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박(b. 1987)은 대를 이어 물려받은 믿음에서 비롯된 인간의 소망을 추적하는 것을 작업의 화두로 삼는다. 그의 작업은 종교적 믿음에 대한 개인적인 서사에서 출발해 한국의 범신론적 기복에 대한 탐구로 이어지며, 믿음이 발생하는 조건과 그 경과를 다뤄왔다.


《뉴 앙데팡당:십자말풀이》 전시 전경(양평군립미술관, 2025) © 희박

희박은 믿음 그 자체보다 믿음과 소망이 어떻게 세대를 거쳐 이어졌으며, 어떠한 방식으로 우리의 일상에 스며들어 변형되어 왔는지 주목한다. 이는 인천 답동성당을 통해 가톨릭 신앙을 접한 작가의 외할머니와 어머니를 거쳐 자신에게 이어지는 믿음과 소망의 계보를 추적하는 일에서 출발했다.
 
이에 따라서, 희박은 작업을 통해 그의 어린 시절 내밀한 기억을 길어 올려 대대로 내려오는 열렬한 믿음과 소망의 실체를 드러내기를 시도한다.


희박, 〈오늘도 무사히〉, 2009, 캔버스에 아크릴 스텐실, 91x116.8cm © 희박

예를 들어, 그가 유년 시절에 보고 자란 ‘기도하는 소녀’의 이미지들은 초기 페인팅부터 현재 입체 작업에까지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기도하는 소녀’의 이미지는 흑발의 곱슬머리를 한 하얀 피부의 소녀가 기도하고 있는 모습으로, 한국의 기독교 또는 천주교 미술에서 번안되고 복제되었던 특정한 도상 중 하나이다.
 
이러한 도상은 기도하는 생활의 습관과 중요성을 환기하는 동시에 신의 은총을 받는 어린 양의 이미지로 여겨져 오며, 사진과 회화 등으로 제작되어 국내에 널리 퍼졌다고 한다.


희박, 〈믿음으로 작동하는 세계〉, 2022, 캔버스에 아크릴, 142x408cm © 희박

희박은 한국의 1970년대 이후 소위 ‘이발소 그림’이라 불리며 소규모 상점이나 가정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었던 ‘기도하는 소녀’ 이미지의 양식화된 키치 회화들을 참고하였다. 그 이미지들은 원래 조슈아 레이놀즈(Joshua Reynolds)의 〈어린 사무엘〉을 원본으로 한다. 원작에서는 기도하는 소년이지만, 한국으로 넘어와 소녀가 되었으며 대량생산에 따라 점점 더 조악한 모습으로 유통되었다.
 
거기서 희박은 이미지의 진위나 신성함을 발견하기보다는, 그 이미지가 한국 사회에서 유행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찾고자 했다. 기도하는 소녀의 도상을 통해 험난한 세상에서 ‘안위를 바라고 복을 기원하는’ 인간의 마음을 들여다 보고자 한 것이다.


《오늘도 무사히》 전시 전경(청주창작스튜디오, 2022) © 희박

희박은 이를 자신의 작업에 가져와 ‘안위의 아이콘’으로 명명하고, 스텐실 기법으로 반복해 찍어내거나 스킬자수로 꿰매는 수행적 노동 방식을 통해 소망의 계보를 잇고자 했다.
 
이와 함께, 희박은 일제강점기와 전쟁 속에서 소시민으로 살아온 작가의 외조모 최옥순의 삶과 노동의 궤적을 기록하는 작업을 이어왔다. 일을 찾아 일본으로 건너간 그의 외조모는 이방인으로서 삶을 살아왔으나 광복 이후 모국인 한국으로 돌아와서도 잊어버린 한국어로 인해 여전히 “말할 수 없는 삶”을 살아 왔다.


《아티스트 프롤로그 2022》 전시 전경(아트센터 예술의시간, 2022) © 희박

이러한 옥순의 삶을 담는 작업은 그가 옥순이라는 이름뿐 아니라 사이쿄쿠준, 춘자, 하루애라는 다른 이름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시작되었다. 인천의 답동성당에서 프랑스 신부에게 자라며 수녀가 되길 바랐던 소녀 춘자, 만주와 오사카의 공장에서 시대의 혼란을 겪어낸 청춘 사이쿄쿠준, 매주 성당에 나와 조용히 미사를 드리는 한 노인 옥순의 이야기가 희박의 작업에 담겨져 있다.


희박, 〈옥순의 조각〉, 2023, 단채널 영상, FHD, 컬러, 사운드, 21분 © 희박

희박은 이처럼 여러 이름을 가지고 삶을 살아온 자신의 외조모를 카메라 앞에 불러 세우고, 그가 남긴 삶의 흔적들을 여러 형태의 작업으로 담아내고자 했다. 이때 작가는 어떠한 메시지를 내포하는 가시화의 전략을 택하기보다 옥순의 모습과 삶의 흔적을 둥둥 떠다니는 기표처럼 모호한 상태로 남겨둔다.


희박, 〈옥순의 금줄〉, 2021, 명주실에 고추, 숯, 솔가지, 한지, 가변크기 © 희박

이를테면, 반짇고리와 도구, 재봉틀과 이불처럼 옥순이 생계를 위해 시작한 ‘바느질’과 연관된 물적인 실체를 나열하거나, 옥순이 남긴 명주실을 사용해 옥순으로부터 물려받은 손재주로 직접 금줄을 꼬거나 깨진 도자기 그릇을 이어 붙이는 등의 수작업을 행한다.
 
이러한 수행적 노동 방식을 통해 작가는 거대한 진실을 좇기보다 옥순의 삶의 단편들에서 어떠한 성실한 삶을 들여다 보고, 그 가운데 안온한 하루를 기도하는 소박한 마음을 확인한다.
 
옥순의 구술과 모습을 담은 다큐멘터리 영상 작업 〈옥순의 조각〉(2023) 또한 명료한 메시지를 담기보다 여러 개의 이름으로 살아온 옥순의 모습과 그의 일상적 노동을 묵묵히 관조의 시선으로 담아낼 뿐이다.


《썩지 않는 금은 없다》 전시 전경(인천아트플랫폼, 2025) © 희박

한편, 2025년 인천아트플랫폼에서 열린 개인전 《썩지 않는 금은 없다》에서 희박은 그간 영상, 평면, 입체, 설치 등으로 변주해 온 자신의 가족 이야기와 종교적 경험을 회화라는 매체를 통해 덜 서사적이면서도 더 강렬하고 심리적인 이미지로 풀어냈다.
 
특히, 비닐에 싸인 성모상을 그린 연작은 작가가 가톨릭 신앙 아래 성장하며 체화한 기억과 감정을 반영한다. 가부장적 권위가 부재한 상황에서 할머니의 정성, 기원, 영향력이 유년 시절을 지배했던 작가에게 성모상은 가장 찬란하면서도 무거운 도상이었다.
 
둘로 분할된 성모상 그림들은 자연광 아래 투명하게 재현되는 것이 아니라, 인위적인 색조로 다시 조각조각 분할되어 마치 다채로운 빛을 반사하는 유리 조각들을 다시 붙여 놓은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이러한 표현은 자신의 경험과 심상의 투사에 가까운 열띤 내적 반영의 색채를 보여준다.


희박, 〈마리아〉, 2025, 캔버스에 유채, 112.1x145.5cm © 희박

최근 제작된 회화 작업을 관통하는 또 다른 모티프는 양초다. 가령, 〈마리아〉(2025)는 성모 마리아상을 작가가 초로 본뜨는 과정에서 남겨진 이미지이다. 할머니가 돌아가시면서 지난해 작가는 한동안 성당에서 쓰고 남은 대림초와 생일 초를 모아 돌탑처럼 쌓거나(〈비는 마음〉(2024)) 다시 녹여 성상의 부분 신체들로 떠내기도 했다.
 
기원의 도구이면서 어떤 형상으로도 재탄생할 수 있고 어떤 형태로도 복제 가능한 밀랍의 변신은 영원함과 덧없음 둘 다를 모두 환기한다.


《Girlhood》 전시 전경(이음 1977, 2025) © 희박

나아가, 같은 해 열린 개인전 《Girlhood》을 통해 희박은 단순한 회상이나 신앙의 재현이 아닌 어쩌면 당연해서 대수롭지 않거나 무뎌진 유년의 기억을 복기해보며 작업의 근원의 된 이미지를 돌아보고자 했다.
 
그림 속에는 어린 시절 그에게 특별한 날이었던 영성체의 풍경과 표정들을 담고 있었다. 하얗고 깨끗한 흰 드레스 입고 성스러움을 부여하는 듯한 미사보를 쓴 아이들은 각자 천진한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작가는 이런 시절 이 엄격하고 정결한 체계 속에서 마치 담이 걸린 듯한 불편함이 존재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그리고 어지러이 펼쳐지는 풍경 안에서 영문을 모르는 존재들에게 부여되는 성스러움과 불편함, 경건함과 키치함이 공존했던 기억 속의 장면을 평면 위에 다시 새겨보았다.


《Girlhood》 전시 전경(이음 1977, 2025) © 희박

이러한 어린 시절의 한 장면은 그에게 있어서 가족의 염원으로 형성된 단편적이지만 지대한 영향을 미친 기억의 단면이다. 어린 시절의 그는 신앙의 주체이기보다 가족의 염원이 투사된 대리자였고, 종교적 이상 혹은 제도가 규정한 신앙적 삶의 모범에 부응하려 노력해야 했다.
 
이진실 미술비평가는 이러한 배경으로 인해 희박의 작업에서 나타나는 성상과 종교적 도상은 “중층 결정화된(multi-layered) 침전물들로서 서늘하면서도 뜨거운, 아주 기묘한 톤을 자아낸다”고 말한다.


《Girlhood》 전시 전경(이음 1977, 2025) © 희박

그리고 이러한 도상들은 “어떤 기호나 대상이라기보다 그녀 자신에게 들러붙어 있는 그 무엇, 난감하지만 소중한 것처럼 보이고 떼어낼 수 없을 것만 같은, 거울로 나를 비춰야만 비로소 간신히 볼 수 있는 그 무엇으로” 보이며, “작업 안에서 이를 비추는 과정은 기억의 투사, 고백, 혹은 성급한 회피나 열망으로 번져버린다”고 설명한다.


《옥순의 실》 전시 전경(시민청 소리갤러리, 2021) © 희박

이렇듯 희박은 그의 외조모 옥순에서 어머니,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로 이어지는 믿음과 소망의 계보를 추적하며, 다양한 매체의 작업을 통해 그 보이지 않는 실체를 풀어낸다.
 
또한 그는 유년 시절, 가톨릭이라는 외래 종교가 한국 사회에 자리 잡는 과정에서 유교 문화와 기복 신앙, 일상적 미신이 뒤섞이며 변형되어 가는 모습을 가까이에서 목격한 경험을 바탕으로, 한국적 정서가 스며들며 변주된 사례들을 수집하고, 그 안에서 발견되는 은유적 표현과 상징을 추출해 작업으로 풀어내고 있다.


희박, 〈옥순의 조각〉, 2023, 단채널 영상, FHD, 컬러, 사운드, 21분 © 희박

결국 희박의 작업은 인간의 마음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으로 이어진다. 이는 특정한 믿음과 소망의 구체적인 이미지에 머무르기보다, 안위를 바라고 복을 기원하는 인간 마음의 자연스러운 경향 자체에 주목하게 만든다.

"개항 이후 외래 종교가 한국에 정착하는 과정에서 유교와 기복, 전통문화가 스며들어 변형된 한국적 신앙의 정서에 관심을 두고, 할머니와 엄마, 엄마에서 나에게로 이어져 내려오는 열렬한 믿음, 소망의 실체를 추적하고 있다." (희박, 작가 노트)


희박 작가 © 인천아트플랫폼

희박은 경원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를 졸업했다. 개인전으로는 《Girlhood》(이음 1977, 인천, 2025), 《썩지 않는 금은 없다》(인천아트플랫폼, 인천, 2025), 《오늘도 무사히》(청주미술창작스튜디오, 청주, 2022), 《옥순의 실》(시민청 소리갤러리, 서울, 2021) 등이 있다.
 
또한 작가는 《부산, 커넥티드》(부산근현대미술관 금고미술관, 부산, 2025), 《뉴 앙데팡당: 십자말풀이》(양평군립미술관, 양평, 2025), 《드로잉 그로잉》(아트스페이스 보안, 서울, 2025), 《레이더: 세상을 감각하는 눈》(인천아트플랫폼, 인천, 2024), 《새끼-치기》(수건과 화환, 서울, 2023), 《아티스트 프롤로그 2022》(아트센터 예술의 시간, 서울, 2022) 등 다수의 단체전에 참여했다.
 
희박은 인천아트플랫폼(2024) 및 청주미술창작스튜디오(2022) 입주 작가로 활동하였으며, 그의 작품은 인천미술은행, 부평구청, 아트센터 예술의 시간에 소장되어 있다.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