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상호(b. 1986)는 소셜미디어를 포함한 인터넷 상에 부유하는 무수한 이미지들을 소재로 그린 회화를 중심 삼아 독창적인 작품세계를 구축해 왔다. 작가는 날마다 마주하는 이미지 조각들을 수집하고 먹지를 이용해 베껴 그린 후, 특유의 상상력과 감각에 기반하여 새로운 화면으로 재구성한다.

노상호, 〈태어나면 모두 눈을 감아야하는 마을이 있었다〉, 2016, 먹지드로잉 위에 수채, 29x21cm ©노상호

노상호의 작업 과정은 동시대 조건 안에서 이미지를 소비하고, 창작하는 방식에 관한 작가의 고민을 투영해 보여준다. 특히 그의 회화의 배경이 되는 먹지는 작가로서의 노상호 자신을 대변하는 매개체이기도 하다.
 
먹지를 매개로 한 제작 방식은 이미지의 범람과 다양한 플랫폼으로의 자유로운 이동과 변환으로 정의되는 디지털 시대를 대하는 노상호만의 유연한 이미지 철학을 정직하게 드러낸다.


《더 그레이트 챕북》 전시 전경(웨스트웨어하우스, 2016) ©노상호

노상호는 2011년부터 매일 한 장씩 A4 크기의 작업 ‘데일리 픽션’ 시리즈를 온라인에 연재하듯 올렸다. 수천 장 규모의 연작으로 거듭난 이 작업은, 인터넷에 떠돌아 다니는 저화질 사진들, 주인 없는 이야기들, 나타났다 사라지는 소식 등을 소재로 제작되었다.
 
‘날마다 창조하는 이야기’라는 뜻을 지닌 이 작업은, 작가가 날마다 인터넷 상에서 접한 이미지들과 함께 작가 자신과 주변인들이 실제로 겪었던 경험, 어린 시절의 기억 등이 뒤섞여 나타난다. 일상의 현실에서 소재를 가져오지만, 완성된 이미지는 현실과는 먼 허구의 세계로 그려지며 새로운 ‘픽션’으로 가공된다.


《더 그레이트 챕북》 전시 전경(웨스트웨어하우스, 2016) ©노상호

나아가, ‘데일리 픽션’ 시리즈는 ‘더 그레이트 챕북’(2016-)이라는 제목의 유화 시리즈로 확장되었다. ‘1달러짜리 싸구려 책자’라는 뜻의 ‘챕북(Chapbook)’ 앞에 ‘위대하다(great)’라는 형용사가 붙은 이 작업의 제목은, 매일 한 장씩 그린 기존의 드로잉들을 대형 화면 위에 빼곡하게 중첩하여 하나의 커다란 세계를 만들어내는 작업 방식과 맞닿아 있다.
 
챕북은 이야기와 판화가 담긴 얇고 저렴한 대량생산 출판물로, 가볍게 읽히고 쉽게 소비되는 특징을 가진다. 노상호는 이를 디지털 시대의 이미지가 소비되고 생산되는 방식과 연결하며, 현실과 가상, 아날로그와 디지털 사이의 경계를 넘나드는 실험을 더욱 확장하였다.

《더 그레이트 챕북 II》 전시 전경(아라리오뮤지엄 인 스페이스, 2018) ©노상호

이를 기점으로 노상호는 ‘이야기’에 대한 내용보다 오늘날 ‘이미지’가 소비되는 방식 자체에 더욱 집중하기 시작했다. 2018년 아라리오뮤지엄 인 스페이스에서 열린 개인전 《더 그레이트 챕북 II》에서 노상호는 본격적으로 이야기가 빠지고 이미지만 남은 작업들을 선보였다.
 
약 1,500점의 그림들로 이루어진 전시는 대형 걸개그림들이 전시장 중간 천장에서 바닥까지 내려오고, 벽돌 벽면을 둘러싼 행거에는 수백 장의 드로잉들이 마치 의류매장처럼 옷걸이에 걸려 쇼핑하듯 자유롭게 관람할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었다.


《더 그레이트 챕북 II》 전시 전경(아라리오뮤지엄 인 스페이스, 2018) ©노상호

그리고 전시장 마지막 공간에는 작은 액자 및 캔버스 작품들이 3개의 흰 벽면을 가득 채우며, 거대한 이미지의 범람이 공간을 장악하고 있었다. 이때 공간을 차지하고 있었던 그림들은 이전 개인전에서 전시했던 1,000장의 그림을 자른 후 규격을 달리하여 재구성한 것들이었다.


노상호, 〈더 그레이트 챕북 II〉, 2018, 캔버스에 수성유화, 270x220cm ©노상호

이와 같은 일련의 작업에는 이전과 달리 이야기를 상징하는 배경이 빠진 채 이미지만 조합된 형태로 나타났다. 특히, 대형 걸개그림에서 작가는 기존 수채화 대신 수성 유화를 사용하여 더욱 선명한 이미지를 추구하고자 했다.
 
이렇듯 노상호는 수많은 정보와 이미지가 반복해서 복제, 편집되는 인터넷 상의 생태계를 탐구하는 것에서 나아가, 이에 반응하며 제작된 자신의 작업 또한 재편집하는 작업을 진행해 왔다.


노상호, 〈더 그레이트 챕북 3〉, 2021, 캔버스에 유채, 130x97cm ©노상호

그리고 2021년부터 노상호는 3D 작업을 병행해 오며 3D 영상 제작기술을 작업의 한 갈래로 도입하기 시작했다. 그는 인터넷에 무료로 배포된 정크 3D 모델 또는 게임 등에서 추출한 요소들을 조합하고, 이를 기존에 2D로 구성한 이미지와 같은 프로세스로 새로운 작업을 진행하였다.
 
노상호는 다양한 곳에서 수집한 요소를 3D적으로 배치하여 영상을 만들거나, 이를 통해 만든 인물을 2D로 변형하여 ‘더 그레이트 챕북’ 시리즈의 화면 곳곳에 집어넣으며, 2D 평면과 3D 입체 영상이 유기적으로 연결되는 작업으로 발전시켰다. 예를 들어, 2021년도에 진행한 ‘더 그레이트 챕북’ 시리즈에서는 3D 영상, 3D 캡처, 그리고 이 3D 캡처를 독립적으로 캔버스에 그리는 방법으로 풀어나갔다.


노상호, 〈더 그레이트 챕북 4 - 홀리〉, 2023, 캔버스에 아크릴, 117x91cm ©아라리오갤러리

나아가, 2022년부터 노상호는 AI 이미지 생성 프로그램을 이용하여 얻은 결과물들을 회화의 소재로 활용하기 시작하는 등 새로운 동시대 미디어 환경에 예민하게 반응하며 작업 방식의 변주를 보였다.
 
가령, 2023년 아라리오갤러리에서 열린 단체전 《낭만적 아이러니》에서 선보인 ‘더 그레이트 챕북 4 – 홀리’(2023) 시리즈는 3D 이미지 중 무료로 사용 가능한 이미지들로 화면을 구성한 후, AI 생성 이미지 도구를 통해 특정 이미지를 탄생시켜 제작한 작업이었다.

노상호, 〈더 그레이트 챕북 4 - 홀리〉, 2023, 캔버스에 아크릴, 60.6x60.6cm ©아라리오갤러리

그 중, 커다랗게 눈 뜬 집을 그린 그림은 인터넷에서 발견한 주택가 풍경과 인물 사진을 중첩해 그린 작업이었다. 그리고 이때 연관 없는 두 개의 이미지를 뒤섞는 과정 가운데 작가의 주관적 상상력이 개입된다.
 
화면 좌측 하단에 분홍색 하트 모양 도상들이 낙엽처럼 쌓여 있는 모습은 인공지능이 그린 도상이다. 정확히는 인공지능 프로그램에 특정 문구를 입력해 디지털 도상을 얻은 후 손으로 따라 그린 것이다. 또 다른 작품에도 인공지능과의 협업으로 그린 도상들이 등장한다.

노상호, 〈더 그레이트 챕북 4 - 홀리〉, 2023, 캔버스에 아크릴, 91x117cm ©아라리오갤러리

그리고 이 작업에서 노상호는 붓 대신 스프레이 형식으로 물감을 분사해 채색하는 에어브러시를 작업 과정에 처음 도입했다. 에어브러시는 손의 흔적을 적당히 숨겨 디지털처럼 매끈한 화면을 만들어 낼 수 있다. 한편, 그는 특수 안료와 석고 등 두터운 질감의 재료를 화면에 덧바르기도 하였다. 이를 통해 매끈한 스크린과 같은 질감을 내는 동시에, 이와 대비되는 회화의 물질성을 강조한다.


노상호, 〈더 그레이트 챕북 3〉, 2023, 캔버스에 유채, 각 117x91cm (2패널) ©아라리오갤러리

또한 화면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어딘가 어긋나 있는 지점들이 나타난다. 이는 작가가 그림의 크기를 확장하는 과정에서 매일의 기본 단위를 유지하는 방법을 고민하며 고안한 작업 방식에서 비롯된다.
 
노상호는 매일 한 장의 그림을 그려왔던 기존의 작업 방식을 역으로 취하며, 하나의 거대한 화면을 A4 크기로 분할해 매일 한 부분씩 채워 그렸다. 그러다 보니 구획한 부분마다 시차가 발생하며 표현과 생각에 변화가 일어났고, 작가는 이러한 차이를 강조하기 위해 화면 경계를 의도적으로 완벽하게 이어 그리지 않았다고 한다.


노상호, 〈더 그레이트 챕북 4 - 홀리〉, 2023, 캔버스에 아크릴, 117x91cm ©아라리오갤러리

이러한 작업을 통해 작가는 현실과 디지털 세계에서의 가상 이미지들 간 혼종교배와 그로 인한 결과물을 노출시키고, 그 현상에 대한 고민을 나누고자 했다. 디지털 기술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그 속성을 노출시키면서도, 결국 다시 손으로 옮겨지는 아날로그적인 작업 방식을 뒤섞으며 두 세계 사이의 상이한 감각을 증폭시킨다.


《홀리》 전시 전경(아라리오갤러리, 2024) ©아라리오갤러리

2024년 아라리오갤러리에서 열린 개인전 《홀리》에서 노상호는 2022년부터 AI가 생성한 수많은 이미지들 가운데 직관적으로 선택한 도상들을 화면으로 끌어오며 탄생한 ‘홀리’ 시리즈를 중점적으로 선보였다.
 
AI가 만든 이미지를 재료 삼아 재구성한 화면은 실재하는 세계를 닮은 한편 보다 극적인 장면으로서 완성된다. 현재 상용화된 AI 이미지 생성 프로그램은 결과물이 ‘사실적으로’ 보이게끔 도출하도록 학습되어 사진처럼 견고한 장면을 구성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동시에 기술의 불완전함 탓에, 머리가 두 개인 사슴이나 손가락이 여섯 개인 사람, 거대하게 불타는 눈사람처럼 현실 세계의 논리와 조금씩 어긋난 기이한 도상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결코 사실적이지 않은 것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이미지를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노상호, 〈홀리〉, 2023, 캔버스에 아크릴, 130x193.9cm ©아라리오갤러리

노상호는 AI가 만든 특정 장면들이 선사하는 경이와 공포의 양가적 감정을 신화 및 종교적 성스러움에 빗대어 보았다. 이러한 맥락을 바탕으로 하는 ‘홀리’ 시리즈는 주로 문자 대신 작가 자신의 기존 작품 이미지를 AI 이미지 생성 프로그램에 입력한 후 재해석을 유도한 다음, 출력된 결과물 가운데 도상을 선택하여 새로운 회화의 화면으로 옮겨오는 방식으로 제작된다.
 
화면에 자주 보이는 ‘불타는 눈사람’도 그렇게 얻은 도상 중 하나다. 노상호는 커다랗게 불타는 눈사람의 형상이 자신의 주제를 함축한 형상과 같다고 여겨 화면에 거듭 묘사하게 되었다고 한다. 현실세계에서 절대로 실현될 수 없는 신비하고도 기이한 광경들은 디지털 스크린을 건너 회화의 화면 위에 다시금 재현된다.


《홀리》 전시 전경(아라리오갤러리, 2024) ©아라리오갤러리

아울러, ‘홀리’ 시리즈는 회화를 중심 삼아 3D 프린터로 출력한 조각, 3D 영상 제작 프로그램으로 만든 영상, 설치 작품 등 다양한 형식으로 재해석되었다. 가령, 설치 작품 〈홀리〉(2024)는 작가가 수집한 빈티지 옷장을 화폭 삼아 그림을 그린 후 목재 구조물 및 패브릭, 양초 등 다양한 요소를 결합하여 완성한 것이다.
 
전시 공간 내 기둥에 해당 옷장이 비스듬히 끼여 있는 모습으로 연출되었는데, 이는 게임 속 글리칭(glitch, glitching) 현상, 즉 기술 오류로 인해 장면 속 요소가 기이하게 뒤엉킨 상황을 재연한 결과물이었다. 한편으로는 일종의 재단과 같은 모습으로 보이기를 의도했다. 작품은 디지털 가상세계에서 일어나는 비현실적 사건의 한 사례를 실제 장소 안에 제시하여 보여준다.


《홀리》 전시 전경(아라리오갤러리, 2024) ©아라리오갤러리

이렇듯 노상호는 초 단위로 갱신되는 소셜미디어의 타임라인에 떠돌아 다니는 수많은 이미지들이 소비되고 파편화되는 것, 그리고 가상 환경 속에서 살아남는 방식에 대해 주목해 오며 작업을 이어왔다. 휘발하는 디지털 이미지들을 고유한 물성의 작품으로 재탄생시키는 그의 작업은, 미술의 범주 및 창작의 정의에 대하여 고찰할 수 있는 지점을 마련해오고 있다.

 ”저에게 미술이란 동시대 혹은 세대가 공유하고 있는 감각과 정서에서 발견되는 이미지의 정치학을 연구/조사하고 시각적으로 완성도 있게 드러내는 것입니다.”   (노상호, 작가 노트) 


노상호 작가 ©아라리오갤러리

노상호는 홍익대학교 판화과 학부 졸업 후 서울과학기술대학교 일반대학원 조형예술과 석사를 취득했다. 최근 개인전으로는 《홀리》(아라리오갤러리 서울, 서울, 2024), 《고스트 브러시》(유키코미즈타니, 도쿄, 2024), 《더 그레이트 챕북》(아라리오갤러리 상하이, 상하이, 중국, 2023), 《더 그레이트 챕북 II》(아라리오뮤지엄 인 스페이스, 서울, 2018), 《더 그레이트 챕북》(웨스트웨어하우스, 서울, 2016) 등이 있다.
 
또한 작가는 《키치 앤 팝: 한국 팝아트의 현재》(주상하이한국문화원, 상하이, 중국; 주홍콩한국문화원, 홍콩, 2025), 《고질라 70주년: 고질라 디 아트 익지비션》(모리아트센터 갤러리, 도쿄, 2025), 《제24회 송은미술대상》(송은, 서울, 2024), 《예술과 인공지능》(울산시립미술관, 울산, 2024), 《히스테리아: 동시대 리얼리즘 회화》(일민미술관, 서울, 2023) 등 다수의 단체전에 참여했다.
 
노상호는 국립현대미술관의 《젊은 모색 2014》에 선정되어 주목을 받았으며, 2015년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 2016년 헝가리-한국 작가 교류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그의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 정부미술은행, 구하우스미술관, 아라리오뮤지엄 등에 소장되어 있다.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