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리》 전시 전경(아라리오갤러리, 2024) ©아라리오갤러리

노상호가 지어낸 ’마을’이라는 세계

결론부터 말해보자. 노상호는 과연 어떤 이야기꾼인가? 이야기라는 단어를 가져오는 것이 맞기는 한가. 왜 그는 ‘메르헨’이라는 독일어 단어를 불러와 자신의 ‘이야기 세계’를 제시하며 작업에 동력을 불어넣었을까?[1] 이야기에 관한 발터 벤야민의 오래된 분류법을 이 작가 앞에 잠시나마 불러와보자. 발터 벤야민은 이야기꾼을 뱃사람과 농부에 비유했다. 벤야민은 경험을 전수하며 자기의 시야를 갖고 있는 이야기꾼이 사라지고 있다는 전제아래, 뱃사공이 여기저기를 다니며 저 멀리 떨어진 공간에서 찾아낸 이야기들을 불러오는 사람이라면 농부는 한 자리에 머물러 머나먼 시간 과거의 역사 속에서 발굴해 이어져오는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전달한다고 적었다.

공간과 시간이라는 드넓은 이야기의 출처를 벤야민의 말에서 우리가 여전히 구해낼 수 있다면, 시공간이 혼돈되어 출처를 찾을 수 없는 작자미상의 수천 수만 개의 이야기들을 구해내고 지어내는 인물이 바로 노상호다. 그는 물론 뱃사람도 농부에 비유할 바 아니다. 인터넷에 평면적으로 달라붙은 단서들, 그러니까 변별해낼 수 없는 시간과 공간의 점프와 단절 속에서 재료를 복구해내는 “암전된 가벽”의 이야기꾼이다.

노상호가 짓는 이야기의 출구에는 노상호가 그려내는 그림, 이미지, 설치 구조, 퍼포먼스의 시간들이 존재한다. “책, 벽화, 드로잉, 설치 등 모든 형태를 이용”(포트폴리오)한다는 노상호에게 이야기보다 방점이 찍혀야 할 것은 그 뒤에 붙은 “세계”라는 단어다. 이 세계는 얇고 방대하다. 물리적으로 손으로 잡히지 않으며 어느 시야든 어느 원근법이든 가능하다. 인쇄 가능하고 조작 가능한 이미지를 통해 경험을 담는 가설무대로서의 이야기와 그림 또한 가변적이 된다.

뱃사람이나 농부가 무대로 삼는 땅과 바다 대신에 노상호가 사는 시대에 가장 근접한 리얼리티는 인터넷 시공간이다. 배가 뒤집어지는 기사를 클릭하지만 누구도 바다 속으로 뛰어들지 않는다. 유기농 쌀을 먹지만 농부의 노동은 택배로 배달된다. 수십개의 아이디어와 수많은 가짜 계정과 온라인으로 보고 퍼온 분류 불가능한 이미 수 차례 짜깁기된 아이디어들과 이미지가 편재한 인터넷 위에서 노상호는 자신의 ‘이야기세계’를 짓는다.

인터넷의 이미지를 수집하고 이를 편집해 자신이 만든 화면을 먹지로 따라 그리며 최종 승인하는 그의 이미지에는 노상호가 어린 시절 겪었던 실제 경험, 주변 친구들의 세계에서 듣고 보았던 경험담들이 등장한다. 그러나 노상호의 각종 형태를 사용해 제작된 작업들에는 자꾸만 원본, 즉 원래 이야기와 이미지를 숨기려는 충동이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려는 의지만큼이나 강하게 작동한다.

이상하지 않은가? 흘러내리는 노상호의 검은 바탕의 벽화, 이야기의 선형적 서사를 아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조각조각 흩어진 이미지들은 노상호가 지어낸 이야기를 도리어 숨긴다. 작가 홈페이지에 업데이트되는 ‘데일리 픽션’에 올라온 ‘태어날 때부터 세 개의 팔을 가진 소녀’에 대한 짤막한 글과 그림, ‘많은 박수를 받는, 최고의 무용수가 되는 것이 꿈인 샐리라는 아이’에 대한 글과 그림을 보자. 그가 그린 표정 없는 인물들의 이 얇은 표면을 한 그림들은 이야기와 같이 올라와 있지만 아무런 말도 주장도 펴지 않는 위장된 삽화다.

노상호를 암전된 가벽의 이야기꾼이라 말하며 위에 쓴 “암전된 가벽”이라는 단어는 노상호가 적은 단어다. 자신의 작업을 소개하며 적은 짧은 문장 중 한 대목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 암전된 가벽이야말로 노상호가 직접 컨트롤하고 제작을 제시할 수 있는 현실의 물질이라는 점이다.[2] 노상호는 그가 말하듯 이야기 자체의 서사나 완결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다. 이야기 하나의 질이라든가 이야기의 양보다 중요한 것은 이 이야기가 그림을 포함한 작업을 생산해내는 입구로서 존재한다는 점이다. 노상호는 그가 만든 세계를 가짜이지만 다소간 활용할 수 있는 벽인 ‘가벽’을 통하여 현실의 체계를 (잠시나마) 전환시키고자 한다. 전환의 방편으로 암전이라는 어두운 상황과 작은 랜턴 조명이라는 인공 빛의 세계, 외부와 차단된 동굴 형태의 긴 복도와 커튼(2015년 봄에 있었던 기고자의 전시에서는 암막 커튼을 관람객이 직접 열고 들어가도록 했다)이 사용된다.

그의 이야기는 그렇다면 어떤가. 노상호가 지어낸 이야기에서 가장 흥미로운 지점은 어떤 마을에서 시작한다는 점이다. 이 마을은 이름을 갖고 있기도 하고 아니기도 한데, 적확한 시공간의 기록으로서의 단서는 등장하지 않는다. 사건의 발단은 있다. 이 발단으로 말미암아 구현되는 이야기에는 인물, 사건, 배경이라는 이야기를 구성하는 3대 요소가 등장한다. 예를 들어 노상호가 만든 ‘태어나면 눈을 감아야 하는 나라가 있었다’에서 문제적 개인이자 제왕인 왕은 세상을 전부 볼 수 있는 마녀의 눈을 탐하고 결국엔 마녀가 모두 마을 사람들이 눈을 뜨는 순간 돌이 되는 마법을 걸어버린다. 컨트롤할 수 없는 마법과 신탁의 세계를 오가는 이 이야기는 마을 안에 있는 힘을 갖지 못한 작은 부품으로서의 사람들 모두 거역할 수 없다.

노상호의 이야기는 부재를 기본으로 한다. 여기서 부재란 이미 그 이야기들은 끝이 난 과거형이라는 형식 면에서, 상실의 이야기라는 주제 면에서, 또 노상호가 이야기나 자신이 그림 그림의 세계를 축적한다기보다는 하나하나 생산하고 휘발시킨다는 점에서 그렇다. 작가가 지어낸 세계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부유한다. 그것은 노상호가 만든 마을이 이미 허구를 믿고 있기 때문이며, 이야기의 첫 번째 주요한 독자가 이야기를 지어내는 자기 자신이기 때문 아닐까. ‘데일리 픽션’이라는 그가 만들어내는 이 이야기의 조각을 통해 작가는 또 하나의 마을을 짓는다. 이 마을은 가상으로 이뤄진 가짜-세계, 인공물의 세계이지만, 이 인공물들이 모여내 실제 작가 노상호의 시간을 일궈내는 그림이라는 물질을 만들어낸다.

한편 노상호에게 그림은 회화라기보다 이미지에 가깝다.[3] 회화적인 것과 이미지가 섞여 어쩌면 온전히 회화적인 것들로 이뤄진 세계와 모든 것이 이미지로 집약가능한 세계의 분류체계를 혼돈시킨다. 노상호는 인터넷에서 시시각각으로 유통되는 패션, 문화, 여자, 남자, 입고 마시고, 태어났다가 사망하는 인간에 관한 모든 저널과 스톡 이미지들을 본다. 그러나 이것은 수집을 위한 수집이 아니며 쉽게 사용되고는 또 쉽게 지나간다. 다시 이미지를 분해하고 조립하고 카피 앤 패이스트(Copy & Paste)의 감각을 재생하는 먹지를 통해 빠르게 그림을 그려내는 그의 작업으로 이어진다. 수집과 조립에 기거하여 그는 자신의 그림 또한 파일명을 가진 이미지로 저장하고 인스타그램을 비롯한 홈페이지에 업로드한다. 그가 제작한 이미지의 생애가 그러나 온라인 상에서 유통되는 고퀄/저퀄 이미지들과 다른 생애사를 찾게 되는 것은 전시라는 미디어를 노상호가 발명 또는 고안하는 순간이다.

전시를 하나의 미디어라고 볼 때 노상호는 전시의 바깥에서 다가간다. 전시과정 중에 무엇인가 진행되는 과정형 전시로서 열린 장치를 운용하는 전시가 가진 가능성뿐만이 아니라 노상호는 전시를 가장 오래된 그림 보여주기의 방식으로서도 접근한다. 그러니까 꼭 전시장에 가야만 하는 이유를 관람자에게 제공하기 위해 노상호는 전시장을 하나의 이미지들의 운동-장으로 만든다. 《젊은 모색》 전시에서 관람객이 마주하게 되었던 동굴, 그리고 홍대 건물의 빈 곳을 전시공간으로 만들어 벽화 등의 전시를 했던 노상호의 전시는 전시장이 완성된 작업을 가져와 채워야 할 빈 벽이 아니라 아예 빈 캔버스 또는 하얀 컴퓨터 모니터 자체로 인식하는 것에 가깝다. 그 위에 뼈대를 세우고 물감을 덧입히듯이 전시장의 조건과 상황을 작업 맥락으로 적극적으로 가져와 아예 다른 자신의 작업을 보여주는 틀-거리를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이렇게 전시라는 미디어를 노상호가 흔들고 제작할 수 있는 것은 그의 크고 작은 그림들이 마을처럼 군집형태를 이룰 수 있으며, 그에 따라 아예 달라 보이는 특성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가 쓴 이야기들이 어떻게 전시장에 배치되고 소멸되느냐에 따라, 또 그의 그림들이 벽화로 제작되는지 액자 하나 하나에 담기는지에 따라 노상호의 작업은 다른 세계와 접합점을 만들어낸다. 이런 방식으로 그가 만들어내는 그림 또한 허상에 기댄다. 그림을 보는 방식을 제작의 수단으로 끌고 나가는 것, 《젊은 모색》의 전시는 과부하에 걸린 컴퓨터 저장 장치만큼이나 수적으로 압도하는 그림들 그러나 너무 어두워서 이 그림들은 손전등으로 비춰봐야만 부분부분을 탐색할 수 있을 뿐이었다. 전체를 보여주는 것에는 큰 관심 없는 이 작가는 어느 곳을 새로운 전시장으로 발굴해낼 수 있을까?


 
작가와 의심

‘미술’보다 재미난 것은 많다. 적어도 노상호에게는 그렇게 보인다. 단 하나의 굉장한 작품, 그러니까 자기만의 방법론을 구축해 쌓아 올리는 행위나 오리지널리티를 가진 단일한 저자로서의 존재방식은 지금 오늘을 사는 노상호의 저장 파일 안에 저장, 아니 임시 저장조차 너무도 무겁다. 그러나 한편 노상호의 작가적 출구전략은 또한 이 한없이 가벼워 보이지만 가벼움으로 소비되지 않는 다른 방식의 생산라인 공정 자체에 있다. 그는 그것이 어떠한 형태로 발산되는 관습적 제스처대신 무한대로 생산해내고 있으며(‘데일리 픽션’을 보자), 눈을 뜬 관객들이 여기저기 파편적으로 배치되어있고(팔로어 구조를 따르는 관객들이 인터넷에 있다) 동료와 이합집산하여 각자의 작품 하나하나가 아닌 어쩌면 더 효율적인 전시나 프로젝트로서의 행사/이벤트 등을 생산해낼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진짜’는 어디에 있는가 반문해볼 수 있다.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건대 노상호에게 이야기 세계는 첫째 비가시적인 세계와 가시적인 세계를 잇는 접점이다. 노상호가 지어낸 이야기에서 많은 이야기들은 불구, 타자, 기이함의 세계에 기대어있는데 여기에서 이야기 속의 존재들은 자신이 얼마나 비참한지 어떻게 이 세계 바깥으로 뚫고 나갈 수 있는지 없는지 알지 못한다. 즉 자신의 비참함을 알지 못하고 살아가는 존재들은 ‘눈’이 없게 되는, 즉 어둠 속에 살고 있는 존재들로 표현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 알 수 없음의 무지몽매함은 마을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일들의 신비를 유지하는 장치로 쓰인다. 그리하여 노상호가 그려내는 그림들은 스스로 지어낸 이야기들을 부분적으로 그려내되, 전체를 알 수 없는 휘발된 그림의 단편 단편을 만들어낸다. 날마다 허구를 짓고 그리는 노상호는 인터넷을 통해 이미지를 무작위로 수집하며 먹지를 사용하여 이미지들의 총합을 따라 그린다.

여기서 나는 그가 과연 이야기 없이는 설 수 없는 작자인가, 무엇인가 의심해보기로 한다. 그러나 날마다 그림 한 장 이상씩은 그려내야 한다고 말하는 이 왼손잡이의 작가를 보며 끊임없이 든 생각은 이 좌우위아래로 (다시) 끊임없이 증식하는 이야기를 작가로부터 (또는 작가의 작업으로부터) 조금 떨어뜨려볼 수 없는가 하는 질문이었다. 노상호가 어떤 이야기꾼이든지 간에 그는 오늘날 이미지와 더불어 산다는 것의 향방에 대해 몸으로 반응하는 사람이며 끝없이 생산의 공장을 굴린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존재방식을 보여준다. 그는 하루에 하나씩 그림을 그리지 않으면 불안하다고 말하며 제안이 들어오면 거기에 맞춰서 디자인, 일러스트레이션, 하물며 전시와 레크레이션 관련 업무조차 가능하다고 한다.


 
[1] 노상호의 포트폴리오에 적힌 메르헨의 소개 일부를 인용하면 이렇다. “메르헨은 가족끼리 모여 앉아 가족들을 상대로 주고받은 ‘집안 속의 이야기’ ‘화롯가의 이야기’라는 본뜻을 가지고 있으며 환상과 상상력을 토대로 불특정 시대, 불특정장소에 처한 불특정 인물의 이야기가 기본토대이다.”
[2]. 2014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젊은모색》전에서 검고 긴 가벽에 벽화를 그리고 드로잉을 빼곡하게 배치했던 작가는 그의 포트폴리오(pdf 파일)에서 ‘태어나면 모두 눈을 감아야 하는 마을이 있었다’를 설명하는 짧은 문장을 아래와 같이 적었다.“메르헨 마차 활동을 통해 지어진‘태어나면 모두 눈을 감아야 하는 마을이 있었다’라는 메르헨을 암전된 가벽 속에 전시하고, 관람자가 랜턴을 통해서 전시를 관람할 수 있도록 하였다.”
[3]. 노상호의 이미지는 작가이자 필자인 히토 슈테엘이 ‘저화질 이미지’에 대해 특유의 수사적 어법으로 언급하며 동원하는 온갖 표현과 닮아있다. 움직이는 파본이며 조각난 세계상이자, 타인에게 이동전송될 수록 값이 떨어지는 상태로서의 이미지, 그것은 극장에 가서 보지 않고 집에서 다운로드 받아보는 만인의 만인에 관한 영화이며 인스타그램으로 보이는 전세계인들이 먹고 마시는 디저트의 풍성한 미각이다.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