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우리(b. 1986)는 영상, 사진, 책, 설치 등의 매체를 통해 사라져 가는 사물들의 세계를 탐구하고, 사물을 바라보고 감각하는 다양한 방식에 주목해 왔다. 특히, 작가는 이미지와 언어, 허구와 사실의 관계를 살펴보며, 무엇이 오래된 것과 새로운 것, 버려진 것과 통용되는 것을 구분 짓는지 추적하여 동시대 일상을 새롭게 바라보고자 한다.


《희미한 파타 모르가나》 전시 전경(청주미술창작스튜디오, 2020) ©청주시

초기 작업에서 한우리는 개인의 차원에서 경험한 사라져 가는 순간들을 붙잡아 작품으로 기록하고자 했다. 이를테면, 그의 두 번째 개인전 《희미한 파타 모르가나》(청주미술창작스튜디오, 2020)는 작가 자신의 아버지로 상징되는 이전 세대가 살아온 세계를 바라보는 영상과 청주에서 서울을 오가며 신기루로 느껴진 희미한 장면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전시 제목 ‘희미한 파타 모르가나’에서 ‘파타 모르가나(Fata Morgana)’는 신기루를 만들어 배를 좌초시키는 물의 정령인 동시에 신기루를 뜻하는 단어이다. 한우리는 빛이 반사되어 허공에 어떤 물체가 보이는 현상인 신기루를 “존재하는 것과 지각되는 것 경계에 있는 어느 희미한 장면”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이 희미한 장면들은 사라짐을 전제로 한다.


《희미한 파타 모르가나》 전시 전경(청주미술창작스튜디오, 2020) ©청주시

 전시는 이러한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가까이 다가갈 수 없고, 치열하게 존재하지만 사라질지도 모르는 세계를 기억하고자 하는 작가의 의도를 담았다.
 
예를 들어, 전시와 동명인 2채널 영상 작품 〈희미한 파타 모르가나〉(2020)는 작가의 아버지가 치료를 위해 침을 맞고 있는 모습을 관찰자의 시선으로 담아낸다. 컬러와 흑백으로 구성된 영상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존재의 변화를 보여주는 동시에 사라지는 것을 붙잡고자 하는 욕망을 시적이고 정적인 분위기로 드러낸다.


《희미한 파타 모르가나》 전시 전경(청주미술창작스튜디오, 2020) ©청주시

한 폭의 정물화처럼 놓여 있는 과일, 흘러내리는 양초, 끓어오르는 커피포트 등의 미장센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물질의 상태를 은유적으로 보여준다. 매우 느린 속도로 전개되는 영상은 관객으로 하여금 그 안에 녹아져 있는 시간의 흔적들과 유한성을 내재한 장면들을 천천히 지켜보게 만든다.


《실과 리와인더》 전시 전경(아트스페이스 보안, 2022) ©보안1942

언젠가 사라질 순간들을 기록해오던 한우리는 자연스럽게 사라져 가는 사물이나 기술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특히, 작가는 오늘날 점차 사라져 가는 16mm 필름과 그 시간성에 주목했다. 디지털 이후 아날로그 필름을 알게 된 세대로서 작가는 이 오래된 매체가 오히려 뉴미디어로 다가왔다고 말한다.
 
한우리는 디지털 기술의 발달로 점점 설 곳을 잃은 아날로그 필름을 디지털과 아날로그라는 이분법을 넘어 새롭게 바라보고, 디지털 환경에서 필름으로 인해 발생되는 관계나 그것들이 살아남는 방식, 그리고 그 시간을 그려내는 방법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실과 리와인더》 전시 전경(아트스페이스 보안, 2022) ©보안1942

2022년 아트스페이스 보안에서 열린 개인전 《실과 리와인더》는 이러한 작가의 고민이 반영된 작품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전시는 사라질 것이 예정된 사물에 대한 이야기로,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잊히고 주변부로 밀려나는 것들을 새롭게 감각하여 소외된 세계와 다시 접속하고자 하는 시도를 담고 있었다.
 
전시에서 선보인 총 3점의 영상은 ‘발견된 이야기’에서 출발한다. 이야기는 발견된 동시에 만들어진 것이며, 공적인 동시에 시적이고, 사실적인 동시에 허구적이다. 작가는 발견한 천체 지도, 동화, 그리고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서사를 가져와 새로운 서사로 재구성했다.


한우리, 〈베르팅커〉, 2022, 비디오로 변화된 16mm 필름, 컬러, 사운드, 스테인리스 스틸, 7분 30초. ©한우리

먼저, 〈베르팅커〉(2022)는 17세기 독일의 천구 지도 제작자인 요한 바이어(Johann Bayer)가 만든 천체 지도 ‘우라노메트리아(Uranometria)’에 표기된 별자리 중 유일한 곤충 자리인 ‘파리자리’에서 착안하여 만든 가상의 설화를 통해 사라져 가는 사물의 삶을 은유한다.
 
‘베르팅커’는 과거 ‘파리’를 지칭했던 단어로, 이제는 사라진 이름이다. 영상에 따르면, 파리자리는 유일하게 신화가 존재하지 않는 별자리이기도 하다. 한우리는 사라져버린 이름과 부재한 신화를 아날로그 필름이라는 매체와 겹쳐 보며, 곤충 별자리에 대한 가상의 설화를 꾸며내어 오늘날 사라져 가는 사물의 존재에 의미를 부여한다.

한우리, 〈투명한 감각〉, 2022, 비디오로 변화된 16mm 필름, 흑백, 컬러, 사운드, 11분 15초. ©한우리

한편, 〈투명한 감각〉(2022)은 독일 하메른에서 내려오는 전설을 바탕으로 한 동화 ‘피리 부는 사나이’ 서사의 뒷이야기를 다룬다. 영상에서 카메라는 피리 부는 사나이를 따라가지 못하고 남겨진 아이들의 시선을 따라간다. 다리를 저는 아이, 앞이 보이지 않는 아이, 소리가 들리지 않는 아이, 이 세 명의 아이들은 피리 소리를 따라 사라져버린 친구들이 남기고 간 사물을 매개로 그들을 기억한다.
 
사라진 친구 혹은 그 무엇은 필름, 광학적 이미지 등을 은유하며, 디지털 매체에 잠식된 오늘날 우리가 잃어버리게 된 다양한 감각을 환기한다.


한우리, 〈얇고 깊은〉, 2022, 16mm 필름, 3D 애니메이션, 디지털 비디오, 4분 30초. ©한우리

실수로 얻어진 필름 이미지를 스캔하여 만든 영상 〈얕고 깊은〉(2022)은 필름 메이커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겪은 작가의 경험을 바탕으로 제작되었다. 커뮤니티 멤버들은 아날로그 필름과 관련된 더 이상 판매되지 않는 장비와 부품 등을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제작하고 매뉴얼과 결과물을 공유한다.
 
사물의 사라짐을 앞둔 시점에서 이들의 헌신적인 노력과 애정, 그리고 오랜 시간의 대가로 만들어진 다양한 이미지들은 사람과 사물, 그리고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또 다른 관계를 만들어 낸다.


《루프: 개를 흔드는 꼬리》 전시 전경(아마도예술공간, 2024) ©아마도예술공간

나아가, 2024년 아마도예술공간에서 열린 개인전 《루프: 개를 흔드는 꼬리》에서 한우리는 필름이라는 희미해진 매체를 중심으로, 디지털 기술의 신비화 또는 환상성 아래 우리가 보지 못한 것은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전시에서 선보인 3점의 영상 작품 〈루프〉(2024), 〈포털〉(2024), 〈성냥〉(2024)은 유명한 신화와 소설의 서사를 변용하지만 동시에 『은입자』(2023)의 서사와 각각 직접적이고도 느슨한 연결을 맺는다.
 
한우리의 텍스트 작업 『은입자』는 ‘얇은 사물’을 중심으로 한 두 인물의 경험이 시간차를 두고 교차하며 펼쳐지는 SF소설이다. 주인공 A는 모든 사회 시스템이 최적화된 네트워크 환경으로 환원된 ‘세계’ 속에 살아가는 인물로, 우연한 시스템의 오류로 ‘바깥’ 세계로 나와 이 미지의 공간에서 ‘세계’에 등재되지 않은 한 신비한 사물을 마주하게 된다.


한우리, 〈은입자〉, 2023, 출판물과 DVD, 가변설치, 《루프: 개를 흔드는 꼬리》 전시 전경(아마도예술공간, 2024) ©아마도예술공간

한편, 보다 머지않은 미래인 2033년, B는 벼룩시장에서 우연히 ‘얇은 사물’을 구매하게 되고 이 막에 새겨진 타인의 기억을 보며 자신의 역사 또한 새기고 싶다는 욕망을 갖게 된다. 이후 그는 얇은 사물을 둘러싼 기기를 어렵게 구하고 사용법을 알아내려 애쓴다. 이 사물을 그나마 알고 있는 얼마 남지 않은 과거 세대에게 조언을 구하고, B처럼 얇은 사물에 기묘한 애착을 가진 웹 속 익명의 인물들과 소통하며 더욱 얇은 사물에 빠져들게 된다.
 
소멸 직전의 사물, 즉 필름을 중심으로 중첩되는 두 인물의 이야기는 시간에 따라 혹은 그것과 관계없이 여전히 잔존하는/생성되고 있는 사물-인간의 공동체를 다룬다.


한우리, 〈루프〉, 2024, 16mm 필름, 루프(스테인리스 스틸, 아크릴, 영사기), 가변크기, 3분 30초, 《루프: 개를 흔드는 꼬리》 전시 전경(아마도예술공간, 2024) ©아마도예술공간

이러한 『은입자』의 먼 전편(prequel)이라 볼 수 있는 〈루프〉는 신을 기만해 영원한 형벌에 처해진 시시포스 신화를 배경으로 삼는다. 그러나 여기에서 시시포스는 무한한 형량의 노동을 시작하기 전, 자신의 그림자로부터 모종의 탈출책을 제안받는다. 역설적이게도 시시포스는 자신의 반영체를 뒤따라 잡거나 그의 산물이 어딘가 숨긴 선물을 찾아야만 한다. 마침내 그는 숨겨진 보물을 찾지만 모른 척 다시 묻어둔 채, 영원한 노동으로부터의 영원한 탈출을 포기한다.
 
돌을 굴려 올리지만 않는다면 다시 미끄러져 같은 일을 반복하지 않을 텐데도 고난을 택하는 신화 속 시시포스처럼, 〈루프〉 속 시시포스는 해방 대신 반복을 자처한다. 이 반복의 서사는 〈루프〉의 일부이자 전체인, 필름의 미로를 품은 커다란 장치에 걸려 되풀이된다. 루프 또는 루퍼(looper)로 지칭되며 필름의 연속 상연을 가능케 했던 이 장치는 최근 영상 재생 인터페이스에서 무한대 기호의 버튼으로 축약된 반복재생(loop) 기능의 전형이다.
 
〈루프〉의 기념비적 장치는 무한한 재생을, 이미지의 영원을, 그 시간을 가능케했던 물질의 부피를 되살리며, 기술 발전 속에서 압축되었던 시간을 물질적으로 가시화한다.


한우리, 〈포털〉, 2024, 단채널 비디오, 돌(대리석, 회토류), 가변크기, 5분 30초, 《루프: 개를 흔드는 꼬리》 전시 전경(아마도예술공간, 2024) ©아마도예술공간

〈포털〉은 『은입자』 세계관 안에서, 먼 과거인 〈루프〉와 미래인 〈성냥〉 사이를 잇는 가교의 역할을 하는 작품이다. 모노리스, 문, 혹은 핸드폰을 닮기도 한 이 스크린에는 『은입자』 세계관 속에서 현실이나 가상 어디로나 언제든 연결 가능한 ‘포털’ 광고가 흘러나온다.
 
그러나 빛 바랜 인물, 섬세한 노동, 부산물들은 포털이 더욱 더 얇고 투명해지는 만큼 함께 지워진다. 포털의 유동성, 완전 무결성으로부터 배제/부정되어야 하는 무가치한 것들이기 때문이다. 〈포털〉의 서사 앞에서 우리는 해마다, 심지어 분기마다 갱신되는 스크린을 떠올리며, 과연 얼마나 많은 ‘부산물’이 지워지고 숨겨졌는지, 이미지 재현의 ‘마법’이 우리 손에 쥐어졌는지, 또 다른 ‘포털’을 찾아 헤매는 영원한 굴레를 벗어나게 될지를 질문하게 된다.


한우리, 〈성냥〉, 2024, HD 영상 변환 16mm 필름, 컬러, 사운드, 13분 30초, 《루프: 개를 흔드는 꼬리》 전시 전경(아마도예술공간, 2024) ©아마도예술공간

『은입자』의 세계관을 바탕으로 한 액자형 구조의 서사 〈성냥〉은 ‘마법자’들이 세상 곳곳에 뚫어 둔 ‘포털’의 이음새나 결함적 포털을 찾아내는 한 ‘추적자’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세계’ 시스템이 포섭하지 못한 세상을 찾아 등록된 ‘장소’들로부터 벗어나는 탐사를 이어가는 추적자는, 한 공간에서 지속시간도 짧고 오롯이 사용자의 능력이 더해져야만 세상을 펼쳐 보이는 아주 오래된 포털, 성냥과 마주한다.
 
성냥을 통해 추적자가 들여다 본 곳에는, 한 괴물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창조주에게 버림받아 분노의 화신이 된 피조물, 그러나 후세엔 그가 그토록 애증하던 창조주의 이름으로 불리게 된 프랑켄슈타인이 그 주인공이다. 다만 여기에서 괴물은 원작과 달리 자신이 버림받고 절망에 빠진 이유를 스스로에게서 찾는다. 그의 비극이 인간적 가치들과 아름다운 자연을 보게 된 것에서 시작되었다고 여긴 괴물은, 그 괴로움의 원초적 이유인 무언가를 볼 수 있는 가능성, 즉 자신의 눈을 불태우기로 결심한다.


한우리, 〈성냥〉, 2024, HD 영상 변환 16mm 필름, 컬러, 사운드, 13분 30초, 《루프: 개를 흔드는 꼬리》 전시 전경(아마도예술공간, 2024) ©아마도예술공간

그러나 태양을 응시하다 극심한 고통을 느껴 눈을 돌려버린 괴물은, 자신의 눈을 서서히 멀게 할 빛을 찾아 나서다가 오래된 도시에서 아주 작고 낡은 ‘태양’을 발견한다. 수명이 짧은 ‘태양’을 켤 때마다 그는 조금씩 시력을 잃었고, 시각에 주의를 빼앗겨 잊고 있었던 저 자신만의 시간을 매만질 수 있게 된다.
 
〈성냥〉은 가시적 이미지 없이도 상상을 매개했던 낡은 광원과 이를 둘러싼 이야기로 시각성에 지배된 당대의 그림자를 비추어볼 수 있게 한다. 보이지 않았거나 보지 않음을 택했기에 시간과 세상을 되찾은 두 인물은, 끝없이 반복되며 주의를 갈구하는 이미지들로 인해 다중적 감각 대부분이 멀어버린 현 시대의 우리들에게 시각을 잠시 내려놓는다는 또 다른 가능성을 속삭인다.


한우리, 〈루프〉, 2024, 16mm 필름, 루프(스테인리스 스틸, 아크릴, 영사기), 가변크기, 3분 30초, 《랜덤 액세스 프로젝트 4.0》 전시 전경(백남준아트센터, 2025) ©백남준아트센터

이러한 한우리의 작업은 구시대의 사물에 대한 향수 혹은 낯선 친밀함을 자극하고자 당대 문화의 한 양태와 접목시키는 것이 아닌, 매끄러운 외피로 다시 포장된 구시대성을 바깥으로 드러내어 여전히 남겨져 있는 그 사물의 존재성과 시간성을 가시화하는 시도라 할 수 있다.
 
한우리가 보여주는 디지털을 경유한 필름의 이미지들은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기술 가속시대 이면에 가려진 것들을 다시 호명하면서 이 세계를 더욱 잘 들여다 볼 수 있게 한다. 즉, 그의 작업은 디지털과 아날로그라는 매체 자체에 대한 이야기이기보다는, 그것이 만들어내는 관계를 통해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을 다중적 감각으로 마주하기를 제안한다.

 ”이미지와 언어, 허구와 사실 관계 속에서 무엇이 어떤 것을, 오래된 것과 새로운 것, 버려진 것과 쓰이는 것, 감춰진 것과 드러난 것으로 만드는지를 추적하면서 동시대의 일상을 새롭게 바라보고자 한다.”     (한우리, 2023년 국립현대미술관 고양레지던시 국내 일반 입주작가 인터뷰 중) 


한우리 작가 ©국립현대미술관

한우리는 이화여자대학교에서 회화 및 판화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서양화 전공을 졸업했다. 최근 개인전으로는 《루프: 개를 흔드는 꼬리》(아마도예술공간, 서울, 2024), 《실과 리와인더》(아트스페이스 보안, 서울, 2022), 《희미한 파타 모르가나》(청주미술창작스튜디오, 청주, 2020) 등이 있다.
 
또한 작가는 《랜덤 액세스 프로젝트 4.0》(백남준아트센터, 용인, 2025), 《백남준, 김실비, 얄루, 한우리: 포지티브피드백》(갤러리박, 서울, 2024), 프리즈 필름 2023 《It was the way of walking through narrative》(아트스페이스 보안, 서울, 2023), 《이미지들》(하이트컬렉션, 서울, 2023), 《The missing Duduri》(TINC, 서울, 2022), Switzerland International Film Festival, Foreign Films(오본느, 스위스) 등 다수의 단체전에 참여한 바 있다.
 
한우리는 국립현대미술관 고양레지던시(2023), 청주미술창작스튜디오(2019-2020) 입주작가로 활동하였으며, 그의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 정부미술은행, 서울시, 양주시립장욱진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