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시 천(b. 1984)은 영상, 드로잉, 조각, 설치 등 다양한 매체를 활용하여 언어와 시학에 대해 탐구한다. 특히 기존에 있는 역사학, 번역, 식민주의적 언어체계를 바탕으로 언어의 구조를 파열하고 추상화하여, 비선형적인 의미와 시간성, 및 번역할 수 없는 것에 관한 작업을 한다.
 
이를 통한 그의 작업은 의미의 무한한 기호학과 우주론을 펼치며, 세상에서 의미가 만들어지는 물리적, 영적 경계들을 초월하는 시적 언어와 순간을 그린다.


제시 천, 〈voiceless consonants〉, 2019, 2분 길이 사운드, 공항 스피커, 철골 좌대, 전선, 앰프. 28 × 32 × 32 cm, 설치 높이 가변길이 《엎질러진 얼룩이 물질을 흡수하기 시작한다》 전시 전경(두산갤러리 뉴욕, 2020) © 두산갤러리

언어에 대한 제시 천의 작업은 자전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한다. 작가는 한국에서 태어나 이후 홍콩, 캐나다, 미국에서 거주하며 토착어와 신조어 등 비영어권 언어, 특히 비서구권 서사와 역사가 소외되고 변화하는 데 대해 관심을 가져왔다.
 
이를테면, 2020년 두산갤러리 뉴욕에서 열린 2인전 《엎질러진 얼룩이 물질을 흡수하기 시작한다》에서 제시 천은 언어와 읽기의 관료적, 제도적 체제를 비판적으로 사유하는 조각과 사운드 설치 작품을 선보였다.
 
작가는 다양하게 마주하는 일상적 사물들을 읽을 수 있는 소재로 만들어내어 권력, 통제, 의미들이 가진 기존 장치들을 능동적으로 오독하고 다시 쓰기를 시도했다. 예를 들어, 세계 “공통어”라 불리는 영어의 발음 강습 오디오, 관료적인 문서와 증명서 원본을 인증하는 워터마크, 손글씨를 이루는 흑연의 물성이 그 예다.
 
시각적, 청각적, 그리고 기호학적 관념들을 통해, 제시 천은 읽기, 내면성, 그리고 불가능한 번역의 영역을 탐구했다.


제시 천, 〈술래 SULLAE〉, 2020, 3채널 비디오 도큐멘테이션, 6분 25초, 유성 및 무성 자음(영어), 한글 및 영어 텍스트, 이미지, 식민지배 이전 한국 여성들의 달춤, 억양 관련 서적의 색인 페이지, 백색 소음, 단어 검열음(삐 소리), 가변 크기 © 제시 천

한편, 2020년에 발표한 영상 작업 〈술래 SULLAE〉는 작가의 어린 시절 기억 속의 강강술래를 소환하여, 한국 여인들의 달춤을 탈식민지적 은유와 위안으로 활용한다.
 
제시 천은 강강술래가 역사에서 여성들이 집단적 침묵의 분노를 터뜨리는 수단이었다고 간주한다. 노래하고, 울부짖고, 고함을 지르며, 달 아래에서 원을 그리는 강강술래는 여성들에게 위안을 주었다.
 
작품에서 영어는 음소, 그리고 무성과 유성의 자음으로 파편화되었다. 작품은 여러 다른 청각적, 시각적, 기호학적 순간을 포착하며, ‘탈언어화,’ 즉 추상과 오역의 과정을 통해 영어에 내재된 폭력과 지배를 무력화한다.


제시 천, 〈탈언어화의 악보 no. 082721〉, 2021, 흑연, 안료, 벨륨지, 핀, 로마자 알파벳, 지우개, 33.02x26.67cm © 제시 천

지배적 언어인 영어의 의미체계를 해체하고 추상화하는 제시 천의 작업은 드로잉 설치 연작 ‘탈언어화의 악보’(2021-)로 이어진다.
 
‘탈언어화의 악보’는 반은 읽을 수 있고 반은 추상적인 촉각 드로잉 연작이다. 제시 천은 로마 알파벳에서 추출하여 분리된 기호들을 주요 편집점으로 잡고, 민감한 정보를 가리기 위해 사용되는 워터마크가 반복되고, 겹겹이 쌓이고, 부분적으로 감춰지도록 했다.
 
또한 그는 이 작품에서 알파벳 스텐실을 사용하여 새로운 텍스트적 궤적과 우주관을 상상하며 기호학적 형상과 의미를 추상화한다. 작품을 구성하는 종이의 패턴은 작가가 관료주의를 상징하는 다양한 워터마크를 비선형적 구도로 배치하여 자신만의 ‘악보’로 주문 제작한 것이다. 일련의 과정을 통해 작품은 언어, 의미, 가독성의 기묘하고 순환적인 뉘앙스로 가득 채워진다.


제시 천, 〈탈언어화의 악보(천지문 and Cosmos): 활성〉, 2024, 퍼포먼스, 협업: 연희(김향수리, 안유희). 《혀 달린 비》 전시 전경(아트선재센터, 2024) © 제시 천

작가가 말하는 ‘탈언어화’의 과정은 작가 개인의 디아스포라적 경험과 아시아의 구전 전통 철학으로 나아가며 더욱 구체화된다.
 
한국적인 관점에서, 전통적인 소리는 마치 말하고, 노래하고, 이야기를 들려주듯이, 호흡을 만드는 생명의 리듬에 기반을 둔다. 작가는 다른 예술가들을 초청하여 악보를 그들만의 해석으로 새롭게 ‘번역’하며, 작품은 이와 같은 퍼포먼스와 협업을 통해 활성화된다.
 
예를 들어, 2024년 아트선재센터에서 선보인 드로잉 설치 작업 〈탈언어화의 악보(천지문 and Cosmos, no. 042823)〉(2024)는 한국 민속 퍼포먼스 아티스트 연희(김향수리, 안유희)와 협업하여 퍼포먼스로 확장되고 활성화되었다.
 
연희와 제시 천이 함께 안무를 구상한 이 퍼포먼스는 한국 민속 춤과 소리를 재해석하여 의미와 시간, 그리고 번역할 수 없는 시언어를 소환한다.


제시 천, 〈And verse(혼잣말의 언어 그리고 cosmos)〉, 2022, 단채널 비디오 설치, 4개의 UV 프린트 아크릴 패널, 돌, 침묵. 1분 59초(비디오); 가변 크기(설치) © 제시 천

나아가, 제시 천은 영상 작업 〈And verse(혼잣말의 언어 그리고 cosmos)〉(2022)를 통해 기존 문자의 질서를 파편화하여 비선형적인 무빙 이미지의 형태로서의 시를 제시한다.
 
작품은 돌, 인덱스 페이지의 파편, 투명한 아크릴 판 위의 텍스트를 바닥에 영사한다. 영사되는 무빙 이미지는 언어와 번역의 자율성과 불일치성, 오르내림을 반복하는 천체의 주기를 투영하는 연못, 악보, 암호화된 문서를 보여준다. 구름, 연기, 각주와 깨어진 문자들은 어휘와 문법을 구축하며 새롭게 굴절된 시적 세계를 형성한다.


제시 천, 〈시: sea (2565)〉, 2022, 단채널 비디오(2분 24초), 거울, 돌, 침묵 © 제시 천

또 다른 무빙 이미지 시 작업인 ‘시: sea’(2022-) 연작은 언어의 ‘이면’에 관한 제시 천의 작품 세계 전반을 반영한다. 작품은 작가의 작품 세계를 작동시키는 거울, 바위, 오역에 대한 연구 노트와 여러 텍스트 기반의 시각물 등의 오브제를 차용한다.
 
한국어 ‘시’는 발음에 따라 영어의 ‘sea’로 잘못 번역될 수 있다. 제시 천은 이러한 오역을 능동적인 시적 형식으로 활용하며, 명료함과 선형적 서사를 거부하는 영상 작업을 통해 추상적인 텍스트의 통로이자 공간적 시를 제시한다.


제시 천, 〈시: concrete poem (no.111123)〉, 〈시: concrete poem (no. 111323)〉, 2023, 손으로 자른 한지에 흑연, 우드 액자, 스틸 폴, 《노스탤직스 온 리얼리티》 전시 전경(타데우스 로팍, 2024)  © 제시 천

이처럼 읽을 수 있는 것과 읽을 수 없는 것 사이의 경계를 다루는 제시 천의 작업은 노동집약적인 한지 작업으로도 확장된다.
 
무속적인 소통 방법이자 한국 전통 종이 오리기인 ‘설위설경’을 재해석한 연작 ‘시: concrete poem’(2023-)은 옻칠한 한지에 흑연으로 무수히 선을 그은 뒤 수작업으로 작가만의 추상 언어를 잘라내 완성한 작업이다.
 
이와 같은 기법은 한국에서 벽사, 의식, 축원을 위한 부적을 만들거나 시공을 초월한 소통에서 사용하기 위해 칼로 한지를 도려내는 무속인의 기법으로, 작가는 이것을 배우고, 재해석하여, 고유의 암호화된 언어를 가진 작품으로 창작하였다.


제시 천, 〈시: concrete poem (no. 041924)〉, 2024, 손으로 자른 한지에 흑연, 우드 액자, 158.75 × 91.44 × 6.35 cm © 제시 천

작품에서 시각화된 추상적 형태는 O, ㅇ, I, L, , ㅓ, ㅏ [오, 이응, 아이, 엘, 이, 어, 아]와 같은 한글과 영어의 문자소와 그들 사이에 위치한, 번역될 수 없는 여백으로 형성되었다.
 
남은 한지의 모양만큼이나 잘려 나간 빈 공간과 그림자가 대조되어 생긴 추상적 패턴은 마치 알려지지 않은 문명의 암호 같다.
 
섬세한 수작업의 과정에서 전통 무용수이자 불교 승려였던 작가의 할머니에게 배워 온 ‘수행으로써 쓰기’의 영향을 찾아볼 수 있으며, 한국어(‘ㅇ’)와 영어(‘O’)에 공통된 문자를 연상시키는 원 형태에서는 언어의 구조적 본질에 대한 작가의 탐구가 드러난다. .
 
읽을 수 있는 것과 읽을 수 없는 것 사이에 위치한 제시 천의 콘크리트 시는 언어의 디아스포라적, 실존적, 우주적 조건을 투영한다. 이로써 ‘시: concrete poem’은 시공간을 허물어트리는 하나의 부적이자 관문으로써 발화, 표현을 넘어 타자들과 만남의 장을 마련한다.


제시 천, 〈오 더스트〉, 2023, 3채널 비디오 설치, 3개의 거울. 7분 6초(비디오), 사운드; 가변 크기(설치) © 제시 천

한편, 같은 해 발표한 영상 작업 〈오 더스트〉(2023)는 문화 유산에 관한 유럽 중심적 번역과 역사성을 주변화하며, 언어, 유산, 무형문화를 보다 가깝게 비추며 드러낸다.
 
프랑스 파리에 있는 유네스코 본사에서 촬영한 작품은 통역부스, 통역기, 마이크, 텅 빈 회의실, 무형문화유산 아카이브 등 제도화된 말하기 장치를 통해 내부를 들여다본다. 비선형적 구도를 가진 작품은 무빙이미지-시, 여러 언어를 중첩한 상상의 전설, 그리고 한국의 전통 무용수였지만 역사화되지 못하고 승려로 삶을 마감한 작가의 할머니에게 보내는 편지 사이에서 민첩하게 움직인다.


제시 천, 〈오 더스트〉, 2023, 3채널 비디오 설치, 3개의 거울. 7분 6초(비디오), 사운드; 가변 크기(설치) © 제시 천

UN의 프랑스어 통역사와 작가의 음성으로 구술되는 〈오 더스트〉는 청각적이고, 언어적이며, 시각적인 파열음을 만들며 관료적인 서사를 벗어나 발화된다. 작가는 세 개의 다른 문자를 직조, 조율, 중첩하여 읽기 어렵게 만들며, 독해할 수 없는 중얼거림이나 허밍을 더하여 유럽 중심적인 언어의 위계와 문화 패권에 도전한다.
 
작품은 전승된 가사가 소멸된 이후의 시공간과 입, 장소와 시간을 거슬러 계속해서 전승되는 것을 서로 매개하고 있다.


제시 천, 〈시( )Nawi( )Fugue (an improvisation, an offering, a reading)〉, 2026, 퍼포먼스 © 제시 천

그리고 2026년 미국 버클리미술관·퍼시픽필름아카이브(BAMPFA)에서 열린 차학경의 대규모 회고전 《Multiple Offerings》에서 제시 천은 차학경이 남긴 디아스포라적 유대와 다성적 에토스(polyvocal ethos)를 이어받은 퍼포먼스 작업을 발표했다.
 
제시 천의 퍼포먼스 작업 〈시( )Nawi( )Fugue (an improvisation, an offering, a reading)〉(2026)은 드로잉 설치 작업 〈시: concrete poem, stanza (for all the uninherited and inherited time travelers that hum through the slivers)〉(2025)를 집단적이고 즉흥적으로 낭독하고 재해석함으로써, 예술적 계보를 형성해 온 여성 선구자들을 소환하고, 소리와 음악, 열린 번역, 구어를 매개로 세대를 가로지르는 영적 유대를 만들어간다.


제시 천, 〈시( )Nawi( )Fugue (an improvisation, an offering, a reading)〉, 2026, 퍼포먼스 © 제시 천

이 작업에서 제시 천은 차학경의 정신을 계승하면서도, 전통 무용수이자 승려였던 작가의 할머니에 대한 기억을 바탕으로 즉흥 연주에 뿌리를 둔 한국 민속 음악인 ‘시나위’와 다성적인 고전 음악 형식인 ‘푸가’를 새롭게 상상한다.
 
이로써 〈시( )Nawi( )Fugue (an improvisation, an offering, a reading)〉은 서로 다른 시공간의 음악적 언어를 시간과 장소를 넘어 함께 발화하는 상호 연결된 행위로 엮어낸다.


《밤, 낮, 달, 비, Speaking in Tongues》 전시 전경(Commonwealth and Council, 2024) © 제시 천

이러한 제시 천의 예술적 수행은 개인의 번역되지 않는 내면, 그리고 번역과 이주에 관한 침묵의 소리를 드러내며, 언어의 사회정치적 맥락을 담아내고, 동시에 초월한다.
 
특히 자신의 가족사, 한국 민속 문학, 그리고 출생지 한국과 관련한 작품에서 작가는 언어의 ‘이면’을 드러내고, 기존의 언어로 다 포착될 수/번역될 수 없는 순간들을 추상적인 시 언어로 발화한다. 이러한 시청각적 추상 작업은 사회와 기호학 구조에 균열을 가하며 대안적 소통과 연대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언어가 지닌 한계를 예술의 주요한 주제로 삼게 된 건 어떤 언어든 완벽히 번역될 수 없다는 걸 제 삶에서 체득해 왔기 때문이죠. 언어의 여러 가능성을 내포한 ‘시학’에 이끌린 것도요. (…)  언어, 의미, 시간. 세 가지 축을 맴돌며 작업을 지속하고 있어요." (제시 천, 하퍼스 바자 코리아 인터뷰 중)


제시 천 작가 © Commonwealth and Council

제시 천은 미국 파슨스 디자인스쿨을 졸업하고 스쿨 오브 비주얼 아츠에서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제12회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에서 국내 첫 개인 서베이 전시 《시, language for new moons》(서울역사박물관, 서울, 2023)을 선보였으며, 《밤, 낮, 달, 비, Speaking in Tongues》(Commonwealth and Council, 로스앤젤레스, 2024), 《And verse (혼잣말의 언어 그리고 cosmos)》(갤러리 TPW + public billboards, 토론토, 2022) 등의 개인전을 개최했다.
 
또한 작가는 제14회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 사전프로그램 《포란》(서울시립 남서울미술관, 서울, 2026), 《Speaking in Tongues》(Institute of Contemporary Art, Los Angeles, 로스앤젤레스, 2026), 《Open Hands》(갤러리현대, 서울, 2024), 《혀 달린 비》(아트선재센터, 서울, 2024), 《노스탤직스 온 리얼리티》(타데우스 로팍, 서울, 2024) 등 다수의 단체전에 참여했다.
 
제시 천은 2020년 미국 조안 미첼 회화조각상을 수상하였으며, 서울시립미술관, 뉴욕 현대미술관도서관, 워싱턴 D.C. 스미소니언박물관, 뉴욕 메트로폴리탄미술관도서관 등 주요 기관 컬렉션에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