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수정(b. 1990)은 주변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사건, 서사 및 이미지에 대한 관심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독창적인 구상 회화의 언어를 실험해 왔다. 마치 꿈 속 장면과 같은 그의 회화는, 현실의 사건들에 대한 작가의 상상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낯설면서도 친숙한 장면들로 이루어져 있다.


정수정, 〈Protecting the forest in the east〉, 2018, 캔버스에 유채, 72.5x90.5cm ©정수정

정수정의 작품 세계는 세 개의 축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 번째는 자연과 인간 문명의 관계에 대한 작가의 세계관이다. 작가의 경험과 철학을 기반으로 한 이 세계관은 자연과 인간의 공존, 선과 악으로 이분화 할 수 없는 순수한 대자연의 원리, 작은 존재들이 만들어 내는 생명력과 역할 등에 대해 이야기한다.

두 번째는 기존의 문화적 도상과 표현 양식을 자신만의 언어로 번안해 현재화 하는 것이다. 고전 회화부터 영화, 애니메이션, 뮤직비디오, 광고 등의 대중문화 시각물까지 관심을 가지며, 그것들이 보여주는 주제와 그 안에 등장하는 형태들이 가진 의미, 포즈나 동세가 보여주는 감각들을 연구해 왔다.


정수정, 〈Sweat becomes the sea 1〉, 2019, 캔버스에 유채, 130.3x193.3cm ©정수정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상상 속의 세계’를 회화적 장면으로 구현해 내는 것이다. 권혜인 큐레이터는 이에 대해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세계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작품을 구성하는 첫 번째 축인 자신의 세계관을 ‘현실의 모사’가 아닌 회화의 언어로 표현하겠다는 의미이자, 두 번째 축인 문화적 도상과 표현 양식이 가진 인공적인 속성을 탐구하고 재구성하여 회화의 순수성을 획득하겠다는 선언으로도 읽힌다”고 보았다.   

이와 같은 정수정의 작품 세계를 구성하는 세 개의 축들은, 각자 별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 전시별로 하나의 소재를 중심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왔다.

《Sweet Siren》 전시 전경(레인보우큐브, 2018) ©레인보우큐브

예컨대 그의 첫 번째 개인전 《Sweet Siren》(레인보우큐브, 2018)에서는 대자연에서 느껴지는 에너지와 정기를 님프와 같은 신화 속 존재를 통해 시각화한 작업을 보여주었다. 그의 회화에 등장하는 인물은 특정한 대상이 아닌 힘과 긴장의 현상으로서 회화 속 자연을 통제하고 사건을 일으키며 배회한다.  

이들은 그리스 신화 속 님프와 같은 영적인 능력으로 이야기를 엉뚱하게 다채롭게 만든다. 작가는 이들의 개입을 어떠한 방식으로 그려 낼지 고민하며, 그들의 흔적을 물감과 붓질로 대신했다.

《Sweet Siren》 전시 전경(레인보우큐브, 2018) ©정수정

각각의 캔버스는 작가가 만들어 낸 세상의 탄생으로부터 시작되는 긴 서사의 단편들을 담고 있었다. 관객은 서술구조에 따라 세포 혹은 우주로 보이는 이미지에서 탄생이라는 시작을, 꿈틀거리며 세상 밖으로 나오려는 추상적인 이미지에서 유의미한 생명체를, 그렇게 자라난 인간의 형태를 띤 생명체의 일과를, 그들이 모여 만들어 낸 미지의 세계를 차례로 느낄 수 있었다.  

이러한 일련의 그림이 다루는 ‘상상의 세계’는 실제와 환상, 선과 악, 남과 여, 젊음과 늙음, 기쁨과 슬픔 등 현실에 존재하는 수많은 이분법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장소로 그려진다.


정수정, 〈Giving answers to Bosch〉, 2018, 캔버스에 유채, 72.7x293cm ©정수정

히에로니무스 보쉬의 〈쾌락의 정원〉에 대한 답으로 그려진 〈Giving answers to Bosch〉(2018)는 정수정이 탄생시킨 세상을 더욱 선명하게 느낄 수 있는 작품 중 하나이다. 마음의 위안을 찾기 위해 논리와 과학으로 진실을 탐구하는 인간의 모습과 그와는 정반대에서 무형의 신을 만들어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오히려 진실과 멀어지는 인간이라는 양극단의 모습. 그리고 르네상스 시대 신화 그림의 형태와 종교(혹은 이단)적 요소를 심어 대단한 과학적 발전에도 여전히 허상을 좇는 우리를 발견하도록 한다. 

존재하지 않는 작가의 세상 역시 보쉬의 그림이 그러하듯 우리의 현실을 평평하고, 무덤덤하게 담고 있다. 작가는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못하는 인간의 양가감정과 이중성이라는 무형의 것, 보이지 않는 힘과 이끌림을 유형의 이미지로 표현했다.


정수정, 〈No Graffiti Here〉, 2020, 캔버스에 유채, 162.2x260.6cm ©정수정

이후 정수정은 갤러리밈에서 열린 개인전 《A Homing Fish》(2019)에서는 회귀성 물고기처럼 자연으로 돌아가는 존재들을 상상의 세계 속에 펼쳐 보여주었으며, 그 이듬해 OCI 미술관에서의 개인전 《빌런들의 별》에서는 영화 속의 빌런 캐릭터들의 역할과 이미지, 그들의 생동력에 대한 흥미를 회화로 풀어냈다.  

화면 속 빌런들은 마치 시공간의 질서가 깨져버린 것처럼 중력에 맞서 날아오르는 SF적인 장면 속에서 묘사된다. 예를 들어, 〈No Graffiti Here〉(2020)를 살펴보자면 착륙 또는 추락하는 것 같은 비행접시가 등장하고, 그 위에 물감을 칠하는 한 인물이 있으며 그의 발치에 쓰러진 다른 인물이 그려져 있다.


정수정, 〈Fly〉, 2020, 캔버스에 유채, 162.2x260.6cm ©정수정

이때 그림을 장악하는 것은 SF적인 비행 장치보다도 무언가 빠르게 던져지고, 때리고, 터지고, 추락하고, 부수는 운동체 또는 에너지 덩어리의 이미지다. 이를 명확하게 보여주는 예로, 〈Fly〉(2020)의 한 가운데 던져진 하얗고 둥근 사물이 있다. 정확히 이 사물이 무엇인지 파악할 수는 없지만, 그것이 화면 중앙에 던져짐으로써 화면의 나머지 요소들이 모두 움직였다는 것은 알 수 있다.


정수정, 〈Our Starman〉, 2020, 캔버스에 유채, 193.3x259.1cm ©정수정

전시 전체의 클라이맥스에 해당하며 실제로 가장 마지막에 완성한 작업인 〈Our Starman〉(2020)은 정수정이 이번 모험의 끝에서 마주한 새로운 지평을 암시한다. 작가와 그가 창조한 세계가 충돌하면서 생겨난 작가의 분신들, 세계의 파편들, 또는 그 부서지는 세계와 함께 출현한 새로운 힘의 화신들이 한 화면에 집중된다.
 
여기서 둥근 원반의 형상은 화면을 넘어서는 크기로 확대되어 마치 일그러진 지평선처럼 나타난다. 사방으로 튀고 위아래로 쏟아져 내리는 물감의 얼룩은 그 넘치는 에너지로 휘어진 공간감을 자아낸다.
 
윤원화 비평가는 이와 같은 정수정의 회화적 실험에 대해 “자신이 만든 세계를 부수고 다시 세우면서 그 세계를 넓혀갈 수 있는 여지를 찾는” 과정이라고 설명한다. 

《Falconry》 전시 전경(SeMA 창고, 2021) ©정수정

한편, 2021년 SeMA 창고에서 열린 개인전 《Falconry》에서는 주로 여성과 새, 동물이 등장한다. 참매로부터 영감을 받아 제작된 출품작들은 새, 동물, 날다, 부유하다, 정지하다, 공존하다 등의 주제를 중심으로 한다.  

우선, 새를 중심으로 한 작업에서 작가는 기존 매체가 시각화 해 온 전형적인 ‘날거나 부유하는’ 동적인 묘사를 하나의 회화적인 장면으로 압축하거나 조형 요소로 변환시켜 표현했다. 한편, 인물화 시리즈인 ‘Tronie’(2021)는 17세기 네덜란드 인물화 ‘트로니(Tronie)’에 대한 작가의 관심을 바탕으로 전개되었다.


정수정, 〈Tronie#2 Dawn of dreams〉, 2021, 캔버스에 유채, 91x72cm ©정수정

정형화된 귀족들의 초상이 아닌 표정 위주의 생동감 넘치는 트로니는 그 자체로 소셜미디어 속 셀피(Selfie)와 같은 느낌을 주는 동시에, 실제로 존재하는 인물이 아닌 상상의 인물을 창조해 낸다. 작가는 이와 같은 트로니의 특징에 착안하여, 이를 동시대 상상 인물화에 대한 실험을 위한 소재로 삼았다.
 
이전부터 꾸준히 인물 표현을 실험해온 작가는 구체적인 생김새보다 뉘앙스로 그 캐릭터를 보여준다거나, 인물의 포즈와 연결되는 분위기를 얼굴에 담아낸다거나, 자세하고 특정한 표정보다는 감정 자체를 회화적 표현으로 담아내는 방식을 취해왔다.  

이번에도 깃털이 달린 옷을 입은 여성(또는 반인반조(半人半鳥))군상의 여러 표정을 한 화면에서 보여준다거나 동물들이 사람과 함께 등장시키는 방식으로 표현을 복합화, 확장시키고 있다. 동물들은 여성들과 감정적으로 동기화되어 있을 뿐 아니라 여성의 어깨 위에 앉거나 품에 안겨있는 등의 포즈를 통해 신체적으로도 연결되어 있다.


《Falconry》 전시 전경(SeMA 창고, 2021) ©정수정

정수정의 인물화에는 트로니에 대한 참조뿐만 아니라 대중적인 애니메이션인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와 〈원령공주〉의 여성과 동물의 도상 또한 나타난다. 작품 속 여성과 동물들은 무엇인가를 향해 전진한다는 역동적인 이미지와 함께, 참조하고 있는 애니메이션의 주제와 공명하는 것처럼 드러나는데, 가령 ‘연약해 보이는 소녀가 자연을 위해 동물들과 함께 인간 문명에 맞선다’ 혹은 ‘인간과 자연의 공존’과 같은 작가의 세계관이 이러한 도상과 맞물리며 암시된다.


정수정, 〈Mating〉, 2021, 캔버스에 유채, 아크릴, 218x720cm ©정수정

이렇게 작가의 세계관을 전달하는데 중심이 되는 여성과 새, 동물 도상은 〈Mating(교미)〉(2021)에서 더욱 독자적이고 발전적으로 드러난다. 〈Mating(교미)〉은 길이 약 7m의 대형 작품으로 고전적인 벽감 아치 형태를 암시하는 색면으로부터 쏟아져 내려오는 저 너머 세계의 폭포와 다양한 생명체들을 담아내고 있다.
 
역동감이 넘치는 이 작품은 제목처럼 동물들과 여러 새들이 환희의 순간을 수놓고 있는 상상도이다. 등장하는 동물들(또는 생명체들)의 표현은 편견과 고정관념을 넘어서려는 작가의 의도 속에서 마치 한 여성 래퍼의 뮤직 비디오처럼 여성 주도적 성적 표현을 가득 담고 있는 전략적이고 상징적인 유쾌한 밈(meme)과 공명하며, 자유롭고 본능에 충실한 자연이 발휘할 수 있는 최고의 에너지와 생명력을 확인시켜주고 있다. 


정수정, 〈Voyage〉, 2023, 캔버스에 유채, 220x420cm ©정수정

2023년 프리즈 서울 ‘포커스 아시아’ 섹션에 참여하며 선보인 〈Voyage〉(2023)에는 상상 속 세계에서 자유로이 부유하는 여성들이 등장한다. 교복을 입은 여성, 웨딩드레스를 입은 여성, 수영복을 입은 여성은 우리의 일상에 가까운 모습을 하고 있지만, 현실과는 다른 자유로운 세계에서 시원하게 물살을, 공기를 가로지른다.  

먹음직스러운 과일부터 기이한 형태를 하고 있는 포자와 플랑크톤에 이르기까지 세계를 구성하는 다양한 미시적 존재와 뒤섞여 유희하는 여성들은 오랜 시간 우리의 상상과 함께 자라온 여신 혹은 요정, 마녀의 후손으로 보이기도 한다.


정수정,  2023 프리즈 서울 ‘포커스 아시아’ 섹션 전시 전경 ©정수정

여기서 버섯, 곰팡이 등 균류는 미세한 포자를 퍼트려 생식하고 무한 번식한다는 점에서 작가로 하여금 “이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균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생명체들”이라는 생각을 하게 하였고, 이는 곧 그림에 반영되어 그려지게 되었다.  

이러한 장면은 작은 미생물부터 기이한 초능력자까지 다양한 생명체가 어우러지고 교류하는 모습으로 그려지며, 현실과는 다른 이상적이고 대안적인 생태계를 상상하게 만든다.


《검은 뼈, 진심과 원석》 전시 전경(에이라운지, 2023) ©정수정

2023년 에이라운지에서 열린 개인전 《검은 뼈, 진심과 원석》에서 작가는 ‘마녀’를 중심축으로, 분노와 슬픔, 원한과 격앙, 갈등과 질투가 교차하는 인물과 상황을 그렸다. 그러한 이야기는 역사 속에서 희생당한 이들의 이야기이도 한 동시에, 역경을 딛고 앞을 향해 나아가는 이들의 이야기이도 하다.
 
마녀로 몰려 불에 타버린 여성들과 그들을 둘러싼 상징적 요소들은 그의 그림 속에서 비틀어지며 새로운 이야기로 직조된다. 정수정은 자본주의 시장에서 하나의 상품이 되어 오늘날 표피만 남게 된 ‘마녀’라는 존재 이면의 진정한 이야기를 작품에 그려내고자 했다고 말한다.  

작가는 표피만 남은 마녀의 도상들을 뒤집고 비틀고 변형하여 다시 생동하게 만들었다. 이에, 여기서 마녀는 상징적 도상으로서 마녀인 동시에 그 도상의 관습적 의미로는 해석할 수 없는 새로운 의미가 덧붙여진 존재가 된다.


《검은 뼈, 진심과 원석》 전시 전경(에이라운지, 2023) ©정수정

정수정이 새로이 써 내려간 마녀는 희생자이면서도, 강한 에너지와 욕망을 지닌 자들이며, 비탄에 빠져 있으면서도, 분노에 타오르는 다층적이고 입체적인 인물로 새로이 거듭난다. 나아가 그러한 인물이 담긴 다층적인 화면 속 장면들은 보는 이로 하여금 이 시대를 빗대어 바라보게 하며, 다양한 관점으로 읽히는 ‘열린 회화’로서 제시된다.
 
이렇듯 정수정의 회화는 현실의 다양한 레퍼런스를 바탕으로 삼고 있지만, 단지 관습적인 도상을 가져오는 것에서 나아가 새로운 의미와 상상이 덧붙여진 이미지로 서사를 만들어 나가며 다층적이고 열린 회화의 가능성을 제시해 왔다.  

그리고 그의 그림 속 다양한 존재들의 얽힘과 공존의 모습은 낯설면서도 기이한 인상을 주는 동시에, 이들 사이에서 약동하는 에너지를 통해 오늘날 이 세상을 다 함께 살아가는 모든 존재자들의 생명력을 상기시킨다.

 ”나는 상상하는 것들을 장면으로 만들고 그림으로 옮긴다. 우리가 일상에서 느끼는 생명력과 생명력이 가득한 자연 속에서 함께 영위하는 삶과 관계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장면을 만든다.”  (정수정, 작가노트) 

정수정 작가 ©IAH

정수정은 가천대학교와 글래스고 예술대학에서 회화를 공부했다. 개인전으로는 《검은 뼈, 진심과 원석》(에이라운지, 서울, 2023-2024), 《Falconry》(SeMA 창고, 서울, 2021), 《빌런들의 별》(OCI 미술관, 서울, 2020), 《A Homing Fish》(갤러리밈, 서울, 2019), 《Sweet Siren》(레인보우큐브, 서울, 2018) 등이 있다.
 
또한 작가는 《사이연출자들》(기체, 서울, 2024), 《Time Lapse》(페이스갤러리, 서울, 2024), 《UNBOXING PROJECT 2: Portable Gallery》(뉴스프링프로젝트, 서울, 2023), 《어쩌면 우리가 보지 않았던 것들》(대전시립미술관, 대전, 2023), 《히스테리아: 동시대 리얼리즘 회화》(일민미술관, 서울, 2023), 《21세기 회화》(하이트컬렉션, 서울, 2021), 《나메》(뮤지엄헤드, 서울, 2020) 등 다수의 단체전에 참여했다.  

정수정은 프리즈 서울 2023의 ‘포커스 아시아’ 섹션에서 솔로 부스를 선보인 바 있으며, 2025년 제23회 금호영아티스트로 선정되어 2026년 금호미술관에서 개인전을 열 예정이다. 그의 작품은 OCI 미술관과 BNK부산은행에 소장되어 있다.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