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년 만에 하는 개인전 치고 많은 작품이 나온 것은 아니었지만, 비슷한 작품의 동어반복을 피하고 견본이 될만한 작품들이 걸린 전시장은, 그림에서 기대될 법한 매끄럽고 화려한 시각의 향연을 거부하고 있다. 그렇다고 정갈하게 정리된 어떤 개념을 주입하려는 것도 아니다. 최진욱의 그림은 아름다움이란 것을 창조하기 위하여 캔버스를 부드럽게 어루만져야 할 붓이 칼로 변모된 듯, 여기저기 훼손된, 또는 방치된 영역들이 존재하며, 여기에서 파열음이 새어나오고 있다. 아무 이상이 없는, 그러나 철저히 무의미해 보이는 일상의 무료한 경관들을 재현한 그의 그림은 그 안에 작가가 남겨놓은 빈곳이나 갈라진 곳들을 주의깊게 살펴볼 것을 요구한다. 균열은 그림 내부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작가는 그림이 걸리는 벽면도 활용한다. 들어서자 보이는 큰 그림 〈Crazy〉나 그 다음 벽면의 그림들은 이채롭게 벽에 바탕색을 칠했다. 관광버스를 대절해서 놀러간 휴양객 무리들을 그린 〈크레이지〉는, 생경한 핑크 바탕과 대조되어 그림의 내용물이 더욱 칙칙해 보이며, 화면 전면에 배치된 쩍쩍 갈라진 바닥면의 굴곡을 더욱 깊게 만든다.
 
반대로 검정색이 칠해진 벽면에 걸린 〈벚꽃주차장〉은 상대적으로 화사한 꽃그림을 더욱 강조한다. 그림들은 차분히 벽에 붙어 있기보다는 벽면에서 튀어나올 듯하며, 그림 속의 관광버스는 벚꽃들과 자연스레 어울리지 않고 상당히 튄다. 장면의 전체적인 균형보다는 버스의 색상이나 형태같은 시시콜콜한 것에 더 관심을 가진 것처럼 눈에 걸리적거린다. 거기에다가 작가는 이 장면을 긴 캔버스에 그린 다음 칼로 썬듯이 조각내어 겹쳐 놓았다. 물리적인 겹쳐짐 말고도, 화면 안에는 많은 겹치는 선들이 존재한다. 제대로 맞추지 못한 조각 사진들처럼 한쪽 면은 만개한 꽃나무가, 그에 이어붙인 면에는 곧 낙엽이 질 듯이 빈약한 나뭇가지들이 연결되어 있다. 검정색 바탕면으로 연결되어 있어 짝을 이루는 것이 분명한 그 옆의 작품, 〈벚꽃주차장 2〉는 언뜻 온전해 보인다. 그러나 장면 자체가 파편적이다. 마치 실수로 찍힌 사진처럼 주목해 봐아할 중요한 대상이 전혀 없다. 초점이 안맞은 냥 뒷면의 꽃의 형태들도 밋밋한 색면으로 뭉개져 있다. 관객의 시점과 같은 위치에 놓인 화면 속 인물만이 그 안에 무언가 볼 게 있을지도 모른다는 망상을 낳게 한다.
 
그 그림은 버스의 위치를 보아, 벚꽃주차장의 뒷면을 그린 그림일지도 모른다. 성의없이 대강 그려진 듯한 이 그림이 놓칠 수 없는 장관의 앞뒷면을 관객에게 친절하게 모두 보여주기 위한 화가의 배려같지는 않다. 그것은 캔버스 안에 균열을 내놓고 잘라놓기까지 한 장면과 마찬가지로 불완전한 단편이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다음 그림인 〈해수욕장-화실〉은 그림 속의 그림, 빈 의자에 부재하는 작가를 비추는 깨진 거울이라는 난반사적인 내용에 더하여, 두쪽으로 된 캔버스의 크기를 달리하여 붙여놓았다. 일종의 변형된 캔버스라고 할 수 있지만, 그의 작품에 명백히 존재하는 재현성은, 캔버스의 틀과 평면의 상호관계를 통해 ‘그림의 그림다움’이라는, 현대 미술사가 던져놓은 과제를 풀기위한 ‘쉐이프트 캔버스’류의 형식 실험과 거리를 두게 한다. 전시제목에도 포함되어 있듯이, 그는 언제나 ‘리얼한 것’을 추구했던 것같다. 그는 작업노트에서 ‘리얼리즘은 대상의 리얼함이 내 눈을 통해 내 몸에 각인되는 과정’이라고 하면서, '풍경을 보고 가슴이 뛸 때마다 나는 홀린 사람처럼 붓을 들고 닮게 그리려고 애써왔다'고 밝히고 있다.

최진욱, 〈러브 이즈 리얼〉, 2005, 캔버스에 아크릴, 112 × 162 cm © 최진욱

〈해수욕장-화실〉과 같이 중성적인 바탕 면에 걸린 작품 〈러브 이즈 리얼〉은 이 전시의 제목이자, 스스로 성공작이라고 평하는 작품인데, ‘러브’도 그렇고, ‘리얼’도 그렇고, 부정보다는 긍정성이 강해보이는 이 작품에도 균열의 그림자는 드리워져 있다. 나른한 히피 음악의 노랫말이기도 한 〈러브 이즈 리얼〉은 꽃이 만발한 산책길을 그린 것이다. 잘 포장되어 있지만 계속 이어져 있지 않아 보이는 이 길은, 무엇인가 새로 시작해야 하는 봄이 주는 불안감이 내재되어 있으며, 이러한 불안감을 예시하고 있는 것은 허연 바닥길을 심연처럼 가르고 있는 나무 그림자들이다. 아직 아무도 밟지 않은 하얀 눈이 쌓인 듯한 작은 길은 조각내고 있는 선들은 그가 무의식적으로 그려넣은 것일지 모르지만, 관객에게는 단순한 그림자 이상의 것으로 다가온다. 전시장을 가르는 대각선 축의 반을 차지하는 작품 속에 존재하는 균열들은 관객에게 어떤 해석학적 상상력을 요구하고 있다. 특히 〈1992년 서울의 봄〉 같은 눈부신 작품이 하나 걸려있기에, 그 낙차를 통해 틈과 균열의 의미가 더욱 강해진다.
 
물론 이 작품 역시 이어붙인 현실이라는 것을 굳이 감추지 않지만, 작품 서쪽에서 봄햇살을 가득 받는 도시적 경관은 장면을 장면이게 하는 정확한 정보를 담은 색채의 면들이 빠르고 정확하게 위치지워지면서, 단순한 재현이나 비루한 일상을 넘어서는 또 다른 차원의 장면으로 펼쳐지고 있다. 화가에게는 이러한 또 다른 차원과의 완전한 조우 및 일체가 ‘리얼’이며, ‘러브’일지 모른다. 그러나 장면과 완전히 일체가 되는 짧은 축복의 순간을 포획하고자 하는 화가의 광기에 찬 손놀림은 그것이 안착될 단단한 지반을 갖지 못한다.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그림을 분석하는 입장에서 그것은 일차적으로 회화적 언어의 불투명성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다. 언어의 투명성을 전제하는 하는 것이 통상적인 리얼리즘의 가설이라면, 최진욱의 리얼리즘은 그가 주장하듯이 의식보다는 육체에 가까운 것이다. 아마도 앞으로는 의식/육체의 이분법을 넘어서, 의식을 가진 고깃덩어리의 문제가 중요해 질지도 모른다.
 
캐서린 벨지는 후기구조주의적 이론을 해설하는 책에서 소쉬르로부터 시작하는 현대언어학의 가설은 언어가 언어는 투명하지 않으며, 독립적으로 구성된 사물들의 세계에 대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단순한 매체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가설에 의하면 언어는 사고의 모방이 아니라, 사고의 조건이 된다. 언어가 개인들과 사물들의 세계를 구성하고 그것들을 구별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한다. 테리 이글턴도 『비평과 이데올로기』에서 후기구조주의적 가설에 유물론적인 해석을 가하면서, 언어 없이는 물질적 생산도 있을 수 없다고 지적한다. 언어는 다른 무엇보다도 육체적, 물질적 현실이며 따라서 물질적 생산력의 일부가 된다. 사물들은 그 언어를 구성하는 차이들의 체계 밖에서는 생각할 수 없다. 참조대상 및 경험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기호는 다시금 기표와 기의의 분리로 이어진다. 차이의 체계인 언어는 그 자체가 틈과 흔적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다. 단일한 실체가 아니라, 균열과 공백을 통해 체계 내의 다른 요소들과의 차이를 통해 현실이 규정된다는 점에서 최진욱의 구사하는 언어는 현대적이다.
 
결국 현대 언어학의 가설이 예시하는 바는, 우리의 직접 경험과 (언어적)기표의 사용 간에는 틈새가 놓여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세계에 대하여 말하거나 그릴 때 자아와 경험 간의 직접적인 관계의 가능성이 손상되곤 한다. 경험의 언어적 구체화는 마치 물이 숭숭 새는 바구니로 물을 퍼올리는 것과 마찬가지의 일이다. 테리 이글턴이 지적하듯 작품은 그자체의 인위적인 기교를 끊임없이 부정하는 가운데, 자신을 자연적이고 명료한 것으로 제시하려고 하지만, 이런 노력은 항상 좌절로 끝나버리고 만다. 이처럼 언어는 나와 세계의 관계를 방해하지만, 그러면서도 의미의 가능성을 제공하는 것은 바로 언어이다. 동시에 언어는 고정적이지 않고 부단한 변화의 과정 중에 있어서 텍스트들은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에 개방되어 있다. 이글턴은 예술작품의 미학적 통합은 유기적인 공동체의 신화 위에서가 아니라, 그 반대로 부르주아 사회의 역사적 자기 분열들 위에서 이루어진다고 지적한다. 작가가 집요하게 리얼한 것을 추적할 수록 현실은 더욱 단단히 기초지어지는 것이 아니라, 불안정하고 모호해지는 것이다. 마치 현대수학이나 물리학의 가설처럼, 불확실성은 정확성과 함께 커지는 것이다. 화면의 재현성이 고수되면서도 끊임없이 동요하며 심연을 드러내는 최진욱의 그림이 그러하다.
 
미완성의 작품도 걸었다는 이번 전시에서 그는 미완성이라는 것은 완성만큼이나 중요하다는 것을 암시한다. 중요한 것은 작품의 무의식, 즉 작품이 알지도 못하고 알 수도 없는 무의식이다. 프로이트가 지적하듯 텍스트 내의 갈라진 틈은 해석이 판을 치는 곳이며 그 해석은 비록 자아의 산물이기는 하지만 자아와는 이질적인 것이다. 최진욱의 그림은 작품 내부로부터의 분열을 보여주며, 이 분열이 작품의 작품의 무의식이다. 이러한 분열은 현대 철학자들이 강조하듯, 보편성보다는 우연을, 통일성 보다는 다양성을, 토대 보다는 결함을, 정체성 보다는 아닌 차이를 부각시킨다. 이러한 부류 가운데 하나인 미셀 푸코는 인식의 요소라는 것은 지식의 집합도 아니고 통일된 사유양식도 아니며, 빗나감, 틈새, 분산의 공간으로 묘사하면서 자신의 문화적 모델을 차이들의 적극적인 상호작용 한가운데 놓는다.
 
최진욱은 균질적이고 단일한 캔버스, 또는 장면들을 조각내는 방식을 통해 작품의 텍스트성, 즉 깨어지거나 기워진 그물망으로서의 특징을 강조한다. 이를통해 텍스트는 서로 충돌하는 다양한 소리polyphonic를 낸다. 텍스트는 처음부터 다언어적이다. 장식적이고 편안한 장면이 거부당한 관객은 작품의 틈들을 통해 ‘작품들이 제시하지만 설명하지 못하는 생략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것의 모순을 찾아야’(캐서린 벨지)하는 것이다. 그것의 부재들 속에서 그리고 분기된 의미들 간의 충돌 속에서 텍스트는 그 자체의 이데올로기를 암묵적으로 비판한다. 관객을 안심시키고 위로하는 환상주의, 어디에서 시작해서 어디로 끝난다는 식의 정확한 메시지로 종결되는 서사가 거부되는 것이다.
 
캐서린 벨지는 주체의 일관성과 연속성이 고전적 사실주의의 개념적 틀을 제공한다고 지적한다. 주어의 사용을 통해 주체가 설정된다. 그러나 담론의 나는 항상 하나의 대역이다. 아무도 서로 다른 순간들에서 동일하게 같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자아의 연속성은 하나의 신화이다. 주체는 언어와 담론 속에서 구성된다. 그리고 담론적 활용속에서 상징적 질서는 이데올로기와 밀접한 관련된다. 그러므로 이데올로기 속에서 주체가 구성된다고 할 수 있다. 이데올로기는 구체적인 개인들을 주체들로 호출하는데 특히 중산계층의 이데올로기는 개인의 고정된 아이덴티티를 강조한다. 중산계층적인 자기동일성과 달리, 실제의 주체는 항구적인 구성의 과정 중에 있다. 주체가 차이에 기초하기 때문에 세계와의 상상적 합일은 영원히 지연된다. 주체성에 대한 언어의 우위성 개념이 의미하는 바는 라캉의 프로이트 해석을 통해 정교화되었다고 지적된다. 언어 속에 구성되는 것으로서의 주체에 대한 라캉의 이론은 개인적 의식의 중심 해체를 확실히 하고, 그 결과 주체는 더 이상 의미, 지식, 그리고 행동의 원천으로 여겨지지 않게 된다.
 
라캉적 주체는 돌이킬 수 없는 분열에 기초하여 구성된다. 거울단계의 자아는 소외, 즉 지각하는 나와 지각된(영상화된) 나 사이의 구별의 순간이다. 가령 최진욱의 작품 〈해수욕장-화실〉에서 작가는 부재하지만 깨진 거울 속에 유령처럼 나타나는가 하면, 사진을 그린 왼쪽 그림 안에 존재하는 것같고, 오른쪽 패널 안의 작은 그림에 존재하고 있는 듯 보이기도 한다. 작가는 여러 곳에 편재하지만 어느 곳에도 확실한 존재성을 가지지 않는다. 그는 여러겹 난반사되는 상황을 통해 주체의 부재와 분열을 그리고 있다. 주체는 그림이든 거울이든 또다른 틀거리들을 통해서 계속 규정되면서도 어딘가로 빠져 나가고 있다. 라캉적인 뜻에서의 주체와 같이 텍스트는 고정되지 않은 하나의 과정이다. 그러나 최진욱의 경우 그림의 문제에 대해선 냉정하고, 그래서 여태 인용하고 논구한 바처럼 ‘분열적’이지만, 그림을 둘러싸고 있는 현실 제도에 관해서는 분명한 할 말이 있다. 전시장 대각선의 나머지 반을 차지하는, 작가의 발언이 보다 직접적인 작품들에서 그것이 나타난다.
 
오늘날 회화는 비유클리트적 차원에 진입하여 그 고원의 희박한 공기 속에서 자신의 존재 의미와 존재 방식에 대해 고차원적인 담론을 생산하고 있다고 생각되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은 엄연히 3차원의 유클리트적 세계에 속해있다. 후기구조주의나 해체주의 같은 현대 철학이 유기적 총체성에 대해 파열과 파편화를 추구한다고 해서 좌파 비평가들이 비판하듯--테리 이글턴은 『비평의 기능』에서 해체주의가 주체가 없는 자유주의이며, 그렇기 때문에 다른 무엇보다도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 적합한 이념적 형식이 된다고 말한다. 그들은 철저하게 모든 것을 무화시키지만 모든 것을 있던 그대로 놓아둔다는 것이다--보수주의에 함몰되는 것은 아니다. 많은 후기구조주의자들이 정치적 행동주의자였다. 그러나 최진욱의 작품에서의 발언은 분열적이거나 분열의 연장선상에서의 정치적 행동주의라기 보다는 명백한 것을 향하고 있다. 의도가 있고 공격 목표가 있으며, 일리가 있다.

최진욱, 〈핑크 글씨〉, 2005, 벽면에 부착된 접착 시트, 400 × 1186 cm © 최진욱

분홍색 시트지로 오려서 붙인 작품 〈핑크 글씨〉는 제목에서 느껴지는 러브 레터같은 달콤한 분위기와는 달리, 군사독재 정권의 유산인 국가보안법과 모노크롬으로 대변되는 한국의 모더니즘의 연관관계를 까발리고 있다. 그것은 대략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모더니즘의 진정한 초심을 찾는 것, 또는 모더니즘의 극한을 통해 모더니즘을 극복하고자 하는 노선을 걷고 있는 듯이 보이는 그에게 모노크롬으로 대변되는 한국적 모더니즘은 표면 장식이라는 장인적 기술과 이론적 과대포장, 그리고 전형적인 패거리 화단 정치의 산물로 비추어진다.

사실을 말하자면, 자신들을 한가지 색으로 칠하고 타자들도 한가지 색으로 칠해버리는 식의 동일성의 이데올로기와 무념무상(?)의 미학의 결합이 그들을 한국 현대미술의 주류이자 적자로 자리매김시킨 동력이었다. 겉으로 내세운 순수주의는 전혀 순수하지가 못했던 것이다. 〈앵무 TV〉에 나오는 우스꽝스러운 극우세력의 궐기는 진지한 비판거리도 되지 못한다. 털모자나 플라스틱 장난감을 머리에 쓰고 있는 듯이 보이는 텔레비전은 마치 광대같다. 그러나 떼지어 움직이는 그들의 단세포같은 행동이 우습긴 하지만, 완전히 무시할 것도 못된다. 세상사는 언젠가는 사필귀정이 될지는 모르지만, 어처구니 없는 사소한 것들에 의해 질질 끌려가곤 하는 것이다.
 
〈앵무 TV〉 옆에는 망친 그림처럼, 때로는 낙서하듯이 그린 작은 그림들이 걸려있다. 타일이 붙어있는 귀퉁이, 형광등이 그려지다 만 듯한 천정, 그리다가 지워버린 그림 등이다. 그의 그림에 보이게/보이지 않게 존재하는 틈들이 중요한 역할을 하듯, 그림이든 세상사든 이성적으로 이렇게 가야한다의 문제가 가장 중요시 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작가에게 자신을 둘러싼 사회에 대한 비평적 언급은 단순히 모종의 진실이 담긴 메시지의 발신과 수신의 문제, 즉 투명한 소통의 문제에 한정되지 않는다.

최진욱은 시트지 작업도 그림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며, 그림인 한 그것은 자신의 내부에서 들끓는 것의 표현이라는 것이 문제시 된다. 최진욱의 작품에서 언어의 사용은 나르시시즘적인 특성이 있다. 바람직하지 못한 선택을 했던 미학적 또는 정치적 노선에 대한 비판이든, 이상적인 여인상에 코멘트든, 결국은 자신이 선택한 길에 대한 우회적인 언급이다. 니이체가 말했듯이 인간은 자신의 장점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기 위하여 언어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말은 권력에의 의지의 산물이다. 역으로 권력은 말을 낳는다. 우리는 매일 거울을 보듯이 자신의 글(작품)을 읽는다. 그러나 그 거울은 자신의 욕망에 의해 흐려지거나 쉽게 깨질 수 있는 취약한 것이기도 하다.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