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훈(b. 1986)은 가상의 디지털 공간에서 3D 시뮬레이션을 주된 매체로 활용하는 디지털 조각가이자, 애니메이터, 시뮬레이터다. 가상의 공간 안에 쌓아 올린 그의 조각들은 사회, 경제, 정치, 문화 등 현실의 문제를 드러내며 인류의 끝없는 욕망이 지구 생태계에 미치는 영향력을 성찰하게 한다.


박재훈, 〈총체적 난국〉, 2023, LED 디스플레이에 3D 시뮬레이션 비디오, 61x61x2cm, 2분 44초. © 박재훈

박재훈은 포인트 클라우드(point cloud)와 사진측량기술(photogrammetry)을 활용해 현실의 사물을 3D 시뮬레이션의 형태로 변환한다. 직접 사물의 3D 데이터를 제작하는 한편, 게임 개발자들이 제작한 레디메이드(ready-made) 데이터를 수집해 가공하고 분해한 뒤 다시 조합하며, 이를 가상의 디지털 공간에 배치한다.
 
이렇게 구축된 조각들은 현실의 구조와 법칙으로는 구현하기 어려운 하나의 무대를 만들어낸다. 현실 세계의 풍경을 연상시키면서도 익숙한 질서에서 벗어난 형태와 인공적인 감각이 뒤섞여, 어딘가 낯설고 기이한 공간을 형성한다.


《실시간 연옥》 전시 전경(대안공간 루프, 2021) © 대안공간 루프

박재훈의 작업은 리서치에서 출발한다. 역사, 과학, 문명, 인류학, 문예학을 넘나들며 실제 발생한 사건, 과학적 가설 기계 장치, 문화적 표상 등 세계를 구성하는 크고 작은 사물과 현상들에 대해 살펴본다.
 
2021년 대안공간 루프에서 열린 개인전 《실시간 연옥》에서 작가는 거대 자본주의 아래 환희와 절망이 교차하는 동시대의 기이한 현상을 짚어낸다.
 
박재훈은 전쟁과 감염병, 빈곤과 같은 재난이 일어나는 동시에, 다른 한편에서는 소비와 자본의 축적으로 혈안이 되어 있는 동시대 현실을 ‘실시간 연옥’으로 칭한다. 그는 자본주의를 종교에 비유하며 인간의 끝없는 욕망과 그로 인해 발생하는 재앙을 지옥과 종말 이후의 풍경에 연결한다.


박재훈, 〈사건의 지평〉, 2021, 3D 애니메이션, 10분 47초. 《실시간 연옥》 전시 전경(대안공간 루프, 2021) © 대안공간 루프

특정 종교에서 ‘연옥’은 천국과 지옥의 중간 지점으로, 그곳에서는 천국에 가기 위해 불로 몸을 단련하고 정화 받기를 희망하는 이들로 가득 차 있다. 작가는 물질과 자본이 종교 이상의 가치를 가지는 거대 자본주의에서 천국으로 향하는 입장권은 마치 명품 매장의 오픈런에 성공한 대기표와 같다고 보았다.
 
이 전시에서 박재훈은 스스로 조물주가 되어 3차원 컴퓨터 그래픽을 활용해 가상의 세상을 창조하였다. 그가 창조한 세상에는 인간이 등장하지 않는 대신 인간의 욕망이 투사되어 있는 사물들만 등장한다. 인간의 이데올로기가 가득 찬 사물들은 서로 엉기고 설켜 인간의 세상을 기록한다.


박재훈, 〈회전문〉, 2019, 3D 애니메이션, 4분 38초 《실시간 연옥》 전시 전경(대안공간 루프, 2021) © 대안공간 루프

이러한 구성은 히에로니무스 보쉬(Hieronymus Bosch)의 지옥도에 등장하는 인간을 괴롭히는 고문 도구와 특유의 기괴함에서 영감을 얻었다. 영상 속 사물들은 기능이 전도되어 기묘하고 적나라하게, 인간이 없는 인간의 삶을 보여준다.
 
박재훈은 가상의 디지털 공간에서 조작된 현실을 재현하고, 평범한 사물이 가진 자본주의 알레고리로 현실의 민낯을 드러낸다. 호화로운 자본주의의 사물들은 초자연적인 현상과 결합되어 지옥같이 황량한 공간으로 연출된다.


박재훈, 〈대제단〉, 2020, 3D 애니메이션, 8분 © 대안공간 루프

예를 들어, 3D 애니메이션 〈대제단〉(2020)은 백화점 1층 화장품 코너의 진열장을 실측하여 3D 모델링 한 작업으로, 판매를 위해 전략적으로 설계된 디스플레이 장치와 르네상스 양식의 트랑시(Tranci)를 종교적 제단으로 연출하여 인간의 허영심을 드러낸다.
 
〈회전문〉(2019)은 빙글빙글 도는 회전문에 갇힌 채 부딪히고 나뒹구는 마네킹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는 헤이그의 드바이엔코프(De Bijenkorf) 백화점 회전문을 측량한 3D 모델링 작업으로, 그 안의 플라스틱 마네킹은 문의 움직임, 속도, 무게 등 물리적으로 정확히 계산되어 시뮬레이션된 과정을 보여준다.
 
쇼핑센터, 백화점 등에 설치된 회전문은 소비를 위한 입장의 첫 관문이 된다. 계속해서 돌아가는 회전문 안에 갇혀 있는 마네킹들의 모습은 하이퍼 자본주의가 가진 끝없는 욕망과 폭력성을 은유한다.


박재훈, 〈과열된 풍차〉, 2020, 3D 애니메이션, 루프 © 박재훈

한편, 영상 설치 작업 〈사건의 지평〉(2021)은 전쟁, 재난으로 폐허가 된 지구의 곳곳의 이미지를 디지털 기술로 재현한다. 가장 원시적인 자연인 돌, 전쟁으로 폐허가 된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의 건물, 후쿠시마의 원자력 발전소, 세른(CERN)의 거대 입자가속기(LHC), 환희를 기념하는 콘페티(Confetti) 등 5개의 시퀀스로 구성된 영상은 실제로 벌어진 비극의 현장을 가상의 공간으로 연출한다.
 
포토그램메트리, 포인트 클라우드 등의 최첨단 방식으로 재현된 현장은 마치 사건의 지평선처럼 예측할 수 없는 상상적 영토가 된다.
 
〈과열된 풍차〉(2020) 영상에는 불에 탄 풍차가 소리 없이 계속해서 돌아간다. 네덜란드를 대표하는 풍차는 대항해시대 식민지 건설의 초석이 된 본래의 기능과 역사는 숨겨진 채 아름다운 문화유산이 된다. 작가는 가려진 역사적 맥락과 과열된 자본주의의 모습을 불에 탄 채 끊임없이 돌아가는 풍차에 비유한다.


박재훈, 〈밤을 위한 제의〉, 2021, 3D 애니메이션, 11분 15초. © 박재훈

〈밤을 위한 제의〉(2021)에는 가톨릭 성당의 향로, 중동의 카펫, 의료용 호스, 방송용 전기 케이블, 쇠사슬 등이 등장한다. 반짝이는 향로에는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폭격을 중계하는 BBC 보도가 반사된다.
 
한편 〈경계 위에서〉(2020)는 판문점 경계석 위에서 남북한 정상이 마주하는 장면을 출발점으로 과거와 근미래의 풍경을 펼쳐낸다. 이념적 대립으로 분단된 한반도를 배경으로, 전쟁의 흔적과 국가 폭력의 잔해를 품은 다양한 사물들이 마치 집단적 외상의 흔적처럼 빠르게 스쳐 지나간다.


《실시간 연옥》 전시 전경(대안공간 루프, 2021) © 박재훈

이렇듯 박재훈의 작업에서 사물들은 인간이 만들어낸 동시대 욕망의 총체로서 하이퍼 자본주의 아래 모든 질서가 종속되고 재편되는 구조를 극명하게 드러낸다. 작가는 사물을 조합한 무대장치를 스펙타클의 결정체로 만들어 자본주의적 환희의 순간을 연출하는 한편, 인간의 욕망으로 인해 파괴된 종말론적 배경을 병치함으로써 자본주의가 초래하는 파멸과 비극을 암시한다.


《파생 풍경》 전시 전경(성곡미술관, 2023) © 박재훈

2023년 성곡미술관에서 열린 개인전 《파생 풍경》은 이러한 작업의 연장선상에서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파생 풍경을 기록하며, 인류의 욕망이 향하는 곳은 어디인지를 질문한다.
 
그의 작품에는 일론 머스크의 스타링크 위성이나 물류대란을 상징 하는 화물 컨테이너, 폭발한 러시아와 독일을 잇는 가스 송유관, 핵폭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해 붕괴한 건물의 잔해들까지 세계의 사회, 경제, 정치, 문화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일련의 사건들과 이를 상징하는 사물들이 화면 속 거대한 제단을 이룬다.
 
이것은 또한 미술사의 풍부한 상징들로 둘러싸여 있는데, 작가는 작품 여기저기에 바니타스(vanitas) 정물화에서 가져온 도상의 상징과 은유를 흩뿌려 놓고, 이는 한데 모여 기묘한 무대 장치를 구축한다. 화면 넓게 퍼진 내러티브는 마치 동시대를 반으로 갈라 자른 듯, 자본주의라는 이데올로기의 숨 막히는 횡단면을 드러낸다.


박재훈, 〈거룩한 묘시〉, 2022, 3D 시뮬레이션 비디오, 6분 7초. © 박재훈

예를 들어, 〈거룩한 묘시〉(2022)는 전쟁과 재난의 상황을 가상 공간에 재현함으로써 고속도로를 질주하듯 파국으로 내달리는 오늘날의 모습을 담은 영상이다. 작업의 출발점이 된 것은 우크라이나에서 미사일 공격을 받아 붕괴된 건물의 3D 스캔 데이터로, 영상 속에서 무수한 점의 형태로 나타난다.
 
이 외에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중 폭파된 노드스트림 가스 파이프 라인, 기름통, 오일펌프, 경찰 보호 장비와 같은 사물이 등장해 전쟁과 에너지 위기, 초인플레이션 등 동시대 인류가 마주하고 있는 군사·정치적 위험과 자본주의 체제하의 통제할 수 없는 문제들을 암시한다.
 
작가는 빠르게 성장하지만, 종말을 향해 가는 듯한 현 세계를 고속도로에 비유한다. 고속도로의 기반 시설이 부유하는 이 영상은 폭발이 끊이지 않는 흰 공간을 주 무대로 삼는데, 신전 기둥이 둘러싸는 화면은 희생제의가 벌어지는 제단처럼 보이고, 종반부에 이르러 기괴하게 왜곡되어 가는 화면은 현상과 진실을 명징하게 바라보는 것이 어려워진 현시대를 은유한다.


박재훈, 〈빙하를 위한 제의〉, 2022, 3D 시뮬레이션 비디오, 6분 7초. © 박재훈

한편, 〈빙하를 위한 제의〉(2022)는 세상에 남은 마지막 빙하’라는 소설적인 소재로 지구온난화 문제를 다루고 있는 영상이다. 이 작업은 아이슬란드의 크리스탈 해변을 여행하던 중, 수 킬로미터의 해변에서 파도에 떠밀려 온 빙하의 잔해가 바닷물과 만나 태양빛에 화려하게 반짝이지만 쓸쓸한 풍경을 보았던 작가의 경험에서 비롯되었다.
 
그는 녹아내리기 전의 빙하로부터 3D 스캐닝 데이터를 얻어 빙하를 디지털 공간으로 이주시키고, 그 속에 들어 있었을 유기물의 움직임을 흰색, 녹색 입자로 형상화하였다. 실제로는 녹아 없어졌지만, 디지털 공간에서 영원히 살아남게 된 빙하는 ‘세상 끝의 빙하’인 것이다.
 
〈빙하를 위한 제의〉에는 마지막으로 남은 빙하를 지키려는 듯 산업 건축 재료, 출입 금지 라인, 꼬마전구가 빙하를 둘러싸고 있다. 작가는 재난을 극복하려는 인간의 허망한 노력을 빙하를 지키는 허술한 제단에 빗댐으로써 사라져가는 자연을 붙잡을 수 없다는 안타까움과 위태로운 지구의 미래를 암시한다.


《폴리곤의 순례자들》 전시 전경(WWNN, 2026) © WWNN

나아가, 박재훈은 최근의 전시 《폴리곤의 순례자들》(WWNN, 2026)에서 점군(point cloud)과 폴리곤(polygon), 픽셀과 복셀, 벡터와 좌표로 구성된 새로운 우주를 통해 방향을 상실한 채 이동하는 동시대 주체의 모습을 탐구하고자 했다.
 
박재훈의 작업에서 가상공간은 무한히 이어지는 격자와 좌표로 이루어져 있지만, 이 공간을 구성하는 폴리곤은 동시에 내부와 외부를 나누며 단절을 만들어낸다. 따라서 연결된 것처럼 보이는 디지털 공간은 오히려 분절과 소외를 끊임없이 만들어내며, 그 안을 이동하는 ‘순례자’는 길을 잃은 존재라기보다 애초에 명확한 목적지나 경로가 존재하지 않는 세계를 떠도는 존재로 나타난다.


《폴리곤의 순례자들》 전시 전경(WWNN, 2026) © WWNN

전시의 중심에는 절대좌표계의 원점이 놓인다. 이론적으로는 언제나 공간의 중심에 있지만 실제로는 접근할 수 없는 이 지점은 순례자들이 끊임없이 향하는 목표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들의 움직임은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한 진보의 과정이 아니라, 욕망에 의해 계속해서 이동하고 지연되는 과정에 가깝다. 작가는 이를 통해 디지털 공간에서의 이동과 인간의 욕망이 지닌 끝없는 반복과 미완의 상태를 보여준다.
 
이러한 가상공간 속에서 박재훈은 순례자와 건축물, 기계와 같은 다양한 조각적 형상을 만들어낸다. 인터페이스와 데이터를 통해 만들어진 이 조형물들은 완성된 형태로 고정되지 않고 복제와 변형을 거듭하며 새로운 형태로 분기된다.


《폴리곤의 순례자들》 전시 전경(WWNN, 2026) © WWNN

전시장에 놓인 좌표축과 방향 지시 장치 역시 공간을 안내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오히려 우리가 이미 방향과 중심을 잃어버린 세계에 놓여 있음을 드러낸다. 여기에 복도와 문, 빛으로 구성된 공간은 현재의 순간조차 명확하게 붙잡을 수 없는 비선형적인 시간의 감각을 만들어낸다.
 
결국 《폴리곤의 순례자들》은 디지털 기술을 이용해 가상의 세계를 재현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존재 조건을 탐구한다.
 
도달할 수 없는 중심을 향해 계속 움직이지만 끝내 목적지에 닿지 못하는 순례자의 모습은 완성이나 도착보다 끊임없는 이동과 지연 속에서 살아가는 동시대인의 모습을 상징한다. 박재훈은 좌표, 데이터, 인터페이스로 구축된 가상공간을 통해 우리가 세계를 인식하고 존재하는 방식 자체를 되묻는다.


《폴리곤의 순례자들》 전시 전경(WWNN, 2026) © WWNN

이처럼 박재훈의 작업에서 가상의 세계는 더 이상 현실을 대체하는 공간이 아니라, 현실의 단면과 그 이면을 동시에 비추는 거울로 다뤄진다.
 
수학적 알고리즘에 따라 정교하게 계산된 가상의 물리 현상은 개연성 없이 병치된 사물들과 결합해 일상적인 공간을 초현실적인 풍경으로 변모시킨다. 그 안에 놓인 사물들은 종교적·자본주의적 알레고리로 기능하며, 이를 통해 박재훈은 인간의 욕망과 이 시대의 모습을 비추는 하나의 자화상을 제시한다.

"저에게 사물은 단순히 기능을 수행하는 도구를 넘어 하나의 기호 체계이자 언어입니다. 사물은 곧 인간을 비추는 거울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이 만든 사물은 대부분 인체와 비례적으로 관계를 맺고, 그 안에 인간적 운명과 문화적 맥락이 녹아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사물을 서로 조합하고 재맥락화함으로써 새로운 의미를 생성하려고 합니다." (박재훈, 노블레스 인터뷰 중)


박재훈 작가 © 노블레스

박재훈은 서울대학교 서양화과에서 학사, 석사과정을 마치고 헤이그왕립예술학교에서 Master Artistic Research 석사학위를 받았다. 최근 개인전으로는 《과열된 풍차》(Grote Kerk Alkmaar, 알크마르, 네덜란드, 2026), 《폴리곤의 순례자들》(WWNN, 서울, 2026), 《파생 풍경》(성곡미술관, 서울, 2023) 등이 있다.
 
또한 작가는 《Shifting Reality》(Bradwolff & Partners, 암스테르담, 2025), 《눈 홉뜨기: 미디어 파사드를 위한 제안》(대안공간 루프, 서울, 2024), 《미적감각(美的感覺)》(서울대학교미술관, 서울, 2024), 2023 베이징 비엔날레 《Earth Heat Flow: the Visitor Who Returns to Solar Time》(베이징, 2023), 《예술평화: 0시의 현재》(울산시립미술관, 울산, 2022) 등 다수의 단체전에 참여했다.
 
박재훈의 작품은 네덜란드 외무부, 네덜란드 왕실, Luc Tuymans & Carla Arocha 컬렉션, 울산시립미술관, LG 디스플레이, 현대모터그룹 등 다수의 기관에 소장되어 있다.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