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이피(b. 1981)는 주로 영상을 기반으로 한 퍼포먼스와 설치 작업을 전개해 왔다. 특히 작가는 인간의 사회적 관계를 미시적으로 시각화하려는 과정으로서의 ‘실험실’을 표방하며, 검열과 규칙 안의 구성원으로서의 셀을 표지하는 개인의 내러티브를 영상화한다. 


신이피, 〈희연한 잠〉, 2017, FHD 싱글채널 영상, 9분 5초. 《희연한 잠》 전시 전경(송은아트큐브, 2018) © 송은

신이피의 작업은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의 인간을 인식하고, 그러한 개개인의 이야기를 관찰자적 시각으로 바라보는 일에서 출발한다. 작가는 사회 안에서 보이지 않는 관계들에 관심을 갖고, 무한한 관계 속에 존재하는 인간의 행위를 미시적으로 분석하여 영상 기반의 작업 형태로 표현해 왔다.
 
이러한 작업에서 작가는 인간의 행위를 단순히 개인적 차원이 아닌 사회적 차원에서 발생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일상적으로 친숙한 현상들을 반복, 패턴화해 이를 새롭게 바라본다.
 
예를 들어, 2018년 송은아트큐브에서 열린 개인전 《희연한 잠》에서 신이피는 생명체의 피할 수 없는 엔트로피(entropy)인 신체의 죽음과 우울이라는 감정의 근원을 미시적 차원에서부터 확장시킴으로써 현대 도시사의 고립된 인간상을 논하고자 했다.


신이피, 〈보이지 않는 차원〉, 2017, FHD 싱글채널 영상, 4분 27초 © 신이피

노르웨이 오슬로의 공동묘지와 북극 설원의 고요하고 불안한 이미지를 담은 〈희연한 잠〉(2017)은 사회적 제도 안에서의 고립과 그로 인한 불안, 죽음에 대한 사유를 담고 있다. 인간은 죽음에 대한 공포감과 두려움으로 이를 외면하려 하지만 작가는 영상 속 물리적인 죽음을 매개로 내면에 자리잡은 우울하고도 슬픈 감정의 근원을 직시하고자 한다.
 
신체의 움직임을 담은 영상 〈보이지 않는 차원〉(2017)은 도시의 인구 과밀화로 인해 사회적 관계망 안에서 파생될 수 있는 갈등, 범죄, 혼란 등의 부정적인 부분을 작가 고유의 화법으로 표현한다.  


신이피, 〈XY-SA 0900〉, 2015, 영상설치, 자작나무, 배양접시, 디지털 프레임 유리. 22x15x13cm 《희연한 잠》 전시 전경(송은아트큐브, 2018) © 송은

마치 과학 실험실을 연상시키는 〈XY-SA 0900〉(2015)은 세포를 배양하는데 사용하는 샬레와 유리 슬라이드 안에 무용가의 움직임을 담은 이미지를 투사한다. 인체의 움직임을 번식하는 세포와 같이 묘사하며 사회적 관계에서의 감정 변화와 심리를 투영한다.
 
또한 삼각관계를 관찰한 드로잉 〈관찰일지〉(2016)는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인간 관계 속에 자연스레 형성되는 갈등과 그로 인한 소외감, 긴장감을 드러낸다.
 
이처럼 신이피는 도시 문명 안에서 고립된 인간사와 그로 인해 생성되는 수많은 관계에 대한 관심을 바탕으로 스스로 실험자 혹은 타인을 지켜보는 관찰자가 되어 이를 채집하고 양자간 관계를 파헤치는 방식으로, 문명화된 사회로 인해 야기되는 불안의 요소를 파악하고자 했다. 


《다리의 감정》 전시 전경(SeMA창고, 2019) © 신이피

이어서 열린 개인전 《다리의 감정》(SeMA창고, 2019)은 인간은 어떻게 세계와 관계를 맺는가에 대한 작가의 성찰을 집약하여 보여준다.
 
전시는 독일 프랑크푸르트 젠켄베르크 자연사박물관을 배경으로 제작된 영상 〈다리의 감정〉(2018)과 2016년 전소된 뉴델리 자연사박물관을 리서치하여 제작된 영상 〈반향정위〉(2018), 두 작업의 배경이 된 각 박물관에 대한 리서치 자료와 오브제로 구성된 아카이브 섹션, 그리고 모눈종이에 그려진 약 40개의 드로잉이 설치된 〈관찰일지〉 섹션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다리의 감정》 전시 전경(SeMA창고, 2019) © 신이피

먼저 〈다리의 감정〉은 자연사를 수집하고 보존하며 기록해온 역사적·감정적 의미와 식민과 학살의 역사를 기록하는 방식이 어떻게 교차하는지에 대한 질문에서 출발한다. 영상은 흐릿한 초점으로 바라본 벌떼의 움직임에서 시작해, 점차 화자 자신의 내면에 자리한 감정과 사유를 유기적으로 드러낸다.
 
피실험체인 벌의 움직임과 정지된 모습을 응시하는 화자의 시선은 현미경 너머 드러나는 곤충의 형이하학적 형태에 머물지 않고, 사회를 구성하는 인간 군상에 대한 관찰로 확장된다.
 
이러한 시선은 자연사박물관으로 이동하고, 박제된 동물과 곤충이 늘어서 있는 전시장에서 사람들은 유리 너머에 놓인 다양한 개체의 주검을 관람한다. 이어 곤충 표본을 제작하는 사람의 손이 클로즈업되는데, 고요하고 평온하게 움직이는 인간의 손은 생명을 거두고 보존하는 거대한 초월적 존재의 모습처럼 보인다.


신이피, 〈다리의 감정〉, 2018, FHD 싱글채널 영상, 9분 © 신이피

이후 나치 수용소의 담벼락을 바라보는 화자의 시선은 ‘초월적 존재’의 불완전함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믿어온 인간에 대한 회의로 이어진다. 이러한 회의는 인간이 죽음과 역사 앞에서 취하는 태도에 대한 질문으로 확장된다.
 
보존은 죽은 대상을 남겨두는 행위인 동시에 생명을 유지하고 죽음을 이해하려는 인간의 시도이기도 하다. 작가는 이러한 보존의 의미를 유서 깊은 생물종과 역사적 유적지를 함께 바라보는 방식으로 확장하며, 무엇이 보존되고 기록되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무감각함과 무차별성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를 사유한다.
 
이처럼 작가는 역사, 정치, 과학의 문제를 서로 교차시키며, 박제된 동식물과 추모된 희생자들이 본래 각각 고유한 존재였음에도 기록되고 보존되는 과정에서 하나의 개체가 아닌 ‘더미’ 혹은 집단으로 다뤄지는 현상에 주목한다. 〈다리의 감정〉은 이러한 무차별적인 기록과 보존의 방식에 의문을 제기하며, 집단 속에서 개별적인 존재와 감정이 어떻게 지워지고 기억되는지를 되묻는다.


신이피, 〈반향정위〉, 2018, FHD 싱글채널 영상, 7분 12초 © 신이피

한편, 영상 〈반향정위〉의 제목은 박쥐나 돌고래와 같은 동물들이 주변 대상의 정보 등을 파악하기 위해 소리를 발생시켜 메아리를 듣는 기술을 의미한다. 작업의 배경인 뉴델리는 야생동물들이 도시의 일부처럼 서식하고 있는 곳이다. 특히 대낮에 날아다니는 박쥐들은 도시에 적응하기 위해 반향정위를 잃은 지 오래다.
 
신이피는 이것이 과연 퇴보인가 혹은 진화인가 하는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이를 뉴델리 자연사박물관이 사라진 사건이 현재의 사람들에게 만들어 놓은 보이지 않는 상실과 겹쳐 보며, 진화의 막다른 길에 이른 인간과 반향정위를 잃은 박쥐의 혼란이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점을 드러낸다.


신이피, 〈죽은 산의 냉철한 새#01〉, 2019, 4K 영상, 4분 © 신이피

이처럼 자연사박물관에 진열된 오브제들을 역사적 관점에서 짚어보는 시도를 반복해 온 신이피는 ‘죽은 산의 냉철한 새’(2019-2020) 연작에서 도시와 생태에 대한 리서치를 기반으로 현대사에서의 생명과 죽음에 관해 사유한다.
 
먼저 〈죽은 산의 냉철한 새#01〉(2019)는 2003년 신도시 계획의 일환으로 건설된 김포한강신도시의 이상과 실태를 도시의 생태에 적응하지 못하고 죽어간 새들에 비유하여 나타낸다.
 
영상은 마치 하늘을 나는 새의 시선으로 전체 풍경을 내려다보는 조감도와 같이 높은 고도에서 해당 지역을 조망하는 카메라의 앵글로 시작되며, 국립생물자원관 수장고의 새 박제 표본을 근접 촬영한 장면을 번갈아 가며 보여준다.


신이피, 〈죽은 산의 냉철한 새#02〉, 2020, 4K 싱글채널 영상, 8분 40초 © 신이피

두 번째 영상 〈죽은 산의 냉철한 새 #02〉(2020)는 행정명령으로 도살된 돼지들의 예비 살처분 기준과 살처분 매립지에 관한 리서치를 기반으로 한 작업이다.
 
화면에 느린 속도로 나타났다 사라지는 자막은 명쾌한 내러티브라기보다는 추상적인 표현의 시적 문구들에 가깝다. 작가의 지난 작업들에서도 자주 사용되었던 이러한 텍스트는 서술의 주체를 모호하게 만들고, 젠더, 외모, 직업 등에서 벗어난 외부시각을 유지하는 실험실의 주인이자 관찰자인 작가의 존재가 투영된 가상의 화자로 기능하게 한다.
 
영상 후반부에 등장하는 돼지뼈와 잔해는 실제 살처분 매립지에서 발굴된 것으로, 영상과 함께 전시장에 설치되었다 .


신이피, 〈죽은 산의 냉철한 새#03〉, 2020, 4K 싱글채널 영상, 8분 40초 © 신이피

세 번째 영상 〈죽은 산의 냉철한 새 #03〉(2020)는 아프리카돼지열병(ASF)으로 인한 돼지 사체 매립지를 영상 이미지로 제시한다. 이와 함께 희생된 돼지들의 액침표본을 만들어 진열한다. 신이피는 저장조에 매몰되어 있다가 발버둥치며 솟아’오르려’ 하는 돼지들을 영상에 담았다.
 
그리고 가축이라는 이유로 표본 제작해 보존 가치를 지니지도 않은 돼지를 자체 표본화하여 전시장에 ‘올린다’. 이는 이미 직립하는 인간이 써내려 가는 역사의 가치에 도전해 보려는 작가의 질문이기도 하다. 사회적으로 저급하게 취급되는 동물의 움직임과 영혼에 수직성을 부여하여, 돼지의 생명권과 수도권 매립지의 환경 문제를 가시화해 보려는 것이다.


《싱글 정뜨르 피머》 전시 전경(엘리펀트 스페이스, 2022) © 엘리펀트 스페이스

역사적 사건과 유해발굴현장, 개별적 존재로서의 생명의 존엄성에 대한 작업은 2022년 개인전 《싱글 정뜨르 피머》에서 더욱 확장된다. 전시는 결핍과 외로움을 넘어선 차별과 학살 그리고 대규모 외상사건(mass traumaevents)에 노출된 수많은 개인들을 화자로 은유적 내러티브를 갖는 작업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전시 제목이자 작업의 제목인 ‘싱글 정뜨르 피머(Single Gentre Femur)’에서 ‘싱글’은 하나, 단일, 개별 존재를 의미한다. ‘정뜨르(Gentre)’는 1940년대 초 현재의 제주공항 일대를 일컫는 지명이며, 이를 entry의 중세식 표기에서 착안하여 소리 나는 대로 적어본 것으로, gentle(온화한, 품위 있는)을 연상시키도록 의도한 표현이다.
 
‘피머(Femur)’는 대퇴골의 의학적 영문 명칭으로 인체에서 가장 크고 단단한 뼈로, 유해 발굴 과정에서도 비교적 온전한 상태로 발견되는 경우가 많으며, 법의인류학에서는 성별과 연령을 추정하는 중요한 기준이 된다.


《싱글 정뜨르 피머》 전시 전경(엘리펀트 스페이스, 2022) © 엘리펀트 스페이스

‘싱글 정뜨르 파머’ 연작은 2020년부터 유해 발굴 작업에 참여하며 한국 근현대사의 학살과 그 기록을 둘러싼 관점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에서 시작되었다. 인체, 생물, 생명, 보존, 고고학을 비롯해 기록과 분류학으로 확장된 연구를 바탕으로 전개된 작업들이다.
 
이 연작의 첫 번째 영상인 〈싱글 정뜨르 파머 vol. 1〉(2022)은 제주에서 8개월간 체류하며 제작한 작업으로, 제주 4·3과 깊이 연관된 장소들을 촬영한 영상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현재도 유해 발굴이 진행되고 있는 대전의 발굴 현장에서 기록한 장면 일부를 포함한다.
 
제주 4·3 당시 정치범으로 분류되어 대전형무소로 이송된 희생자들은 한국전쟁 전후에 집단 학살되었고, 그들의 유해는 오늘날까지도 발굴되고 있다. 작가는 발굴되지 않은 시간과 발굴되는 현재, 지워진 이름과 다시 드러나는 존재가 하나의 서사 안에서 교차하며, 사건이 과거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현재의 시간임을 보여주고자 한다.


신이피, 〈싱글 정뜨르 피머 vol.2〉, 2022, 4K 싱글채널 영상, 8분 26초 © 신이피

〈싱글 정뜨르 피머 vol.2〉(2022)는 환원될 수 없는 유한성에 대한 사유들과 ‘죽은 자’의 존재성에 관한 의문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럼에도 연속성을 이어가는 인간 사회의 모습은 일상적이며,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들마저 ‘평범한 것’으로 느껴지게 한다. 작품 속 무뎌진 선악의 경계를 은유하는 글들은 국가적 재난에 노출되었던 수많은 개인이 경험했던 비현실감을 반영하고자 한 시도이다.
 
〈싱글 정뜨르 피머 vol.3〉(2022)은 웹사이트로 공개되는 인터뷰 자료들로 구성되어 있다.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공동조사단장,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정책보좌관, 조사관 등 현재진형형으로서의 역사기록자들이다.


신이피, 〈원내의일점과원외의일점을결부한직선〉, 2018, FHD 싱글채널 영상, 3분 24초 © 신이피

이렇듯 신이피는 거대한 사회 구조 안에서의 개인, 그리고 비인간 개체들의 관계에 대해 관찰하고 그 안에서 수집한 의문점들을 작업의 형태로 제시한다. 미시적인 관점에서 관계들을 고찰한 다음, 이를 예술의 언어로 시각화 하는 과정은, 작가 스스로 세계와 관계를 맺는 방식이기도 하다.
 
이러한 관계 맺음으로서의 신이피의 작업은 관객으로 하여금 지금-여기에 축적된 역사와 기억, 존재의 흔적들을 바탕으로 현재 ‘나’라는 개별 존재와 주변의 수많은 개별자들 사이의 관계성을 새롭게 사유하게 만든다.

"나의 작업은 종의 진화, 생명의 역사에 관한 단편적인 서사를 담고 있으며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개인을 다수이자 하나의 ‘개인’인 화자로 표현하는 내러티브를 가진 작업들로 구성된다." (신이피, 작가 노트)


신이피 작가. 사진: 이재욱. © 신이피

신이피는 유럽연합고등영상원(École européenne supérieure de l’image) 에서 학사 및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최근 개인전으로는 《싱글 정뜨르 피머》(김포아트홀, 김포, 2024), 《싱글 정뜨르 피머》(엘리펀트 스페이스, 서울, 2022), 《죽은 산의 냉철한 새》(온수공간, 서울, 2020), 《다리의 감정》(SeMA창고, 서울, 2019) 등이 있다.
 
또한 작가는 《서로를 모르지만 같은 밤을 지난다》(영등포아트스퀘어, 서울, 2026), 《송은 x 언박싱 프로젝트: 생성적 형상들》(송은, 서울, 2026), 《2025 부산현대미술관 시네미디어_영화 이후》(부산현대미술관, 2025-2026), 《지나친 몸짓들: 메아리를 깨워 울려 퍼지게 하느냐》(Hall 1, 서울, 2022), 《제20회 송은미술대상전》(송은, 서울, 2020) 등의 단체전에 참여했다.
 
신이피는 2021년 제20회 송은미술대상의 우수상을 수상하였으며, 그의 작품은 서울시립미술관, 송은문화재단, 국립현대미술관 정부미술은행 등에 소장되어 있다.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