홍경택 작가의 대형 회화 작품인 ‘펜’ 시리즈에는 형형색색의 연필과 펜들이 마치 폭죽 터지듯 사방으로 퍼져 나가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표면에 빽빽하게 그려진 펜 뭉치는 보는 이로 하여금 어떤 압도감을 느끼게 한다.


Hong Kyoungtack, ‘Pens 3,’ 2001-2010, Oil on linen, 259 x 776 cm.

눈앞에 마치 폭죽이 터지듯 알록달록한 연필과 펜들이 사방으로 퍼져 나간다. 홍경택 작가의 ‘펜’ 연작은 대형 캔버스에 연필과 펜을 크게 확대해 묘사해 놨다. 보고 있으면 필기구로 이뤄진 거대한 크기의 꽃이 만개하는 것처럼 느껴져 색다른 압도감을 받게 다. 요즘은 대형 작품들이 많지만 분명 이 그림이 처음 등장했던 2000년대에는 엄청난 충격을 주었을 것이다.

홍경택 작가의 ‘펜’ 시리즈 속에 빽빽하게 뭉쳐 있는 필기구들은 극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하지만 오브제 사이사이에 있어야 할 그림자가 부재해 비현실적인 느낌이 강하다. 오브제들의 표면은 만질 수만 있다면 플라스틱 특유의 매끈한 질감이 느껴질 것만 같으면서도 건조한 느낌 준다. 이러한 특성 때문에 그의 연필 연작은 회화 작품 같으면서도 디자인 이미지 같기도 하다.

홍경택 작가는 종종 한국의 팝아트 작가로 불린다. 미국 팝아트는 1960년대 추상표현주의에 대항하여 대중적인 이미지를 표현했으며 개념적 아이디어와 사회 비판적 메세지를 담았다. 홍경택 작가는 대학 시절 기성 작가들 사이에서 주를 이뤘던 추상회화와 설치 미술와는 달리 구상적인 정물을 그만의 방식으로 그려 냈다. 하지만 홍경택 작가의 작품이 어떠한 사회적 메세지를 담고 있지는 않는다.


Hong Kyoungtack, ‘Pens,’ 2010, Oil on linen, 259 x 388 cm.

홍경택 작가는 그의 ‘펜’ 작품들을 표현주의적인 작품이라고 설명한다. 작가의 내면에 잠재된 다양한 욕구, 감정과 생각이 연필과 펜이라는 소재를 통해 분출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모두가 아는 친숙한 소재인 연필과 펜을 그리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내면을 이루고 있는 복잡하게 얽힌 요소들을 색과 형태로 표현한다.

날카롭게 솟아 어딘가를 향해 날아갈 것만 같은 필기구들의 모습은 왠지 모르게 공격적이고 강박적인 느낌을 준다. 작가는 이 필기구들이 때로는 총알 같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 때문에 ‘펜’ 시리즈는 때로는 위협적으로 다가다. 강박적으로 빽빽하게 모여 있는 필기구들의 모습은 답답해 보인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폭발하는 듯한 모습이 어떠한 압도감과 쾌감을 주기도 한다.

작가는 정교한 붓터치로 연필과 펜들의 색과 질감을 똑같은 밀도와 강도로 묘사한다. 그의 ‘펜’ 연작 속 제각각 다른 색과 모양을 가지고 있는 필기구들은 매우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다. 하지만 이들 한데 뭉쳐 있음으로써 어딘지 추상적인 느낌도 준다. 빈틈없이 모여 있는 연필과 펜들의 모습은 구상과 추상을 오간다.

Hong Kyoungtack, ‘Full of Love,’ 2012, Oil on linen, 130 x 162 cm.

그림 속에 묘사된 무명 디자이너의 손길을 거친 펜들은 다양한 모양과 형태를 띤다. 해골, 인형, 동물, 캐릭터 모양 등은 모두 누군가의 손을 거쳐 탄생한 것이지만, 이를 디자인한 사람은 익명으로 남아 있다.

작품 속 펜들은 매우 사실적이고 매끄럽고 다소 편집증적일 정도로 정교해 보인다. 하지만 펜과 연필들 사이는 여백이 없도 꾹꾹 끼워 넣은 모습이다. 이는 마치 도시를 살아가는 개인이 군중 속에서 익명으로 존재하며 서로 다른 목표를 위해 고군분투하는 현대인들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펜 시리즈는 홍경택 작가가 대학을 졸업하기 1년 전인 1994년부터 시작한 연작이다. 작가는 이 시리즈를 2000년대 한국의 대표적인 대안 공간 중 하나였던 인사미술공간에서 개인전을 열면서 대중에게 처음 선보였다. 당시 그의 ‘펜’ 시리즈는 관람객들의 주목을 받았으며, 당시 한국근현대미술사학회 회장을 지내고 나중에는 제11대 국립중앙박물관장을 역임한 김영나 평론가의 평론을 받는 등 미술계의 관심을 끌었다.

하지만 그가 한국 미술계에서 본격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작품이 해외에 판매되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펜 시리즈가 국내에 처음 소개되었을 때만 해도 한국 미술 시장과 컬렉터들은 이 새로운 형태의 예술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당시 한국에서는 보다 전통적인 형식의 작품이 수용되었다. 


Hong Kyoungtack, ‘Pens-Anonymous,’ 2021, Oil on linen, 181 x 227 cm.

하지만 크리스티 홍콩에 홍경택 작가의 작품이 등장하면서 이러한 분위기는 바뀌기 시작했다. 그의 펜 시리즈 작품은 2007년 홍콩 크리스티(CHRISTIE’S) 경매에서 처음 낙찰되어 당시 7억 7,760만 원으로 최고가 기록을 경신했으며 2013년 5월 홍콩 크리스티 경매에서 9억 6,000만 원에 낙찰돼 크리스티 경매 사상 한국 현대 미술품 최고가 기록을 세웠다. 그 뒤로 홍경택 작가의 이름은 미술 시장에 자주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홍경택 작가의 ‘펜’ 시리즈가 주는 폭발적이면서도 날카로운 에너지는 많은 사람의 흥미와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그의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 일민미술관, 대림미술관 등 국내 주요 미술관 컬렉션에 들어가 있고 다수의 국내외 컬렉터들이 소장하고 있다.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