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ejung Choi, Rehearsal, 2022 © Heejung Choi

최희정의 작업이 가진 일관성은 주제보다는 작업이 구축되는 구조적인 측면에 있다. 작가가 설계하는 작업의 구조는 이미 그 자체로 하나의 내용이자 주제이기도 하다. 최희정이 반복해서 구축하는 구조는 일종의 주름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주름은 겹겹이 겹쳐 접힌 형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정지한 상태로서의 주름이 아닌, 그의 4채널 비디오 작품 〈Hace Viento〉(2023)이 보여주는 아코디언처럼 끊임없이 펼쳐졌다가 다시 접히며 소리를 내는 그러한 운동으로 작동하는 구조이다.

영상을 주요 매체로 다루는 최희정에게 이 구조는 주로 다채널이라는 형식을 통해 구현된다. 여러 화면과 여러 방향에서의 소리로 구성되는 접힘과 펼침의 과정에서 이야기는 연속하기보단 점멸하고, 산포된 이미지와 소리는 여러 방향에서 관람객으로 향한다. 이 산재 속에서 관람객이 다시 이야기를 쌓아 올리기를 요청하는 것이 최희정 작업의 주요한 측면일 것이다.

〈갈라테아〉(2018)는 상하 두 개로 분할된 화면에서 시작한다. 분할된 한쪽은 흰색이, 다른 한쪽은 검은색이 차지하고 있다. 이 분할은 상하 반전됐다가 다시 좌우 분할로 나뉘고 또 반전된다. 오프닝 시퀀스가 끝난 후, 화면에는 손이 등장해 흰색 종이를 천천히 세심히 접는 모습을 보여준다. 접힌 종이는 기하학적 구조를 이루고, 구조를 가진 종이는 입체가 되고 쌓여 탑과 같은 조형물이 된다.

종이를 접던 손의 인물은 화면에 다시 등장해 탑 사이를 걸어 다니며 탑을 이루는 입체의 표면을 매만진다. 이내 카메라는 줌아웃하고, 공간을 채운 다양한 모양과 크기의 탑들 사이에서 인물은 가장 높은 탑 하나를 계속해서 마주 보고 있다. 작가는 이 작품이 “자신만의 조각 갈라테아를 찾아가는 과정”과 같다고 설명한다. 이를 이해해 보기 위해 잘 알려진 갈라테아에 관한 이야기를 돌아보자.

갈라테아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바다의 님프 중 하나의 이름이기도 하지만, 오비디우스(Ovidius)의 『변신 이야기(Metamorphoses)』에 실린 피그말리온이 만든 조각상의 이름이기도 하다. 키프로스 섬의 조각가인 피그말리온은 자신이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여성을 조각으로 만들기로 결정한다. 이 조각은 결국 완벽한 아름다움을 가지게 되고 피그말리온은 사람이 아닌 이 조각에 사랑을 느끼게 된다. 피그말리온은 사랑과 아름다움의 여신 아프로디테에게 이 조각상을 자기 아내로 삼을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피그말리온의 정성에 감동한 아프로디테는 조각상에 생명을 불어넣어 인간으로 만들어 준다. 피그말리온은 결국 갈라테아와 결혼하여 행복하게 산다.


Heejung Choi The opposite of love is abandonment, 2023 © Heejung Choi

강력한 기대가 조각마저 사람으로 바꾸었다는 모티프는 피그말리온 효과라는 우리에게도 익숙하게 알려진 심리학 개념의 기원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이야기가 품고 있는 예술론의 가장 기원적인 측면은 바로 이상적인 아름다움에의 추구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아름다움이 구현되었을 때 작품은 자기 자신의 생명을 얻어 예술가를 초과하는 독립적인 무언가가 된다. 〈갈라테아〉를 통해 최희정이 선언적으로 혹은 어떤 염원으로 보여주는 자기 자신의 이상적인 아름다움은 주름 잡힌 평면으로 구축된, 중심이 빈 구형의 입체물로 쌓아 올려진 기념비적 탑이다. 주름은 하나의 이상이다.

2채널 비디오 작업 〈구원의 번개〉(2022)에는 네 명의 등장인물이 차례로 등장한다. 처음에는 넓은 공간을 걸어 다니며 자기 팔목에 스스로 팔찌를 묶기를 시도하는 사람이 나타난다. 단순한 일임에도 이 인물은 팔찌의 고리를 채우는 데 계속해서 실패하고, 마치 영원히 바위를 굴리는 형벌을 받은 시지프스처럼 그 행위를 반복한다. 또 다른 인물은 팔짱을 끼고 바닥에 앉아 있는데, 역시나 계속해서 일어나기를 시도하지만 실패한다. 반짝이는 종이를 공중에 뿌리기를 반복하는 인물, 사다리를 오르기를 시도하지만 계속해서 실패하며 제자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인물이 뒤이어 등장한다.

화면은 처음엔 이들의 모습을 개별적으로 클로즈업하여 보여주다가 천천히 뒤로 물러나며 이들이 모두 한 공간에 있음을 보여주는데, 그 모습은 비로소, 마치 한 편의 부조리극의 장면처럼 보인다. 이 끊임없이 반복되는 행위들이 중첩되는 구조에 유일하게 외부자로 남은 건 작가 자신이다. 그런데 이 구성은 새로운 공간 속에서 다른 형태로 펼쳐질 수 있다. 네 명의 인물이 따로 개별의 디스플레이로 공간에 설치 작업으로서 구현될 때, 작가의 자리에 놓이게 되는 건 우리 관람객이 된다. 바로 그 가상적 공간에, 영원히 반복될 것만 같은 실패하는 인물들의 관계 속에 우리가 얽히고 그곳을 거닐게 될 때, 단지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이 아니게 될 때, 관람객은 무엇을 경험하게 될까?

〈오랜만에 내 그림자를 보았다〉(2024)는 다채널을 통해 주름의 구조를 완숙하게 구현하는 근작이다. 비행기에서 내려다본, 미묘하게 서로 다른 다섯 모습의 설산을 오프닝 시퀀스에서 보여준 뒤, 이어 영상에 나오는 것은 서로 다른 다섯 개의 이미지다. 가운데 화면에는 한 백인 여성이 확성기를 들고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말하는 영화 혹은 드라마의 한 장면이 나오고, 사운드는 이 화면에 맞춰 동기화되어 있다. 그 한쪽 옆의 화면은 검은색에 “정규직인 분까지 딱 열 명만 줄을 서세요”와 같은 자막만이 나온다. 이 대사는 가운데 화면에서 여성이 확성기로 말하는 내용과는 다른 내용이다. 다른 한쪽 옆의 화면은 비행기가 활주로에 착륙하는 장면을 보여주고, 다른 두 화면에서는 비행기에서 바라본 서로 다른 풍경을 보여준다.

다섯 개의 화면은 한눈에 지각하기 힘들고 또 서로 관련 없어 보이는 이미지들을 하나로 통합하여 인지하는 것에는 어려움이 뒤따른다. 이 지각 경험은 〈오랜만에 내 그림자를 보았다〉가 구조화하는 양식 중 하나다. 그러나 이 작업이 흩어진 이미지와 사운드로 분산적 경험만을 강조하는 것은 아니다. 이 작업을 이끌어 가는 중심된 내러티브는 회색 남자에게 그림자를 판 페터 슐레밀의 이야기를 담은 아델베르트 폰 샤미소(Adelbert von Chamisso)의 소설 『그림자를 판 사나이(Peter Schlemihls windersame Geschichte)』(1814)다. 슐레밀은 그림자를 팔고 무한한 부를 얻지만, 그림자가 없어지면서 사람들은 그를 두려워하거나 이상한 존재로 여기게 되고 정상적인 사회적 존재가 되지 못한다.

〈오랜만에 내 그림자를 보았다〉는 친구들, 일상적 도시 풍경, 디지털 이미지를 조작하는 모습, 할머니… 슐레밀 이야기와 관련 있어 보이기도 하고 아무런 관련이 없어 보이기도 한 푸티지들이 등장하고 사라진다. 이것들의 연결은 즉각적이지 않다. 〈오랜만에 내 그림자를 보았다〉의 마지막은 강가에서 카약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빠르게 지나가는 모습을 다섯 채널에서 순차적으로 보여준다. 두 번째 화면의 왼쪽에서 등장한 카약이 오른쪽으로 지나가 사라지면 세 번째 화면의 왼쪽에서 등장해 다시 오른쪽으로 나가 사라지는 것이다. 그렇게 카약이 다섯 화면을 통과하고 남는 것은 오랫동안 이어지는 물결의 파동이고, 화면은 이 물결을 한참 동안 보여준다. 시차 속에서 다른 형태로 출몰했던 화면의 파동은 천천히 같은 무늬를 이룬다. 이 시퀀스는 최희정 작업의 주름의 구조가 결국 어떤 방식으로, 어떤 시차를 두고 우리에게 불현듯 당도하는지에 대한 은유처럼 보인다.

『그림자를 판 사나이』의 마지막에, 회색 남자는 슐레밀에게 그림자를 돌려줄 테니 영혼을 팔라고 제안한다. 그러나 슐레밀은 이를 거부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방랑을 떠난다. 직접적이고 등가적인 교환이 아닌 방랑을 택하는 것, 슐레밀의 마지막 선택은 산재한 불확실성 속에서 어떤 경험이 구조화되길 기대하는 최희정 작업의 주름 구조와 유사한 모습이다.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