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혜(b. 1989)는 순환하는 ‘빛’, ‘물’, ‘열에너지’와 같이 실제 시공간에 실존하지만, 관념적으로 인식되는 물리적 조건을 어떻게 매체적으로 사고하고 유기적인 언어로서 해독해 볼 수 있을지를 회화, 드로잉, 판화 등의 방법으로 탐구한다. 동시에 작업을 둘러싼 물리적 시공간의 층위를 형태적으로 상상하고 기록한다.


박정혜, 〈Moment of Sufficient〉, 2015, 캔버스에 아크릴, 91x117cm ©박정혜

초기의 작업에서 박정혜는 작업실을 단순한 일터가 아닌 현실과 가상을 매개하는 정신적 헤테로토피아이자 상징이 자라나는 ‘정원’으로 바라보며, 자신의 작업실을 회화로 담았다. 2013년부터 이어온 작업실 기록과 그로부터 파생된 회화와 드로잉을 통해 작가는 작업실을 사유의 공간으로 확장시킨다.


박정혜, 〈Tomorrow〉, 2015, 캔버스에 아크릴, 53x65cm ©박정혜

이러한 맥락에서 회화와 드로잉은 매체의 경계를 넘어 사유로 진입하는 통로가 되며,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양면을 동시에 드러낸다. 표면에 축적되는 재료의 층위, 마름질과 덧입힘에서 발생하는 물성의 엔트로피, 사물‧기호의 동태는 화면을 분할하고 확장시키며, 도시에 배어 있는 그리드의 질서를 참조하면서도 작업실이 생성하는 은유적 시각언어를 탐색한다.

《디어 드롭스(Dear. Drops)》 전시 전경(아카이브 봄, 2016) ©박정혜

그리고 첫 번째 개인전 《디어 드롭스(Dear. Drops)》(아카이브 봄, 2016)에서 작가는 회화에서 의도와 우연적 행위의 주체를 예술가가 아닌 물감 그 자체로 돌리는 실험을 시도했다. 박정혜는 물감이 흘러 남긴 흔적들 속에서 물성을 발견하고, 만약 이것이 발화의 주체가 된다면 어떠한 풍경이 펼쳐질 수 있을지 상상했다.


박정혜, 〈Dear. Drops〉, 2016, 나무 패널, 린넨에 아크릴, 162.2x130.3cm ©박정혜

그 결과물로 제작된 작품들은 물감의 물성이 물리법칙과 상호작용하며 생겨난 흔적들을 간직하고 있었다. 가령, 세로로 세워진 캔버스 위에서 물감은 흘러내리고, 천에 맞닿아 물들며 퍼져 나가고 있었다.
 
또한 전작들의 경우 점, 선, 면, 색이라는 요소들이 서로 간섭하지 않도록 계산되어 있었다면, 이 전시에서 선보인 그림들은 유기적인 물감의 곡선들이 화면을 가로지르며 그 시작과 끝을 가늠하기 어렵게 만든다.
 
이렇듯 박정혜는 예술가의 의도에 따라 물감을 흩뿌리는 기법인 ‘드리핑(dripping)’이 아닌 물이 흘러 남긴 흔적으로서의 ‘드롭스(drops)’라는 개념을 제시하며, 추상과 구상이라는 프레임을 벗어날 뿐 안이라 의도와 우연의 프레임 또한 재설정하고자 했다.


《Xagenexx》 전시 전경(온그라운드2, 2017) ©박정혜

이어서 열린 개인전 《Xagenexx》(온그라운드2, 2017)에서 박정혜는 마치 카모플라쥬가 기능하듯이 회화가 세계를 ‘가장(假裝)’하는 가능성을 탐구하였다. 작가는 우리 주변의 자연물이나 건축물, 사물 등을 바라보는 과정에서 연상된 색과 형태, 물성을 회화의 언어로 옮겨 왔다.
 
이 전시에서 작가는 사각형의 사물들을 좇으며 사각의 프레임 사이로 떠오르는 이미지를 상상했다. 모든 이미지가 스크린이라는 사각의 프레임 안에서 인식되는 오늘날, 박정혜는 또 다른 사각의 프레임인 캔버스를 통해 가상과 현실의 사이를 매개하는 회화의 형식에 관해 고민했다.


《Xagenexx》 전시 전경(온그라운드2, 2017) ©박정혜

이때 색과 형태와 프레임과 같은 회화의 형식적 요소를 재발견해내는 일은 형식주의로의 회귀가 아닌 현실의 주변에 스며듦으로써 회화를 세계의 환유로 삼기 위함이었다.
 
전시장을 가득 채우고 있던 노란색은 빛의 상징과 은유에 그치지 않고 가짜 빛으로서 회화의 가장 상태를 노출한다. 나아가, 자연의 빛은 화폭 위로 미끄러지며 빛의 가장으로서의 노란색을 가시화한다. 


《Mellow Melody》 전시 전경(휘슬, 2021) ©박정혜

첫 번째 개인전에서는 액체인 물감의 물성을 통한 회화적 실험을, 두 번째 개인전에서는 공간에 반응하는 빛의 물성을 통해 가상과 현실 사이의 연계를 다뤘다면, 세 번째 개인전인 《Mellow Melody》(휘슬, 2021)에서는 구체적으로 날씨와 연관된 빛의 변화를 살피고 연상되는 음률과 형상을 연결했다.
 
전시장 입구에 자리하고 있던 작품 〈Micro Ground〉(2019)는 개인전을 전체적으로 관통하는 주제인 빛에 대한 기억, 그리고 빛의 몸체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림에는 눈으로 볼 수 없는 풍경의 거리감을 머릿속에 떠올려 다른 방식으로 ‘보고,’ ‘인지’하여 꼼꼼하게 묘사하려는 작가의 의지가 보인다.


박정혜, 〈Heavy Cloud〉, 2018-2019, 나무 패널, 린넨에 아크릴, 162.2x130.3cm ©박정혜

한편, 〈Heavy Cloud〉(2018-2019)는 입자의 크기에 대한 작가의 상상을 표현한다. 무거움을 이기지 못하고 가라앉은 구름과 그 위로 불쑥 튀어나온 하트 표식의 한없는 가벼움이 부딪히는 모습은, 보는 이의 관념에 따라 달라지는 대상의 크기와 무게의 괴리감을 드러낸다.
 
이 외에도 작가는 빛에 노출되면서 변화하는 모습과 균열을 생각한 〈TEETHh〉(2018), 어느 날 밤에 지나간 낮을 떠올린 〈Flashback〉(2018), 시간의 겹을 역으로 뒤튼 〈Distorting Time〉(2018) 등 제목과 도상을 엮어 관객에게 해석의 실마리로 던져두었다.


《Mellow Melody》 전시 전경(휘슬, 2021) ©박정혜

아울러, 박정혜의 작업 속에는 종이로 만들어진 오브제가 종종 등장한다. 초현실적인 색의 정경 앞에 놓인 종이 조각은 빛과 이야기를 드러내는 계획된 장면이자, 관람자와 작품이 현실 세계에 함께 놓여있음을 상기하는 사물이다.
 
또한, 작가에게는 “입체적 상상을 일으키는 도구”이며 감각적으로 대상의 거리를 측정하며 화면의 구조를 견고하게 만드는 관념적 재료가 된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인쇄용지에서 볼 수 있는 색을 흥미롭게 여기는데 이는 작가가 평소에 관심을 두고 있는 “가상의 리얼리티”와 연관된다.


《고대의 냉장고》 전시 전경(실린더2, 2024) ©박정혜

한편, 2024년 실린더2에서 열린 개인전 《고대의 냉장고》에서 박정혜는 빛과 열의 역학관계를 에너지의 순환 운동으로 간주하고, 이미지의 ‘저장장치’로서 회화의 매체성과 그 내부에 저장된 시각적 온도에 초점을 맞춘다.


박정혜, 〈Condenser〉, 2024, 나무 패널, 린넨에 아크릴, 160.2x130cm ©박정혜

전시 《고대의 냉장고》는 회화가 에너지를 저장하고 통제하는 매체라는 점에서 기능적으로도 미학적으로도 냉장고와 닮아 있다는 가능성에서 출발한다.
 
전시는 2023년부터 지속해 온 회화와 드로잉으로 구성되었다. 직조된 캔버스 표면과 종이의 요철, 디지털 사진에 담긴 입체 공간의 양상이 교차할 때의 다차원적 국면을 구상과 추상의 경계에서 재구성한 그림들이다.
 
각각의 작업에는 분무기를 통해 흩뿌려진 색채의 입자들, 조색 과정에서 형성된 물감의 덩어리, 평면적 조형 방법론으로서의 종이접기에서 비롯된 입체에 대한 관점 등이 스며들어 있다.


박정혜, 〈Passage(OC)-Landing Strip(OC)-Neon Bar(OC)-Landing Strip(OC)〉, 2024, 캔버스에 아크릴, 156x8cm ©박정혜

에너지를 붙잡아 두는 저장 장치로서 회화를 바라봄으로써, 그의 화면 내부에는 마치 열에너지처럼 그 자체의 순환고리를 띈 시각적 에너지가 생동한다. 나아가, 작가는 전시를 통해 “관객 각자가 간직하고 있던 물성에 관한 기억의 조각들이 각 작업 안에 차갑게 녹아들 수 있기를” 희망하며, 작품과 관객 사이에서 발생하는 시각적 에너지의 상호 작용을 모색하고자 하였다.


《Zettelkasten》 전시 전경(스페이스 애프터, 2025) ©박정혜

2025년 스페이스 애프터에서 열린 개인전 《Zettelkasten》은 박정혜가 쌓아온 시간과 펼쳐온 공간에 대한 분류이자 목록이며 촉매로서의 작업들을 선보였다. 시간이 담길 수 있을 때 공간이 생성되며, 공간이 나타날 때 시간은 움직인다. 이러한 시공간의 역학관계와 운동은 박정혜의 회화 안에서 수많은 모양과 형태로 보관된다.
 
메모 상자라는 뜻을 가진 전시 제목 ‘Zettelkasten’은 박정혜의 조형적 근간이 되는 정방형의 공간이 무수히 변주되어 흐르는 시간의 모습을 은유한다. 이와 동명의 회화 연작 ‘Zettelkasten’(2025)에서 기본적인 정방형의 그리드는 세계를 자신의 눈으로 바라보려는 고유의 눈금으로 회화의 표면에 구축되고, 그 축을 따라 또 다른 정방형의 형태가 끝없는 변수와 변모를 거듭한다.


박정혜, 〈Zettelkasten〉, 2025, 종이에 색연필, 84.5x60.5cm (each 4 sheets) ©박정혜

정방형은 각진 모서리를 접고 또 접어 가는 방식으로 변화가 전개되다가 결국에는 점으로 도달하게 된다. 이는 곧 위치이자 ‘나’라는 존재로의 수렴을 뜻한다. 동시에 이 수렴된 세계는 다시 펼쳐질 때 나타날 세계의 모습을 향하고 있다.
 
《Zettelkasten》은 박정혜가 “생각의 형태”라 부른 “수국의 머리”처럼 모아진 기억이며, 그의 손에서 포개진 촉각의 기록이기도 하다. 〈Clock Flower〉(2025), 〈Blooming Hours〉(2025), 〈Bouquet〉(2025)와 같이, 그에게 시간의 외연은 끝없이 피어나 한 움큼 묶이는 기억이다.


박정혜, 〈Blooming Hours〉, 2025, 캔버스에 아크릴, 33x24cm ©박정혜

그의 회화 안에서 매일의 일들과 그 시간은 사물처럼 차곡차곡 자기만의 순서를 가진 파일에 보관된다. 기억이 된 각각의 사물들은 때론 뾰족하고, 별도의 메모지가 첨부되기도 하며, 각기 다른 색으로 분철된다. 심지어 정돈되어 분류될 수 없는 경험의 잔상은 가늘게 분쇄된 종이를 투명한 정방형의 상자에 가득 채워 혼돈과 맞바꾼다.
 
이 같은 기억의 사물화는 자신을 거쳐 유일무이해지는 시간과 공간을 현시하기 위한 방법이고, 사물을 통해 환유하는 기억의 의미 작용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다시금 연결되고 확장되며 새롭게 부여되는 의미의 망은 회화의 표면으로 이행된다.
 
그렇게 박정혜의 회화적 공간은 시간에 대한 감각과 사유를 암시하는 형상으로 채워지며, 또한 그렇게 이루어진 전시의 공간은 그가 쌓아온 회화적 궤적이 통합되고 갱신되는 시간이 된다.


박정혜, 〈Clock Flower〉, 2025, 나무 패널, 린넨에 아크릴, 162x97cm ©박정혜

이렇듯 박정혜는 우리 주변을 끝없이 흐르고 순환하는 여러 에너지와 물리법칙을 회화라는 물질적 매체로써 포착하고 기록하는 작업을 통해 변화무쌍한 세계와 그 안에 서 있는 존재에 대해 이야기한다.
 
나아가, 캔버스 화면 안에 다층적으로 담겨진 에너지들은 보는 행위를 매개로 다시금 관객과 상호작용하며 각자의 감각 안에서 새로운 추상성을 획득하게 된다.

 "뫼비우스의 띠처럼 새로운 시간으로의 접속과 연결을 머릿속에 그려 보다, 문득 내가 보는 모든 순간들을 볕이 드는 창가에 놓인 수국 다발처럼 모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생각의 형태란 결국 줄기로 연결된 꽃받침들이 한 송이 꽃처럼 보이는 저 수국 머리의 형태와 같지 않을까.
 
사실 수국의 머리는 꽃이 아니라고. 그것은 날아다니는 벌레를 색으로 유인하는 위장의 생존술과 작은 잎사귀들이 모여 있는 연합체. 이 모든 것은 내가 모으고 분류하며 정돈하려는 지금 내 머리를 말한다."
 
 
 
(박정혜, 작가노트) 


박정혜 작가 ©BB&M

박정혜는 홍익대학교 회화과 학사를 졸업했다. 개인전으로는 《Zattelkasten》(스페이스 애프터, 서울, 2025), 《고대의 냉장고》(실린더2, 서울, 2024), 《Jetlag》(N/A, 서울, 2024), 《Mellow Melody》(휘슬, 서울, 2021), 《Xagenexx》(온그라운드2, 서울, 2017) 등이 있다.
 
또한 작가는 《인 시투》(아르코미술관, 서울, 2025), 《Contours of Zero》(제로원 스페이스, 뉴욕, 미국, 2025), 《도상의 추상》(서울대학교미술관, 서울, 2025), 《Open Corridor》(인터럼, 서울, 2024), 《SUNROOM》(BB&M, 서울, 2023), 《삼원소》(SeMA 벙커, 서울, 2022), 《두산아트랩 전시 2021》(두산갤러리, 서울, 2021), 《층과 사이》(국립현대미술관, 과천, 2017) 등 다수의 단체전에 참여했다.
 
박정혜는 2025년 아르코 예술창작실, 서울시립미술관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에서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참여했으며, 그의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 정부미술은행, 서울시립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