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인(b. 1991)은 서로 연관 없어 보이는 기억의 조각들을 한 화면에 섞어 놓으며, 보는 이로 하여금 그림 속에서 길을 잃고 자신만의 이야기를 상상하게 만드는 ‘열린 그림’을 제작해 왔다. 마치 픽셀과도 같은 기억 조각들은 개인으로 상정되며, 이들을 캔버스 위에 접붙이는 과정을 통해 ‘연대’의 상이 그려지게 된다.  

작가는 이처럼 하나의 의미로 해석 불가능한, 집합된 이미지 조각들을 통해 급변하는 시대적 현상을 성찰하고 모종의 관계망을 구축해 왔다.


김정인, 〈현장 분위기 1〉, 2017, 캔버스에 유채, 72.7x60.6cm ©김정인

김정인의 초기 작업은 ‘재개발’이라는 반복적인 사회 구조의 변형과 대체에 대한 혼란스러움에서 출발했다. 2017년도부터 그는 공사가 한창 진행되고 있는 동네의 풍경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는 어두컴컴하고 삭막한 도심 속 폐허의 풍경 속에 인물들을 함께 그려 넣었다.  

그러나 인물들은 표정이 지워져 있거나(〈무딘 사람들〉(2017)), 얼굴이 드러나지 않거나(〈부정적 시선〉(2017)), 비닐에 씌워져 있거나(〈바람 속 두 남자〉(2017)), 움직이는 역동성에 의해 형체가 불분명하는(〈경계 허물기〉(2018)) 등 개별적인 인물의 정서가 의도적으로 감추어져 있다. 그 반면 인간이 아닌 존재들, 예를 들어 개, 가로수와 같은 존재들의 형체는 비교적 분명하게 드러난다. 


김정인, 〈탈색되는 공간〉, 2018, 캔버스에 유채, 162.2x130.3cm ©김정인

이러한 표현으로 미루어 볼 때, 작가는 도심 속 인물들보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자신의 몸을 환경에 맞춰온 존재들에 심적인 거리감을 더욱 가까이 하고 있어 보인다. 유은순 큐레이터는 이러한 그의 그림에 대해 “개별적인 인물의 정서보다 인간 군상을 통해 자신의 감정을 전달한다. 그런데 그 감정이란 신뢰보다도 회의나 불신의 감정에 가까운 것처럼 보인다”고 해석했다.


김정인, 〈서로를 의존하는 대상〉, 2019, 캔버스에 유채, 162.2x130.3cm ©김정인

나아가 2018년에서 2020년 사이의 그림에서 인간과 나무의 관계가 역전되어 나타난다. 〈탈색되는 공간〉(2018), 〈탈색되는 남자〉(2019)라는 제목에 들어있는 ‘탈색’이라는 단어가 시사하는 것처럼, 화면 속 풍경은 전체적으로 회색조를 띄고 있으며 배경과 인물 간 경계가 불분명하게 그려져 있다.  

아울러, 〈접합된 형상〉(2019), 〈서로 의존하는 대상〉(2019), 〈나무와 남자〉(2020), 〈숨은 남자〉(2020) 등의 그림에서는 화면 중앙에 나무와 인간이 겹쳐지며 둘의 경계가 사라져 있는 형상으로 드러난다.


김정인, 〈숨은 남자〉, 2020, 캔버스에 유채, 90.9x72.7cm ©김정인

이처럼 인간과 도시 문명의 산물을 무채색에 가깝게 채색하거나 형태를 흐림으로써 그 위계의 역사와 존재감을 의도적으로 약화시킨다. 반면 나무와 같은 주변부로 밀려난 존재는 치밀하게 묘사하거나, 다양한 색채와 붓질을 통해 존재감을 부각함으로써, 인간보다 비인간의 존재들을 보다 생동하는 존재로 드러낸다.


김정인, 〈나무에게 가는 길〉, 2020, 캔버스에 유채, 181.1x227.3cm ©김정인

2020년에 이르러 김정인의 회화에 파편화된 형상들의 조합이 화면을 자리하기 시작한다. 초반의 그림에서는 거울이나 유리와 같은 소재가 화면의 분할을 이루고 있다. 예를 들어, 〈거울이 동반된 혼란〉(2020)에서는 여러 개의 볼록거울이 겹쳐지며 주변의 인물과 나무, 풍경 등을 반영함으로써 공간감을 교란시키고, 비현실적이고 초현실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나무에게 가는 길〉도 이와 마찬가지로 복수의 거울을 이용해 주변의 이미지들을 2차원의 화면 안에 모아 놓는다. 그리고 여기서 거울은 인간 무리와 함께 뒤엉키며 하나의 덩어리처럼 나타난다.
 
작가는 이러한 거울의 왜곡과 반사, 겹쳐짐을 통해 “현실 세계가 이미 왜곡되어 있는 것은 아닌지, 무언가를 본다는 것과 무언가를 경험한다는 것을 구분할 수 있는지” 질문한다.  


김정인, 〈꺼지지 않는 불씨〉, 2021, 캔버스에 유채, 72.7x60.6cm ©김정인

한편, 2021년부터의 그림에서 작가는 파편적인 이미지를 화면에서 콜라주 하듯이 조합하고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 나가기 시작한다. 마치 손으로 찢은 듯한 종아리 조각을 테이프로 이어 붙인 듯 접합된 이미지들은 작가의 기억 속에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았던, 이미지로도 소비되지 않은 애매하게 남겨져 있던 것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사소한 것에서 비롯된 기억 조각들은 원래의 전체 형상을 파악하기 어렵고, 어떠한 맥락을 정확하게 암시하지도 않는다. 그렇기에 각각의 조각들은 어떠한 위계를 지니지 않으며, 그저 서로 접해 있는 다른 이미지에 의해 관계를 구성하고 있을 뿐이다.


김정인, 〈이미지 연대〉, 2021, 캔버스에 유채, 162.2x130.3cm ©김정인

이처럼 초반의 작업에서 작가는 급변하는 시대의 흐름에 대한 불안감을 불안정하고 유동적인 액체의 감각으로 그림에 녹아냈다면, 2020년 이후의 그림에서는 “사용 기한이 다한 잔해나 방치된 대상”들을 개별 이미지 조각으로 가져와 이들을 연결해 사회의 급류로부터 저항하는 “이미지의 연대”를 만들어 낸다.


김정인, 〈잔해가 만든 별〉, 2021, 캔버스에 유채, 91x116.8cm ©김정인

2022년 이응노 미술관에서 열린 개인전 《녹일 수 없는 이미지》에서 선보인 그림들에는 보다 정교하게 의식된 화면 분할이 나타난다. 예를 들어, 〈잔해가 만든 별〉(2021)은 찢어진 이미지가 겹치고 만나면서 별의 형상을 만들어 낸다.
 
이후의 그림에서도 별 모양뿐 아니라 하트, 네모와 같은 도상이 화면 곳곳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도상들은 그 자체로서 어떠한 의미나 맥락을 시사하기보다는, 재현된 이미지를 보려는 관객의 시선을 교란시키며 의미의 틈새를 만드는 역할을 한다. 


김정인, 〈풍경을 바라보는 방법 1〉, 2022, 캔버스에 유채, 116.5x91cm ©김정인

이는 이미지의 재현보다 개별 이미지 파편들이 새롭게 겹쳐지며 어떠한 관계와 의미를 만들어 내는지가 작가에게 있어서 더욱 중요하기 때문이다. 파편들의 조합, 그리고 그 사이사이에 들어간 텅 빈 기표들은 관객으로 하여금 화면 앞에 더 오래 머물도록 만들며 하나로 수렴될 수 없는 각자만의 다양한 이야기를 상상하게 만든다.


《픽셀 메모리》 전시 전경(라흰갤러리, 2023) ©라흰갤러리

한편, 2023년 라흰갤러리에서 열린 개인전 《픽셀 메모리》에서 작가는 나무와 인물, 틈새와 천, 스케치 등 그가 기억하는 단편적인 조각들을 정방의 ‘픽셀’ 패턴으로 반복하며 기하학적이고 입체적인 형상을 표현하였다.  

이전까지 그는 이미지들을 평면의 화면 위에 납작하게 쌓곤 했으나, 《픽셀 메모리》에서는 그의 다중적인 경험이 한층 입체적인 층위에서 축적되며 시간성이 해체된 이미지들을 직조해 냈다.


김정인, 〈썰린 기억의 합 1〉, 2023, 캔버스에 유채, 72.7x90.9cm ©김정인

김정인은 기억으로서의 이미지를 분절한 후, 이를 ‘픽셀’의 단위로 무수히 나열함으로써 누실된 시각적 기억을 회화로 조립했다. 이로써 인간의 ‘망각’을 가시화하고, 궁극적으로는 그러한 작업을 통해 망각을 촉진하는 속도에 회화적으로 저항하기를 시도한다.  

‘선명해지는 기억’(2023) 시리즈와 ‘썰린 기억의 합’(2023) 시리즈에서는 그동안 반복적으로 등장했던 나무를 픽셀처럼 분할한 방에서 분리/재조합 되는 과정이 묘사된다. 여기서 등장하는 나무는 작가의 소실된 기억에 대한 은유로서 자리한다. 한편, 그의 기억 속에 선명하게 남겨진 부분들은 집요하게 반복함으로써 대상의 원래 형상이 해체되어 나타난다.


김정인, 〈선명해지는 기억 1〉, 2023, 캔버스에 유채, 72.7x72.7cm ©김정인

그리고 이때 정방형의 입방체가 반복되는 형태를 통해 하나의 입체적인 이미지를 구체화하지만, 그 결과물은 단일한 형상으로 수렴되기보다는 오히려 모호하게 연결된 사슬에 가까워 보인다.  

작가는 정지된 사건의 단면 혹은 그의 기억 속에만 존재하는 이미지를 시간의 선형성에서 이탈한 파편들로 겹쳐 놓으며, 관객으로 하여금 완성된 하나의 이미지를 상상하는 것을 와해하고 ‘기억-이미지’의 불완전성과 비선형성을 가시화한다.


김정인, 〈되감기 1〉, 2025, 캔버스에 유채, 162.2x130.3cm ©김정인

이렇듯 김정인의 회화는 이 사회를 혼란스럽게 하고, 획일화 시키는 비가시적인 압력, 혹은 권력이라는, 사회 변화의 근원에 대한 저항으로 읽힌다. 그의 삶과 기억 속 주변부에 자리했던 소외된 조각들을 끌어 모아 캔버스 위에 만들어진 ‘이미지 연대’는, 각자의 시공간이나 내용, 의미 등을 은폐하고, 비틀어지면서 관계성 없는 외형을 드러내며 모호함을 띤다.   

이러한 뒤엉킴을 통해 만들어진 모호성은 그의 그림에서 권력에 대한 저항의 전략으로 작용한다. 그는 관객으로 하여금 모호함 속에서 길을 잃고, 배회하며 그 의미를 찾아 나갈 수 있도록 함으로써, 그림을 통한 상상하기와 비판적 태도/시각, 주체성 혹은 판단력의 회복 등의 가능성을 실험해 오고 있다. 

 ”단순히 단편적인 이미지를 그려내는 것이 아닌 연대하는 이미지로의 시각화는 혼란스러운 시대상에 대응해 나가는 나의 의식과 태도를 드러낸다.”   (김정인, 작가 노트) 


김정인 작가 ©키아프 서울

김정인은 목원대학교에서 서양화를 전공하고 홍익대학교 일반대학원에서 회화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개인전으로는 《픽셀 메모리》(라흰갤러리, 서울, 2023), 《이미지 연대》(SeMA 창고, 서울, 2022), 《파편 기록》(성곡미술관, 서울, 2022), 《녹일 수 없는 이미지》(이응노미술관, 대전, 2021) 등이 있다.
 
또한 작가는 《Layers of Now》(스페이스458, 서울, 2025), 《페리지 윈터쇼 2024》(페리지갤러리, 서울, 2024), 《무슬리니 팟캐스트》(아마도예술공간, 서울, 2024), 《모노맨숀》(별관, 서울, 2023), 《NANJI ACCESS with PACK : Mbps》(서울시립미술관, 서울, 2022), 《편집된 풍경》(가나아트 부산, 부산, 2022) 등 다수의 단체전에 참여했다.
 
김정인은 서울시립미술관 신진미술인 지원(2022) 및 성곡미술관 오픈콜(2022)에 선정되었으며, 2025년 ‘키아프 하이라이트’ 세미파이널 작가에 선정된 바 있다. 그의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은행, 서울시청 박물관과 등에 소장되어 있다.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