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인화(b. 1991)는 기술을 매개로 역사적 소수자의 경험을 재구성하고, 다양한 존재들의 행위, 반응, 표현 등을 포용하는 방법을 고안해 왔다. 이를 위해 작가는 XR 기술 기반의 ‘3D 퍼포머티브 장치-환경’을 구축해 오며, 관객의 인지, 심리, 신체적 참여를 통한 ‘다른 존재자 되기’의 경험을 이끌어 오고 있다. 


염인화, 〈찬드라 X〉, 2021-2022, 3D 퍼포머티브 장치-환경(PC 기반 VR, 모바일 AR, 설치), 《SIGGRAPH Asia 2022》 전시 전경(대구 EXCO, 2022) ©염인화

염인화의 작업에서 주요한 개념이자 매체인 ‘3D 퍼포머티브 장치-환경’은 3D 그래픽과 인터랙션 기술을 담은 디지털 장치들, 그 외의 비디지털 장치들을 한 데 모아 마치 관객을 위한 무대처럼 제시되는 환경을 의미한다. 이 무대 환경 안에서 관객은 자신이 아닌 또 다른 존재자가 되는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이러한 환경을 구축하기 위해 염인화는 가상현실(VR)과 증강현실(AR)이 상호 연동되고 운용되는 환경인 확장현실 기술을 활용한다. 이러한 장치/환경은 기술적 시스템 자체로서 상호 수행성을 지니는 동시에, 관객의 참여를 통해 또 다른 수행성이 뒤얽히게 된다.


염인화, 〈찬드라 X〉, 2021-2022, 3D 퍼포머티브 장치-환경(PC 기반 VR, 모바일 AR, 설치), 《마믅소리 Mameunsori (MMSR)》 전시 전경(아트스페이스 보안, 2022) ©염인화

즉, 그의 작업은 관객/퍼포머와 장치/환경이 서로가 서로의 존재와 역할에 따라 영향을 주고 받는 관계를 바탕으로 작동된다. 작가는 이러한 상호 수행성의 관계망 안에서 관객이 하나의 무대이자 동반 퍼포머인 장치/환경과 함께 내가 아닌 다른 존재자들의 감각과 경험, 사유에 비판적으로 몰입할 수 있도록 한다.
 
예를 들어, 2021년에 발표한 3D 퍼포머티브 장치-환경인 〈찬드라 X〉는 복수의 관객이 이종 기기 네트워크 환경 속 이종 현실들을 가로질러 서로의 경험에 실시간으로 연결-개입하고, 또 수행-행위에 대한 상호작용과 피드백을 주고 받을 수 있는 환경이다.


염인화, 〈찬드라 X〉, 2021-2022, 3D 퍼포머티브 장치-환경(PC 기반 VR, 모바일 AR, 설치) ©염인화

작품의 제목인 ‘찬드라’는 중성적인 이름으로 힌두교의 달의 신이자 미국항공우주국(NASA)이 개발한 ‘찬드라 X선 망원경’의 이름을 차용하여 작가가 창조한 캐릭터이다. 가상현실과 증강현실이 상호 연동된 장치/환경 속에서 관객은 ‘찬드라’가 되어, 마치 우주를 항해하듯 다양한 층위가 뒤섞인 현실들 사이를 오가고 변주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염인화, 〈찬드라의 신호〉, 2021, 3D 퍼포머티브 장치-환경(PC 기반 VR, 설치) ©염인화

2021년 대전시립미술관에서 열린 단체전 《게임과 예술: 환상의 전조》에서 선보인 〈찬드라의 신호〉에서 염인화는 행성-스케일 컴퓨팅 시스템 기반의 신봉건주의 사회를 구축한다.
 
그 안에서는 에너지원을 얻기 위해 채굴 작업을 반복하는 노동자와 이를 감시하는 1인칭 시점의 게이머이자 ‘찬드라’라 불리는 계급사회의 중간자가 등장한다. 전시에서 관객은 직접 컴퓨터를 조작해 프로그램을 구동하여 작품 속 서사를 플레이할 수 있었다.


염인화, 〈A.C.(After Chandra, 애프터 찬드라)〉, 2025, HMD VR, 영상, 크리스탈 설치, 15분 ©ACC

최근 염인화는 ‘찬드라’를 신경망 환경을 관리하는 존재로 제시하고, 찬드라의 연대기를 3개의 시공간 차원으로 확장하여 관객의 신체와 감각을 통해 그 사이를 매개할 수 있는 3D 퍼포머티브 장치-환경 시리즈 ‘찬드라 연대기: 인 뉴로버스’(2025)를 발표했다.
 
이 작업에서 관객은 실물현실, 증강현실(AR), 가상현실(VR)을 넘나드는 다양한 기술 매체를 통해 〈A.C. (애프터 찬드라)〉, 〈B.C. (비포 찬드라)〉, 〈C.C. (한창의 찬드라)〉라는 3개의 시공간 차원을 매개하는 수행자(performer)이자 ‘찬드라’가 된다.
 
관객은 디지털 기술을 매개로 이 3개의 시공간을 넘나들며 찬드라가 가장 역동적이었던 시절의 시지각 상태부터 은퇴 후 접어들게 된 찬드라의 신경 노화 상태를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각각의 시공간에서 수행되는 모든 행위는 즉시 뉴로버스 전반에 전달되어, 다른 시공간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임포스터 키친》 전시 전경(공간:일리, 2022) ©염인화

2022년 공간:일리에서 열린 개인전 《임포스터 키친》에서 선보인 동명의 작업 〈임포스터 키친〉 또한 인간의 노화를 다루는 3D 퍼포머티브 장치-환경 작업이었다. 〈임포스터 키친〉은 오픈 키친 형식의 파인다이닝 레스토랑에서 노화 현상을 둘러싼 이해관계망과 그 다양성을 사변한다.
 
레스토랑의 각 테이블에는 환자 보호자, 연구원과 엔지니어, 사업가와 투자자, 동물권 활동가 등이 그룹을 지어 앉아있다. 한편, 키친에서는 스테이크 에이징을 위한 의사-수술적 과정을 하나의 스펙타클처럼 제공한다.


《임포스터 키친》 전시 전경(공간:일리, 2022) ©염인화

이때 관객은 키친과 테이블 사이를 오가며, 서로 다른 에이징 기법의 스테이크 요리를 코스에 따라 전달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그 과정에서 한 당사자의 지분(stake)을 다른 이해 관계자에게 이전하거나 매개할 수 있다.
 
작품은 이와 같은 관객 수행성을 통해 노화를 키워드로 일견 상충하는 듯한 여러 이해 관계들이 다시 연결되고, 공생하는 동시대 사회의 양상을 탐구한다.


염인화, 〈이너뷰티 스파〉, 2023, 3D 퍼포머티브 장치-환경(PC 기반 VR, 모바일 AR, 설치), 《행성공명》 전시 전경(국립아시아문화전당, 2023) ©ACC

2023년 염인화는 국립아시아문화전당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참여하며 ‘신경다양성(neurodiversity)’에 대한 관심을 바탕으로 3D 퍼포머티브 장치-환경 〈이너뷰티 스파〉(2023)를 제작했다. 작품은 정신 기능 이상 또는 질환이라 여겨진 것을 신경 유형의 ‘차이’로서 인정하는 태도에서 출발한다.
 
이 스파는 다양한 신경유형의 고객들을 환영하며, 이들의 내면 아름다움을 위한 각종 신경케어 서비스를 제공한다. 관객은 〈이너뷰티 스파〉의 관리사 역할을 맡아, 가상현실 장치 속에 묘사된 스파 관리실 곳곳을 이동하며 고객을 응대하게 된다. 이때 각자만의 고민과 통점을 털어놓는 고객들의 음성이 한 가닥의 노래처럼 흘러나오며, 관객은 이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염인화, 〈이너뷰티 스파〉, 2023, 3D 퍼포머티브 장치-환경(PC 기반 VR, 모바일 AR, 설치), 《행성공명》 전시 전경(국립아시아문화전당, 2023) ©ACC

또, 관객은 테이블 앞에 앉아 〈이너뷰티 스파〉가 자랑하는 증강현실 기반의 ‘뷰티 기기’를 활용해 고객들을 위한 관리 매뉴얼을 수행하게 된다. 관리사의 주된 역할은 고객의 각종 요청에 ‘주파수 맞추기,’ ‘채널링하기,’ 그리고 이에 ‘공명하기’ 등의 행위를 포괄한다. 그 과정에서, 관리사는 고객들의 노랫가락 같은 목소리에 대한 반주이자 화음이자 추임새를 넣는, 일종의 오페라 오케스트라와 같은 역할도 수행한다.
 
궁극적으로, 이러한 일련의 수행성이 작동하는 〈이너뷰티 스파〉의 시공간을 통해 염인화는 신경다양성을 일상적으로 감각하고 포용할 수 있는 장소들이 보편화된 근미래를 그린다.


염인화, 〈사우나랩〉, 2024, 3D 퍼포머티브 장치-환경(멀티 채널 영상, 프로젝터, TV 모니터, 의자) ©염인화

이후 선보인 작업 〈사우나랩〉(2024)에서 염인화는 과학 기술 자본이 특정 계층에 집중되어 있는 현상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며, 과학 기술 자본이 기후 위기 약자들에게 무상으로 공유되는 미래를 상상하였다.
 
대전 유성구의 과학 기술 연구 자본과 온천 시설을 재사용해 설립된 시민 참여형 기후 연구소인 〈사우나랩〉은 노년층과 미래 세대가 함께 기후 위기를 연구하는 가상의 공동체이다. 이때 작가는 ‘기후 위기 취약계층’이라는 표현 대신 ‘기후 위기 생존자’라는 표현으로 노년층을 재명명하고, 이들의 위상을 기후 문제를 해결하는 주체로 재위치시킨다.


염인화, 〈솔라소닉 밴드〉, 2024, 3D 퍼포머티브 장치-환경(PC 기반 VR, 모바일 AR, 스테인리스 스틸, 거울, 크리스탈 재질의 장치들), 15분, 언폴드엑스 2024 《2084: 스페이스 오디세이》 전시 전경(문화역서울284, 2024) ©언폴드엑스

기후 위기라는 동시대의 전 지구적 문제에 대한 작가의 관심은 XR 기반의 관객참여형 퍼포먼스 〈솔라소닉 밴드〉(2024)에서도 이어서 다루어졌다. 작업은 기후 위기 시대에 ‘태양’이 떠 있는 한 야외 공연을 계속 이어가고자 하는 희망을 가지고, 관객을 기후 공동 행동으로 끌어들이고자 한다.
 
관객은 스크린 중앙에 마련된 ‘밴드 리드’ 단상 위로 올라가 증강현실(AR) 기반의 ‘밴드 스탠드’ 악보를 연주하며 가상현실(VR)로 구현된 5개의 기후 권역—대기권, 수권, 암석권, 빙하권, 생물권—을 위한 순회 공연의 리허설을 이끈다. 악보는 기후 데이터를 바탕으로 구성되며, 밴드 리드의 실시간 상호작용에 따라 변주되는 기후 위기 시나리오를 반영한다.


염인화, 〈솔라소닉 밴드〉, 2024, 3D 퍼포머티브 장치-환경(PC 기반 VR, 모바일 AR, 스테인리스 스틸, 거울, 크리스탈 재질의 장치들), 15분 ©염인화

이처럼 염인화는 생명공학, 클라우드 컴퓨팅, 비인간 행위자 등을 매개로 다양한 신체성과 수행성을 탐구하며, 인간과 비인간의 협업적 감각을 탐구해 왔다. 그는 기술과 공연, 예술의 경계에서 ‘3D 퍼포머티브 장치-환경’을 창작해 오며, 이를 통해 다양한 (비)인간의 행동, 반응, 표현을 포함하고 사회의 역사 속에서 구축된 ‘소수자들’을 위한 무대를 제공해 왔다.
 
관객의 인지적, 심리적, 신체적 참여를 기반으로 하는 그의 장치-환경은, 주류 사회의 기준에서 소외되어 온 ‘소수자들’의 존재와 그들의 이야기가 관객에게 감각적으로 전이되고 발화될 수 있는 무대가 된다.

 ”3D 퍼포머티브 장치-환경이라는 하나의 무대이자 동반 퍼포머와 함께 내가 아닌 또 다른 존재자들의 감각과 사유, 경험에 좀 더 비판적으로 몰입할 수 있기를 바란다.”   (염인화, 2023 ACC 레지던시 참여자 인터뷰) 


염인화 작가 ©ACC

염인화는 미디어 아티스트이자 확장 현실(XR) 연구자이며, 확장 현실(XR) 기반 바이오테크 R&D 스타트업 바이오브의 창립자이다. 개인전으로는 《임포스터 키친》(공간:일리, 서울, 2022-2023), 《물에서 타는 불》(갤러리 메일란, 서울, 2022), 《찬드라 X》(온라인, 2021)이 있다.
 
또한 작가는 《백남준의 도시: 태양에 녹아드는 바다》(백남준아트센터, 용인, 2025), 《Whispering, Plating Myth》(타이완 컨템포러리 컬쳐 랩(C-Lab), 타이베이, 2024), 언폴드엑스 2024 《2084: 스페이스 오디세이》(문화역서울284, 서울, 2024), 《넥스트 코드: 누구든 낙오하지 않을 항해에 관한 기록》(대전시립미술관, 대전, 2024), 《행성공명》(국립아시아문화전당, 광주, 2023) 등 다수의 단체전에 참여했다.
 
염인화는 현대 아트 랩 & 현대자동차 주관 제6회 VH 어워드(2024), LG아트센터 & 엘지전자 주관 미디어아트 신진작가 공모전에 수상한 바 있으며, 타이완 컨템포러리 컬쳐 랩(타이베이, 2024), 국립아시아문화전당(광주, 2023) 등의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참여하였다.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