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의
하층민
평범하기
그지없던 20대 사진 전공 대학생은 1980년대 초 서울
진입과 동시에 ‘도시의 하층민’ 신세로 전락한다. 이는 이갑철 사진 세계의 서막을 알리는 사건이다. ‘경제 발전의
열기와 독재의 암울함’으로 점철된 1970년대를 지난 1980년대 서울은 그야말로 ‘격동의 시기’였다.
아시안게임과
올림픽을 핑계 삼아 국민에게 ‘선진국 진입’이라는 환상을
주입했고, 외국인들을 의식해 도시미관을 정비했으며,
3S(Screen, Sex, Sports)를 바탕으로 ‘우민 정책’을 펼쳤다. 이와 함께 많은 사람들이 ‘중산층의 꿈’을 품고 서울로 몰려오기도 했지만, 높은 진입 장벽에 가로막혀 서울 변두리로 밀려나는 사람도 있었다. 한편, 해외여행 자유화가 추진됐고, 우리나라에서 내로라하는 사진가들 다수가
당시 유학길에 올랐다.
유학에 대한 막연한 동경 대신, 이갑철은
서울에 머무르는 것을 택했다. 당시 그에게 삶은 녹록치 않았다. 너무나
빠른 변화로 인해 익숙하던 것들이 낯설게 다가왔다. 세상에 덩그러니 남겨진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이때부터 그는 가장 익숙하지만, 동시에 격정과 혼돈으로 가득 찬 1980년대를 기록하기 시작했다. 송수정의 말마따나, 이갑철은 달라질 수 없다는 정치적 절망과 삶의 조건이 나아지리라는 경제적 열망 사이에 놓인 한국 사회에서 객관적
기록의 허상을 의심했다.
이를 위해 리얼리즘에서 한발 뒤로 물러나 이방인의 시선으로 전국을 떠돌아다니며
누군가의 모습을 찍었다. 그렇게 탄생한 작업이 〈타인의 땅〉이다.
1988년 선보인 이 작업은 하나의 특별한 주제로 응집되진 않지만, 사진을 보고 있노라면 1980년대 시대상이 파노라마처럼 눈앞에 펼쳐진다.
텅
빈 충만
이갑철은
계속해서 전국을 누볐다. 그러다 불현듯, 생명과 죽음 같은
형이상학적인 것도 사진으로 표현할 수 있어야 진정한 한국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운명적으로
찍힌 사진 한 장이 그에게 길을 제시했다. 우리에게 너무나 유명한, 노인의
얼굴과 누군가의 손이 한 프레임 안에 담긴 사진이 바로 그것이다. 구체적인 이야기를 전달하진 않지만, 묘한 기운을 풍기는 이 사진은 고차원적인 세계에서의 해석을 가능케 한다.
피사체의
움직임을 포착해 극적인 순간을 만드는 것만이 사진가의 최선이 아님을 깨달은 이갑철은 그 사진을 기점으로 영험한 존재를 정지된 시간에 박제하는 데
집중했다. 핵심은 무언가를 찍겠다는 목적의식이 아닌, 직관과
무의식에 몸을 맡기는 것. 그의 사진을 휘감던 사회적인 시선이 정신적인 세계로 승화되는 순간이었다. 이때의 결과물을 모은 것이 한국 사진사에 한 획을 그은 〈충돌과 반동〉(1990~2002)이다. 사진에서 굿과 제사 등이 보이는 까닭에 귀기(鬼氣)가 서린 게 사실이나, 샤머니즘을 넘어 초현실 세계로 스며들게 하는
것이 인상적인 작업이다.
흥미롭게도 그의 사진은 〈기〉(2002~2007)와
함께 다시 한 번 변주한다. 생동감 넘치는 〈충돌과 반동〉과는 달리,
동중정(動中靜)의 심상이다. 또한, 기존 작업이 여백이 있음에도 빽빽함이 느껴졌다면, 〈기〉는 사진에 공간이 부여된 듯하다. 마음속 풍파가 안정된 것인지, 전보다 생각이 단순해진 것인지 잘 모르겠지만, 사진 속 대상의 요동이
줄어든 것이 눈에 띈다.
이러한
변화는 신작 〈적막강산〉(2008~2019)과 〈도시징후〉(2008~)로
이어진다. 〈적막강산〉은 쓸쓸한 가운데 에너지가 감도는 겨울 산에, 그리고
〈도시징후〉는 번잡함 가운데 빛이 도달하지 않는 도시 공간에 초점을 맞췄다. 각각 자연과 도시라는 대비되는
소재를 배경으로 하지만, 두 작업 모두 ‘고독과 적막’이 감지된다. 그는 왜 사진으로 ‘고독과
적막’을 표현했을까. 기실 〈충돌과 반동〉의 강렬함이 뇌리에
깊게 박혀 이갑철의 새로운 작업이 생경하게 다가오지만, 차분히 사진 속 공간에 나를 투영해본다. 마음을 비우니 겨울 산에선 코끝을 스치는 바람 소리가, 빛이 없는
도시 공간에선 긴장감이 흐른다.
되레 마음이 충만해지는 모양새다. ‘고독과
적막’ 안에서 무언가를 찾아보라고 말하는 듯하다. 이갑철의
삶의 여정이 이와 같지 않을까 감히 생각해본다. ‘이방인’의
외로움이 훨훨 타올랐던 젊은 날의 불티가 ‘소리가 귀로 들어와 마음과 통하기 때문에 거슬리는 바가 없고, 아는 것이 지극한 경지(耳順)’에
다다른 것처럼 보인다. 정신세계를 알기 위해 세속을 벗어났던 그가 다시 도시로 돌아온 것을 보면, 그런데도 사진 안에서 고요한 정신세계가 유지되는 것을 보면, 텅
비었던 마음이 채워진 것이 아닐까 싶다. 이갑철의 《적막강산-도시징후》는 한미사진미술관 삼청별관에서
2020년 1월 15일까지 진행된다.
(*이갑철의 삶의 여정은 송수정의 〈주술사에서 구도자로〉를 참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