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형상
높은 곳. 어두운 다락방. 영상의 빛이 스며든 공간에는 음산한 분위기가 돈다. 영상은 정보량이 풍부한 원천으로 전시장을 지나오며 보았던 물체들의 출처다. 영상에서 매 순간 전환되는 형상은 실크스크린과 3D 프린터로 출력되었다. 그러나 물리적 공간에 소환된 사물은 파생물에 머물지 않는 또 다른 원천이다. 원천은 입체와 평면의 낙차를 흐르고, 고정된 물체는 불/연속적으로 나열되며 유동하는 형상을 암시한다. 형상은 자가 증식할 뿐 아니라 외부로부터 유입되는데 ‘신곡’에서 영감을 얻은 구스타브 도레와 윌리엄 블레이크의 삽화가 실크스크린 판화에 복제되어 있다. 고전에서 유래한 모티브도 등장한다.
머리가 세 개인 존재는 지옥문을 지키는 케르베로스와 자신의 베어진 머리를 든 망령을 참조한 것으로, 분열하고 증식하는 디지털 이미지의 속성을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신곡’에서 인간이 신의 진리에 기대 나아간다면, 영상에서 뿔이 달린 불가해한 존재는 문 앞에 당도한 자를 끌어들인다.[viii] 앞서 두산갤러리에서 선보인 영상 〈Soul Fishing〉(2021)에도 망설이는 여행자와 회유하는 존재가 나오는데, 이는 두 세계를 매개하는 마법 소녀물의 안내자를 본뜬 것이기도 하다.[ix] 한편 신의 형벌이자 괴물 혹은 여인과 함께 등장하던 『신곡』 지옥편의 뱀은 차원을 이동하는 메신저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벽에서 나온 듯한 뱀은 전시장의 벽을 인식하게 하며 탈물질적인 느낌을 주는 투명한 몸통은 속이 비어 물이 흐르는 관처럼 보인다.
다락방으로의 여정은 좁아지는 공간을 더듬는 일이다. 작가는 2020년의 작업 〈포스포필라이트 “기도해!”: Pattern 01-10〉(2020)에서 구체(球體)가 통과한 흔적을 격자가 그려진 종이에 남겼다. 그러나 관객은 이제 대상으로서의 작품을 멀리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차원을 지나는 물질처럼 공간을 지난다. 2017년의 초기작에서부터 격자는 회화의 그리드, 영상 속 3D 프로그램의 격자, 모니터를 구성하는 픽셀 등으로 드러났다. 작업에서 격자는 사물이 놓이는 장이자 위치를 가늠케 하는 좌표로, 세계를 구성하는 규율로 나타난다. 그러나 격자는 불변하는 것이 아니기에 이따금 예기치 못한 사건으로 뭉그러지고, 차원을 통과하려는 이들은 파문을 일으키며 격자의 구멍을 벌린다.
포탈은 무엇의 구멍인가? 세계의 균열이 시작되는 곳? 분열과 융합의 일시적 시공?
손을 구멍으로 밀어 넣는 힘은 무엇인가? 계시인가 의지인가 마력인가 공포인가?
손은 어디로 움직일 것인가? 왔던 곳으로? 관성에 힘입어?
확신을 얻음에 따라 더 빠른 속도로 직진?
3. 방향
이 밖에 작가의 꾸준한 참조점이 되어 온 것은 여성 주인공의 서사다. 만화 ‘RIVER’S EDGE’와 애니메이션 ‘보석의 나라’의 배경은 유사한 사건이 반복되는 정체된 공간이다. 하지만 등장인물들은 금기를 어기고 결국에는 어떠한 지점을 넘어서는데, 변화는 인격을 갖추고 직능을 키우는 성장이 아닌, 의심과 위반에서 오는 열락을 맛보는 일이다. ‘보석의 나라’에서 주인공인 포스포필라이트는 자신의 세계를 만들고, 헌신했던 ‘선생님’에게서 떨어져 나와 자신을 위해 기도하기를 요구한다. 충격에 부서지고 다른 물질과 결합하며 소멸과 재생을 오가는 그를 작가는 2020년의 ‘포스포필라이트 “기도해!”’ 시리즈에서 위령탑이나 토템폴(totem pole)과 같은 형상으로 추상화하여 불러왔다.
디지털 공간에서 복제되고, 물리적 공간으로 출력된 형상에서 “끝없이 반복 복사 증식 재활용되는 동시대 디지털이미지”의 속성을 감지할 수도 있을 것이다.[x] 하지만 흩어진 것을 소환하고, 동일성을 띤 부분의 발견을 반복하는 기저에는 독립적인 자아에 대한 소망이 담겨 있는 것이 아닐까. 과거 직접적인 모티브였던 만화와 애니메이션은 이제 작가의 세계관에 흔적으로 남았다. 작가는 영상 〈PUT MY FINGER IN THE PORTAL〉에 대하여 “차원과 차원의 전이 순간을 공포로 묘사”했다고 했지만, 작업에는 “공포”로 치환하기 어려운 미묘한 감정이 바스락거린다.[xi] 포탈은 자신과 외부를 마주하는 몰입의 순간이자 감정이 뒤섞이는 지점이다. 너머를 더듬었다면 돌이킬 수 없다. 절대자에 허락을 구하지 않는 알 수 없는 길. 늘어지고 찢어져 차원이 변하는 구멍. 사건의 지평선 너머.
[i]〈Summoned hand〉, 2022, 3D Printed Resin, 25×15×23cm
[ii]〈Blueprint of Image Layering (1), (2)〉, 2022, Pigment Print, 59.4×84.1cm
[iii]〈Messenger (Part 2), (Part 6)〉, 2022, 3D Printed Resin, 15×10×3cm, 18×15×6cm
[iv]〈Image Layering (1) ~ (8)〉, 2022, Silkscreen on Paper, 40×40cm
[v]〈Thermoplastic Bodies (1) ~ (5)〉, 2021, 3D Printed Resin, 10×10×10cm
[vi]〈Fishing Hook〉, 2021, 3D Printed Resin, 10×10×10cm
[vii]〈Messenger (Part 1)〉, 2022, 3D Printed Resin, 18×15×6cm
[viii]〈PUT MY FINGER IN THE PORTAL〉, 2022, Single Channel Video, 3m53sc
[ix]〈Soul Fishing〉, 2021, Single Channel Video, 4m5sc, 3D Printed Resin, Polycaprolactone, 130×125×133cm
[x] 디지털 이미지의 속성에 관한 내용은 문혜진의 글에서 인용. 문혜진, 「‘개념’을 디지털이미지로」, 『Art in Culture』, 2018년 5월호, p. 75.
[xi] 이정훈, 작가 인터뷰 「차원과 차원의 전복, 주슬아 작가의 〈손가락을 포탈에 넣기〉」, 『디자인프레스』, 2022년 4월 6일 게재, https://m.blog.naver.com/designpress2016/222693139605 (2022년 5월 16일 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