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을지로(b. 1994)는 모델링 프로그램을 활용해 3D 애니메이션, 증강현실(AR) 등 다양한 미디어 작업을 선보이고 있다. 작가는 현실과 가상의 물질-비물질이 각기 다른 환경-인터페이스에서 작동하는 방식에 관심을 두며, 현실의 대상을 디지털 환경에서 재현하는 방식을 탐구하거나 물리 법칙을 벗어난 허구의 물질을 만들어 새로운 유기체를 탄생시키기도 한다.
 
특히, 작가는 3D 기술을 통해 사람들이 잘 알지 못하는 식물의 세계, 식물의 능력, 그리고 그들간의 네트워크를 표현하는 방법을 탐색하며, 균류의 증식이나 식물의 성장처럼 생물이 생성되는 구조와 3D 그래픽 작동 방식 사이의 유사성을 탐구해 오고있다.


김을지로, 〈胞(포), 측면〉, 2023, 3D애니메이션, 단채널 비디오, 컬러, 무음 ©김을지로

김을지로는 모델링과 렌더링 등의 과정들이 특정 소재와 물리적 현상을 재해석하도록 도와준다는 점에 흥미를 가지며 3D 소프트웨어를 주된 작업의 매체로 사용해 왔다. 그는 현실을 모방하고자 하는 3D 이미지가 비록 현실을 이길 수는 없지만, 프로그램 안에서 애니메이션을 설계하고 라이팅을 설정하고 바람 시뮬레이션을 적용해 만든 식물이나 유기체 모델링은 물리적인 현실과 다른 맥락을 획득할 수 있다고 보았다.


김을지로 3D 작업 프로세스 ©김을지로

그의 작업이 이루어지는 3D 프로그램에서는 거의 무한에 가까운 가상의 공간이 만들어진다. 그러나 보여지는 결과물은 프로그램 속에서 작가가 설정한 카메라의 시점을 통해 결정된다. 현실의 카메라는 물리적인 제약이 존재하지만, 프로그램 속 카메라는 물고기의 시각처럼 비인간의 시점으로 왜곡하거나 원근법을 뒤집어 보여준다.
 
이러한 3D 기술은 인간 중심적인 이미지를 재현할 수 있는 동시에, 김을지로의 작업에서는 어떠한 시점으로 접근하는지에 따라 비인간화, 타자화 할 수 있는 전복적인 도구로서 활용된다.


김을지로, 〈NULL player〉, 2020, AR 프로그램, 컬러, 무음 ©김을지로

2020년 코로나 19로 인한 비대면 사회를 맞이하게 되면서 많은 전시가 온라인으로 대체되고 현실과 가상의 경계를 주제로 삼았다. 김을지로 또한 그러한 전시에 참여하며 가상의 레이어를 현실 공간에 덧입히는 AR 작업 등을 선보여 왔다.
 
이를테면, 2020년에 선보인 AR 작업 〈NULL player〉는 코로나19로 인해 선거운동이 거리 유세보다 온라인 유세를 시도하는 가운데, 보다 효과적인 비대면 거리 유세를 제안한다. 기존의 소모적인 선거운동을 대체할 디지털 선거운동원 ‘NULL player’들은 AR 필터를 착용하면 언제 어디서나 소환되어 무소음-무공해-친환경적인 선거유세를 펼친다. 현실 공간에 얹혀진 3D 애니메이션 속 동작들은 특정 정당을 표현하지 않는 흔한 안무로 이루어졌다.


김을지로, 〈N. rafflesiana sema〉, 2021 ©김을지로

팬데믹 당시 갈 수 없는 장소를 3D 기술로 재현하거나 금지된 행동을 AR 기술로 대리하는 가운데 김을지로는 “가상과 실제를 구분하기 어려운 이미지란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관심은 현재까지도 이어져 식물이 생장하는 과정이 가진 디지털 이미지와의 유사성과 차이점을 주제로 확장해 나갔다.


김을지로, 〈N. rafflesiana sema-micro〉, 2021 ©김을지로

2020년을 기점으로 작가는 ‘프로시듀얼’이라고 하는 절차적 모델링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이는 반복적인 형상과 효과를 조절하기 좋은 접근법으로, 김을지로는 여기에 랜덤한 값을 더하여 생성되는 창발적인 현상들을 포착해 왔다.
 
이를 통해 작가가 포착하는 이미지들은 논리적인 규칙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무생물로 보이지 않으며, 마치 박동하는 세포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한다.


김을지로, 〈Hyper-morphogenesis β〉, 2022, 단채널 비디오, 50초, 반복재생 ©김을지로

예를 들어, 2022년에 선보인 〈Hyper-morphogenesis β〉는 최소한의 기능을 위해 발달한 미생물 생태계의 형상과 3D 인터페이스의 가상 물리로 구성된 비물질 세계의 유사성을 탐구하는 작업 중 하나다. 작가는 소프트웨어 내부에 물리적 환경을 조성하고, 시스템 안에서 자라난 새로운 종을 관찰하고 촬영했다.
 
‘Morphogenesis’라는 단어는 유기체의 형태를 통해 기원을 유추하는 개념을 의미한다. ‘Hyper-morphogenesis’는 그 둘의 상관관계를 역설하여 기능과 형태의 연관성을 와해시키고,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데이터의 움직임을 통해 그에게서 발생하는 화학작용 혹은 형태적 근거를 유추해 볼 수 있는, 존재하는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 미생물이다.

김을지로, 〈고사리 걸음〉, 2022, 단채널 비디오, 컬러, 사운드(스테레오), 2분. 국립아시아문화 전당 제작지원. 작가 소장. 안무: 이재은, 식물 알고리즘 모델링: 정연태, 사운드: 최영. ©ACC

한편, 2022년 국립아시아문화전당에서 열린 단체전 《반디산책: 지구와 화해하는 발걸음》에서 선보인 가상 식물 작업은 인류보다 먼저 행성에 정착한 고사리에 대한 경외심에서 전개되었다. 먼저 고사리의 자기복제성과 무성아 번식에 대한 호기심을 바탕으로 제작된 〈고사리 걸음〉(2022)은 고사리의 형태적 특질을 3D 프로그램이라는 가상 인큐베이터에서 배양하고 인간 몸짓의 궤적을 입혀 발아시킨 작업이다.
 
이를 위해 작가는 무용수의 모션을 캡쳐하고 그 궤적에 식물의 이미지를 생성하여 새로운 혼종을 만들어냈다. 즉, 작품에서 인간은 포자를 위한 배지가 되고, 두 가지 혹은 그 이상의 다른 생물종이 가진 각기 다른 타임라인의 충돌은 하이브리드를 낳는다.


김을지로, 〈입체 프레파라트〉, 2022, 4채널 비디오, 컬러, 사운드, 3분.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제작지원. 작가 소장. 안무: 이재은, 식물 알고리즘 모델링: 정연태, 사운드: 최영. ©ACC

이와 연장선상에 있는 작업 〈입체 프레파라트〉(2022)는 〈고사리 걸음〉에서 배양한 유기체를 ACC 미디어월이라는 가상의 디지털 테라리엄에 이식한다. 작가는 지하부와 지상부에 걸쳐 정보와 이미지가 방출되는 조형물의 특징을 토양에 뿌리내려 생장하는 식물의 구조와 병치시킨다.
 
이로써 지하와 지상을 오가며 구조물을 체험하는 관객은 지상부에 위치한 유기체로 전달되는 영양 물질의 역할을 하게 된다.


《옮겨심기(Potting)》 전시 전경(리플랫, 2023) ©리플랫. 사진: 김진솔

2023년 전시공간 리플랫에서 열린 개인전 《옮겨심기(Potting)》에서 김을지로는 관심사를 재현의 방식으로 돌려, 3D 모델링 표면 밀도의 한계를 거칠게 드러내며 자연적인 것과 인공적인 것, 그리고 디지털 이미지의 피상성과 실내 식물의 특징을 연결 짓고자 했다.
 
작가는 디지털 식물들을 통해 보기 좋게끔 유전형질까지 편집한 실내 식물처럼, 미디어로 공유되는 그래픽이 항상 매끈하고 ‘완벽해’ 보이는 것이 과연 자연스러운 일인지 질문하고 3D 그래픽의 속성을 재고할 수 있도록 하였다. 나아가 3D 그래픽 작업 과정에서 주로 제거의 대상이 되는 글리치(glitch)를 그대로 담아낸 영상 시리즈 ‘Soil mixing’(2023)는 이러한 의문을 더욱 분명하게 제기한다.


김을지로, 〈Sequence〉, 2023 ©리플랫. 사진: 김진솔

이와 함께 작가는 그래픽 작업 과정에서 발생하는 부산물인 이미지 시퀀스를 투명한 용지에 출력하여 마치 실험실의 표본처럼 전시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작업을 통해 작가는 우리의 시각적 욕망에 가려져 미처 논의하지 못한 대상의 뒷이야기를 상상해 볼 수 있도록 했다.

김을지로, 〈기계 태양의 정원〉, 2024, 4채널 비디오 설치, 컬러, 사운드, 《사물은 어떤 꿈을 꾸는가》 전시 전경(국립현대미술관, 2024) ©국립현대미술관

한편, 2024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단체전 《사물은 어떤 꿈을 꾸는가》에서 선보인 작품 〈기계 태양의 정원〉(2024)은 태양열 전지판과 식물을 연결하여 3D 기술의 시스템과 식물의 체계 사이의 유사성을 다룬다.
 
과학의 발전으로 자연 에너지를 가공할 수 있게 된 역사를 참조해 만든 김을지로의 3D 세상에서 픽셀은 곧 씨앗처럼 유기체적인 삶을 산다. 픽셀은 마치 씨앗처럼 성장하고 기지를 치면서 분화돼 유닛을 이룬다.
 
이처럼 인공 자연을 만들어 식물을 키우는 비닐하우스처럼, 작가는 3차원 이미지로 구현된 인공적인 환경 속에서 가장 원초적이고 자연스러운 것들을 배양한다. 이를 통해 작가는 서로 다른 범주에 있다고 여겨지던 것들이 사실은 같은 것일 수 있고, 어쩌면 생명과 데이터가 서로 다르지 않을 수도 있음을 이야기한다.


김을지로, 《젊은 모색 2025: 지금, 여기》 전시 전경 (국립현대미술관, 2025) ©국립현대미술관

그리고 국립현대미술관 《젊은 모색 2025: 지금, 여기》에서 김을지로는 난초의 생물학적 특징과 역사적 상황에 주목하고 이를 디지털 미디어의 속성에 빗대어 표현한 신작들을 선보였다. 공생균 없이는 발아할 수 없고, 특정한 수분매개자 없이는 번식이 어려운 난초의 생물학적 특성을 디지털 이미지의 재현 방식, 그리고 미디어를 통한 지각 과정과 교차시켜 재현한다.
 
난초의 생물학적 특성을 디지털의 존재 방식에 비유한 〈시밀리아 시밀리부스 쿠란투르〉(2025), 난초에 갇힌 곤충의 시각을 표현한 〈복안의 전령〉(2025), 난초 포복경에 기어가는 뿌리의 동선을 그리는 〈포복하는 맥박〉(2025)은 각각 3D 영상의 특수성에 대한 축을 나눠 가진다.


김을지로, 〈복안의 전령〉, 2025, 단채널 LED 패널, 컬러, 212.1x212.2x60cm ©국립현대미술관

〈시밀리아 시밀리부스 쿠란투르〉는 인간 중심적이고 이분법적인 생물 분류를 와해하는 새로운 시야를 제안하고, 〈복안의 전령〉은 곤충의 시야각을 재현한다. 〈포복하는 맥박〉에서는 시간의 흐름을 길게 늘어뜨려 잔상이 남는 것처럼 표현하는 방식으로 식물이 경험하는 시간성과 운동성에 접근한다.
 
가상 환경 속에 배양된 김을지로의 디지털 식물 또는 유기체들은 여러 층위가 겹쳐지며 발아된 혼종적인 존재들로, 자연과 기술 또는 현실과 가상 사이를 오가는 중간자의 위상을 가지게 된다. 그리고 이는 곧 자연적인 것과 인공적인 것 사이의 경계를 허물며 ‘우리가 보고, 믿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동시에 관객의 지각에 균열을 일으킨다.

 ”디지털은 현실에 대한 다른 관점과 새로운 관계를 설정할 수 있는 흥미로운 사고실험의 장임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그 안에서 우리는 당연시했던 감각들을 다시 조정하거나, 타자를 포용할 새로운 가능성을 탐색할 수 있을 것입니다.”     (김을지로, 국립현대미술관 《젊은 모색 2025: 지금, 여기》 인터뷰 중)


김을지로 작가 ©국립현대미술관

김을지로는 중앙대학교에서 시각디자인학과 학사를 졸업하고 연세대학교 커뮤니케이션대학원 미디어아트학과 석사 과정에 재학 중이다. 개인전으로는 《옮겨심기(Potting)》(리:플랫, 서울, 2023), 《Sneak Peek》(온라인, 2021)이 있다.
 
또한 작가는 《젊은 모색 2025: 지금, 여기》(국립현대미술관, 과천, 2025), 《사물은 어떤 꿈을 꾸는가》(국립현대미술관, 서울, 2024), 《Hacker Space》(TINK, 서울, 2023), 《반디산책: 지구와 화해하는 발걸음》(국립아시아문화전당, 광주, 2022), 《새일꾼 1948-2020: 여러분의 대표를 뽑아 국회로 보내시오》(일민미술관, 서울, 2020) 등 다수의 단체전에 참여했다.
 
아울러 웹 3D컨텐츠 《Quarantine Etudes》 비주얼 디렉팅, 인스타그램 AR크리에이터로 활동하는 등 3D그래픽이 해석되는 분야를 넘나들며 작업의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