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동현은 한동안 작품의 수를 의도적으로 정해놓고 그림을 그리곤 했는데 -예를 들어, 마이클 잭슨의 싱글앨범 수에 맞춘
40개의 초상화, 미국의 맨해튼을 부수는 영화 10편을
그린 병풍형식의 산수화, 중국 화가 사혁(謝赫)이 제시한 육법(六法)을 근간으로 여섯
명의 협객을 그린 〈육협(六俠)〉(2015)
등- 이번 전시에서 선보이는 작품들은 이와는 달리 하나의 작업에 꼬리를 물고 다음 작업으로 연결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흘러내리고 퍼지고 번지는 먹이라는 -작가에게 다소
긴장감을 선사하는- 매체의 물성을 그대로 받아들여 하나의 인물로 간주하고 그려낸 〈Inky Ink〉를 시작으로 작가는 동양화의 여러 요소들을 가지고 인물의 성격이나 특징, 더
나아가 그가 가진 무공(武功) 혹은 이능력(異能力)으로 간주하여 하나의 인물 안에서 적극적인 실험을 시도한다. 메자닌층 제일 아래
부분에는 파도나 계곡물이 부딪히는 등 물을 표현하는 기법으로 그려진 〈Hide Tide〉를 중심으로 흑색의
물소인간 〈Black Mountain〉과 새우인간 〈Wild Shrimp〉가
위치한다.
양 옆에 두 작품은 대가들의 고유한 화법이나 그들이 주로 그리던 화재(畫材)를 재구성하여 화면에 펼쳐놓은 것으로 각각 중국화의 대가 리커란(李可染, 1907-1989)과 그의 스승 제백석(齐白石, 1860-1957)을
염두하며 진행된 작업이다. 안개나 구름을 표현하는 효과를 사용한 〈Gray
Mist〉, 인물화에 거의 사용하지 않는 평필(납작붓)로 그린 〈Flat Flow〉는 인물화의 양식을 빌려 산수화의 표현기법과 도구의
전환을 시각화한 작업들로 메자닌 측면에 설치되었다. 동양화의 기본으로 일컫는 사군자 역시 하나의 인물인 〈Gracious Four〉로 탈바꿈하였는데, 이는 사군자가 가지고 있는 의미보다는
각자의 모양에 더 집중한 형태로 메자닌의 가장 높은 곳에 자리 잡았다.
전시장 2층에 설치된 〈Linear Line〉과 〈Broken Splash〉는 동일한 밑그림이 사용된, 서로 마주보고 있는 거울상의 작품이다. 전자는 인물십팔묘(人物十八描)를 모두 적용하여 선으로만 묘사한 인물화이며, 후자는 먹을 깨뜨려 농담을 조절하여 그리는 파묵법과 물을 많이 섞어 윤곽선 없이 그리는 발묵법을 위주로 그려졌다. 탁본 기법 역시 〈Heelballer〉라는 인물을 통해 재탄생하게 되는데, 탁본에 사용된 물건들은 작가가 그림을 그릴 때 사용하는 먹, 자전, 접시 등의 도구들이다.
3층 초입에 위치한 작업들은 작가가 과거 문자도 작업에서부터 꾸준히 관심을 가지고
진행해온 글자와 그림의 관계에 대한 고찰을 드러내는 동시에 이번 전시와 작품들에 대한 제발(題跋)의 역할을 한다. 글자와 그림의 기원이 같고 본질적으로 동일하다고 보는 서화동체론(書畵同體論)과 서화동원론(書畵同源論)을 그래피티의 형식을 차용하여 쓰며 그린 〈The Origin〉, 문자가 추상화되는 과정을 포착하고 그것을 다시 인물화로서의 완전한 구상화로 전환한 〈Lady
Composition〉, 동양화에서 중요하게 여겨져 온 획(劃)에 대한 작가의 탐구와 함께 청초(靑初)의
화가인 석도(石濤)의 일획론(一劃論)을 떠올리게 하는 〈One Stroke〉, 동양화와
뗄 수 없는 관계인 표의문자로서의 한자에 특징을 살려 인체 각 부분에 해당하는 한자로 인물을 구성한 〈Ideo G〉
모두 작가의 글씨와 그림에 대한 실험을 시각화한 작업이다.
일획론은 흡사 무협지와 같이 “태고의 무법이 일획에 의해 유법으로 전환된다.”라는 문장으로 시작되는데, 여기에서 일획은 두 가지 의미로 해석된다. 그 첫 번째 의미는 작가가 붓으로
먹물을 찍어 화면에 첫 점을 대고 선을 긋는 순간이며, 두 번째는 문인화론(文人畵論)에서 말하는 마음속 생각을 표출한다는 뜻의 ‘사의(寫意)’나 마음으로 우려낸 그림이라는 ‘심화(心畵)’에 빗대어 보면 작가의 마음속에 품고 있는 단단한 주제의식이나 방법론으로도 보여진다.
3층 안쪽 전시장에는 이번 전시를 준비하면서 작가의 드로잉북 역할을 한 화첩과 그 일부가 아카이브 형태로 조명되는데, 주로 얼굴과 손을 다양한 방법으로 해석하고 실험한 손동현의 작업과정과 세계를 보다 심층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통로를
제공한다.
전시장의 마지막 공간에 들어서면 여섯 개의 화폭이 연결되어 이번 전시에서 가장
큰 규모의 그림으로 전시되는 〈Master Transmission〉이 자리잡고 있다. 이 작품은 지난 제15회 송은미술대상전 때 선보였던 ‘육협’ 연작 중 크기가 가장 작은 작품이자 현판의 역할을 했던 〈The Transmission〉(2015)의 확장판 문자도이다. 옛 그림의 모사를 통해 우수한 전통을 발전시킨다는 의미의 ‘전이모사(轉移模寫)’가 이전 작업에서는 ‘육법(六法)’이라는 한자로 형상화되었다면, 이번에는
인물화인 동시에 문자도로 그 실체를 드러낸다.
그 옆에는 동양화에서 산수화를 그릴 때 새까만 밤은 담묵으로
슬쩍 처리하고 앞부분에 위치한 산을 어둡게 표현하는 방법으로 그려진 〈Blackest Night〉이 자리
잡았는데, 밤의 산수를 표현하는 방법으로 까맣게 칠해진 배경 위에 그림의 주인공인 ‘가장 어두운 밤’이 밝은 형태로 부각된다. 전시공간
중간에 설치된 〈The Other Side〉는 서너 가지 종류의 먹을 사용하여 그리는 속도와 강도에 변화를
주며 작업한 것으로, 제목처럼 그림이 보이는 종이 뒷면에 인물을 그려 반대편으로 먹이 베어 나오는 효과를
활용하였고, 〈Dot Dot〉은 조형의 기본요소인 점, 선, 면의 시작점인 점으로 형체를 만들어 인물화의 양식을 빌려 회화의 요소를
시각화한 작업이다.
4층의 마지막 부분에는 산수화를 그릴 때 산과 돌의 입체감이나 양감, 질감, 명암 등을 나타내기 위해 표면을 처리할 때 사용되는 준법(皴法)들을 인물화의 형태로 바꾼 작업들이 자리 잡았다. 〈Ghost Face Cloud〉에는 풍화작용으로 침식된 산세를 표현하는 운두준(雲頭皴)과 암벽이나 토산의 표면을 그릴 때 사용하는 귀면준(鬼面皴) 등을 조합하였고, 〈High Fiber〉에는 구불거리는 실 같은 선들이 엮여있는 모습의 피마준(披麻皴), 연잎 줄기와 같이 생겨 산봉우리에 주로 사용되는 하엽준(荷葉皴), 앞의 두 개 준법과 유사하지만 선이 더 길고 복잡하게 엉켜있는 듯한 해색준(解索皴) 등을 사용하였다.
〈Axe Cut〉은
뾰족하고 험악한 바위의 표면이나 깎아지른 산의 입체감과 질감을 표현할 때 쓰는 부벽준(斧劈皴)에 관한 인물화로, 이 준법은 도끼로 찍거나 끌로 판 자국과 비슷하여 이런 이름을
가지게 되었는데, 준법의 영문명을 그대로 제목으로 사용하였다. 그림을
완성한 뒤 작품에 자신의 이름이나 날짜 등을 쓰고 도장을 찍는 낙관(落款)으로서의
인물화 〈Full Stop〉은 이번 전시와 작품들에 대한 작가의 마침표를 대신한다.
손동현은 이번 전시에서 표면적으로는 자신만의 무공을 뽐내는 협객들에 대한 인물화
연작을 선보이지만, 이 연작들의 작업과정이나 주제는 초상화보다는 산수화나 문인화에 더 가까워 보인다. 인물의 인격과 정신까지 묘사하는 전신사조의 의미보다는 산수를 표현하는 준법이나 대가들의 화법, 제발과 낙관에 이르는 역할을 부여 받은 인물화 연작은 전시장 안에서 어우러져 전시 전체가 한 폭의 산수화로 보여지기도
한다.
두 종류의 차 잎을 진주모양으로 둥글게 말아 몇 개월에 걸쳐 숙성시켜 만드는 중국의 차(茶) 이름인 《Jasmine Dragon
Phoenix Pearl》을 전시제목으로 내세운 작가는 자신의 것으로 체화(體化)하고 육화(肉化)해온 동아시아 회화의 체계와
주제, 요소들을 현재 시점으로 소환하여 그 가능성을 실험하고 조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