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진(b. 1988)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기록된 기억이 변이되고 망각되는 것에 주목하며 작업을 이어오고 있다. 그는 지나간 순간들을 현재의 시선으로 바라보고자 과거의 기억들을 분절하고, 그 조각들을 섞고 한 조각 씩 화면에 다시 붙인다.
 
이처럼 과거의 기억을 다시 읽어보는 행위로써 화면을 구성하는 과정 속에서 쌓여진 시간들은 재구성되고, 그 결과 새로운 흐름이 생성되어 순간의 연대기가 시각화된다.


김원진, 〈Re-Constructed Time Shelves〉, 2013, 책, 파라핀, 스틸, 가변크기 ©김원진

김원진의 작업 세계는 크게 ‘순간의 연대기,’ ‘사서되기,’ ‘너와 나의 연대기,’ ‘무용한 무용’이라는 네 개의 챕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먼저, 초기의 작업에서 작가는 도서관에서 폐기된 책, 일기와 같은 기록물을 작업의 재료로 사용하거나, 기록될 수 없고 사라질 수밖에 없는 것들의 ‘기록하는 과정’ 자체를 작업으로 삼았다. 당시 작가는 스스로를 ‘망각의 사서’라고 여기며, 지워지는 과정들을 수집하고 그것들을 ‘지층을 가진 덩어리’로 엮어 시간들을 연결했다. 그렇게 만들어지며 모인 것들이 작가의 도서관이 되었다.
 
이때 작가는 기록을 은폐하는 과정을 공간에 드러내는 것이 기억의 속성을 보여주는 것이라 생각하며, 기록된 텍스트들을 모두 분쇄해 그 내용과 이미지가 하나도 보이지 않도록 했다.


김원진, 〈순간의 연대기〉, 2018, 한지에 색연필, 콜라주, 32x23cm ©김원진

한편, 2016년부터 전개된 ‘순간의 연대기’ 연작은 색연필로 가로 선을 길게 그어 채운 종이를 1mm 두께로 얇고 길게 잘라낸 후 이를 다시 붙이며 기억의 순간들을 재구성한다. 여기서 작가가 그은 한 줄의 선은 한 순간을 의미한다. 선을 긋는 행위가 거듭될수록 순간의 시간들은 겹겹이 쌓여 종이는 과거가 된다.
 
이때 종이를 세로로 길게 잘라 높낮이를 달리하여 이어 붙이는 과정은 지나간 과거를 현재의 시점에서 다시 읽어내고 기억하는 과정을 은유한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과거에 대한 기억이 분절되고 변화하듯이, 이렇게 과거(종이)를 새로이 편집해 구성된 화면은 그 전과는 다른 형상으로 변모하며, 또 하나의 새로운 흐름을 발생시킨다.


김원진, 〈지층적 풍경〉, 2017, 한지에 색연필, 콜라주, 97x97cm ©김원진

이와 함께 전개된 또 다른 연작 ‘지층적 풍경’ 역시 종이 위에 마른 재료로 풍경을 그린 뒤, 이를 세로로 1mm 두께로 잘라 다시 붙여 새로운 화면을 만드는 과정을 거친다. 이 작업은 기억 속에서 포착된 순간의 일부가 또 다른 화면으로 전환되는 과정을 보여주며, 잃어버린 순간과 남아 있는 순간은 반복되는 흐름 속에서 끊임없이 재구성됨을 드러낸다.


김원진, 〈오류지대〉, 2019, 《生生化化 – 흩어진 생각, 조합된 경험》 전시 전경(단원미술관, 2019) ©김원진

초기의 작업과 궤를 함께하는 ‘사서되기’에 속하는 작품 〈오류지대〉(2019)는 1년 동안 수집한 폐기된 책들을 쌓은 후 시추한다는 생각으로 도무송을 이용해 쌓인 기록물들을 몇 가지 크기의 원형으로 오려낸 뒤 설치한 작업이다. 평면으로 된 작업의 경우에는 기록으로 가득 채운 종이를 다시 한번 오일 크레용과 색연필로 덮은 후 얇고 긴 조각으로 잘라 미세하게 붙여 나가는 방식으로 제작되었다.
 
이 작업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작가는 우연히 누군가의 편지를 발견하게 되면서, 단서가 남아 있는 상실의 자리에서 새롭게 자라나는 이야기들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이를 계기로 작가는 기록을 숨기는 방식으로 기억을 다뤘던 초기 작업에서 벗어나, 덮어두려 했던 기록들을 그 자체로 ‘불완전한 연대기’로서 빛나고 있음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김원진, 〈오류지대〉, 2019, 종이에 색연필, 연필, 펜, 콜라주, 220x130cm ©김원진

이러한 과정 속에서 탄생한 작품 〈오류지대〉는 재단되어 분절된 점처럼 보이는 기록들이 마치 컴퓨터 화면에서 마주했던 오류의 장면처럼 보인다. 작가는 ‘오류’가 규정된 범주를 크게 벗어난 것이 아니라 미세한 차이로 발생하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임을 말하며, 우리를 둘러싼 사건들로 이뤄진 역사와 현시대의 풍경도 사소한 오류로 이뤄진 단면들임을 표현한다.
 
이를 통해 김원진은 불완전하고 왜곡되는 기록을 기억에 비유하여, 모든 순간이 불완전한 연대기로 이루어져 있음을 이야기한다. 경험한다는 것은 읽어 내려가는 과정이고, 기억한다는 것은 이를 다시 새로이 읽는 행위이다. 그런 점에서 타인의 문장은 타인의 기억을 만나는 과정이며, 출판된 기록물은 집단의 기억을 은유한다.


김원진, 〈W의 이야기〉, 2020, 캔버스에 유채, 27.3x19cm (61 페이지) ©김원진

그간 책의 표면처럼 물질의 외곽만 가지고 작업을 했다면, 이 작업을 계기로 김원진은 책 안쪽에 담긴 이야기와 사람들에게 다가가려 했다. 그러한 과정에서 2020년경 작가는 ‘우리를 이루는 이야기는 어떻게 전개되는 것일까?’라는 의문을 품게 되었고, 유년시절 가장 많이 접하게 되는 세계명작소설의 서사구조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작가는 보통 기억을 이야기라는 방식으로 기록하고 전하기 때문에 유년 시절에 가장 많이 읽었던 세계명작소설의 기승전결이나 인과응보 같은 서사구조가 이후 우리가 이야기를 생성하는 것에 적지 않은 영향을 준다고 보았다. 이러한 생각은 곧 2020년에 전개한 작업 〈Melting strata project〉와 〈W의 이야기〉로 이어지게 되었다.


김원진, 〈W의 이야기〉, 2020, 캔버스에 유채, 27.3x19cm (61 페이지) ©김원진

이 두 작업을 진행하기에 앞서 김원진은 폐기된 고전소설을 다시 읽었다. 시간이 흐른 뒤에도 책의 기승전결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절정의 장면들이었다. 이에, 작가는 절정의 장면만 타이핑하여 수집했다. 그렇게 모인 문장들은 작가로 하여금 이전의 순간과 단절되고 새로운 챕터로 전개될 어떤 이별의 이야기처럼 다가왔다.
 
작가는 그러한 이야기들이 담긴 페이지들을 실크스크린으로 제작하고, 자신의 일기에서 발췌한 이별의 기록들을 합쳤다. 그런 다음 캔버스에 유화 물감으로 이 이별의 페이지를 찍고, 그 위에 기름을 뿌려 유화로 찍힌 글자가 눈물처럼 일순간 터지듯 흘러내리며 녹아 번지게 했다.


김원진, 〈Melting strata project – day 1〉, 2020, 왁스, 파라핀, 잉크, 발열 패널, 75x150x73cm ©김원진

이처럼 이별의 장면을 찍고 녹이기를 반복해 레이어를 겹치며 〈W의 이야기〉가 완성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W의 이야기〉는 이후 〈Melting strata project〉의 재료가 되었다. 〈Melting strata project〉는 〈W의 이야기〉에서 얻은 문장들을 잉크를 섞은 밀랍으로 떠낸 뒤 전시장에서 매일 새로운 문단을 일정한 시간 동안 녹이는 작업이다.
 
매일 한 문단씩 녹이기를 반복하며 눈에 보이지 않지만 계속해서 흐르는 시간을 물리적인 형태로 쌓아 기록의 흔적을 남긴다.


《공간고백》 전시 전경(서울예술교육센터 감정서가, 2021) ©김원진

이러한 작업이 같은 시간과 공간에 존재하지 않았던 문학적 기록의 단서들을 작업의 재료로 삼았다면, 2020-2021년에 진행한 시민 참여 프로젝트 〈감정선〉에서는 200명의 감정 기록을 스케치로 삼았다. 다양한 연령층의 시민들이 참여한 이 프로젝트는 각자만의 내밀한 자기 고백으로 이루어진 드로잉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스스로를 마주하는 시간 속에서 그려낸 내밀한 개인의 순간들은 빛이 새어 나오는 작은 렌즈를 통해 관객과 마주하게 된다. 고개를 숙여 구멍이 뚫린 벽 내부를 들여다 보는 행위는 타인의 감정에 다가가고 마주하는 ‘관계’의 행위와 닮아 있었다.


김원진, 〈너와 나의 연대기〉, 2021, 회신 온 일기의 재, 잉크, 비즈왁스, 파라핀, 스틸, 열전구, 가변크기 ©김원진

한편, ‘너와 나의 연대기’(2021) 연작에서 김원진은 190인에게 하루의 일기를 요청하는 서신을 보냈고, 156인으로부터 156일의 하루를 회신 받았다. 당시 강렬했던 감정은 일기를 쓰고 이야기를 나누며 언어가 되는 과정에서 시간을 지나며 다시 읽히고 하나의 조각처럼 결정화된다.
 
작가는 회신된 기록들에 불을 가하여 이들의 시간을 변형하고, 소멸의 끝에 남은 재를 모아 밀랍과 석고를 섞어 하나의 조각으로 결정화함으로써 새로운 시간 속에 놓이게 했다. 이 조각들은 사라지며 쏟아진 얼룩의 형태로 스멀스멀 타인과 닿기도 하고 멀어지기도 한다.


《무용한 무용》 전시 전경(금호미술관, 2023) ©금호미술관

2023년 금호미술관에서 열린 개인전 《무용한 무용》에서 소개한 동명의 연작 ‘무용의 무용’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의미가 변하는 기억의 불완전성과 이를 기록하는 매체가 지닌 물질적 유한함에 대한 고찰을 시각적으로 풀어낸다.
 
이를 위해 김원진은 과거의 감정을 환기시키는 사물의 조각을 참조해 그린 그림을 얇게 오려 그 앞면과 뒷면을 교차로 붙였다. 이는 기억이 온전히 재생되지 못해 오류가 발생한 듯한 화면을 생성한다. 작가는 이어 붙임이 반복되는 수행적 노동을 통해 ‘시간'을 표현하는 동시에 순간들이 쌓인 개인의 역사를 가시화한다.


《언어 없는 춤》 전시 전경(아트센터 예술의 시간, 2025) ©아트센터 예술의 시간

한편, 2025년 아트센터 예술의 시간에서 열린 개인전 《언어 없는 춤》에서 김원진은 직접 겪은 질병의 경험을 통해 죽음을 관념이 아닌, 육체를 관통하며 맞닥뜨린 실재의 사건으로 다루었다.
 
급작스럽고 치명적이었던 신체의 붕괴는 작가로 하여금 죽음을 개념이 아닌 체화된 감각으로 말하게 하였다. 몸이 감응을 잃어가던 장면을 붙잡아 물리적 표피로 드러내는 작품들은 작가가 최근 경험한 사건들, 질병의 발견-치료의 과정-후유증으로 모인 서사를 그린다.


《언어 없는 춤》 전시 전경(아트센터 예술의 시간, 2025) ©아트센터 예술의 시간

작가는 감각을 더듬으며 자신이 겪은 과거의 시간과 현재를 연결하고자 했다. 그러나 고통은 언어로 다 표현될 수 없으며 시간 역시 언제나 섞이고 사라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작가는 바로 그러한 불완전함 속에서 극한의 경험을 통과한 몸과 언어의 부재를 다시금 사유한다.
 
전시 《언어 없는 춤》은 작가 한 개인의 질병과 회복의 경험에서 출발하지만, 언어와 기억의 한계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다시 삶을 이어 나갈 수 있는가?’에 대한 물음으로 확장된다.


김원진, 〈무용한 무용〉, 2023, 종이에 채색, 648.8x336.3cm ©김원진

이렇듯 김원진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하며 사라지는, 우리 모두의 ‘불완전한 연대기’를 회화와 설치 작업의 형태로 붙잡는다. 이러한 작업은 단순히 순간을 기록하는 것에서 나아가 이와 함께 유동하고 변화하는 우리들의 내면의 풍경과 중첩시키며,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나’를 연결시킨다.
 
즉, 김원진의 작업은 시간을 다루는 방법인 동시에 그 역동의 한 가운데 놓여 있는 우리들의 삶을 새로운 감각으로써 바라보게 하며, 파편처럼 흩어진 개인의 삶과 기억을 한시적으로 나마 연결할 수 있는 순간을 제시한다.

 "시간 속에서 갑작스럽게 다가오는 공백은 기억 속에서 발생한 일시적인 오류로 다가오며, 나는 그 속에서 잃어버린 기억이 새로이 메워진 오류의 풍경이자, 그 자체로 시간 안에서 작동하고 있는 공간을 만든다."   (김원진, 작가노트) 


김원진 작가 ©대전테미예술창작센터

김원진은 고려대학교 조형예술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개인전으로는 《언어 없는 춤》(아트센터 예술의 시간, 서울, 2025), 《흔적의 흔적》(아트스페이스 보안, 서울, 2024), 《무용한 무용》(금호미술관, 서울, 2023), 《공백, 고백》(대전테미예술창작센터, 대전, 2022) 등이 있다.
 
또한 작가는 《산 자와 죽은 자 가운데》(아트센터 예술의 시간, 서울, 2024), 《퍼블릭아트 뉴히어로 2024》(K&L Museum, 과천, 2024), 《이것은 부산이 아니다》(부산현대미술관, 부산, 2024), 《Tu m’ 너는 나를》(SeMA 창고, 서울, 2022), 《하나의 점, 모든 장소》(금호미술관, 서울, 2021), 《수림미술상展》(수림문화재단 수림아트센터, 서울, 2020) 외 다수의 그룹전에 참여하였다.
 
김원진은 제20회 금호영아티스트에 선정된 바 있으며, Cité internationale des arts(프랑스, 2023), 대전테미예술창작센터(2022), 금호창작스튜디오(2020-2021), Pier-2 Artist In Residence(대만, 2018) 등 국내외 레지던시 입주작가로 활동하였다.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