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홍구, 〈수련자(修練子)-금강불괴(金剛不壞)〉, 2005-2006, 디지털 사진 인화, 100 x 220cm © 강홍구

보는 이로 하여금 생뚱 맞은 정황에 맞닥뜨리게 하는 강홍구의 작품은 어색하고 불편하다.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읽어야할지 혹은 어떻게 보아야 할지 보는 이를 난처하게 만든다. 그는 그렇게 우리를 자신의 시선 속에 개입하게 하고 현실에 대해 이의를 요청한다.

이번 전시는 2004년에서 2010년 사이에 작업한 것들이다. 〈오쇠리 풍경〉, 〈미키네 집〉과 〈수련자〉, 〈사라지다〉와 〈그 집〉 시리즈 작품들 중 일부이다. 일목요연하게 그의 세계 이해의 시선과 태도를 보아낼 수 있는 전시이다. 욕심 같아서면 도망자 시리즈나 그 전의 작품도 몇 점 같이 나왔으면 더 좋았을 것 같다. 신작 위주의 작품전이 아니라면 그런 시도도 한 작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자신의 시선에 느닷없이 붓 자국이 선명한 흰 색띠가 여기저기 중첩된다. 잘 만들어진 사진 위에 잘못 묻은 것 같은 흔적들이다. 밑으로 흘러내린 물감흔적은 이런 우연성 혹은 느닷없음을 은근히 강요한다. 그러나 그것은 인위적이고 의도적인 칠하기이자 훼손시키기이다. 2010년 제작된 〈그 집-푸른 지붕〉, 〈그 집-붉은 지붕〉, 〈그 집-계단〉, 〈그 집-은행나무〉 등의 제명이 붙은 작품들에는 멀쩡한 풍경 위에 느닷없이 붓자국을 하나씩 덤으로 가지고 있다. 산비탈 경사 급한 곳에 앉은 동네 모습이 드러나고 창이 나가 떨어져 있고, 문이 열린 집이 많다. 대문이나 지붕이 온전한 집을 찾기 힘들다. 대문을 갖추고 있지만 인기척을 찾기 힘들다. 그런 것들로 보아 재개발로 철거 직전의 모습을 잡은 풍경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붓 자국과 풍경 사이에 말하기 뭐한 거리감, 이격감을 만들어낸다. 마치 붓 자국은 지금 이 순간으로서 현실의 공간을 차지하고 있고, 사진으로 박힌 풍경은 이곳의 공간이 아닌 다른 어떤 것, 다른 시간과 공간으로서 거리를 보게 한다. 평범한 풍경이 어느 순간 훼손된 사진이 된다. 오물로 더럽혀진 창으로 바라보는 풍경 같다. 사람이 없는 빈 집 창 안에서 그려진 인물을 발견할 때는 섬뜩하다. 참 어색하고 난처한 순간이다. 평범한 집을 잡은 시선 이 순식간에 의외의 표정을 짓는다. 그것은 이해할 수 없는 표정이고 표지이다.

담장 위에 놓인 플라스틱 통 안에 소복하게 올라온 상추를 잡은 〈그 집-상추〉는 오른쪽 하단에 너무나 뚜렷하게 난 흰 붓 자국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한 화면에서 전혀 다른 공간들이 공존하게 된 셈이다. 〈그 집-빨래〉는 널린 빨랫감에 붓질을 하고 색을 입힌 흔적이 뚜렷하다. 게다가 물감이 흘러내린 자국마저 노골적이다. 숲이나 나뭇잎, 담장 어딘가에는 그대로가 아닌 색상이 효과를 더하고 있다. 그려 넣기와 색 더하기로 기왕의 사진 위에 흔적을 남긴다. 온전한 사진에다 훼손으로 재구성 효과를 더하고 시간적으로 사후에 개입한 흔적을 드러낸다. 어울리지 않아서 어색하고 감쪽같아서 난처하다. 의미를 만들기 위한 개입이다. 의미는 사후적 사건이라고 하지만 이런 경우는 시선의 강제를 통해 강요된다. 상징으로서 풍경의 역할과 어법이 있을 법한데도 색을 칠하는 행위로 풍경/사진의 결여를 보충하려 한다.

이 흰 붓 자국, 혹은 색상이 있는 흔적은 기왕의 풍경과 병치되면서 붓 자국의 행위가 두드러지게 드러나고 현재라는 시간성을 얻는다. 풍경의 현재적 공간은 과거라는 시간적 거리를 갖게 된다.

그 거리는 사진으로서 풍경을 ‘거기 있는’ 것으로 보이게 한다. 흔적은 그것을 ‘거기 있었던 것’으로 만든다. 그 거기는 이제 거기 없다는 것을 말한다. ‘거기 있는’이나 ‘거기 없는’은 이제 풍경의 즉물성을 보이는 것이 아니라 회상과 사실이라는 양면성으로 제시된다. 현실과 현실거부, 현실부정으로서 반응이다. 주어진 현실을 바꾸려는 의지는 수련자나 미키네 집이나 오쇠리의 풍경으로 다가온다. 흔적보다 더 받아들이기 힘든 풍경들이 전개된다. 그것은 타자의 힘에 의한 강제나 폭력을 풍경으로 생성하는 것이다.

‘미키네 집’ 시리즈는 장난감 집을 철거지역 내 적당한 곳에 놓고 주변 정황을 함께 찍은 풍경이다. 그러나 미키네는 장난감으로나 철거지역으로나 어느 쪽도 온전할 수 없는 어색함을 던져준다. 느닷없이 풍경 속에 들어서는 낯선 풍경 때문이다. 여기에 강홍구 사진의 기묘한 비현실성이 생긴다. 원근도, 시간도, 정황도 어긋나는 시선을 당당하게, 때로는 천연덕스럽게 내세운다. 비로소 기존의 풍경과 미키네가 비교되고 그 어색한 조우에 새로운 풍경이 드러난다. 그리고 미키네를 응시하다 철거된 풍경이, 철거된 풍경을 바라보는데 미키네 집의 시선을 의식하게 된다. 응시와 시선이 오간다.

〈미키네 집-구름〉은 담장 위에 올린 기왓장을 건물로 착각하게 하거나 헐다 만 집 안방에 놓여 따뜻한 온전함이 무엇인지를 환기시킨다. 철거 후의 황폐한 공간에 놓여 초현실적인 어떤 것, 이젠 없지만 한 때 있었던 꿈으로 자리를 잡는다. 폐기된 철골 더미 사이의 〈미키네 집-철근〉, 〈미키네 집-문〉은 그곳의 장소와 집을 회상하고 남아 있게 한다. 그것은 미키네-집을 통해 있는 것이 없다는 것을, 없어진 것이 여전히 남아 있는, 부재하지만 존재하는 어떤 것을 보여준다. 없어졌지만 없어지지 않은, 부재하지만 결여로서 남겨진 어떤 것에 대한 시선이다. 미키네 집은 현실을 환상으로, 환상을 현실 의미로 끌어들이고 제시한다. 제시하는 방식으로서 환상이란 언어적 질서로서 가능한 읽기이다. 환상이란 “근본적으로 서사적 구조를 갖고”1) 현실의 결여를 보충하는 결여의 서사이다. 현실의 구조와 다르지 않다. 고통스러운 ‘사실’로서 환상이다.

‘수행자’ 시리즈는 권투장갑을 끼고 웃통을 벗은 장난감 사내가 주연이다. 격투기 게임의 전사의 등장은 때로 폭소와 냉소를, 때로 연민의 손짓을 안겨준다. 능공허보, 이 시대의 돈키호테를 하나 던져준다. 담장을 성벽처럼 기어오르는 모습 〈수련자-벽호공〉이나 유리조각이 날을 세운 담장을 넘는 〈수련자-금강불괴〉의 모습은 일본만화에서나 나오는 닌자의 모양새다. 전선을 붙잡고 마을을 뛰어넘으려는 장대높이뛰기를 연상하는 〈수련자-능공허보〉에 와서는 무협지를 방불케 하는 장면을 연출한다. 마치 구경꾼 앞에서 사이비 차력술사 같은 허풍을 떠는 것이다. 그런데 그 허풍이 허풍 같지 않고 왠지 씁쓸한 웃음을 안겨준다. 무밭에서 〈수련자-운기조식〉을 하거나 시든 넝쿨풀 위에 서서 집안을 들이다 보는 〈수련자-적엽비상〉, 눈밭에 선 〈수련자-답설무흔〉은 그가 저항하고자 하는 것, 무위로 끝나버린 시대적 저항을 대신하고 있다. 행위는 있었으나 흔적조차 없는, 흔적밖에 없지만 실재의 어떤 것이 스쳐 지난다. 그런 그의 시선을 통해 우리는 있어야 할 인간의 이야기, 실재로서의 우리 삶을 이끄는 어떤 말하기 힘든 것을 만나게 된다.

사마귀가 지나가는 수레를 막아선다는 장자의 당랑거철(螳螂拒轍)의 고사를 떠올리게 하는 이 작업들은 그 불가능함과 비현실적인 착안 자체가 힘이다. 그 힘에 의해서 ‘사실’이 버티고 있다. 오늘날의 사진판의 흐름에서 사진으로서, 조형으로서 그의 원숙이나 세련, 새로운 시도가 어느 지점인지를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그런 면에서 그의 작품을 좋은 사진이라고 판단하기는 힘들지만 좋은 이야기를 만드는 것임에 분명하다. 그리고 그것이 서사적 진술로서 그의 합성적 이미지와 탈사진적 접근에도 불구하고 전통사진의 ‘사실’적 표상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도 부정할 수 없다.

〈사라지다〉는 대체로 특별한 작위가 없다. 그저 재개발로 철거 중인 풍경이나 철거한 뒤의 모습이다. 일부 철거중인 정황과 남아 있는 것들의 황폐함 사이에서 기억과 현장의 어색한 조우를 보여준다. 정말 사라지고 나면 어떤 것도 남아 있지 않을 빈 것, 모든 것이 소거된 후 우리에게 남겨질, 없지만 있는, 부재하지만 그렇게 있는 것을 보여준다. 이 작업들에는 감상적인 치근거림은 보이지 않는다. 건조한 기록적 시선을 지키려 한다. 그러나 큰길 중앙에 남은 살구꽃이 하얗게 핀 장면을 잡거나 골목길을 밝히고 선 복사꽃은 애틋하고 가슴 먹먹하게 한다. 대문 앞의 화단에 화사하게 핀 접시꽃과 얼쩡거리는 닭 한 마리를 잡은 작품 역시 사라지는 것에 대한 있음, 현재를 과거로 소급하는 독특한 시선이나 태도를 보아낼 수 있다. 그런 것이야말로 사라진 것들의 기억으로 ‘사실’이 잡혀 있다. 사라짐으로 ‘거기 있는’ 불가공성의 어떤 실재인 빈 터를 보인다. 있는 것이 없는 것에 개입한다. 부서진 것 사 이에 남아 있는 온전한 집, 은평리 뉴타운은 거기 있는 사실을 밀고 들어선다.
이에 비해 〈오쇠리 풍경〉은 다르다. 낡은 것과 새것을 병치하고, 무너지고 부서진 것 사이에 온전하게 남은 것들을 병치한다. 적극적으로 대비적인 정황을 통해 이야기한다. 피폐된 것의 한 편으로 남아 있는 것, 인간, 혹은 인간의 숨결, 그 위로, 너무 낮게 비행기가 지나는 무소불위를 폭력에 비교하는 것이다. 철거와 잔류 사이의 황량함, 이주를 못하고 아직도 남아있는 이들의 빨래가 널려있는 골목길 표정, 〈오쇠리 풍경12〉가 그런 것이다. 부서진 집과 비교적 온전한 집, 그 사이 길을 걷는 교복차림의 여학생을 잡은 〈오쇠리 풍경10〉도 같은 맥락이다. 회색조의 풍경에 어울리지 않는 주황색의 포클레인이나 붉은 지붕의 마을 풍경을 보아내는 〈오쇠리 풍경5〉에서 이런 대비적 효과에 대한 태도는 더 확실하다. 마지막까지 그가 보아내는 것에 대한, 혹은 마지막까지 남아 있는 것, 흔적이 아닌 실재로서 기억될 어떤 것에 대한 선명한 시선을 고수하려 한다.
〈도망자〉 이래, 〈오쇠리 풍경〉에서 〈그 집〉까지 그는 ‘거기 있는’ 것의 없음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오고 있다. 거기 있는 것에서 도망치고, 〈오쇠리 풍경〉처럼 버림받고, 〈미키네-집〉처럼 엉뚱한 온전함이 우리 현실에 개입해서 대비를 이룬다. 사라지는 것이 남아있는 것에 개입하고, 흔적이 풍경을 밀어낸다. ‘거기 있는’ 것은 우리에게 사라진 어떤 것이지만 실재의 것으로 문득 판을 뒤집듯 개입한다. 그런 어법으로 스스로의 시선과 보는 이의 시선을 흔든다. 흔적으로 기왕의 장면을 훼손하는 현재형인 것이다. 흔적과 풍경에서 흔적이 현재가 됨으로서 풍경은 과거가 된다.
흔적이라는 개입을 통해 강홍구는 ‘거기 있는’ 어떤 것, 풍경을 하나의 의미체계로 이전시키고 사진이라는 단조로운 찍기나 장르 의식에서 벗어나게 한다. 합성과 일탈을 통해 사진으로 재구성된 ‘사실’을 만나게 한다.
이 어색하고 난처한 개입은 사진으로서 즉물성에 다른 관점을 요구하고, 사진은 합성되는 것이라는 영역을 보여준다. 그에게서 사진으로 찍힌 풍경은 문자기호처럼 새로운 문장의 명사나 부사, 동사로 합성된다. 그의 사진은 그의 문장이다. 그리고 다른 매체와 마찬가지로 조합을 통한 사물, 사건의 새로운 의미형성이라는 측면/문장을 일깨워준다. 그 문장은 허구가 아니라 ‘사실’을 일깨우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모르는 세상이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우리가 모르는 세상은 우리에게 ‘사실’로 존재하지 않는다. 비트켄슈타인은 이렇게 말한다. ‘세상은 사물의 총체가 아니라 사실의 총체다.’어떤 인식도 자신의 경험과 선입견, 사회적 맥락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면 사실에 대한 인식은 항상 해석을 동반하며, 그런 의미에서 ‘사실’은 이미 해석된 사실이다.”2) 그의 작업 방법은 풍경에 대한 해석이며 그 해석을 통해 우리는 우리가 몸담고 있는 사회 현실을 ‘사실’로 인식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진이 그저 하나의 합성수단의 매개일 때, 사진 자체의 영역이 해체되거나 닫혀질 수 있다는 의구심이 남고, 〈그 집〉에서 보이듯 합성된 사진의 소극성은 전통적 사진 어법을 너무 의식하고 있다는 것 때문에 디지털의 이미지 전환적 활용 역시 그 평가를 조심스럽게 한다. 게다가 〈그 집〉에서 붓질을 한 한 장의 오리지널 오브제와 다시 그것을 찍은 사진 사이의 차이가 어떤 것인지를 말하기 쉽지 않다. 또한 현장을 보는 작가의 시선이 오쇠리에서 그 집으로 옮겨오면서 직접적인 시선에서 간접적으로, 구체에서 추상으로, 나긋해지고 있다. 여기서는 더 언급하지 않았지만 눈여겨 지켜볼 부분이다.

예술은 모든 표현마다 표현 불가능한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표현하며, 비평가의 임무는 진정한 예술의 존재를 틀어막는 데 일조해온 양식과 체계에 도전함으로써 그러한 표현 불가능한 것에 담긴 함의에 응답하는 것이다.

사유의 임무는 현재 일어나고 있는 것들에 반성적으로 응답함으로써 새로운 규칙들과 행동 방식들을 발견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강홍구의 작업은 우리에게 명쾌한 태도를 제시한다. 그러나 합성 리얼리즘, 존재하지 않는 것의 존재에 대해 기대와 의구심을 함께 가지는 것은 여전히 사진이라는 매체의 특성이 완강해서일까. 이런 의문과 의구심은 그가 풀어야 할 과제이지 않을까. 사진 위에다 덧칠하는 짓과 함께.


 
1)    엮음, 라깡, 사유의 모험, 마티, 2010. p.193
2)    기호학, 연세대학교 출판부, 2005, p.14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