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ng Kyoungtack, Pens3, 2010 © Hong Kyoungtack

나는 번쩍이는 형광색 빛을 배경으로 십자가에 못 박혔거나 ‘권력, 타락 그리고 거짓말’이라는 문자들 틈에서 부활을 기다리는 그리스도이다. 또 나는 비의(秘儀)적 지식과 유혹하는 이미지의 숨은 창조자/통치자이고, 고급예술의 정련된 문법과 대중문화의 일회적 취향을 디제잉(Djing)하는 지휘자이다. 그러나 동시에 나는 이 모든 역할이 내가 구현한 상상의 이미지 차원에서 ‘가상적으로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화가이다.

위 문단은 홍경택의 그림들이 때로는 명시적으로, 때로는 은밀히 제시하는 것으로 여길만한 예술가 주체를 묘사해 본 것이다.

홍경택이 미술계를 넘어 대중 매체 및 일반인들의 관심 영역에 급부상한 계기는, 지난 2007년 5월 홍콩 크리스티 경매에서 〈Pens 1〉이라는 그림이 놀라운 낙찰가로 팔려서이다. 이 당시 홍경택과 그의 작품에 대해 한국 사회가 보인 비정상적일 정도의 관심이 다분히 ‘돈’과 관련 있었다는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러한 현상은 정작 홍경택의 미술을 우리가 미적으로든 지적으로든 향유할 기회를 위축시켰으며, 동시에 그 미술이 정당하게 비평될 수 있는 순간을 지연시킨 측면이 없지 않다. 예술작품이 곧 시장의 상품으로 환원될 수 없는 한, 작품을 경제적 측면에서만 선호하거나 가치 평가하는 것은 불충분하고 문제적이다.

우리 중 혹자는 홍경택의 미술을 그림 값에 정향시켜 논하는 데 만족하며, 이 젊은 화가를 행운을 거머쥔 ‘미술계 반짝 스타’ 정도로 간주하려는 것 같다. 그러나 사실 사람들의 흥미를 돋운 홍경택의 ‘연필’ 시리즈 그림은 작가가 대학 4학년 때 시작한 그림을 수년에 걸쳐 완성한 작품들이다. 그리고 이 작가는 1995년 경원대학교 회화과를 졸업한 이후 그 흔한 대학원 진학이나 해외 레지던시 프로그램조차 참여한 적이 없다. 이런 사실들이 말해주는 것은, 홍경택이 자신의 창작 환경과 자가 발전형 학습 속에서 미술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그의 그림들은 여타 외부적 영향, 예를 들어 현대미술의 주류 문법이라든가 메커니즘, 속도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지 않는 작가만의 미적 산출물인 것이다. 이러한 배경은 그의 그림들을 읽기 위해 먼저 이해해야 할 부분으로, 부언하자면 이는 서두에서 제시한 예술가 주체가 어떤 이미지 세계를 창조해내는가를 해명하는 이정표인 것이다.


옴니프레젠스 또는 그림의 공간

홍경택의 그림들은 굳이 금욕주의자가 아니더라도 일말의 죄책감을 느낄 만큼 감상자의 사고와 감각에 쾌락을 선사하는 이미지들로 가득 차 있다. 그림은 요컨대 신성한 존재인 예수부터 대중적 인물인 할리우드 여배우까지, 위대한 정신의 표상인 책에서부터 그 정신을 받아쓰는 도구에 불과한 공산품 펜에 이르기까지, 순결한 성모 마리아 입상에서 발가벗겨진 바비인형에 이르기까지, 태초 낙원의 아담과 이브에서부터 부박한 인간의 필멸성을 상징하는 백골에 이르기까지, 성(聖)과 속(俗), 관념과 재현, 종교와 일상, 숭배와 유희, 시원(始原)과 종말의 이미지를 백과사전적으로 집대성하고 있다. 이 정도로 작가의 그림 속 소재 선택이 종횡무진이고, 또 이처럼 그 내러티브가 광범위할 때, 우리가 객관적으로 예상할 수 있는 작 품의 결과는 두 방향이다.

완전히 정신 산만하든지, 평범한 즐김을 넘어서는 경이를 구현하 든지. 미학적 성공 또는 실패로 갈리는 극단의 이 두 길을 결정짓는 것은 작가의 화면 전체 구성 능력과 전체 문맥의 조직력, 즉 무수한 디테일을 구사하는 동시에 통제할 수 있느냐 여부와 개별 요소들을 개연성 있는 전체 이야기로 엮어낼 수 있는가 없는가에 달려있다. 이런 관점에서 홍경택의 백화난만한 그림들은 근대 회화에서 디테일을 터부시한 보들레르조차도 설득할만한 구성력을 갖췄다. 19세기 프랑스의 이 미술 비평가는 “자잘한 잡동사니와 유치한 술책으로 주제를 부각”시키는 기술이라며 당시 프랑스 관학파의 세부에 치중하는 회화 양식을 비판했는데,1) 홍경택은 어떤 점에서 이를 극복하는가?

그의 그림들이 난삽한 디테일의 나열을 넘어서 디테일의 예술이 될 수 있는 것은, 요컨대 평면성의 원리에 기인한다. 보다 정확히 말해서, 화면의 모든 공간에 각종 소재들을 똑같은 강도(intensity)로 그려 넣음으로써 그림 표면이 힘의 평형 상태를 이루는 원리 덕분이다. 시각적으로든 은유적인 의미에서든 홍경택의 그림은 위에서 아래까지, 왼쪽 위 모서리에서 대각선으로 오른쪽 아래 모서리까지, 혹은 그 반대로 보아도 화폭에 빈틈없이 무엇인가가 있다. 가령 이 화가의 가장 유명한 그림이자 초기작인 〈Pens 1〉(1995-1998)을 보라. 무한하다 싶을 만큼 다수의 색상과 재질, 그리고 다양한 용도의 펜들이 세로 259cm, 가로 581cm의 초대형 캔버스 공간에 완벽히 동등하게 묘사돼있지 않은가?

가장 최근에 속하는 ‘훵케스트라’ 시리즈의 그림들은 또 어떤가? 문자, 패턴, 인물, 동식물 또는 도상에서 유형의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이 모든 이미지들이 정사각형 평면의 제각각 위치에 똑같은 강도로 존재한다. 이 시리즈 중 하나인 〈노란 앵무새〉만 봐도, 중심에 위치한 이 그림의 주인공 앵무새나 바탕을 이루고 있는 각종 현란한 색채의 패턴들이나 별반 힘의 차이를 느낄 수 없이 면과 면, 색과 색으로 연속해있음을 알 수 있다.

사물들의 현존으로 꽉 채워진 그림의 공간은, 정작 그림을 제작하는 화가의 입장에서 볼 때, 그의 시선이 그림의 전(全)공간에 ‘미치지 않는 곳이 없음’, 즉 편재(遍在) 또는 무소부재 (無所不在)를 증거한다. 마치 절대자이자 창조주로서 신의 특권인 옴니프레젠스 (omnipresence)처럼 말이다. 홍경택이 만약 디테일을 구사하면서 개별적 사물의 묘사에만 경도됐거나 전체를 보는 시각능력을 발휘하지 못했다면, 그의 그림에서 평면성은 일루전의 불충분함이거나 자잘한 잡동사니 이미지의 피상성을 뜻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화가의 그림이 획득한 평면성은, 말하자면 그린버그(C. Greenberg)가 주창한 모더니즘 추상회화의 평면성과 정반대 방향에서 상통한다. 전자가 현실 사물들의 외관을 2차원 공간에 균질하게 재현함으로써 회화의 평면성을 숨기지 않는다면, 후자는 회화의 유일한 속성으로 평면성을 상정하고 추상적 형식을 통해 그것을 드러내려했다는 점에서만 다를 뿐이다.

다른 한편, 우리는 균등한 디테일로 이뤄진 홍경택의 회화세계에서 화가의 어떤 자아, 혹은 자기규정을 읽어낼 수 있다. 홍경택은 여러 작품 속에서 여러 방식으로 전지전능한 신적 주체로서의 화가 모델을 주장한다. 예컨대 그 모델은 시리즈의 몇몇 그림에 보이듯이, 겹겹이 쌓인 책더미와 미니어처 장난감들의 좁은 틈 사이에 숨어 그림 밖 관람자를 응시하고 있다. 아마도 이 응시의 주체는 정황상 그림 속 마이크로 월드를 창조한 자이자, 그 이미지의 배후에서 그림의 공간을 컨트롤하며 감상자를 거기로 유혹하는 자일 것이다. 홍경택이 이력 초기부터 지금까지, “그림을 그리는 일은 자신의 신전을 짓는 일이고 그림을 감상하는 행위는 작가의 신전에 초대받는 일”(2000년 8월 작성)이라 쓴 자기 노트를 제시한다는 사실만 따져봐도 내 독법이 과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화가의 상상적 자아가 최근 한 작품에 매우 선언적이고, 어찌 보면 불경할 정도의 수위로 표현됐다.

16세기 대가 홀바인(H. Holbein)의 〈죽은 그리스도〉와 매우 유사해 보이는, 〈권력, 타락 그리고 거짓말〉이라는 그림 속에서, 전자의 그리스도와 동일하게 거의 나신(裸身)에 가까운 모습으로 길게 누운 이는 화가 자신이다. 둘 사이에 다른 것이 있다면 홀바인의 예수가 십자가의 책형 이후 고통으로 절멸하는 신체를 제단을 연상시키는 프레임으로 보여준다면, 2008년 그림 속 화가는 상대적으로 건강한 자신의 몸을 미국식 패션잡지의 표지 디자인에 근접해 보이는 구도로 전시한다는 사실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홍경택이 화가 주체로서 신적 시선을 욕망하면서도, 만약 ‘시선의 취향’이라는 말이 가능하다면, 제의와 숭배적 시선이 아니라 시각적 쾌락 과 세속적 시선을 욕망한다고 유추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이 ‘복합적 성격의 편재하는 시선’이야말로 디테일의 전면성이 곧 그림 전체가 된 홍경택 회화를 산출해낸 원천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옴니포텐스 또는 사물의 질서

무수한 디테일로 이루어진 그림이 단순히 이미지들의 집합소나 모티브의 난삽한 나열이 되지 않기 위해서, 화가는 화면에 특정한 질서를 부여해야한다. 유럽 회화 전통뿐만 아니라 현재까지 우리가 당연시하는 그림의 질서는 대체로 ‘관계적 구성(relational composition)’에 근간을 둔다. 우리가 어릴 때 미술학원에서 그림을 배우기 시작하면서부터 내면화한 질서, 이를테면 주제가 있으면 그 옆이나 조금 뒤로 부주제를 배치하고 이러저러한 여분의 사물과 공간을 합리적으로 포치(布置)하는 화면 구성이 그것이다. 미니멀리즘과 팝아트는 이 관계적 구성을 의문시한 미술이다.

예컨대 저드(Donald Judd)는 공장에 의뢰해서 만든 똑같은 상자를 일정한 간격으로 나열했고, 워홀(Andy Warhol)은 실크스크린으로 인쇄한 콜라 병 또는 브릴로 박스를 쭉 늘어놓았다. 이는 관계적 구성에 반대해서 ‘하나 다음 하나(one thing after another)’라는 단순 반복에 기반을 둔 일종의 기계적 질서이다. 관계적 구성이든 기계적 반복이든 그것은 세계를 이해하고 이미지로 구성하는 미술의 각각 다른 방식들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내가 이를 자세히 설명한 것은, 홍경택의 경우 흥미롭게도 이 두 질서를 융합한 제3의 질서를 그림 속에서 구사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그 질서는 큰 틀에서 그림의 모티브와 패턴(또는 모티브이자 패턴)을 중심과 주변이라는 관계 속에서 배치하지만, 세부적으로 그런 모티브와 패턴을 주종(主從)의 구분 없이, 여백 또한 없이 무한 반복하는 것이다. 우리가 홍경택의 ‘Pens’, ‘Library’, ‘Funkchestra’ 시리즈를 보면서 어떤 어지럼, 약간의 경이를 느끼는 것은 바로 이 중층적 질서 때문이다.

우리는 홍경택 그림의 질서를 형식적 구성과 도상학적 의미를 결합시켜 읽어볼 수 있다. 1995년부터 2001년까지 제작한 〈Library 2〉는 그가 2005년경부터 집중적으로 선보이고 있는 ‘훵케스트라’의 구성을 선취한 작품으로 보인다. 이때의 구성이란 시각 형식으로 따지면, 화면 중심으로부터 빛이 확산돼 나오듯이, 그림의 소재들이 소실점으로부터 선형 원근법을 그리며 배치됨을 의미한다. 이는 서구 13세기에서 15세기에 그려진 다수의 성화(聖畵), 또는 19세기 낭만파 화가 프리드리히(Caspar David Friedrich)의 〈산 속의 십자가와 성당〉에서 발견할 수 있는 구도로서, 감상자로부터 절대성, 경건, 은총, 숭고 같은 감정을 자아낸다. 그것은 옴니포텐스(omnipotence), 즉 전능을 표상하고 경험케 하는 그림의 질서이다.

말하자면 성령의 광휘처럼 모든 개체, 모든 영역에 뻗어나가고, 다시 그로 수렴되는 권능을 표현하기에 가장 합당한 시각 질서이다. 홍경택의 화면 구성은 이 질서를 차용했거나 적어도 학습을 통해 자기화한 것으로 보인다. 기묘한 점은 〈훵케스트라〉에서 보듯이, 이러한 화면 구성을 통해 주제화된 내용들이 성스럽기보다는 세속적이고, 숭고보다는 매혹을 유발하며, 경건보다는 쾌락에 더 가까이 있다는 사실이다. 도박과 환락의 도시 라스베가스 광고판만큼이나 번쩍이는 도형들의 배경 위로 특권화된 인물은, 이를테면 마리아가 아니라 마릴린 몬로, 예수가 아니라 “예수보다 비틀즈가 더 유명”하다고 단언한 존 레논인 것이다. 홍경택이 시각 질서 형식을 통해 일종의 의미의 전복 내지는 가치의 균등화를 상징적으로 말하려는 의도는 〈Library 2〉부터 있었다. 다시 〈Library 2〉로 돌아가보자.


Hong Kyoungtack, Library 2, 1995-2001 © Hong Kyoungtack

〈Library 2〉에서 첩첩이 쌓인 책들로 만들어낸 직선들이 한데 집결하는 소실점은 15세기 화가 보티첼리(Sandro Botticelli)의 〈비너스의 탄생〉에서 차용한 ‘비너스’의 상반신이다. 그림의 최상단에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가 위치해있고, 그 아래로는 명백히 아담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이는 나체의 남성 6명이 바로 옆에 쌓아올린 팬케이크와 동일하게 순차적으로 늘어서 있다. 다음, 그 아래층에는 피에로가 그림의 관객을 환영하듯 팔을 펼치고 서있고, 한 칸 더 아래서는 뒷모습의 피에로가 보인다. 그리고 화면의 맨 아래, 오른쪽 귀퉁이에 동물의 두개골이 그림의 중앙을 향해 놓여있다.

여기서도 우리는 중심과 주변의 구분 없이 반복되는 이미지의 질서를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 우리가 이 그림의 구성을 도상학적으로 읽으면, 욕망하는 인간(선악과를 손에 든 6명의 아담) 위에 미(미의 화신 비너스)가 존재하며, 그 미는 진리(원근법의 선을 따라 무한 반복된 책)를 수렴하는 꼴이고, 그러한 미 위에 절대적 권위로서 신성(神聖)이 현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절대자의 정반대 지점인 그림 최하층에서 피에로가 그림 밖 관객 또는 그림 속 맨 위의 신을 향해 특유의 몸짓 연기를 하며, 이 일련의 수직적 위계와 존재론적 가치 구조를 조소하듯이 덧없음(vanitas)의 상징인 해골이 머리를 두르고 있다.

이처럼 〈Library 2〉는 전복과 균등성을 함축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읽기만 가능한가? 단언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그림 속에 이미지로 출현한 존재들, 상징화된 의미들, 그것을 구성하고 있는 시각 질서가 중층적으로 융합하면서 합리적 구분을 가로지르고 명쾌한 논리를 따돌리며 해석의 문을 열어 제치기 때문이다. 나는 홍경택 그림에서 발휘되는 이 열린 해석의 가능성이 옴니포텐스를 표상하는 질서로부터 온다고 생각한다.


그림자 없는 그림, 회화의 매혹

우리는 어떤 경우에 그림에 매혹되는가? 서구 회화 전통에서는 그림에 대한 감상자의 매혹을 ‘그림이 더 이상 그림으로 보이지 않는 경이로움’으로 정의한다. 예를 들어 우리가 16세기 라파엘로(Raffaello Sanzio)의 〈시스틴 마리아〉에서 물감이 정교하게 발린 캔버스를 의식하는 것이 아니라, 성모와 아기 예수의 성령이 독일 드레스덴 미술관이라는 현실의 전시 공간에 현현하고 있음을 느낄 때, 그 순간 우리는 매혹된 것이다.

또는 17세기 네덜란드의 바로크 화가 페르메어(Jan van Vermeer)의 〈진주귀걸이 소녀〉를 보며, 우아함과 불안정성, 성숙과 미성숙이 교묘히 결합해 있는 신비한 여인을 느낀다면, 그 그림은 더 이상 화가의 손기술이 만들어낸 단순한 이미지일 수 없다. 이런 예들에서 알 수 있듯이, 회화의 매혹은 많은 경우 환영적인(illusionistic) 차원에서 발생한다. 그러나 정말 우리는 눈속임 그림이나 환영 효과를 극대화한 그림 속에서만 매혹을 경험하는가?

이제까지 논한 것처럼, 홍경택의 대부분 작품은 무수히 많은 양과 다양한 종류의 모티브를 화면에 극히 디테일하게 배치한 그림이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이 작가는 그림 속 모티브를 현대회화의 최신 유행 경향인 포토리얼리즘으로 재현하지 않는다. 책은 그저 우리가 책이라고 인지할 수 있을 정도이며, 상대적으로 정교하게 묘사하는 인형들, 패션모델 및 각종 유명인들, 선인장들, 종교적 도상 또한 착시 효과를 불러일으킬 정도로 완벽하게 재현한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홍경택의 그림들에서 매혹이나 경이로움을 경험한다면, 그것은 화면 전체를 완전히 장악하고 있는 무한한 디테일들, 그 디테일들의 편차 없음과 여백 없음에서 온다.

편차가 없고, 여백이 없다는 것은 곧 그림자가 없다는 것이다. 높이와 낮음의 구조 속에서는, 채워져 있음과 비어 있음의 질서 속에서는, 반드시 후자 쪽으로 시각적으로든 의미상으로든 그림자가 진다. 이런 식의 그림자가 부재하는 홍경택의 미술은 말하자면 전면적으로 밝은 세계이고, 그 밝음이 우리를 매혹시키는 그림의 능력이다. 가상의 이미지 세계 속에서만 가능하다 하더라도, 이 능력을 구사하는 이가 바로 예술가 주체이다.


수록: 강수미, “그림자 없는 그림의 세계: 매혹과 동시에 신성모독을 유발하는 홍경택의 그 림”, 『한국미술의 원더풀 리얼리티』, 서울: 도서출판 현실문화, 2009, pp. 28-39.

1) Daniel Arasse, Le Détail: Pour une histoire rapprochée de la peinture, 이윤영 역, 『디테일: 가까이에서 본 미술사를 위하여』, 고양: 숲, 2007, pp. 27-30 참조.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