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전 (요약)
윤미선은 2012년 갤러리 담, 2017년 노블레스 컬렉션, 2022년과 2025년 갤러리까비넷, 2025년 페이지룸8, 2026년 기체에서 개인전을 개최했다.
그룹전 (요약)
윤미선은 2023년 파리 메종 오즈멘과 서울 갤러리까비넷, 2024년 아트스페이스 호화, 2026년 페이지룸8과 갤러리 지우헌에서 열린 단체전에 참여했다.
윤미선은 단국대학교에서 도예를, 홍익대학교에서 섬유미술을 전공했다. 흑연 드로잉을 통해 인간 내면의 불안과 두려움을 탐구하며, 이를 ‘밸런스 볼’이라 명명한 유기적인 구 이미지로 시각화하고 있다.
윤미선은 2012년 갤러리 담, 2017년 노블레스 컬렉션, 2022년과 2025년 갤러리까비넷, 2025년 페이지룸8, 2026년 기체에서 개인전을 개최했다.
윤미선은 2023년 파리 메종 오즈멘과 서울 갤러리까비넷, 2024년 아트스페이스 호화, 2026년 페이지룸8과 갤러리 지우헌에서 열린 단체전에 참여했다.
윤미선의 작업은 불안과 두려움, 상처처럼 쉽게 해소되지 않는 감정을 인간의 얼굴과 몸에 투영하는 데서 출발한다. 초기 패브릭 초상에서 작가는 전쟁·시위·재난 등 극단적인 상황에 놓인 타인의 얼굴에 자신의 감정을 이입했고, 이를 ‘타인의 거죽을 빌린 자화상’이라 설명했다.
서로 다른 삶을 살아온 사람에게서 자신과 유사한 감정을 발견하고, 그 감정에 공감하며 자신의 내면을 되비추는 방식이다. 이러한 관심은 점차 특정한 피해자의 서사를 넘어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불안과 두려움을 지닌 동시대 인간 전반으로 확장되었다.
패브릭 작업 이후 나타난 얼굴은 실존 인물의 재현에서 점차 벗어나 작가의 내면을 대리하는 자율적인 형상으로 발전한다. 특히 단발머리 인물 ‘단발이(Bob)’는 작가가 자신을 투영하는 분신이자 반복적으로 변주되는 페르소나로 자리 잡았다.
여러 조각이 모여 얼굴을 이루던 초기 작업의 원리는 원과 구의 결합으로 이어졌고, ‘구’는 불안정한 존재가 균형을 모색하는 과정과 파편화된 자아가 온전함을 향해 나아가려는 의지를 상징하게 되었다. 2022년 《Balance Ball》 이후 이 모티프는 작가가 오랫동안 탐구해온 불안, 인내, 자기 회복의 문제를 압축하는 핵심 언어로 더욱 선명해졌다.
‘단발이’에 이어 등장한 ‘악마’, ‘피해자’, 검은 광대 등의 존재는 개인의 내면을 선악, 가해와 피해, 욕망과 억압이 교차하는 관계로 확장한다. 특히 《SOMNICUS》에서 서커스는 꿈과 현실, 긴장과 유희가 교차하는 삶의 은유로 제시되며, 그 안의 검은 광대는 관객의 기대 속에서 균형을 유지하려 애쓰는 인간의 취약성과 고독을 드러낸다. 윤미선은 자신의 경험을 직접 고백하는 방식에 머무르지 않고, 분신과 허구적 인물들을 통해 감정을 재배치하면서 불안 속에서도 버티고 성장하려는 존재의 태도를 탐구한다.
최근 작업에서는 자아와 타자의 관계가 다시 중요한 문제로 부상한다. 《원형 초상》의 이중 초상과 눈물의 이미지는 고정된 자아상보다 변화하고 겹쳐지는 감정의 상태를 드러내며, 《구球와 물곰팡이》에서는 시선이 거리와 미디어에서 스쳐 지나간 익명의 타인에게 다시 향한다.
이때 ‘구’는 닫힘과 열림, 충만과 공허가 공존하는 형상으로 확장되고, ‘물곰팡이’와 ‘이염’은 감정이 타인에게 스며들고 변질되며 소멸하는 관계의 순환을 사유하게 한다. 결국 윤미선에게 정체성은 고정된 자화상이라기보다 타인과의 접촉 속에서 끊임없이 흔들리고 변형되며 다시 구성되는 감정적 자아에 가깝다.
윤미선의 초기 작업은 원단을 회화적 재료로 다루는 패치워크 초상에서 출발한다. 인물의 대략적인 형상을 잡은 뒤 원단을 직접 염색하고 불규칙하게 자른 조각들을 재봉틀과 손바느질로 이어 붙이며, 때로는 열을 가하고 팽팽하게 다림질해 화면을 완성했다.
작가가 천을 ‘물감과 캔버스’에 비유했듯 색과 형태, 촉감과 부피가 동시에 작동하며, 미리 완벽하게 계산된 구성보다 제작 과정에서 발생하는 우연성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조각난 얼굴과 신체는 이처럼 잘라내고 접합하는 행위의 흔적을 그대로 품으며, 인물의 감정과 작가의 신체적 노동을 화면의 구조 안에 함께 드러낸다.
2017년을 전후해 패브릭에서 연필 드로잉으로 중심 매체가 이동하면서 화면을 구성하는 방식도 달라진다. 공업용 미싱과 다리미를 대신해 연필을 쥐게 된 작가는 자유롭게 뻗어나가는 흑연의 선을 따라 얼굴을 분해하고 다시 조립했다.
삼각형과 원추, 원과 구처럼 단순화된 도형이 두상과 이목구비를 이루기 시작했으며, 천 조각을 이어 전체 형상을 구축하던 이전의 원리는 선과 면을 연결하는 방식으로 이어졌다. 재료는 크게 달라졌지만 ‘파편을 결합해 인물을 만든다’는 제작의 논리는 작업 전반에서 지속되고 있다.
이후 원과 구는 윤미선의 초상을 조직하는 가장 특징적인 조형 단위로 정착한다. 크고 작은 원형이 관절처럼 맞물리며 얼굴과 몸을 만들고, 흑연을 여러 번 덧칠해 얻은 명암의 차이는 평면 위에 돌출과 함몰의 착시를 만든다.
검은색과 회색의 세밀한 그라데이션에 제한적인 색면과 단색 배경을 병치하면서 입체감과 평면성이 동시에 강조되며, 좌우가 반전된 인물이나 두 얼굴이 겹치는 이중 초상처럼 반복·복제·변형의 방식도 적극적으로 활용된다. 이러한 형식은 ‘단발이’를 비롯한 인물의 표정과 시선을 매번 조금씩 달리하면서 자화상, 이중 초상, 군상과 정물까지 화면의 범위를 확장하는 기반이 되었다.
최근 회화에서는 이러한 조형 원리가 다시 물질성이 강한 표현으로 확장되고 있다. 캔버스 위에 아크릴, 연필, 목탄, 오일 스틱, 오일 파스텔 등을 함께 사용하면서 ‘구’는 선으로 구획된 도형에서 붓질과 질감이 축적된 물질적 형상으로 변화한다. 차창 밖이나 거리, 미디어에서 스쳐 본 타인의 얼굴과 복합적인 표정은 선을 굴리고 흐트러뜨리는 몸의 움직임을 통해 화면에 옮겨지며, 물감이 스며들고 번지는 ‘이염’과 실제 작업 과정에서 발생한 ‘물곰팡이’까지 작품의 어휘로 받아들여진다.
초기 패브릭의 염색과 봉제, 흑연 드로잉의 반복적인 선, 최근 회화의 번짐과 중첩은 서로 다른 기법이면서도 재료를 축적하고 연결하며 예상하지 못한 변화를 수용한다는 공통된 제작 감각으로 이어진다.
윤미선의 작업은 패브릭, 드로잉, 회화로 매체를 옮겨가면서도 초상과 자화상을 중심에 두고 꾸준히 전개되어 왔다. 초기 패브릭 작업에서 천 조각을 잘라 이어 붙이던 방식은 연필 드로잉에서 원과 구를 연결하는 구조로 변환되었고, 최근 회화에서는 여러 재료와 필선이 충돌하고 중첩되는 방식으로 이어진다.
매체가 바뀔 때마다 앞선 형식을 폐기하기보다는 조각을 나누고 결합하며 인물의 감정과 정체성을 재구성하는 제작 원리를 새롭게 적용해왔다. 작가 스스로도 패치워크와 드로잉을 상호 보완적인 작업으로 설명했으며, 색감과 분위기의 변화 속에서도 자화상을 통해 인간의 다양한 감정을 표현하려는 관심은 계속 유지해왔다.
이러한 지속성은 2018년경부터 축적된 ‘원형 초상’에서 더욱 뚜렷하게 확인된다. 약 7년에 걸쳐 제작된 500여 점의 원형 초상은 동일한 도상을 반복하는 연작이라기보다, 원과 구를 기본 단위로 삼아 얼굴과 몸을 끊임없이 변주해온 장기적인 실험에 가깝다.
작품 번호에 제작 연도와 순서가 기록되고, ‘단발이’의 표정과 자세, 좌우 반전된 얼굴, 이중 초상, 군상과 정물이 연속적으로 등장하면서 각각의 작품은 작가가 지나온 시간과 감정을 축적한다. 반복은 형식을 고정하는 규칙이 아니라, 같은 조형 언어가 얼마나 다른 심리와 이미지를 만들어낼 수 있는지 확인하는 방법으로 작동한다.
5년 만에 전시 활동을 재개한 2022년 《Balance Ball》은 이러한 조형 언어가 본격적으로 정리된 시점이다. ‘단발이’, ‘악마’, ‘식물’ 등에 공통적으로 나타난 구는 화면의 균형을 잡는 형식에서 출발해 작가의 내면과 삶의 태도를 대리하는 모티프로 확장되었다.
이후 2025년 《SOMNICUS》에서는 단발이가 검은 광대로 변주되며 꿈과 서커스라는 허구적 서사를 획득했고, 같은 해 《원형 초상》은 오랜 기간 지속된 원형의 변화를 다시 살피며 작업의 연대기를 가시화했다. 이 과정에서 윤미선은 익숙한 얼굴을 계속 반복하면서도 인물의 역할과 관계, 감정의 범위를 넓혀왔다.
2026년 《구球와 물곰팡이》에서 다시 타인의 얼굴로 시선을 돌리고 회화의 물성을 강화한 점은 작업이 여전히 변화 중임을 보여준다. 패브릭의 이염, 드로잉의 원형, 회화의 구와 물곰팡이는 서로 다른 시기의 어휘이지만 모두 접촉과 침투, 분해와 결합, 순환이라는 감각을 공유한다.
이처럼 윤미선은 자신의 조형 언어를 완성된 양식으로 고정하지 않고 반복과 변형을 통해 지속적으로 갱신한다. 초상은 작가 개인의 기억에서 출발해 페르소나와 타인의 얼굴, 정물과 군상으로 범위를 넓혀왔으며, 이러한 확장성은 앞으로도 ‘자아와 타자의 관계’를 중심으로 작업이 이어질 수 있는 중요한 동력이 된다.

회화에 있어 우연성은 회화성 자체로 읽히기도 하는데, 이는 인간인 예술가가 통제할 수 없는 것이거나 혹은 통제하고 싶지 않은 영역에서 발생한다. 이것은 몸의 수고로운 작업 방식이나 창조된 이미지의 단순 변주와 같은 통제 가능한 영역과 대치된다. 이 두 영역의 사이에서 스스로 현현하는 것이 있다.
메를로 퐁티는 이를 승화의 과정에서 발생하는 예술로 보았고, 이것은 곧 이번 전시에 김정욱과 윤미선의 회화를 나란히 둘 수 있는 단서가 된다. 작품에는 작가의 신체적 행위를 통해 경험되는 감각이 긴밀하게 결부되기 때문에 그 안에 물질적 매체 너머의 상징체계가 내재된다고 보았던 퐁티의 맥락을 바탕으로 김정욱과 윤미선의 회화에서 그들의 ‘검은 우주’를 쫓아보려 한다.
먼저, 전시 제목에서의 ‘검은’과 ‘우주’로 나누어 두 작가의 작업을 살펴보고자 한다. 제 우주를 밀도 있게 담아낸 두 작가의 작품에서 표면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검은’ 색은, 그들이 수행하듯 긴 시간 갈아낸 작업의 재료에서 기원한다. 소나무를 태운 그을음에 동물의 가죽이나 연골에서 얻은 아교로 응고한 먹을 다시 갈아 물에 섞어 겹겹이 올린 것은 김정욱의 검음이고, 자연에서 채취한 탄소 물질인 흑연에 점토를 섞어 구워 만든 연필을 종이에 수도 없이 겹쳐 칠한 것은 윤미선의 검음이다.
배경으로 자리한 김정욱의 검은색은 화면의 다른 요소들을 부유하는 것처럼 보이게 하지만 동시에 심연의 중력으로 모든 것을 제 자리에 고정시킨다. 닥종이에 아교포수한 지지체에서부터 시작하는 김정욱의 그림자를 따라가다 보면 세필로 그려낸 수없이 많은 먹선 앞에 멈추게 된다. 검은 먹이 스며든 한지는 다시 긴 시간을 밀어내고 제 안으로 침잠하며 깊어진다.
반면, 양감이 짙은 윤미선의 검은색은 명확한 구획을 이루며 앞으로 전진한다. 그는 가까운 구체의 검은 색을 가장 어둡게 하여 강조함으로써 입체적 착시를 의도하는데 하얀 종이 위에 마모되는 흑연은 거친 질감을 그대로 남긴 채 회화로 돌아오게 한다. 아크릴로 단단히 마무리한 단색의 배경과 대조되는 윤미선의 검은 연필 선은 무수히 겹쳐지며 묵묵히 제 역할을 해낸다.

다음으로 ‘우주’로 지칭할 수 있을 무형의 것에 대해서는 현존에 관한 두 작가의 질문에서 길을 찾을 수 있다. 인간 지각의 시작점이자 외부 세계를 돌아와 다시 체류하게 되는 지점 역시 인간인데, 두 작가 역시 태초의 질문이 시작된 곳으로 회귀하는 경향을 보인다. 김정욱은 유약한 나와 우리에서 나아가 자문으로써의 작업을 거치며 생 자체의 힘에서 경외를 찾는다.
이 섬세하고 명료한 발견에서 작가는 비로소 외부의 것과 균형을 이룰 수 있게 되었고, 그렇기 때문에 이 과정 자체를 은유하는 그의 작품에는 제목이 없다. 작가는 발 딛고 선 땅의 소리와 귓가를 돌아오는 바람이 머금은 향기를 모두 섞어낸 것을 정성스럽게 빚은 화면에 그려낸다. 그것은 소녀였다가 얼굴이었다가 부처였다가 돌이나 새였다가 빛과 어둠으로 남는다. 한편, 윤미선의 우주에는 불안한 시절을 격려하듯 견고하게 구조물을 쌓아 만든 형상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제 얼굴이 기하학적 원소로 해체된 퍼즐처럼 조각된 이 형상은 중세의 초상처럼 곧은 자세를 하고 앉아 화면 밖의 우리를 응시한다. 우리는 눈동자일지 모를 작고 검은 반구체에서 작가가 삼켜내어 연필 끝으로 다시 뱉어낸 질문을 읽는다. 곧 많은 질문과 그보다 많은 대답들을 쏟아낼 듯한 그는 스스로 형체를 잃고 무너질지도 모를 모양으로 그곳에 있다.
김정욱과 윤미선을 《검은 우주》로 엮어 읽으며 한지에 스민 먹과 종이에 그어진 연필선을 쫓아보았다. 두 작가가 고뇌하는 시간이 쉼 없이 쌓여 비춰지는 어둠에 빚어지는 기이한 형상들을 들여다보며 그들의 우주를 상상할 수 있었다. 이번 전시를 통해 두 작가가 지나온 시간들을 겹쳐보며 보다 근원적인 질문에 다가갈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