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서울(b. 1988)은 고전적 매체인 회화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과 응답의 과정을 거쳐 작업을 해왔다. 그의 작업에는 붓, 물감, 캔버스 천과 틀, 액자와 같은 물리적 요소가 회화에서 작동하는 방식에 대한 메타적 탐구가 드러난다.
 
작가는 미술사조에서 영향을 끼친 선대 작가, 미술용품 브랜드의 붓과 물감, 그리는 행위에 가해지는 운동성 등을 주제로 삼으며, 시각 예술이 오랜 시간 빚져온 역사적 참조와 관습을 현재의 방식으로 다시 쓰기 위한 그만의 법칙을 하나씩 세워간다.


《Uncolored》 전시 전경(아트딜라이트갤러리, 2019) ©아트딜라이트갤러리

2019년 아트딜라이트갤러리에서 열린 김서울의 첫 번째 개인전 《Uncolored》는 서양 현대미술사에서 접해 온 추상미술의 스테레오타입들을 연상시키면서도, 2019년의 맥락에서 재발견해 나가는 새로운 유형의 추상미술에 관해 고민해보게 하는 흥미로운 작업을 소개했다.


김서울, 〈After De Kooning No.10〉, 2018, 캔버스에 168가지의 유화 물감, 172x172cm ©김서울

특정한 형상 없이 여러 가지 색으로 이루어져 있는 그의 작업에 가까이 다가서면, 색면과 색면 사이에 윤곽선처럼 보이기도 하는 1mm 이내의 좁은 틈이 비워져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이는 우연한 효과에 의한 것이 아닌 작가의 계획된 움직임의 흔적이다. 이 같은 틈은 화면 내의 공간을 구획 지으며 분리시킨다.
 
붓질의 유형 또한 다양한데, 어떤 부분은 묽고 투명하게 채색되어 있고, 어떤 부분은 두껍고 매트하게 칠해졌으며, 어떤 부분은 색이 그라데이션 처리되거나, 여러 차례 겹쳐져 발려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또한 완성된 캔버스에는 바니쉬 칠이 되지 않아 마지막으로 발린 물감의 느낌이 그대로 살아 있는 것도 특징적이다.


김서울, 〈After De Kooning No.5〉, 2017, 캔버스에 168가지의 유화 물감, 172x172cm ©김서울

이처럼 중심도 주변도 없이 평평하게 이어지는 그의 화면은 언뜻 색채를 자유로이 구사한 듯 보이지만, ‘틈’에서 볼 수 있었던 이성의 통제력은 색의 선택 과정에서부터 발현되었다. 예를 들어, ‘After De Kooning’ 연작은 네덜란드의 유화물감 제조사 올드 홀랜드의 모든 물감을 이용하여 제작되었다.
 
모든 페인팅을 제작할 때 작가가 조건으로 삼은 것은 “168가지 색을 모두 ‘민주적’으로 사용하며, 혼색하지 않고, 비슷한 양을 사용하며, 168조각으로 구성해 화면을 채우는 일”이었다. 이에, 김서울은 학습된 방식대로 인위적인 조화를 연출하지 않고 자신이 설정해 둔 조건들을 충족시키며 작품 제작을 위한 과정을 수행해 나갔다.

김서울, 〈After De Kooning No.10〉 컬러 차트, 2017 ©김서울

김서울은 올드 홀랜드사에서 제작하는 모든 색의 물감을 구입하고 사용해 보면서 물감의 성질을 파악하고, 분류하는 데 약 2년의 시간을 들였다. 색상, 채도, 명도뿐만 아니라 직접 사용해 봐야지만 알 수 있는 특성들을 발견해 나가며, 각 물감이 가진 정체성, 고유한 특성을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는 방식으로 채색하였다.
 
그 예로, 작가는 인공 안료를 이용한 물감은 비교적 투명도가 높아 의존적인 성격을 띤다고 생각해 여러 겹으로 겹쳐 칠하기도 하였다. 또한 미묘한 색상의 차이는 비슷한 계열의 색이 인접하게 칠해졌을 때 두드러져 보인다고 생각하여, 화면 내에서 붉은 계열의 색들을 한쪽에 몰아서 채색하기도 했다.
 
이러한 그의 작업은 무수히 많은 이미지와 영상에 쉴 새 없이 노출되어 있는 오늘날, 168가지라는 제한된 색상만을 이용해 가장 아날로그적인 방식으로 직조한 화면을 제시한다.


김서울, 〈Filbert Family No.9〉, 2020, 유화, 면 캔버스(중간 텍스처), 172x172cm ©김서울

이렇듯 김서울은 ‘회화’를 구성하는 가장 기본적인 요소들의 특성에 대해 지속적으로 고민해 오며, 이를 기반으로 한 조건을 세우고 그 틀 안에서 끝없이 변주해 나가는 작업을 이어왔다.
 
그는 첫 번째 개인전에서 추상표현주의와 물감의 역사 및 특성을 전례 없는 방식으로 번역하는 시도를 보였다면, 이후 2021년에 열린 두 차례의 개인전에서는 특정 인물이나 사조에서 한발 물러나 회화의 기본이자 모태가 되는 구조, 즉 붓 자체에 주목한 작업 ‘필버트 패밀리’ 연작을 소개했다.


김서울, 〈Filbert Family No.10〉, 2021, 이리디슨트 아크릴, 몰딩 페이스트, 유화, 폴리에스터, 천 캔버스(중간 텍스처), 172x172cm ©김서울

연작의 제목 ‘필버트 패밀리’는 붓의 종류 중 하나인 필버트 붓(Filbert Brush)에서 가져온 이름이다. 이 붓은 타원형을 띠고 있으며, 붓의 머리는 납작하고 붓 끝은 뾰족한 특징을 가진다. 둥근붓과 납작붓을 합쳐 놓은 필버트 붓은 얇게 펴 바르거나 두껍게 바르는 것, 곡선이나 직선을 그리는 것이 모두 가능하다.


김서울, 〈Filbert Family No.6〉, 2021, 스탠드 오일, 니켈 티타늄 옐로우, 리넨 캔버스(무거운 텍스처), 172x172cm ©김서울

김서울은 이러한 필버트 붓을 이용하여 ‘필버트 패밀리’ 연작을 완성시켰다. 그는 작업에 앞서 고고학자와 같은 마음으로 한 제조사에서 만든 다양한 필버트 붓 25가지를 모두 구입하여 실험하였고, 이후 필버트라는 형상을 하나의 모듈로 상정하여 이를 통해 만들어 낼 수 있는 다이아몬드, 타원, 하트, 격자무늬 등 단순하면서도 다양한 수 십여 종의 형태와 패턴을 추출했다.
 
즉, ‘필버트 패밀리’ 연작은 그리고자 하는 형태에 따라 붓을 선택해 그리는 것이 아니라, 붓이 그려낼 수 있는 형태가 캔버스 위에 옮겨진다는 점에서 ‘무엇을’ 그리는지 보다는 ‘어떻게’ 그리고 ‘왜’ 그리는 지가 더욱 중요하게 다가온다.


김서울, 〈Filbert Family No.13 (small ver.)〉, 2020, 3M HDR 스티커, 자작나무 합판, 황마 캔버스에 유채(매우 거친 텍스처), 39x39cm ©김서울

또한, ‘필버트 패밀리’ 연작의 작은 캔버스들은 입체적인 프레임을 가지고 있다. 가령, 2021년 아트딜라이트갤러리에서 열린 개인전 《뷰티풀 마인드》에서 선보인 ‘필버트 패밀리’ 연작의 프레임은 내부 콘텐츠의 색과 형태를 반영하고 있었으며, 그림의 구조를 반복하고 때로는 반사체와 결합해 캔버스 옆면의 축을 바꾸기도 하였다. 이러한 입체적인 프레임으로 인해, 그림의 2차원 구성 원리가 축을 달리하며 3차원화 된다.


《아름다운 영혼을 위한 소나타》 전시 전경(디스위켄드룸, 2021) ©디스위켄드룸

《뷰티풀 마인드》와 연장선상에서 열린 개인전 《아름다운 영혼을 위한 소나타》(디스위켄드룸, 2021)에서 선보인 ‘필버트 패밀리’ 연작의 프레임 또한 범상치 않은 모습을 띠고 있었다.
 
작품의 양 옆과 위아래, 네 면을 모두 한번에 볼 수 있도록 거울을 액자 안쪽에 설치하는가 하면(〈필버트 패밀리 No.10, 11 작은 버전〉), 작품에서 나타난 모듈을 액자의 형태에서도 반복하여 확장시키는 등(〈필버트 패밀리 No.19 작은 버전〉 액자의 실험적 활용이 이루어졌다.


김서울, 〈Filbert Family No.19 (small ver.)〉, 2021, 캐나다산 하드 메이플 우드, 자작나무 합판, 크롬, 면 캔버스에 유채(중간 텍스처), 35x46cm ©디스위켄드룸

작품을 보호하기 위해 존재하는 기존의 액자와 달리, 김서울의 액자는 작품과 함께 기능하는 일종의 구조물로 더 적극적인 조형 언어로 활용된다. 김서울은 작품이 완성되고 난 다음, 그 내부의 조형 언어를 더 발전시킬 수 있는 구조물로 액자를 상정하며 제작했다.
 
그 결과 액자는 그림을 일종의 가구처럼 만들어 주는 틀로, 다양한 나무의 종류, 형태, 반사되는 물질의 결합 등을 통해 회화의 문법을 확장하는 요소로 활용되었다.


김서울, 〈스칼라 앤 벡터 No.5〉, 2023, 콜드 왁스, 스탠드 오일, 유화, 폴리에스터/천 캔버스(중간 텍스처), 172x172cm ©디스위켄드룸

한편, 2023년부터 전개해온 연작 ‘스칼라 앤 벡터’은 지난 두 연작에서 연구가 부족했던 색채의 조합을 보다 역학적이고 심리적인 관점에서 보완하는 데 초점을 맞추며 진행되었다.
 
이 연작은 작가가 화면을 구성할 때 고려하는 색채와 힘의 역학적 실험을 순차적으로 담고 있다. 사물의 물리량을 뜻하는 ‘스칼라(scalar)’와 그것의 방향성을 나타내는 ‘벡터(vector)’는 그가 색의 질량과 움직임에 대해 탐구했음을 직관적으로 알려준다.


《도킹 왈츠》 전시 전경(디스위켄드룸, 2024) ©디스위켄드룸

이러한 ‘스칼라 앤 벡터’ 연작을 중심으로 기획된 개인전 《도킹 왈츠》(디스위켄드룸, 2024)은 그가 회화에 대해 견지하는 유물론적인 시각을 살핌과 동시에 그의 태도와 관람자의 신체적, 정신적 경험 사이의 긴밀한 관계성에 관해 이야기한다.
 
김서울에게 있어서 색은 의미를 표상하는 기호이기 이전에 여러 혼합물로 구성된 산업 안료 중 하나이며, 조건에 따라 상이한 모습을 가질 수 있는 변수이다. 이러한 실증적 이해는 화면에서 각 색이 차지하는 면적과 방향성을 결정할 수 있도록 하며, 그가 내리는 조형적 결정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김서울, 〈스칼라 앤 벡터 No.12〉, 2024, 이리디슨트 아크릴, 유화, 클리어 사이징 처리된 리넨 캔버스 (매우 고운 텍스처), 172x172cm ©디스위켄드룸

각 재료에 관한 분석이 이루어진 다음, 그는 오로지 자신이 이해한 물성을 토대로 조형적 감각을 최대치로 실현하는 데 몰두한다. 밑바탕에 그어 놓은 그리드선 위로 하나의 주조색이 칠해지고 나면 그는 그 다음 색이 어떻게 진입할 수 있을 지 직관적으로 판단한다. 물감을 긋고 던지고 밀어내는 치열한 과정 속에서 각 색조는 평면 안에 순차적으로 도킹(docking)된다.
 
때로는 넓은 면이, 긴 직선이나 흩어지는 짧은 선이, 또 가끔은 그들을 받쳐주는 원형이 등장하며 그림의 골격을 조금씩 만들어간다. 작가가 그리기를 멈추었을 때, 각각의 완성품은 개별적인 힘의 상태를 내재한 이미지로 우리에게 다가선다.


김서울, 〈스칼라 앤 벡터 No.11〉, 2024, 유화, 클리어 사이징 처리된 리넨 캔버스 (매우 고운 텍스처), 172x172cm ©디스위켄드룸

작품이 완성되고 관객 앞에 드러나는 순간, 화면에 촘촘히 겹친 작가의 고민은 관객으로 하여금 이성적인 판단 범주를 훌쩍 넘어서는 쾌를 유발한다.
 
보는 이의 시선은 화면을 압도하는 색의 질감과 강력한 붓의 스트로크, 곳곳에 장면의 균형을 깨부수는 기하학적 단서들 위를 끝없이 오간다. 그 안에서 관객은 앞으로 팽창하고 뒤로 수축하기를 반복하는 에너지의 변주를 마주하게 된다.


김서울, 〈스칼라 앤 벡터 No.16〉, 2025, 스탠드 오일, 유화, 유성 프라이머 처리된 황마 캔버스 (매우 거친 텍스처), 172x172cm ©디스위켄드룸

이렇듯 김서울은 감정적 수사나 부연적 서사를 걷어내고 캔버스와 붓, 물감이 자신의 고유한 성질을 가감 없이 드러낼 수 있는 회화를 고안해 왔다. 다양한 선과 면, 그리고 기호들을 적재적소에 위치시키고, 건축물을 설계하듯 화면 위에 물질을 순차적으로 안착시키는 방식으로 빈틈없는 균형을 만들어 나간다.
 
그리고 그가 보여준 물질에 대한 깊은 이해와 전용은 곧 춤추는 색의 연쇄로 드러난다. 이는 보는 이로 하여금 이성적인 이해를 넘어서 예상치 못한 인상과 기억을 불러일으키며, 다차원의 물질을 기반으로 형성되어 온 모든 존재들의 의미에 대해 돌이켜 보게끔 한다.

 "이미지가 범람하는 요즘, 왜 인간은 각고의 노력을 들여 손수 이미지를 생산하는지, 그리고 이렇게 생산된 이미지의 차별점에 대해 고민하고 있습니다."  (김서울, 리바트 인터뷰 중) 


김서울 작가 ©IBK 기업은행

김서울은 국민대학교 회화과 학사를 졸업했다. 개인전으로는 《도킹 왈츠》(디스위켄드룸, 서울, 2024), 《아름다운 영혼을 위한 소나타》(디스위켄드룸, 서울, 2021), 《뷰티풀 마인드》(아트딜라이트갤러리, 서울, 2021), 《Uncolored》(아트딜라이트갤러리, 서울, 2019) 등이 있다.
 
또한 작가는 《도상(途上)의 추상(抽象) - 세속의 길에서 추상하다》(서울대학교미술관, 서울, 2025), 《블룸 비전》(교토 츠타야 서점, 교토, 2024), 《Transparent Window, Glass Table》(기체, 서울, 2023), 《Hand to Eye》(BOL 갤러리, 싱가포르, 2023), 《Layered》(IBK 아트 스테이션, 서울, 2022), 《페리지 윈터쇼 2021》(페리지갤러리, 서울, 20210 등 다수의 단체전에 참여했다.
 
김서울은 제1회 계명극재회화상(2024)을 수상한 바 있으며, 그의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 정부미술은행과 박서보재단에 소장되어 있다.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