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은영(b. 1974)은 잊혀지고 사라져가는 소수의 역사들에 대한 꾸준한 연구를 해오며, 이를 현재로 소환해 예술의 영역 안으로 재배치하는 작업을 이어오고 있다. 그 중에서도, 작가는 1950년대 대중적 인기를 누렸지만 전통극으로도, 현대극으로도 자리잡지 못한 채 잊혀져간 공연예술장르인 여성국극에 대한 예술 프로젝트로써 이름을 알려 왔다.

이를 비롯한 그의 작업은 젠더와 성을 둘러싼 사회의 가부장적이고 이분법적인 틀에 균열을 내는 저항의 목소리를 찾아, 영상과 공연, 아카이브와 같은 예술의 다양한 형태로써 동시대의 맥락 안으로 다시금 끌어오고 있다.


정은영, 〈The Narrow Sorrow poster〉, 2007 ©정은영

정은영은 그의 대표적인 프로젝트인 〈여성국극 프로젝트〉 이전부터 소수자의 이미지를 작품에 담아왔다. 예를 들어, 2007년부터 2009년까지 전개했던 〈동두천 프로젝트〉는 경기도 동두천에 위치한 미군 기지촌의 건물들을 사진 또는 음성으로 기록하며 그 안에 거주해왔으나 사회로부터 누락된 소수자들의 존재를 수면 위로 끌어올리는 작업이었다.

정은영은 이 프로젝트를 위해 동두천이라는 지역을 연구하고 직접 지역민들을 취재하며, 공적인 행정 기록에 등록되지 못한 채 투명인간처럼 살아가는 동두천의 클럽 여성들 또는 다문화 가정 2세들 등 각종 소수자들의 삶에 주목했다.

정은영, 〈The Narrow Sorrow poster〉, 2007, “기억을 위한 보행, 상상을 위한 보행” 전시 전경(인사미술공간, 2008) ©정은영

작가는 외지인으로서 동두천의 사람들과 적정 거리를 설정하여, 그들의 작고 사소한 풍경들과 그 풍경이 만들어내는 삶의 구조들을 경계적인 위치에 서서 들여다 보았다. 그리고 그러한 태도를 견지하며 동두천의 건물과 건물, 혹은 클럽과 클럽 사이에 존재하는 기이하게도 좁은 문과 그 문에서 이어지는 여자들의 방을 사진에 담았다.

이후 작가는 그들의 삶이 드러나는 사진들과 텍스트를 엮어 포스터로 만들거나, 그들의 일상이 담긴 소리를 녹음하여 만든 사운드와 동두천의 좁은 문을 담은 사진으로 영상을 제작했다.


정은영, 〈리허설〉, 2009 ©정은영

2008년부터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는 〈여성국극 프로젝트〉는 여성 배우들로만 이루어진 한국의 공연예술 ‘여성국극’을 둘러싼 연구와 조사, 분석에 기반을 둔 예술 프로젝트이다. 작가에게 있어서 여성국극은 성별의 규범과 문화의 동시대성이 어떻게 인식되고 구성되는지를 밝히는 매우 중요한 민족지이다.

여성국극은 판소리를 기반으로 한 창무극으로, 광복 이후 여성 명창들이 국악계의 가부장적 폭력성에 맞서며 만들어진 장르이다. 이는 1950년대 새로운 대중예술의 한 장르로서 큰 인기를 끌었지만 1960년대에 이르러 텔레비전의 등장과 영화산업의 발전으로 인해 점차 사그라지게 되었다. 한국의 근대사 안에서 살아 숨쉬었던 여성국극은 전통과 현대 어느 곳에도 편입되지 못한 채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점차 잊혀지고 있다.

정은영, 〈분장의 시간〉, 2009 ©두산아트센터

정은영은 여성국극의 얼마 남아 있지 않은 사료들을 수집하여 연구하고, 남아 있는 배우들을 취재하며 끊어져 있던 여성국극의 역사의 틈새를 메우려 노력했다. 이러한 역사연구를 기반으로 한 〈여성국극 프로젝트〉의 초기 작업은 배우들의 리허설 장면과 인터뷰 등으로 구성된 다큐멘터리 형식의 영상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때 정은영은 여성국극의 남성 역할을 수행하는 남역배우들에 주목했다. 보다 완벽한 연기를 위해 무대 밖 일상에서까지 남성성을 수행하던 남역배우들은 고정된 젠더 범주에 포섭되지 않는 새로운 주체를 재현하고, 실천하고 있었다. 작가는 근대국가의 욕망 안에서 만들어진 젠더 수행의 견고한 이분법의 경계를 무너트리던 남역배우들의 삶을 들여다보고 그들의 모습을 영상으로 기록했다.  

가령, 작가는 〈분장의 시간〉(2009)에서 여성국극 남역배우들이 남성을 연기하기 위해 스스로 자신의 얼굴을 “가장하는(masquerading)” 행위에 집중했다. 영상에 등장하는 세명의 노인들은 당대 여성극국을 대표하는 최고의 남역배우 조금앵, 조영숙, 이소자이다. 작가는 무대와 무대 밖의 경계에 위치한 틈새공간인 분장실에서 벌어지는 분장의 과정으로부터 여성과 남성의 신체가 혼재되는 경계적 순간을 포착했다.


정은영, 〈뜻밖의 응답〉, 2010 ©정은영

정은영은 이처럼 분장을 비롯해 본격적인 무대로 진입하기 이전의 모든 “되어 가기”의 과정들에 주목했다. 리허설 장면을 담고 있는 〈뜻밖의 응답〉(2009-2010)은 여성국극계에서 가장 탁월한 니마이역(남자주인공으로 용맹스럽고 선하며 로맨틱한 감수성을 지닌 인물) 배우인 이등우를 제외한 모든 주변의 상황과 조건을 제거하고 철저히 배우의 행위만을 강조하여 담고 있다.

작가는 표정과 목소리는 물론이고 섬세한 몸짓과 시선처리 등을 총동원하여 완벽에 가까운 “이상적 남성”을 다듬어 나가는 배우의 정교화 과정을 주의 깊게 담아냈다. 다른 성을 완전하게 연기하는 배우의 모습은 생물학적 남성만이 남성성을 현현할 수 있다는 본질주의적 관념을 향해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응답을 돌려준다.


정은영, 〈오프/스테이지: 이소자〉, 2012 ©정은영

이처럼 정은영은 젠더란 삶을 통해 변화하고 드러나며 수행될 수 있다는 사실을 여성국극 배우들의 무대와 삶 속에서 발견하고, 영상을 비롯한 다양한 기록물을 통해 현재로 소환해낸다. 〈오프/스테이지〉(2012) 시리즈에서는 무대 바깥에서도 남성이어야 했던 여성국극 남역배우들이 지난 개인사를 회고하는 내용을 영상으로 담고 있다.


“전환극장” 전시 전경(아트 스페이스 풀, 2015) ©정은영, 아트 스페이스 풀

2015년 아트 스페이스 풀에서의 개인전 “전환극장”에서 작가는 2008년부터 수집한 여성국극에 대한 자료들과 이를 바탕으로 제작한 작가의 창작물들을 선보였다. 일종의 여성국극 아카이브로서의 전시였던 “전환극장”은 개념적으로는 아카이브라는 담론에 기대되, 통념적인 아카이브 방식에는 저항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보통의 아카이브 전시와 달리, 작가의 개인적 관심에 따라 선별된 자료들이 명확한 분류 기준 없이 비정형적으로 전시되었다. 작가는 이 전시에 대해 “지금까지 작업에 담고자 노력해온 수행적 젠더의 아카이브적인 실천”이라 설명한다.

즉 그의 아카이브는 일종의 수행으로, 결코 확정되거나 완결될 수 없는 것이며 그러한 아카이브를 보여주는 전시장은 끊임없이 모으는 수행만이 일시적으로 상영되는 극장인 셈이다.

정은영, 〈변칙 판타지_한국판〉, 2016 ©토탈미술관

한편 2016년에 발표한 극장 기반의 작품 〈변칙 판타지〉는 여성국극의 ‘쇠퇴 이후에 남겨진 것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작가가 직접 극작과 연출을 맡은 이 작업은 여성국극의 마지막 세대 남역배우인 남은진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한다.

〈변칙 판타지〉는 여성국극에 매료된 남은진이 배우가 되는 과정을 통해 무대의 판타지를 다룬다. 배우의 길을 택했지만 여성국극이 쇠락한 지금, 남은진에게 있어서 여성국극이란 일종의 판타지로서 존재했다. 이러한 마지막 세대 남역배우의 서사와 함께, 게이남성들로 이루어진 아마추어 합창단 지보이스(G-Voice)가 등장하며 마땅한 자리를 갖지 못한 또 다른 소수자들의 목소리가 더해진다.

정은영, 〈변칙 판타지_한국판〉, 2016 ©토탈미술관

이 작업은 여성국극이 가진 변칙성을 현재의 맥락으로 끌어와 새롭게 해석할 여지를 만들어낸다. 남성 중심의 근대화에서 의도적으로 누락되고 타자화되면서도 사회가 강요한 고정된 성별의 틀을 허물었던 여성국극을 동시대의 시점에서 사유하며, 이에 내재된 소수자의 정치적 가능성을 조명한다.

정은영, 〈유예극장〉, 2018 ©국립현대미술관

2018년 올해의 작가상 전시에서 선보였던 〈유예극장〉에서도 과거의 전통이 현재를 살아가는 후대에게 어떻게 읽히고 수행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영상은 여성국극의 마지막 세대 남역배우인 남은진, 전통 국악 장르인 가곡을 부르는 박민희, 그리고 드랙킹 아장맨을 전면에 내세운 동시에, 재현된 이미지와 역사적 자료들을 교차시킨다.

각자 다른 장르에서 전통을 이어오고 있는 남은진과 박민희는 사라져 가고 있는 전통문화를 현재화하는 일에 대한 각자의 상이한 관점을 보이며 전통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이끌어낸다.

정은영, 〈유예극장〉, 2018 ©국립현대미술관

장면은 다시 남역배우와 드랙킹 아장맨을 교차한다. 여성국극에서 가상의 남성성을 연기해온 남역배우와 지금 자신의 성정체성을 수행하고 해방시키는 장으로서의 무대에서 노래하는 드랙킹 사이에서 작가는 성별의 정치에 관한 논의를 슬며시 제시한다.  

이 세 명의 퍼포머들이 드러내는 것은 전통이나 역사에 관한 거시적인 관점보다도 무대에 서서 노래를 부르는 자신의 사적인 삶에 대한 고백이다. 제목에 드러나듯 정은영은 〈유예극장〉을 통해 어떠한 결론을 내리기보다는 여성국극에 대한 모든 역사적 판결과 규범적 가치들로 규정하는 것을 유예한다.

정은영, 〈섬광, 잔상, 속도와 소음의 공연〉, 2019 ©정은영

이듬해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 전시 “역사가 우리를 망쳐 놨지만 그래도 상관없다”에서 선보인 〈섬광, 잔상, 속도와 소음의 공연〉(2019)은 동시대의 퀴어 공연예술가들을 통해 여성국극의 수행성이 오늘날 어떻게 이동하고 전회될 수 있는지를 이야기한다.

영상에는 트랜스젠더 전자음악가 키라라의 무대와 음악, 레즈비언 배우 이리, 장애여성극단 춤추는 허리의 연출가이자 배우인 중증장애인 서지원, 드랙킹 아장맨이 교차된다. 이들의 실천은 기존의 장르공연을 탈주하는 형식적 도전과 자신의 신체경험이 견인하는 불편하고 이상한 몸의 변칙적 수행 사이를 진동하며, 여성국극의 역사를 ‘퀴어공연’이라는 맥락으로 다시 소환한다.

이들과 함께 정은영은 ‘퀴어링(queering)’으로서의 공연을 감각하는 순간들을 직조해 예술실천에서의 ‘퀴어적 전회’를 반복적으로 환기하려 하였으며, 동시에 공적 역사가 배제한 이들의 서사를 다시 소환하는 ‘페미니스트-퀴어’ 방법론을 통한 정치적 미학을 질문하고자 한다.

정은영, 〈섬광, 잔상, 속도와 소음의 공연〉, 2019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이처럼 정은영은 여성주의적 예술의 실천으로써 〈여성국극 프로젝트〉를 수행해 오며, 잊혀져 가는 ‘여성국극’의 탈-규정적인 역사를 수행이라는 신체의 움직임으로 다시 써내려 왔다. 이때 작가는 여성국극의 본질적 정당성을 회복시키기보다는, 감각적 변이로써 보다 변칙적이고 퀴어한 예술실천의 정치적 힘을 역설한다.

“이름 모를 개개인들의 들끓는 열망이 어떻게 세계의 사건들과 만나게 되는지, 그리고 그것은 어떻게 저항이 되거나 역사가 되고 정치가 되는지에 관심이 있다.”


정은영 작가 ©국립현대미술관

정은영은 이화여자대학교와 동 대학원, 그리고 영국 리즈대학교 대학원에서 시각예술과 페미니즘을 공부했다. 작가는 아시아퍼시픽 트리엔날레(2015), 광주 비엔날레(2016), 타이페이 비엔날레(2017), 상하이 비엔날레(2018), 도쿄 공연예술 회의 TPAM(2018), 세렌디피티 아트 페스티벌(2018),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2019) 등 국내외 주요 행사들에 참여하며 활발한 활동을 보였다. 또한 2013년 에르메스재단 미술상, 2015년 신도리코 미술상, 2018년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상을 수상한 바 있다.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