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희(b. 1990)는 가볍고 사소한 일상적 순간들을 포착하여, 나와 타자, 그리고 우리로 대변되는 보편적 인물의 일상을 상상의 이미지로 풀어내는 회화 작업을 이어왔다. 해외에서 오랜 시간을 보낸 작가는 다수와 다른 한 개인의 특성과 소수성이 시간과 공간 전반에서 끝없이 작동하며 현실을 구성하고 있음을 회화로 보여주고자 한다.

김진희, 〈The Heroine〉, 2019, 캔버스에 아크릴, 100x110cm ©김진희

이를 위해 김진희는 인종적, 종교적, 문화적 차이를 시각적으로 드러내기보다 오히려 등장인물의 평범한 행위와 원초적 상태를 그린다. 이러한 인물의 표현은 인종과 문화, 성별과 언어의 구분을 상쇄하는 시각적인 알레고리로 작동한다.


김진희, 〈Magic hour in the room II, III〉, 2019, 캔버스에 아크릴, 각 80x80cm ©김진희

초기 작업에서 작가는 인간의 감정이나 인간이라면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는 부재의 감각을 인물의 표정이나 제스처로 표현하곤 하였다. 그러나 당시 서구권에서 ‘동양인 작가’로 활동하며 그러한 작품들을 선보였을 때 그림 속 개인의 감정보다 그 인물이 가진 지역적, 인종적 배경에 관심이 쏠리는 것을 경험한 작가는, 표면적으로 읽히는 인물의 외부적 요소들을 제거해 나가기 시작했다.


김진희, 〈A Collector of Scholar’s Stone〉, 2020, 캔버스에 아크릴, 65x65cm ©김진희

예를 들어, 작가는 등장인물의 피부색을 삭제하거나, 인물의 얼굴에서 인종적 특징을 읽을 수 없게 하였다. 아울러 여성의 신체를 다룰 때에는 이를 대상화하지 않는 조형적인 언어로 표현하고자 하였다.
 
이렇듯 김진희는 다수와 다른 한 개인의 특성과 소수성에 대한 외부의 시선을 경험하며, 이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나’에 대한 표현으로써 외형적 단서들을 제거해 나갔다. 그는 이에 대해 “어떤 의미에서는 보편성을 지향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오히려 그 보편성이 얼마나 환상에 가깝고 균열을 품고 있는지를 보여주기 위한 선택”이라고 설명한다.

김진희, 〈극장에서〉, 2023, 캔버스에 아크릴, 160x130cm ©디스위켄드룸

외부의 지표로서 표현되는 ‘나’가 아니라 가장 개인적인 ‘나’로서 존재하는 모습을 그리고자 인물의 성별, 나이, 국적 등을 모호하게 표현하는 것 외에도, 작가는 이들을 가장 일상적이고 사소한 행위들을 하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한다.
 
가령, 아침에 일어나 물을 마시거나, 마트에서 장을 보거나, 버스정류장에서 줄을 서고 있는 상황들이 줄곧 묘사된다. 이러한 행위는 매일 반복되는 가볍고 사소한 상황들이지만, 김진희는 이러한 일상적인 일들이 오히려 지금의 ‘나’를 구성하고 있는 중요한 요소들이라고 여긴다.
 
따라서 그의 작업은 아주 사소한 것에서, 그리고 지금 내가 발을 딛고 있는 곳에서 지금 ‘나’의 모습을 가장 생생하고 진실되게 보여준다.


김진희, 〈How to Make a Dog〉, 2021, 캔버스에 아크릴, 100x110cm ©디스위켄드룸

이러한 김진희의 회화에서 두드러지는 또 다른 특징 중 하나는 인물 위로 드리워진 빛의 극적인 표현이다. 작가는 사소한 삶의 단편들을 정교하게 배치한 인물 및 공간과 함께, 섬세하게 조정된 빛과 색의 관계로 이루어진 화면의 무대 위로 세운다.
 
아울러, 그의 화면은 언뜻 매끈하고 간결해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작가의 손길이 닿은 붓의 흔적들이 드러난다. 화면에 단단하게 매여 있는 붓의 흔적과 고스란히 남아 있는 그 물성은 지금-여기에 발을 붙이고 살아가는 우리의 일상적 순간을 담아내고자 하는 작업의 주제와도 맞물린다.  


김진희, 〈Ikarus〉, 2021, 캔버스에 아크릴, 130x160cm ©김진희

예를 들어, 김진희의 〈Ikarus〉(2021)를 보면 인간에게 경종을 울리는 신화의 내용과는 달리 캔버스 한가운데 인물이 편안한 자세로 앉아있다. ‘이카로스’가 미지의 세계에 대한 인간의 동경을 상징했다면 그가 새롭게 연출한 신화는 닿을 수 없는 공간과 시간을 대하는 작가의 태도와 맞닿아 있다.
 
작품 속 인물은 마치 빛이 들어오는 곳으로 다시 날아오를 것을 암시하며 화면 밖 관객을 응시한다. 작가는 시간과 공간의 틈을 연극의 무대에 빗대어 보며, 캔버스를 가상의 무대로 삼고 그 안의 인물을 배우의 위치로 배치해 화면 너머를 바라보거나 관객과 시선을 맞추도록 한다. 이로써 작가는 시선의 대상이었던 인물을 주체로 전환하며 찰나의 시간을 뒤튼다.


《커튼콜》 전시 전경(디스위켄드룸, 2022) ©디스위켄드룸

한편, 2022년 디스위켄드룸에서 열린 2인전 《커튼콜》에서 선보인 그림들은 평범한 일상을 이어가는 익명의 인물들을 통해 죽음, 상실, 이별처럼 지금 내 앞에 현존하지 않는 것에 대한 기억과 인상을 캔버스라는 텅 빈 무대 위로 옮기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그려진 인물은 주로 어디인지 모를 빈 공간에서 사소한 행위를 이어간다. 한 곳을 멍하니 응시하거나, 작은 물건을 손에 조심스레 쥐어보거나, 때로는 좁은 틈 뒤로 큰 몸을 웅크려보기도 하는 이들은 평안해 보이기보다 어딘가 불완전한 상태로 보인다.


김진희, 〈잠든 그들을 찾아가 1〉, 2022, 캔버스에 아크릴, 48x54cm ©디스위켄드룸

여기에 더해 그의 회화를 지배하는 강렬한 색채와 빛의 대비는 작가가 그리고자 하는 삶의 무거운 사건이 갖는 복잡한 정서적 레이어를 시각화하는 효과적인 장치가 된다.
 
치밀하게 계산된 연극적인 조명과 건축적인 구조물들 사이에 놓인 둥근 몸들은 서로 부딪히며 기묘한 아우라를 만들어낸다. 이 분위기는 유머러스함과 쓸쓸함, 긴장감과 허무함 그 사이를 오가는 양가적인 감각을 자극한다.

《새벽, 보인 적 없는》 전시 전경(디스위켄드룸, 2023) ©디스위켄드룸

이듬해 같은 공간에서 열린 김진희의 국내 첫 개인전 《새벽, 보인 적 없는》에서 작가는 슬픔, 상실, 허무함 등 인간이 가진 단어와 문장들로 오롯이 설명하기 힘든 모호하고 비언어적인 양태를 시각 이미지로 붙잡고자 하였다.
 
전시는 상징적 배경으로서의 새벽이 감추고 있을 장면을 불현듯 벗겨내어 그 안에 담겨 있을 찰나의 이야기들을 포착하려는 작가의 시도를 보여줬다. 다시 말해, 그는 그림을 통해 새벽이라는 시간대 안에 침잠해 있을 작고 사소한 내면의 진동을 담아내고자 하였다.

김진희, 〈새벽의 얼굴 1〉, 2023, 캔버스에 아크릴, 110x100cm ©디스위켄드룸

김진희는 완벽한 어둠도 완전한 빛도 아닌, 오히려 불확실성과 비정형의 기운이 맴도는 새벽녘에 가려져 있는 장면들을 상상하며 그들에게 일시적인 빛을 부여하기로 하였다.
 
작가는 자신이 제어한 인공적인 조명 아래에서 새벽에 잠겨 있을 존재들을 깨우며, 일종의 소격효과를 발생시킨다. 고요함이 깨진 각 광경 속에서 인물들은 가다듬지 못한 모습들을 예상치 못하게 내비친다. 누군가는 조명이 꺼진 캄캄한 극장을 떠나려 하고, 또 다른 이는 닫힌 방 안에 혼자 숨어 오르골 안에 잠겨 있던 신비한 광채를 마주한다.


김진희, 〈보석상자 안에〉, 2023, 캔버스에 아크릴, 70x60cm ©디스위켄드룸

이때 각 화면들 간의 이야기는 일관성 있게 공명하거나 연결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파편적으로 선택된 임의의 순간 속에서 각 인물의 이름 없는 감정과 생각들은 미묘한 눈빛과 제스처, 그리고 멜랑꼴리한 색의 변주를 통해 어렴풋이 다가올 뿐이다.
 
날것의 감각들은 그가 꾸린 무대에서 아주 강하거나 옅은 색채를 입고 짧은 찰나의 형상으로 그려진다. 김진희는 서로의 위치에서 각자 품고 있을 새벽은 어떤 것일지 상상하고, 그들이 영원히 밤의 시간에 머무르지 않을 것임을 믿으며 한번도 본 적 없던 누군가의 그늘이 걷히고 무색무취의 공간이 여러 빛깔의 색으로 채워지는 순간을 그린다.


김진희, 《젊은 모색 2025: 지금, 여기》 전시 전경(국립현대미술관, 2025) ©국립현대미술관

또한, 김진희는 2025년 국립현대미술관의 《젊은 모색 2025: 지금, 여기》에 참여하며 선보인 신작에서도 스쳐 지나가는 일상의 장면들을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연극처럼 담아냈다. 그러나 기존 작업에서는 슈퍼마켓이나 서점, 공원과 같은 공공장소에서 타인의 시선 속에 놓인 인물들을 주로 담아왔다면, 이번 작업에서는 집 안이나 발코니, 방 안의 책상 등 사적인 공간에서의 일상과 감정을 집중적으로 드러낸다.
 
즉, 이 작업에서는 관찰의 시점이 외부에서 내부로, 그리고 타인에서 나 자신으로 이동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때 작가는 개인적인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보여주지 않음으로써 사적인 공간을 온전히 ‘나’의 공간이라 상정하기 어렵게 만든다. 


김진희, 〈무게 없는 것들〉, 2025, 캔버스에 아크릴, 180x330x4cm ©김진희

아울러, 그는 나이, 성별, 국적 등을 알 수 없는 모호하고 다소 가벼워 보이는 듯한 인물의 이미지에 고전 회화의 형식과 표현을 접목함으로써 누구라고 특정할 수 없는, 그렇기에 그 누구도 될 수 있는 보편적인 인물로 표현한다.
 
그의 작품을 아우르는 모호성이라는 특징은 사물과의 관계에서도 드러난다. 예를 들어, 〈무게 없는 것들〉(2025)에서 한 인물이 서랍을 열고 있지만, 그 사적인 영역 안에 놓인 사물들로 이러한 행위의 맥락이나 목적이 명확히 드러나지 않는다. 그 안에는 쿠키와 초콜릿처럼 아무 의미도 없어 보이는 사소한 사물만이 자리할 뿐이다.
 
여기서 작가는 단지 이처럼 아주 하찮은 과자 봉지에도 ‘나’라는 존재가 스며들어 있으며, 그런 사소한 것들이 지금의 ‘나’를 이루고 있음을 이야기할 뿐이다.


김진희, 〈Leftover〉, 2024, 캔버스에 아크릴, 180x160cm ©김진희

이렇듯 김진희는 인물과 사물을 통해 어떤 명확한 의미를 전달하고자 하지 않는다. 오히려 감정과 감각, 의미와 배경이 선명하게 나뉘지 않은, 그렇기에 은근한 긴장을 품고 있는 모호한 상태를 통해 우리가 살아가는 많은 장면들을 상상하게 만든다.

 ”저는 인물과 사물을 통해 어떤 명확한 의미를 전달하고자 하지는 않아요. 회화 안에서 그저 은근한 긴장을 품은 채 비슷한 질량으로 공존하길 바라요. 사실 우리가 살아가는 많은 장면이 그런 식으로 작동하잖아요. 눈앞에 펼쳐진 세상에서 감정과 감각, 의미와 배경이 선명하게 나뉘지 않는 상태. 제 회화도 그 어딘가에 머물러 있길 바랍니다.”    (김진희, 국립현대미술관 《젊은 모색 2025: 지금, 여기》 인터뷰 중) 


김진희 작가 ©김진희

김진희는 홍익대학교 회화과를 졸업하고 베를린 예술대학교 조형예술과에서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개인전으로는 《남겨진 것, 너머》(박서보재단, 서울, 2025), 《Drink Water》(프리즈 No.9 코크 스트리트, 런던, 2024), 《새벽, 보인 적 없는》(디스위켄드룸, 서울, 2023), 《어느 날 초콜릿 가게가 문을 닫았다》(프리오 아트 스페이스, 바르셀로나, 2022) 등이 있다.
 
또한 작가는 《젊은 모색 2025: 지금, 여기》(국립현대미술관, 과천, 2025), 《Stemming from Umwelt》(탕 컨템포러리 아트, 베이징, 2024), 《Time Lapse 어느 시간에 탑승하시겠습니까?》(페이스갤러리, 서울, 2024), 《Dogs of Weserhalle》(베저할레, 베를린, 2023), 《UNBOXING PROJECT 2: Portable Gallery》(뉴스프링프로젝트, 서울, 2023) 등 다수의 단체전에 참여했다.
 
김진희는 현재 서울과 베를린을 오가며 활동하고 있으며, 그의 작품은 스페이스 K, 박서보재단,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은행 등에 소장되어 있다.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