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슬아(b. 1988)는 주로 만화나 애니메이션 등 비주류, 하위문화의 특성과 현실을 기반으로 한 허구적 세계관에 관심을 가져왔다. 그는 애니메이션 영상, 3D 조각, 평면 작업과 같은 다양한 매체를 활용해 차원을 전이하거나 분해, 재조합하는 방식으로 가상과 현실, 물질과 비물질 사이의 경계가 뒤섞이며 충돌하는 지점을 탐구한다.


《리버스 엣지》 전시 전경(공간 일리, 2019) © 공간 일리

주슬아의 작업은 주로 애니메이션이나 만화, 게임 등으로부터 개인적인 경험이나 상황과 유사성을 발견하고, 이를 알리바이로 삼으며 시작된다. 그는 이러한 개인적인 경험을 기반으로 사물을 추적하며 이야기를 만들어가는데, 이러한 과정에서 사물을 둘러싼 다양한 층위를 기괴하게 펼쳐낸다.
 
예를 들어, 2019년 공간 일리에서 열린 개인전 《리버스 엣지 (REVERSE EDGE)》는 오카자키 쿄코의 만화 『RIVER'S EDGE』(1993)에서 출발한다. 개인전의 단초가 되는 이 만화는 어떤 경계의 구분에서 밀려난, 혹은 경계에서 살아가는 존재들이 겪는 혼란스러운 사건을 이야기하는 작품이다.


《리버스 엣지》 전시 전경(공간 일리, 2019) © 공간 일리

전시 제목인 《리버스 엣지 (REVERSE EDGE)》는 만화 『리버스 엣지 (RIVER'S EDGE)』를 “REVERSE EDGE”로 오독한 데서 기인했다. 만화 속 존재들이 경계의 바깥에서 혼란을 겪듯이, 그의 전시에서 이미지들은 회화의 평면성, 그리고 사각의 틀과 형태라는 매체의 물리적 실체를 벗어나 공간 속에서 확장된 채로 존재했다.  
 
기존의 틀에서 벗어난 주슬아의 이미지들은 일견 잘 배열된 데이터들처럼 보이지만 어딘가에서 발생하는 틈과 오류로 인해 그 정보를 단적으로 진단할 수 없는 상황을 환기시킨다. 


주슬아, 《두산아트랩 전시 2022》 전시 전경(두산갤러리, 2022) © 두산아트센터

이후 《두산아트랩 전시 2022》에 참여하며 출품한 일련의 작업들 또한 애니메이션이나 만화에 등장하는 서사에 주목하며 제작되었다. 가령 〈루어〉(2021), 〈소울 피싱〉(2021), 그리고 〈세 개의 속이 빈 악마 머리〉(2021) 등은 만화에 등장하는 여성 영웅 서사에서 영감을 받았다.
 
주슬아는 3D 프린터와 실크스크린 등으로 만화 속 주인공이 자유롭게 신체를 변형하는 모습, 투명하고 비물질적인 도구 등을 물질로 구현하여 현실 밖으로 출력하였다.


주슬아, 〈Text Panel of Welcome Soul Jem (type2)〉, 2022, 3D 프린트 레진, 5x9x30cm. © 더 그레잇 컬렉션

이어서 열린 개인전 《손가락을 포탈에 넣기》(더 그레잇 컬렉션, 2022)에서 또한 주슬아는 애니메이션 영상, 3D 조각, 실크스크린 등 다양한 매체와 장르를 하나의 궤로 엮으며, 여성 영웅 서사 애니메이션 속 인물들이 신체를 변형하고 차원을 넘나드는 ‘변신의 찰나’에 주목하였다.
 
전시 제목 《손가락을 포탈에 넣기》에서 포탈은 ‘두 개의 서로 다른 위치를 연결하는 마법이나 기술적인 문’을 의미한다. 작가는 이를 은유하여 포탈이 가상세계를 통하는 문으로서, 우리가 디지털 세계에 손가락을 넣으며 경험하게 되는 차원의 변화에 주목했다.
 
이에, 전시는 차원이 변화하는 찰나에서 발생하는 감각의 인식과 전이, 혼돈에 이르는 기분이나 생각 등을 복합적인 정서로 제시한다.


《손가락을 포탈에 넣기》 전시 전경(더 그레잇 컬렉션, 2022) © 더 그레잇 컬렉션

특히, 주슬아는 관객으로 하여금 작품을 바라보는 단일한 차원의 감상이 아니라 미술의 여러 형식이 변화되는 과정을 보여줌으로써 여러 차원을 상상하게 만들었다. 노스텔지어를 불러일으키는 종이 만화책에서 본 듯한 이미지가 판화로 구현되고, 이를 상상의 차원으로 옮겨와 3D 조각으로 출력되며, 나아가 그 조형성이 애니메이션 영상까지 진화하는 모종의 감각들을 발생시켰다.
 
이 전시를 작동시키는 매체들인 실크스크린, 3D 애니메이션, 3D 프린트은 각 매체가 원본을 이동할 수 있고, 복제할 수 있다는 특징, 그리고 매체 간의 이동에서 A와 B 속성이 결합된 상태가 발생할 수 있다는 공통점을 가진다.


주슬아, 〈PUT MY FINGER IN THE PORTAL〉, 2022, 단채널 비디오, 3분 53초. © 주슬아

주슬아는 이러한 매체적 특성에 주목해 차원의 변화에서 오는 생경한 감각적 순간을 작품의 형태로 구현하는 데 주력했다.
 
먼저 차원 간의 전이가 이루어지는 순간을 공포로 묘사한 영상 작품 〈PUT MY FINGER IN THE PORTAL〉(2022)은 ‘차원과 차원의 경계에서 사는 존재’가 등장해 관객에게 자신이 무엇인지 이야기하고, 자신이 있는 곳이 어떤 곳인지 그리고 그 너머는 무엇일지에 대해 이야기하며 경계 너머 미지의 곳으로 가자고 말한다.


주슬아, 〈Messenger〉, 2022, 3D 프린트 레진, 가변 크기 © 주슬아

한편, 3D 프린트로 만든 입체 작업은 영상에서 등장한 뱀을 형상화 한 것으로, 전시장 벽면을 구불구불 관통하고 있었다. 뱀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것들의 연쇄적 의미를 가지기도 한다. 전시장에서 뱀은 마치 차원의 벽을 뚫고 이동하듯이 전시장 벽과 천장 등을 관통하며 각 공간에 자신의 분절된 신체를 드러내고 있었다.
 
관객은 이 정체 모를 형상에 물음표를 띄우다 곧 다락방에 있는 뱀의 머리를 마주하게 되는 순간, 그 형의 정체를 유추할 수 있게 되었다.


주슬아, 〈Thermoplastic Bodyies〉, 2021, 3D 프린트 레진, 8x8x8cm © 더 그레잇 컬렉션

주슬아는 이처럼 3D 프린트를 이용한 작업에 대해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것에 몸을 부여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작가는 디지털 공간의 특성이 다른 매체로 전이(Transition)되면서 발생하는 ‘차이’에 관심을 가져 왔다. 그는 이러한 차이가 디지털 환경과 물리적 공간의 속성을 모두 내포한다고 보았다.


주슬아, 〈Image Layering (9)〉, 2022, 종이에 실크스크린, 40x40cm © 더 그레잇 컬렉션

한편, 실크스크린 작업은 영상 〈PUT MY FINGER IN THE PORTAL〉와 〈소울 피싱〉에서 등장한 장면들을 배열하고 재조합한 결과물이다. 영상 작업을 바탕으로 시작한 이 작업은 영상에서 컷과 컷을 연결하기 위해 사용한 방식을 평면에 적용하여 제작되었다.
 
영상 작업의 경우, 주슬아는 주로 컷의 전환에서 다음 컷과의 교집합을 만들어내며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보이도록 했다면, 실크스크린 작업에서는 여러 레이어를 겹쳐 그 관계를 한 화면에 결합하고자 하였다.


주슬아, 〈어느 날 레몬 옐로우가 사라졌다〉, 2022, 혼합 매체 © 서울시립미술관

이렇듯 그의 작업은 서로 다른 매체 간의 특성을 뒤섞고 차원을 이동하며, A와 B를 구분하는 경계 너머에서 발생하는 감각적 경험과 변화하는 인식의 차원을 관객의 신체로써 체험하도록 이끈다.
 
2023년 SeMA 창고에서 열린 개인전 《노멜의 추적일지》에서 주슬아는 ‘레몬’이라는 사물을 중심으로 그것이 다양한 차원을 오가며 변이되는 과정을 허구적 이야기로 풀어나갔다. 전시는 작가의 집에서 어느 날 사라져 버린 ‘레몬’에서 출발해, 그 레몬의 행방을 쫓는 과정을 드로잉, 애니메이션, 에세이, 3D 조각 등으로 보여주었다.
 
추적 과정에서 레몬은 계속해서 변화하고, 원래 알고 있던 모습에서 점차 다른 것이 되어간다. 설치 작품 〈어느 날 레몬 옐로우가 사라졌다〉(2022)에서는 이러한 인식의 과정이 구현되어 나타난다. 여기서 관객은 전시장의 미로와 같은 구조물을 통해 레몬을 추적해 나가는 과정을 따라가 볼 수 있었다.


《노멜의 추적일지》 전시 전경(SeMA 창고, 2023) © 서울시립미술관

추적 과정에서 중요한 단서인 레몬 라벨에는 원산지, 유통 경로 등의 정보가 표식화 되어있는데, 이것은 마치 인간이 인종, 성별, 환경 등 인간의 사회적 관계를 통해 결정되는 좌표와 유사하다. 레몬의 라벨 정보를 디지털화 하는 행위는 탈물질화된 의식을 디지털 장치로 이전하는 업로딩된 포스트 휴먼에 비유해 볼 수 있다.


《노멜의 추적일지》 전시 전경(SeMA 창고, 2023) © 서울시립미술관

이는 논의의 맥락과 관점에 따라 다의적인 방식으로 전유, 재현되는 포스트 휴먼의 형상, 즉 인간을 고정적 실체가 아닌 존재론적 시각에서 신체의 정의를 확장시키는 행위의 비판으로도 읽을 수 있다.
 
또, 작가는 레몬 라벨을 디지털 정보화 하는 과정에서 대량재배, 거대 유통 지배 구조 등과 같이 사회적 행위를 매개하는 과정 가운데에 목격하는 자본주의의 비판적 시각을 견지해 나간다. 또한 디지털 기술 기반의 포스트휴먼 매체 환경 속에서 디지털 경계의 해체나 디지털 불멸을 추구하는 인간 존재 확장 방식에 대한 다양한 의문을 제기한다.


《노멜의 추적일지》 전시 전경(SeMA 창고, 2023) © 서울시립미술관

사물의 변이 가능성에 대한 작가의 관심은 레몬뿐만 아니라 인간의 신체로도 확장된다. 영상 작품 〈GUMMY〉(2023)에서는 실수로 거미를 삼킨 경험에서 출발한 신체의 기이한 감각이 표현된다. 흰 실로 엮인 영상 근처의 조각들은 파편화되고 이질적인 신체를 상기시킨다.


《크랙》 전시 전경(미학관, 2025) © 미학관

이렇듯 주슬아는 다양한 매체와 장르의 특성을 고정된 틀 바깥에서 사유하고 결합하며, 평면과 입체, 물질과 비물질 사이의 경계가 교차하는 지점에서 발생하는 찰나의 감각적 순간을 실험해 왔다. 이러한 그의 작업은 보는 이로 하여금 우리를 둘러싼 환경과 사물 등에 내재한 변이의 가능성과 상호 침투에 대한 가능성을 상기시키고, 세상의 여러 층위를 새롭게 인식하고 감각할 수 있는 포탈 안으로 초대한다.

"어릴 적부터 나는 자유롭게 신체를 변형하는 능력을 지닌 여성 영웅의 서사를 탐닉해 왔다. 그 관찰의 섬세한 과정을 회상해 보면 모니터는 나를 보고, 나는 모니터를 봤다. 바라보는 거리는 중요하지 않다.
 
마침내 내 눈이 모니터 속 캐릭터에 영점을 맞추면 마치 신체의 물리적 감각이 사라지는 것 같았다. 이후 모니터에서 발산하는 빛이 망막에 스며들고, 내 시점은 모니터 패널을 침투한다. 종래에 몰입된 서사가 몸을 관통하는 것처럼 관객들도 형용할 수 없는 그 감각을 함께 경험해 볼 수 있기를 희망한다." (주슬아, 작가 노트)


주슬아 작가 ©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주슬아는 중앙대학교 서양화과 학사를 졸업하고 서울과학기술대학교에서 조형예술과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개인전으로는 《크랙》(미학관, 서울, 2025), 《노멜의 추적일지》(SeMA 창고, 서울, 2023), 《손가락을 포탈에 넣기》(더 그레잇 컬렉션, 서울, 2022), 《리버스 엣지》(공간 일리, 서울, 2019) 등이 있다.
 
또한 작가는 《드로잉그로잉》(아트스페이스 보안, 서울, 2025), 《발화점》(더레퍼런스, 서울, 2024), 《조각모음》(문래예술공장 갤러리M30, 서울, 2023), 《해커스페이스》(TINC, 서울, 2023), 《지구생존가이드: 포스트 휴먼 2022》(국립아시아문화전당, 광주, 2022), 《두산아트랩 전시 2022》(두산갤러리, 서울, 2022) 등 다수의 단체전에 참여했다.
 
주슬아는  서울시립미술관 신진미술인(2023), 두산아트랩(2022) 등에 선정되었으며, 2022년에는 국립아시아문화전당 ACC 레지던시 입주 작가로 활동한 바 있다.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