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고무판이나
스티로폼, 유리판 위에 여러 색의 물감을 뿌리고, 제스모나이트에
돌가루, 철가루, 금박, 은박
등을 섞어 수차례에 걸쳐 레이어를 주며 안쪽을 채워나간다. 캐스팅(casting)의
거푸집처럼 사용되는 오래된 고무판의 결이나 마모된 부분, 스티로폼의 표면을 살짝 부식시키거나 상감까지
하면 이곳의 요철은 또 다른 국면을 맞이하며 판화처럼 표면을 고스란히 담아낸다. 재료가 굳은 후 고무판
및 판들을 분리해내면 울퉁불퉁한 표면이 드러나는데 우연의 효과가 강조된 결과 이미지는 상상 이상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작가는 떨어져 나온 표면을 그라인더로 평평하게 갈아내기도 하는데, 노동이 수반된 수고로운 과정을 재료의
성질들을 완전히 파악할 때까지 반복하고 몇 번의 실패를 거듭하고서야 만족한 결과를 걸러낼 수 있다. 발생하는
우연성은 이미지의 허상(illusion)을 해체하고 익숙한(conventional)
이미지는 평면을 가장한 추상회화가 된다.
작가는 미술사에서의 추상개념과 우연성을 획득하는
다양한 기법 및 재료, 심지어 이미지까지 레퍼런스(reference)
삼아 평면의 외형을 취하지만, 과정은 평판화나 조각 캐스팅과도 같은 아이러니하게도 총체적(holistic) 작품을 생산해낸다. 번역행위에서 해방된 언어는 수많은
레퍼런스를 통해 다양한 미디어와 기법, 그리고 스타일의 변주를 보여준다.
작가는
오랫동안 비누로 작업을 하면서 다양한 프로젝트(〈번역 시리즈〉, 〈유령
시리즈〉, 〈화장실 프로젝트〉, 〈풍화 프로젝트〉, 〈비누에 새기다: 좌대 프로젝트〉,
〈폐허 풍경〉, 〈화석화된 시간〉, 〈페인팅
시리즈〉)를 선보였지만, 재료 자체를 다변화하고자 하는 의지를
강력하게 가지고 있는 바, 세라믹과 유리 작업을 계속 연구해왔다.
2019년에는 런던 바라캇 갤러리에서 도자작업, 《풍화》로 개인전을 가졌다. 이번 2021년 서울 씨알콜렉티브에서의 개인전 《앱스트랙트 매터스 Abstract Matters》가 매체의 다변화 탐구와 함께 또 다른 시각언어로의 진화, 경계를 실험하는 진일보한 확장을 위한 플랫폼이 되길 기대하고 있다.
이번
전시에서 다루는 추상에 대한 것은 미술사를 통해 오랫동안 탐험 되어 온 것으로, 작가에게 추상은 진리를
탐색하거나 상세한 서술을 위한 것이라기보다 성취되어야 할 일정 목표 또는 재서술 되어야 할 문제로 전환된다. 이
과정에서 아이러니함을 발견하게 되는데, 이 지점을 드러내는 것은 신미경 작업 세계만의 고유한 특징이고, 동시에 오랫동안 반복된 작업을 대하는 작가의 태도이다. 완전한 새로움
또는 본질 탐구에 기댄 작업이라기보다 익숙한 결과에서도 과정을 해체하여 아이러니를 발견하는 것이 이제껏 작가가 치열하게 매진해온 노정의 의미이며
태도다. 이번 작업의 형식과 내용이 고대 벽화에서부터 주변의 오래된 건물의 외벽을 닮았다고 느껴진다면
그래서 동시에 수많은 추상 이미지들이 떠올려진다면, 이미 추상은 특수한 스타일의 전유물이면서도 아이러니하게
이미 어디에나 있는 것이자 일상 가까이 있는 개념이라는 증거일 것이다.
그러나
이번 실험은 ‘추상은 이미 모든 삶과 언어에 걸쳐있는 개념으로 특정 작가나 비평가의 특수한 담론으로
차별화하는 추상표현주의자들과 미니멀리스트들에 대한 기존 담론들을 재전유하고 비판하고자 하는 지점’과는
일정 거리를 둔다. 또한 조각/비조각의 변증법적 긴장을 통해
확장된 조각 영역을 증빙하려는 지점과도 거리를 둔다. 이러한 전략 및 사회문화적 차이와 정치와 권력의
개입 너머의 순전한 시간과 환경 속 개인/개별자의 역사 그리고 불순한 의도나 작가의 개입에서 다소 자유로워지는
곳에서, 그러나 아이러니하게 해체의 전략이 드러나는 동시대적 의미의 추구가 강하다 하겠다.
신미경은
작가로서의 존재 이유는 ‘기존에 있었던 것을 새로이 해석함으로써 고정관념으로부터 해방되어 새로운 국면으로
나아가는’ 과정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 태도를 위해
가장 적합한 양식을 찾아 나가는 것이 예술가로서의 존재, 그리고 예술 하는 방식이다. 그의 행보와 실천들이 한결같이 자만이나 합리화, 지침이나 뒤돌아봄
없이 30년 가까이 꾸준하게 한 곳을 바라보고 나아가고 있다는 점은 경이롭기까지 하다.
오세원 (씨알콜렉티브 디렉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