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갑철, 〈거리의 양키들〉, 1984 ©이갑철

이갑철은 행복한 사진가이다. 자신의 사진을 이해해주는 많은 관객을 가진 드문 사람이기 때문이다. 80년대 그의 사진이 하나의 세계를 향해 열리기 시작할 때 그는 이미 성남의 음침한 골방에서 가난하지만 열기에 찬 삶을 동료들과 공유할 수 있었고, 그의 사진이 세상에 나올 때마다 비평가들로부터 외면당한 적이 없었다.

태생이 관습화되고 자동화된 것, 고정적인 것, 이데올로기적으로 굳어진 관념을 거부하는 그는, 사진에 대해 계속 회의하고 반문하며 사방으로 ‘사진’을 찾아 나섰다. 어떤 의미에서 그의 사진은 실험이었고, 그의 실험은 곧 그의 사진 자체이다. 사진가들이 사랑하는 사진가, 사진가 중의 사진가로 꼽히는 이유일 것이다. 이갑철은 사진을 시작하면서 지금까지 트라이 엑스(Tri-X) 필름을 사용한다.

감도가 비교적 높으면서도 우수한 입상성을 지닌 이 필름은 이 땅의 사람들의 생생한 몸짓과 숨결을 담아내기에 충분하였다. 그래서 그곳이 어디든, 언제든, 보이지 않는 것들에도 즉각적으로 반응할 수 있는 동물적인 감각으로 남보다 ‘세배(tri)’ 이상을 움직여 일구어낸 《충돌과 반동》(금호미술관, 2002)전시를 본 사람들은 일종의 충격이었다고 말한다. “머리카락이 곤두 설 만큼”(박영택), “우리의 한스러운 정서를 빼어나게 도려낸”(김용택), “한국인의 심층적 무의식 세계에 대한 접근”(육명심), “비상한 감각과 재빠른 반응으로 포착한”(강운구)사진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정확한 형태도 보이지 않고 거친 흑백 톤이 파격적인 구도와 함께 프레임 안에서 한꺼번에 무너지고 다시 일어서는 그의 이미지들은 대상을 사실적으로 담아내야 한다는 사진에 대한 전형적인 기대들을 전복시켰다. 그것은 한국사진에서 이제껏 볼 수 없었던 이미지로,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증거, 자료, 기념물, 예술작품을 생산해 내기 위해 사용하는 도구로서의 사진이 아닌, 자체 내에 이미 무한한 변화가능성을 가진 적극적인 장르임을 알게 한 것이다. 대상(object)에 의존하여, 유사하게 만들어내는 것이 사진이라는 개념의 외피는 이제 벗겨진 지 오래다.

사람들은 그를 사진계의 구도자, 카메라로 선(禪)문답을 하는 선승, 한국적인 정서인 한(恨)을 사진으로 달래는 영매자라고 했다. 그의 사진 속엔 공간과 사람, 그 둘의 상황, 그 모든 것을 아우르는 묘한 풍경(風磬)소리가 함께 했던 것이었다. 사람도 온전하게 등장하지 않고 어디선가, 불현듯, 느닷없이 치고 올라와 보는 사람들을 긴장하게 하면서 자꾸 다시 보게 하였다. 풍경의 ‘외관’만 담아온, 풍경사진 자체로 일정부분 미적가치를 획득하게 되는 당시에 그의 사진이 주목받을 수밖에 없었던 이 묘한 기운은 한국적인 정서를 잘 담아낸 사진으로 평가받으며 차세대 한국의 대표적인 사진가로 떠오르게 한다.

작가로서의 화려한 개화를 시작하게 된 《충돌과 반동》 (금호미술관, 2002), 《이갑철 사진전》 (한미미술관, 2002) 두 차례 개인전이 90년대 초반부터 십여 년간 지방의 굿과 의례, 민속행사를 담아냈다면, 이 후 다시 5년의 공백을 갖고 열린 2007년 《Energy 氣》 (한미미술관)는 대부분의 사진에 사람이 등장했던 전작과는 달리 풍경만이 보인다. 《Energy 氣》는 그가 지금 여기의 현실과 풍경의 현실을 냉엄히 구분하면서도 그것을 따뜻하게 교통시킬 줄 아는 각성된 지성의 소유자임을 새삼스럽게 증거다.

그의 투명한 의식은 자연의 은총 속에 내재해 있는 삶의 어떤 위기를 고백하고 성찰하는 작품의 산란지이기도 하다. 《충돌과 반동》에서 보여준 ‘사진가=영매’의 위치가 이 사진들에서는 좀 더 추상적으로 도약하는데, 자신이 발 딛고 있는 땅과 하늘을 연결시키고자 무수한 바람을 일으키는 존재로서의 역할을 하며 두 개의 세계가 서로 부르고 화답하고 교감할 수 있게 하였다. 그가 자연 그대로의 모든 것을 ‘자연’으로 받아들이고, 살아 있는 모든 것을 사랑하고 포용하는, 사랑의 표면적이 넓은 사진가여서 가능한 일이었다. 그것은 무한히 커진 프린트만 봐도 알 수 있다.

《Energy 氣》사진이 보여주고 있는 숲과 나무와 꽃과 물은 생명의 근원이자 우주의 원리이다. 그가 끊임없이 도약하고 싶고 날고 싶고 초월하고 싶은 것도 삶이지만 궁극적으로 도달하고 싶은 것도 삶이다. 결국 이갑철은 늘 삶의 자리를 떠나지만 다시 가볍게 돌아온다. 그의 사진에 자주 등장하는 텅 빈 채 먹먹한 공간은, 바람처럼 끝없는 운동을 계속하는 사진가의 공간이자, 관객이 그 속으로 쉽게 떠나올 수 있도록 마련한 공간이다.

그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한 달에 절반 이상을 돌아다녔다고 하니 이갑철에게 삶의 7할은 사진이었고, 그 중의 8할은 길 위에서, 나머지는 캄캄한 암실에 있는 시간이었을 것이다. 사심 없이 자성이 좋아하는 대로 작업에 매진하다 보니 무념상태에 이르게 되고, 이익을 챙기려는 노동이 아닌 작업과 놀이가 구분되지 않을 만큼 즐겁게 놀다 보니, 어느덧 사진을 한지 삼십 년이 되었다.



나와 너, 그 사이 _ 타인의 땅

“할수록 어려운 것이 사진이었습니다. 사진을 조금 안다고 느끼게 되면서 더욱 막막하고, 더욱 괴로운 것이기도 했습니다. 내가 살아가는 이 시대, 이 현실이 그런 것이기 때문입니다. ‘삶’이란 무엇이며, ‘시대의 현실’이란 무엇일까요. (중략) 우리 모두 ‘타인의 땅’에서 뜻을 잃고 오고가는 나그네들이 아닐까요?” 작가에게도 단 한권 밖에 남지 않은, 이갑철의 첫 사진집 『타인의 땅』에 실린 그의 글이다.

1988년은 작가뿐 아니라 한국 사람에게 아주 특별한 해이다. 이 전의 한국사진이 자명한 것으로 사유했던 지향과 가치들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고, 사진 하드웨어 측면에서도 새로운 기술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60,70년대 박정희 정권의 출혈적 개발 노선과 80년대 전두환 정권의 경제개발 추진, 소비에트 몰락과 함께 미국 중심의 세계체제가 재편성되고, 88서울올림픽을 치러내며 한국은 주변국에서 주변국 언저리쯤의 위치로 부상하게 된다. 중심도 주변도 아닌 혼성의 시간들이 시작된 것이다.

그 즈음 미술계에서도 미학적, 사회적 이슈로 ‘정체성’의 문제가 대두된 이유일 것이다. 80년대에, 20대를 보낸 작가는 그 시대의 사람들을 집요하게 탐구대상으로 하였다. 〈거리의 양키들〉, 〈Images of the City〉, 〈타인의 땅〉은 80년대를 살아가는 이갑철이 ‘지금, 여기’의 구체적 삶과 함께 삶의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문제에 심도 있게 천착한 작업들이다. 뿐만 아니라 사진가와 사진 그리고 사진 그 자체에 대한 메타적 성찰도 동시에 가져간다. 그래서 초기 사진들은 매우 상징적이고, 상징적인 것만큼 사진의 깊이를 획득하고 있다. 이갑철은 그 무렵 낯선 형식의 강렬함과 상상적인 비전을 가지고 자아와 세계 간에 놓인 긴장을 파고든다.

자아를 구성하는 정체성의 경계를 탐구하는 이갑철의 사진찍기는 〈거리의 양키들〉에 이어 〈타인의 땅〉에서 더욱 깊어지고 세련되게 구성되는데, 〈타인의 땅〉에서는 내면의 상처를 지닌 인물들이 어떻게 그것을 이겨내고 자아를 되찾게 되는가의 서사가 하나의 흥미로운 이미지로 펼쳐지고 있다. 정체성이라는 용어는 항상 그것이 지시하는 대상과 그 대상이 표상하는 바의 관계에 대한 물음을 갖도록 만든다. 그리하여 개인적인 것이든 집단적인 것이든, 관념이든 실체이든 간에 어떤 대상의 정체성을 탐구하려면 먼저 그것이 어떠한 방식으로 구성되었는가를 돌아보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사진이 할수록 어렵고, 막막한 것이, 이 시대가 그런 것이기 때문에’라는 작가의 말은 〈타인의 땅〉에서 우리의 시선을 가로 막는 뒷모습의 익명의 사람과, 그림자와, 실루엣으로, 희미하게 보여 진다. 이갑철이 마주친 ‘타인’은 멀게 흔들리는 영상으로 불가해한 채로 드러난다. 때문에 여기에서 사진가(‘그들’에게도 타자)의 위치는 중요하다. 사진가의 위치는 관객의 위치와 비슷하여 사진 속 타자를 통해 보는 이의 낯선 핵심과 조우하려 든다. 당신이 누구인지, 당신이 못 견뎌 하는 것이 무엇인지 계속 묻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어떤 상황, 정체성을 붙들고 고민하는 우리 모두의 존재는 사실 불완전하며 결국엔 사진가도 이해할 수 없는 존재로 다가온다. 

이갑철은 일상의 궤도를 이탈시키는 하나의 물음의 방법으로 고독과 외로움의 여백을, 어둡고 두텁게 깔아놓았다. 그 여백이 고독과 부재의 결락이었음을 인식하는 것은, 앞으로의 이갑철 사진을 읽어내는데 도움을 줄 것이다. 〈타인의 땅〉은 이갑철이 낯선 땅에서 조우한 대상을 집요하게 탐구대상으로 하고, 사진이미지를 통해 독특하게 해체주의적으로 육화시킨 점에서 우리 현대사진사에 예외적인 자리에 놓이게 한 주요작품이기도 하다. 이 작업들은 한 달에 롤필름 20롤씩, 2년 동안 촬영한 것으로, 아폴로 인화지(지금은 생산이 중단된)로 만든 편집용 프린트와 함께 500롤의 필름으로 정리되어 있다. 



사진적 추상_충돌과 반동

〈충돌과 반동〉은 우리의 조상 제례, 굿(풍어제, 위도 용왕굿), 세시풍속, 민속놀이(대보름 연날리기, 남원 삼동놀이, 농악, 탈놀이, 마니산 제천행사), 불교의식 및 농촌의 일상을 1990년부터 2001년까지, 11년간 촬영한 작업들이다. 안동, 남원, 진도, 경주, 하동, 강화…이 땅의 구석구석 특별한 경계를 두지 않고 우리만이 정한을 방대하게 담아내었다. 전시와 함께 출판된 『충돌과 반동』 사진집은 우리의 상처와 흉터, 이승과 저승, 자연과 신비, 축수와 평화, 과거와 현재며 미래와 현재 사이의 아릿한 기운들을 펼쳐 보이며 기념비적인 작품집이 되었다.

‘충돌과 반동’이 전시되었을 당시 우리 사진계를 휘감은 팽팽한 긴장들을 기억한다. 그것은 ‘충격’이라는 말 한마디 외에 적당한 단어를 찾지 못할 정도였다. 시인 김용택은 이갑철의 사진을 보며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 될 때”가 있고, “세상을 이렇게 낯설게 해주는 것…세상을 다시 보게 해주는” 주술이 이갑철의 사진이라고도 했다. 또한 현재 작가가 소속되어 있는 에이전시이자 갤러리 뷰(Vu, 파리, 프랑스)의 디렉터인 크리스티앙 코졸은 “한국인의 정서가 독특하고 자유롭게 표현된” 사진이라는 호평을 했다. 

이 사진들은 최소한의 사진 텍스트(제목)를 통해 장소와 시기를 객관적으로 밝히며 내러티브를 만들어내고 있지만, 전체적으로 작가의 주관적인 시각, 즉 움직이지 않는 것의 운동성을 뚜렷하게 보여주며 의미를 강화시킨다. 주어진 대상을 기계적으로, 정확하게 재현해내는 사진의 증거적 역할을 텍스트가 대신하게 하고 정작 작품 안에서는 비균질적이고 역동적으로 생성 중인 의미들을 드러내고 있을 뿐이다.

다큐멘터리 사진이 필연적으로 지닐 수밖에 없는 기록적인 측면은 작가의 창작 가능성을 제한할 수 있다. 그것은 대상을 직접 보여주어야 하는 부담감을 갖게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진의 본질은 재현의 직접성을 넘어서 이미지의 추상성/상징성에 다가섬에 있다. 이갑철이 ‘이야기하기’를 그치고 무언가를 관객의 몫으로 두고 ‘드러내려’ 하는 이유다. 즉 사진을 찍기 위해서, 대상들이 가진 시간을 자르고 붙이며 극적인 의미를 생성하는 것이 아닌 순수한 시간의 드러냄을 통해서 대상을 보여주려는 것이다. 그래서 그에게는 ‘포착’이라는 말보다 의미가 생성되기 위해 의미가 다가오는 순간들을 ‘기다릴’줄 안다는 말이 더 적합하다.

이갑철 사진의 특징 중의 하나로, 겉보기에 그토록 멀리 떨어져 있는 것들, 이질적인 것들을 맺어주는 정신을 들 수 있는데, 이갑철은 대상들 간의 차이, 인식들 간의 차이를 지우고, 그 너머에서, 혹은 그 깊이에서 그 대립되는 것들을 맺어준다. 그러니 사진가는 밝고 건강한 모습보다는 상처받고, 가녀리고, 몸부림치고, 애처로운 것들 앞에서 더욱 오래 체류할 수밖에 없다. 스스로 바람이 되어 자유롭게 온갖 경계를 넘나들다가도 시들고 아프고 쓸쓸한 것들을 보면 지나치질 못한다.

이것은 이갑철의 사진에서 필연적으로 긴밀하게 선택되고 결합되어 있는 대상들을 보면 알 수 있다. 〈풍어제와 하얀 옷을 입은 아이(안면, 1992)〉에서 풍어제를 구경하다 말고 어른의 옷자락에 얼굴을 묻은 아이나 〈숲 속의 두 노인(남해, 1994)〉에서 지금 막 산신령께 제를 올리고 숲길에서 마주친 두 노인의 모습에서 삶의 이편과 저편의 세계를 오고갔을 사람들의 모습은 막막하고 불안하기만 하다. 이처럼 살아 있는 것들에 대한 연민의 정이 삶의 깊은 곳, 삶의 먼 곳을 볼 수 있게 하는 하나의 조건이 되고, 삶의 표면에서 이면까지 꿰뚫어보는 상상력의 근원이 된다.

이는 빛과 어둠(먼지)이 동거하는 ‘화광동진(和光同塵)’, 즉 원효의 ‘화쟁’과 다름 아니리라. 사진이라는 것이 사물의 진상이 아니라 빛이 닿은 사물의 반사형상일 뿐이고, 빛이 있으면 분명 어둠이 존재할 터이니 이 세계의 모든 대립쌍들도 결국 내가 있고, 네가 있어 가능한 것이 아니던가. 그래서 그의 사진은 그 어떤 분석의 필요도 없이 하나의 구체적인 이미지 덩어리가 된다.

이갑철 사진의 핵심은 바로 수직과 수평, 본질과 현상, 삶과 죽음을 오가며 이질적인 것을 맺어주는 그의 상상력이다. 이갑철의 상상력은 결국 자신을 활짝 열어놓은 채, 세상을 향한 한없는 연민과 사랑으로 충만할 때 가능한 것이었고, 그래서 그의 사진 앞에서 관객은 무방비로 놓여 사진가의 상상력에 감염되는 것이다. 그 상상력(작가는 그것을 무의식이라고 하지만)자체가 그의 작업의 궤적을 이룬다.

그의 사진은 한 장을 반복해서 여러 번 보거나, 때로는 전체를 모아서 한꺼번에 봐야한다. 그래야 그가 화면 안에서 선택해 낸 침묵과 부재의 공간들을 찾아낼 수 있다. 또한 사진 하나하나가 따로따로 제 몫을 지니면서도 극적인 연계, 혹은 시퀀스 속에서 서로 부딪히고 호응하고 대화를 주고받으며 새로운 의미들이 생성되는 지점을 알 수 있다. 살아있는 사람에게, 아니 사진은 ‘현재’와 ‘부재’의 확인을 안겨준다. 그 ‘부재’를 극복하기 위해 사람들은 사진을 찍고 말을 뱉어내고 굿으로 위로하지 않던가.

사진 찍는 사람은 자신의 기억 속에 아로새겨진 어떤 체험의 순간을 지금-여기로 다시 불러오는 존재이다. 이갑철 사진의 여백은 그 기억의 공간이기도 하다. 그 여백은 사자(死者)들의 공간’, ‘시간이 없는 공간’이다. 이들의 매개체이자 영매(靈媒)로서, 사진가는 그 역할을 한다. 그는 사진을 통해 사라진 영혼을 호명해내기도 하고, 죽은 자와 산 자들의 관계를 복원시키며 ‘살아짐과 사라짐의 경계(프레임,frame)’를 생성해낸다. 사실 사진에서 프레임은 현실의 단편을 잘라(선택과 배제)내는 역할을 하지만, 이갑철에게 프레임은 푼크툼(punctum)을 발생하기 위한 장치로서 존재한다. 그래서 프레임 밖이나 안이 경계 없이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으면서 또한 숨죽이고 있는 그의 사진 속 적막을 다시 보자. 그 속에서 새들은 일제히 날아오르고, 사람은 흔들리고, 깃발은 바람에 나부끼며, 구름과 새는 산을 스쳐간다. 난데없이 뒷모습의 아이들은 꽃을 머리에 인 채 삐뚤어진 산을 바라보고 남해금산 능선에는 한 아이가 울고 있다. 지금 까맣게 속이 타들어간 태안 앞바다를 미리 예견하기라도 했듯, 태안의 무당은 동물의 피를 뒤집어쓴 채(흑백사진에서 붉은 색은 검은 색이다.) 언덕을 내려오고, 숲 속의 두 노인은 기이하게 마주한다.

변신, 운동, 과장된 것들이 서로 변개하며 전체의 형상을 이루고 있는 이 사진들에 어김없이 등장하는 여백들은 밀도 짙은 부재로 꽉 차 있다. 즉흥과 일탈과 무질서들을 집약하고 다시 용해시키며 반복되기를 수차례, 『충돌과 반동』의 마지막 장에는 바람을 타고 연들이 단 하나의 소실점으로 완강하게 사라지고 있다. 관객은 그 즈음에서 마음에 구멍을 뚫고 그 바람이 드나드는 상상을 하게 된다. 아뿔싸. 끝난 줄 알았더니, 그 다음 장에 한 노인이 낮은 문으로 지금 막 통과하고 있었다. “피하고 싶고 낯설고 두려운 장면이다. 일상에서 튕겨져 나온 ‘충돌’의 그 순간에, 사람들이 무의식적으로 보여주는 ‘반동’의 떨림이 작가에게 셔터를 누를 힘을 주는”(정재숙) 것이다.

구체적인 체험 속에 깃들어 있는 고유한 생(生)의 순간들과 그 감각적 비의(秘義)들은 관례화된 형식을 통해서는 결코 표현될 수 없는 법. 이갑철은 ‘충돌과 반동’에서 지금까지 ‘사진’이 보존해 온 관습적 전법을 파괴하면서 새로운 사진의 문법을 과감하게 실험하고 있다. 이것이 ‘사진’이라는 현대적인 산물에 요구되었던 필수불가결한 조건이자 ‘사진’이 현재에 이르기까지 그 자신을 영위할 수 있었던 근원적인 힘이 아닐까. 똑같이 한 곳을 바라보고 있지만 세계의 풍요로운 실제성을 담아낼 줄 아는 사진가들의 힘이 이어져 사진은 사실이 아니라, 상상이고 추상이라는 커다란 가치를 획득해 낸 것이다. 


 
풍경의 연서 _ ENERGY 氣

작가에게 전시 타이틀인 ‘Energy 氣’에 대해 물은 적이 있다. 타이틀이 너무 직접적인 것에 대한 항의였다. 아니, 이전의 살롱사진에서 숱하게 봐왔던 제목이라 삐딱한 거부감이 일었는지 모른다. 대답은 아주 간단했다. “사진은 시(詩)가 아닐까? 머리로 고민하지 않고 느끼는 찰나의 순간을 찍을 뿐이다. 삶의 순간을 통째로 즐기는 것, 사진은 그런 힘을 안겨준다.”

과거의 이갑철이 현실을 해석해 왔다면, 현재의 이갑철은 풍경을 해석해내고 있다. 

이갑철의 재능이자 《Energy 氣》사진의 특별함은 무심히 봐왔던 대상들이 마치 서로 사랑하기라도 하듯 지극히 내밀한 순간들을 뽑아내고 정제하는데서 발휘된다. 이갑철은 풍경의 에센스를 추출하기 위해 빠르게 다가가, 천천히 보고, 느린 셔터로 촬영했다. 그로 인해 드러나는 것은 바로 풍경의 ‘시간’이다. 앞 셔터가 먼저가고, 뒤 셔터가 따라가는 사이 발생하는 시간의 물리적인(시간이 흐르면 사랑도 사람도 산천도 변한다)변화가 흐르듯 머문다. 이처럼 ‘Energy 氣’ 사진에서 자연을 형상화한 작품들은 작가가 셔터를 누르고 있는 동안, 관객의 감정도 농밀해지고 있다. 셔터와 셔터 사이, 그리고 사물과 사물 사이의 공간에 움직이는 바람을 잡아낸 것이다. 그 사이 작가의 내발적 에네르기도 조금씩 달아오르게 된다. 풍경이 사진가를 뜨겁게 달아오르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氣’라고 했을까.

이갑철의 풍경은 전체적 윤곽을 드러내거나 정밀한 세부묘사를 보여주기보다, 굵으면서 섬세한 역동적 분위기의 표출에 집중되어 있다. 이는 풍경의 특정 순간을 포착하여 고정시키기보다는 빛에 의해 시시각각 변하는 풍경 혹은 사물의 끊임없는 움직임과 흐름을 드러내고자 했기 때문이다. 스티글리츠(Alfred Stieglitz)가 단지 고요히 세계를 보는 것으로 풍경의 삼매경(equivalent, 이퀴벨런트)을 구하면서 탈속의 경지로 다가서려 했다면 이와 달리 이갑철은 세계의 진실한 이면에 가 닿고자 자신의 온몸을 열어 풍경을 호흡하고자 망원렌즈로 가까이 다가섰다.

주로 28mm 광각렌즈를 사용했던 이전의 작업과는 다르다. 에센스만 보여주기 위함이라고 했다. 그래야 풍경의 에너지를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땅의 곳곳을 다니며 땅의 냄새를 맡고 그의 기운을 받는 것은 기쁨이고 가슴 시린 일이다’는 작가의 말처럼 이갑철의 풍경은 작가와 감도 높게 조응한, 맑은 서정이다. 그리하여 동일한 공간의 풍경이라도 시간의 흐름과 환경의 변화에 따라 전혀 다른 풍취를 드러내게 된다.

사진 속에 바람이 불면, 그날은 분명 바람이 불었던 날이고 그 바람이 일으키는 흔들림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 특히 〈2004, 합천〉사진은 풍경에의 몰입이 순도 높게 표현된 사진이다. 또한 〈2004, 장수〉의 황혼과 나무, 나무 끝에 앉아 있는 새들의 적막은 그저 제 갈 길을 가고 있는 대상들이 온전한 개별성을 갖고 풍경의 전체성으로 응집되고 있다. 마치 겨울 숲의 나무들이 헐거운 채로 일정하게 떨어져 자신의 하늘을 바라보지만 그 사이의 긴장들이 모여 ‘군무’를 이루어내듯. 

이갑철 사진의 ‘사진적 순간’은 결코 일상화될 수 없는 것으로, 사진가가 풍경 속에서 경험하는 충일한 현재는 아주 잠깐에 지나지 않는다. 그는 매우 담담하게, 햇빛 속에서 환하게 흔들리는 벚꽃과 〈2004, 하동〉, 흐르는 물을 떠서 〈2005, 산청〉 관객에게 건네며, 무심한 듯 맑은 눈동자로 고통과 번뇌로부터 벗어난 자유로운 순진함 그대로 풍경의 상징을 만들어냈다. 대저 사진가에게 있어서 사진을 찍는 것이란 무엇인가.

이갑철의 사진들은 우리에게 뜻밖에도 이러한 근본 문제를 제기한다. 사진가는 자연을 만들 수 있는가, 자연을 흉내 낼 수밖에 없는가의 질문으로 바뀌질 때 그 해답은 비교적 명백해진다. 많은 풍경사진들이 사진가가 자연을 만들 수 있다는 확신을 근거로 하고 있거나, 확신은 없다 하더라도 무의식적으로 그 행태에 답습해 온 것이 사실이다. 아름다운 자연과 그 자연을 담은 사진은 그 자체로 미적가치가 획득된다는 것은 안셀 아담스(Ansel Adams)이후의 풍경사진의 명제가 되어왔다. 실체가 빈약한 화려함과 뒤돌아보지 않는 오만함으로 풍경사진을 생산해내는 이러한 풍토에 이갑철의 풍경이 답을 하고 있다. 그의 사진은 미묘한 떨림으로 풍경을 만나게 한다. 그래서 그의 사진 속 대숲에 불어왔다, 불고 가는 바람소리 〈2004, 담양〉가 더욱 그리운 것이다.


어머님!
저는 요즘 우리나라의 풍경을 촬영하고 있습니다. 그저 아름다운 풍경이 아니라 저의 가슴을 시리게 하는 풍경을요. 나의 조상들이, 아버님 어머님이 살았던 젊은 시절, 그리고 저의 어린 시절의 그 아스라한 풍경을요.

봄날 야트막한 저 앞산에 연분홍 진달래가 피면, 여름날 비바람에 흔들리는 저 푸른 참나무 숲이 제 빛깔을 찾으면, 가을날 들판에서 갈대의 소곤대는 외로운 이야기가 들리면, 겨울날 깊은 산에 진눈깨비라도 날리는 날이면,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답니다. 실개울의 물소리도, 뒷산의 뻐꾸기 소리도, 그리고 저녁 무렵 논물에 비친 구름까지도 가슴이 시릴 만큼 아름다운 풍경으로 다가옵니다. 그 풍경 속에 언제나 어머님의 모습이 함께 비춰졌기에 더욱 좋았지요. 이제 또 하루가 저물면서 이 고원에도 달이 떴습니다. 어머님의 존함이 월임(月任)이었지요. 저 달 속에 하얀 찔레꽃을 닮았던 어머님의 모습이 떠올라 가만히 이 노래를 읊조려 봅니다.

밤 깊어 까만 데 엄마 혼자서
하얀 발목 바쁘게 내게 오시네
밤마다 보는 꿈은 하얀 엄마 꿈
산등성이 너머로 흔들리는 꿈
(이갑철, ‘늘 그리운 어머님께’ 중 일부)
 

이갑철의 『Energy 氣』사진집을 주의 깊게 보면서 나는 뜻밖의 경이로움과 미묘한 감동을 경험해야 했다. 이갑철은 결코 설명하려 들지 않는다. 하기야 복잡하고 미묘한 자연의 온갖 현상에 대해서 사진가가 그 무엇이라고 설명할 수 있겠는가? 그는 대상을 분석하지도 않는다. 어쩌면 그는 그런 행위를 그의 사진을 보는 관람자의 몫으로 돌려놓고 있는지도 모른다.


 
점령되어 있지 않음_공즉시색(空卽是色)

이갑철은 카메라로 선문답을 한다고 한다. 그런 의지로 카메라를 다루는 것이다. 불교신자는 아니지만 산사를 무척 좋아하고 산을 좋아하는 그는 운전할 때마다 뜻도 모를 불경을 틀어놓고 마냥 듣는다고 한다. 그런 이갑철의 화두가 이제, 공즉시색(空卽是色)으로 옮겨가고 있다. 소유에서 존재로 이행해가는 마음의 길 닦기는 불교의 『반야심경』에 나오는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의 사유에서 가장 잘 드러남을 알 수 있다. 인간은 소유의 노예가 되어 존재로서의 생산의 현장에 참여하지 못한 채 덧없는 몽상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유독 사진은 소유로서의 관점에서 서술되어 왔다. 슈팅(shutting, 총으로 쏜다), 포착(capture), 프레임(frame, 선택과 배제, 가두기, 틀 만들기), 과시(광고사진), 죽음에의 극복(portrait, 초상사진), 허상(simulacre, 복제), 정착(fixing) 등 사진을 둘러싼 몇 개의 담론들은 기실 불교적 관점에서 해석하기엔 무리가 따른다. 모든 만물의 생멸과 존재방식이 공(空)의 현상임을 말하는 공즉시색은 원효가 『금강삼매경론소』에서 말하듯 ‘얻을 수 없고 얻을 수 없는 것도 아닌(不可得 非不可得)’ 것이라 했다. 실제를 ‘담는’ 사진은 모든 죽음에 저항하기 위해 소유론적 욕망과 배타적 탐욕의 장 한가운데 있었다.

이갑철은 과연 ‘공즉시색’을 사진으로 말할 수 있을까? ‘표현’하려는 마음까지도 사실상 ‘욕망’이 아니던가. 그렇다면 이제 사진을 찍지 말아야 한다. 이갑철의 답은 역시 간단하다. ‘공즉시색은 죽어서 공허한 빈 공간이 아니라, 무엇인가 끝없이 샘솟는 마음의 상태’이다. 사진으로 이타행(利他行)을 하고 싶어 하는 그런 존재론적 욕망의 다른 이름이 이갑철이 말한 공즉시색이 아닐 런지.

이갑철이 찍은 사진적 공간은 실재하였던 ‘환상’ 공간이다. 그리하여 모두 사라져버리고, 없을 수도 있을 추억의 실체를 끄집어내고, 일회적인 모든 것들이 영원에 맞닿을 수 있게 한다. 그러므로 그의 사진을 볼 때는 황홀한 풍경의 흐름을 놓치지 않기 위해 “나”를 놓아야만 한다. 왜냐면 그 속엔 이갑철이 “언뜻 주는 눈길에도 수만 번의 인연을 떠올려 서로의 묵은 업장을 눈물로 녹이는 그런” 대상들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지금은 살아있지만, 언젠가는 사라져가는 것들이다. 우리 모두 그러한 존재이다. 너무 멀리 왔는가? 그렇다면 다시 말하는 주체로 돌아와 쓴다.

그의 사진이 지향하고 있는 아름다움이나 그의 사진이 지니고 있는 힘이 마치 현실과 상관없는 것이 아닌가, 의심하면서 그것을 사적인 고백이나 이미지의 장난이라는 차원에서 다루려는 사람들에게 그의 사진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그의 사진은 누구에게나 말을 하지 않고 단지 세상의 모습을 보여줌과 동시에 사물과 사물 사이의 움직임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움직임을 읽을 줄 아는 사람에게 이갑철은 경이로운 사진가가 된다.

과연 우주적 마음(cosmic mind)을 가진 사진가는 이제 무엇을 보여줄까. 매우 온유하고 고요하게 자리(自利)의 고요가 곧 이타(利他)의 보시로 이어질 것인가. 그런 원기(元氣)가 이미 이갑철에게 있음을 확인한다. 자기 생각으로 가득 차 있지 않고, 충분히 자유롭고 여유롭기 때문이다. 마르셀은 그런 마음의 존재를 ‘점령되어 있지 않음’이라고 했다. 텅 비어 있기에 언제 어디서나 부름에 응답할 준비가 되어 있는, 즉 감광될 준비가 되어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