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세준의 작업은 회화가
여전히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을 집요하게 이어간다. 사진과 디지털 이미지가 빠르게 생산되고
소비되는 시대에, 회화는 오히려 오래 머물고 반복해서 다시 볼 수 있는 매체가 될 수 있다. 작가의 화면은 한눈에 다 읽히지 않고, 부분과 전체가 서로 다른
속도로 작동한다. 멀리서 보면 하나의 추상적 풍경처럼 보이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작은 사물, 기억의 조각, 낯선 색면, 구체적인 이미지, 다른 작품에서 흘러온 흔적들이 차례로 발견된다. 이 점에서 그의 회화는 빠른 이미지 소비에 맞서는 느린 이미지의 구조를 가진다.
동시대의 많은 회화가
이미지의 파편성이나 디지털 환경의 시각성을 다루지만, 이세준의 독특함은 그것을 표면적인 스타일로 소비하지
않고 회화의 구조 자체로 만든다는 데 있다. 그는 온라인에서 수집한 이미지, 친구가 보내온 사진, 여행의 장면,
일상의 메시지, SF적 상상력, 종교와 신화, 미술사의 형식까지 모두 회화 안으로 끌어들이지만, 그것들을 하나의
명확한 서사로 정리하지 않는다. 대신 결론이 언제 날지 알 수 없는 귀납의 과정을 견고하게 구조화한다.
브릿지 작업에서 원본 이미지가 사라지고 흔적만 남는 일, 위치 변경
실험에서 하나의 작품이 관람 시점마다 다른 얼굴을 갖는 일, 〈안티 플롯_스페이스 아케이드〉가 하나의 작업이면서 동시에 전체를 한 번에 보여주지 않는 일은 모두 이러한 태도의 구체적
실현이다. 작가는 세계를 다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그
불가능성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 그리는 쪽을 택한다.
그의 작업은 2010년대의 확장형 다중 캔버스에서 2019년의 세계관 수집, 2020년 이후의 브릿지와 이동 가능한 회화, 2024년의 가능세계, 2025년의 이미지 간 공명과 풍경 개념으로 이어지며 꾸준히 변화해왔다. 그러나
이 변화는 매번 새로운 주제를 덧붙이는 방식이 아니라, 회화가 세계를 어떻게 담고, 연결하고, 다시 다르게 보이게 할 수 있는지를 반복해서 갱신하는
과정에 가깝다.
최근에 참여한 단체전들을
살펴보면, 《그날의 이야기》(벗이미술관, 2025)에서 그의 작업은 파편화된 기억과 비선형적 서사를 다루는 회화로 읽혔고, 《Euphoria》(미메시스
아트 뮤지엄, 2025)에서는 일상과 비일상, 중요하거나
의미 없는 이미지가 뒤섞인 캔버스의 퍼즐로 소개되었다.
《해변의 아인슈타인》(갤러리로윤, 2026)에서는 서로 다른 질서와 감각이 교차하는 경계의
순간과 연결되고, 《불의 씨앗》(시안미술관, 2026)에서는 재난 이후의 기억과 회복의 문제를 다루는 전시 맥락 안에 놓인다. 이처럼 그의 회화는 개인적 이미지의 축적에서 출발하지만, 전시의
맥락에 따라 기억, 경계, 재난, 공동체, 가능세계의 문제로 확장된다.
이세준은 특정한 형식에
고정되기보다, 이미지가 어떻게 연결되고 이동하며 다시 세계를 구성하는가를 더 넓은 전시 구조 안에서
실험해나갈 것으로 전망된다. 회화라는 오래된 매체가 아직 유효한지 묻는 작가에게, 그 답은 완결된 명제가 아니라 계속 갱신되는 화면과 전시의 구조 속에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