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산수화는 실물화의 사진 필름을 전사하고 컴퓨터로 처리하여 농담없는 흑백
픽셀화를 만드는 것으로 시작된다. 입력 정보를 이진법적 흑백 이미지로 변형시키는 이 일차적 단계를 거친 후, 그것을 펀칭의 단위가 될 점으로 전환하여 A4용지에 출력하게 된다. 이번 출품작의 경우 파동 벽면은 네거티브로 출력하여 까만 점이 여백을 나타내고, 유리벽면은
포지티브로 하여 까만 점이 이미지를 나타내도록 한다. 그 출력물을 실제 벽화로 전환하기 위해서는 무려 1,500장의 용지가 필요하다. 작가는 그 출력 용지를 벽화 크기의 필름지에
대고 까만 점들을 따라 구멍을 낸 후, 그것을 딱딱하고 스폰지를 입힌 현장 벽면에 대고 구멍을 따라 표시한다. 그 표시에 따라 표면에 검거나 흰 재료를 부착하여 흑백 이미지를 얻어내는 것이 마지막 공정이다. 파동벽의 흑색 이미지 부분은 검은 폐비닐로, 까만 점으로 표시된 여백 부분은
아크릴 거울 파편을 부착해 이미지를 만드는 한편, 유리면의 경우는 여백 부분은 투명 유리를 그대로 두고 이미지가
될 까만 점을 검은 실리콘을 쏘아 형상을 드러낸다.
11-12mm 크기로 잘라낸 거울조각 13만 개, 12mm 크기의 실리콘 덩어리 6만개가
요구되는 이번 디지털 산수화는 디지털 기술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막대한 수공과 시간을 요구한다. 기계적
과정 이후에 요구되는 노동, 즉 재료 부착의 반복 작업이 선종선사의 도닦기에도 비견될 수 있는데, 그의 작품이 주는 파워는 재료적 물성이나 물량보다는 이러한 수공적 밀도에 기인한다. 그는
이번에 파동벽 부착 재료로 전에 사용하던 리벳이나 크리스탈 대신에 커팅한 거울조각을 사용한다. 비가시적 픽셀을
가시화하는 부착 재료로서 그가 이번에 선택한 거울은 유리 건축의 비물질성을 강조하는 점에서 건축물과 미학적 연관성을 갖는데, 특히 그것이 반영의 매체라는 점에서 특별한 효과를 발휘하게 된다. 즉 조각난
거울 파편들이 제각각 주변을 반영하고 빛을 반사시킬 때에 벽화의 표면은 작열하는 수면처럼 스스로를 탈물질화시키고 이와 함께 재료적 물성과 물량적
수치를 감축시킨다는 것이다. 자체적 물량과 물성을 탈물질화, 무효화시키는
거울이라는 매체를 통해 그는 가시화된 비가시적 픽셀을 다시 비가시화시키고, 그
럼으로써 디지털 미학의 추상성과 비가시성을 극대화시키는 것이다.
〈바람처럼〉은 내부 공간을 반 이상 둘러싸는 초대형 스케일이라는 점에서도 디지털
미학을 충족시킨다. 흐르는 이미지, 즉 전자적 픽셀의 운동을 유추시키듯, 점점이 읽히는 그의 디지털 산수화는 독해의 시간 뿐 아니라 감상을 위한 신체적 이동 또는 행동을 요구하는 점에서
설치, 퍼포먼스와 같은 연극성을 획득하
며 이와 함께 시간예술로 진입한다. 또한
시간성의 개입으로 평면과 입체의 중간 형태를 점하는 전자 영상과 마찬가지로, 픽셀화된 거울 파편들이 평면을
벗어나 모자이크적인 부조성을 부여받을 때 그의 산수화는 3차원 예술로 이전한다.
“텍스트의 충실한 전달이기보다는 컴퓨터 과정의 오류나 편차를 노정시킴으로써“ 지각 주체의 새로운
반응을 유도한다는 작가의 지적처럼, 디지털 이미지는 시간과 공간, 평면과
입체의 중간지대에 기거하는 이중적 양상으로 시각 이상의 공감각적 감흥을 일으키며 지각 체계의 교정을 요구하는 바,이것이
황인기 디지털 산수화의 인식론적 의미이다.
컴퓨터 기술 뿐 아니라 실리콘, 거울, 폐비닐 등 산업재료를 사용하면서 고화를 현대적으로 재구성하는 황인기의 디지털 산수화는 문화적 유산의 은유이자 그것의
풍경적 환유로서 알레고리를 획득한다. 즉 과거 이미지를 차용하는 동시에 그것을 현재로 재생시키고 단편과 파편을
총체로 완결시키려는 재창조의 의지에서, 또한 동일 단위의 반복과 병렬적 배치로 수열적 연속체를 구성하는 동시에
스스로를 파편화, 해체시키는 상호 텍스트적 발상에서 포스트모던 알레고리를 함의한다는 것이다. 결국 〈바람처럼〉은 “바람처럼“ 전통과
현대, 과거와 현재, 서양과 동양, 아날로그와
디지털, 복합화와 파편화의 경계를 넘나들며 초시제적, 초공간적, 초기술적 알레고리 풍경화로 의미화되며 그럼으로써 명상과 함께 지각체계의 변화를 유도하는 동요를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바람처럼〉은 수상도시 베니스의 실풍경과 그림 속 계곡의 재현 풍경을 병치시키는
이중 풍경의 전략으로 내부와 외부, 실제와 가상, 재현과 제시의 이분법을
무효화시킨다. 그것은 정자를 닮아 건물이기보다는 자연의 일부이기를 원하는 한국관,
사이트 특정성을 근간으로 도출된 전시 개념 자체를 대변하듯, 그 자체가 풍경적 환유로 기능한다. 다시 말해 자연, 장소, 공간, 위치와 충돌하기보다는낯설게 만나고 다르게 반응하는 3인 작가들의 출품작과 그것이
일궈내는 ‘차이들의 풍경‘, 그 관념적, 개념적, 추상적, 해체적, 메타언어적, 담론적 풍경을 가시화하는 시각적 힌트로 작용하는 것이 황인기의 벽화 〈바람처럼〉이라는 것이다.
4. 정서영의 〈기둥〉과 〈새로운 삶〉
정서영은 〈기둥〉과 〈새로운 삶〉으로 《차이들의 풍경》에 참여한다. 이미지와 개념, 말과 사물의 간극과 불일치를 유머스럽게 조형화하는 정서영의
작업은 그것이 오브제일 경우 가구적 기능을 갖지 않는 가구처럼 실내, 인간 신체와 이상한 방식으로 관계 맺으며
인테리어 디자인적 특성을 갖는데, 이번 전시와 같이 건물 구조를 근간으로 하는 설치작업에서는 그러한 특성이
건축적 코드로 강조, 강화된다.
한국관 정면 좌측, 궁형의 유리창이 둘러치고
있는 궁형 공간에 설치된 〈기둥〉은 그 공간에 이미 세워져 있는 기둥에 부착해서 만든 높이 224cm, 지름 110cm의 커다란 가짜 기둥이다. 몸체는 단단한 백색 스티로폼, 베이스는 하얀 시멘트로 만들어져 언뜻 보면 진짜같기도 하지만, 그 커다란 몸체가
밑으로부터 5cm 띄워져 설치되어 있어 관객은 그것이 뻔한 거짓말인 줄 금방 알아차리게 된다. 궁형의 창밖으로는 외부 풍경 이 내다보이는데, 그러한 자연 풍경을 배경으로
아무 용도 없이 덩치만 커다란 가짜 기둥이 주변 공간을 가득 차지하며 공중에 얕게 떠 있는 것이다. 진짜
자연과 가짜 기둥의 비맥락적 병치, 공간과 구조의 불균형적 비례가 초현실적 풍경을 창출하는 가운데 관객은
신기함과 거북함, 시각적 쾌와 불쾌로 엇갈리는 감흥을 경험한다.
〈새로운 삶〉은 한국관이 세워지기 이전부터 그곳에 있던 입방체 벽돌 구조물 내부
공간을 이용한 설치 작업이다. 정서영은 그 공간이 위치적으로, 양식으로도
본건물로부터 동떨어진 소외 공간이라는 점을 강조하려는 듯, 사방 4m, 높이 4m 가량의 사각방을 무대로 독자적 드라마를 펼친다. 그녀의 연출은 인테리어를
변경시키는 건축적 작업으로 시작한다. 우선 건물 내부에서 그 방으로 통하는 입구에 바닥에서 1m 정도 올려 높이 72cm 정도의 작은 사이문을 단다. 단색조의 충충한 주변에 활기를 주듯 야광 주홍으로 낙점하듯 채색된 이 문은 일단 열기만 하면 그 물리적 반동의 힘으로
자동적으로 되돌아가 닫히는 여닫이문이다. 열리는 동시에 닫히는 이 사이문은 본체로부터 분리되어 있으면서 연결되는
공간 자체의 존재론적 양상을 상징하듯, 또한 다른 작품과 관계맺기와 함께 거리 취하기라는 작가적 이중태도, 나아가 3인 작가의 차별화와 동일화라는 큐레토리얼 요구를 암시하는 듯, 그 자체가 경계, 양면성의 표상으로 존립한다.
새로운 세계로 인도하는 주홍색 문을 열고 들어가면 텅빈 공간을 가로질러 외부로
향한 출구 한 끝에 검은색 오토바이 한 대가 뜬금없이 서있다. 무슨 일이 벌어질 듯, 또는 벌어진 듯한 야릇하고 긴장된 분위기이다. 그 방은 원래 후면에 출구가
나 있었으나 한동안 전시를 위해 벽으로 막아두었던 것을 작가가 이번에 문 부분을 따내어 90cm 폭의 문구멍을
만들었다. 그 문구멍 공간에 반은 안으로 반은 밖으로 걸쳐진 250cm 정도의
중형 오토바이가 있는 것이다. 그 이상한 오토바이를 자세히 보기 위해 관객이 출구를 향해 걸어갈 때 에 마루바닥은
전시장 내의 다른 바닥과 달리 출렁대는 느낌을 주며 약간씩 삐꺽거리는 소리를 낸다. 작가가 잘 깔려진 기존의
마루 바닥 위에 사이를 두고 마감 안된 목재로
생마루를 깔아 놓은 까닭이다.
가까이 가보면 앞부분은 보통 오토바이이지만 뒷좌석 부분이 두바퀴 리어카로 개조된
삼륜의 변형 오토바이이다. 판자로 만들어진 리어카를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것은 리어카가 아니라 밑부분은
창문 달린 집이고 그 위 지붕은 고속도로인 이상한 조합의 집이다. 로트레아몽이나 마그리트의 초현실적 비전을
방불케 하는 꿈 속에서나 가능한 몽환적 오브제인 것이다. 고속도로는 약간의 원근법으로 그려져 어느 정도의
속도감과 거리감을 느끼게 한다. 달리는 고속도로를 머리에 얹고 있는 바퀴달린 리어카 집이 뒤로 빠져 있는
출구 후면으로는, 황인기의 유리벽화 뒤로 보이는 멋진 베니스 해안풍광과는 대조적으로 잡초만 무성한 버려진
뒷마당이 보인다.
〈기둥〉과 마찬가지로 〈새로운 삶〉이라는 이 방도 가짜, 거짓말, 픽션이다. 현대미술이 점점 일상, 삶과 닮아 가고 사물화되어 가지만, 정서영은 예술과 같은 예술, 즉 거짓말 같은 예술로 예술을 창조하고자 한다. 정서영의 예술은 픽션이며 그것은
그럴 듯한 픽션이 아니라 거짓말 같은 픽션, 이유없는 반항처럼 그냥 거짓말인 픽션이다. 오토바이도 리어카도 아닌, 고속도로 집을 싣고 있는 이 리어카 오토바이는 지면으로부터
붕 떠 있는 기둥 만큼 새빨간 거짓말이며 예술적 오브제로만 존재가 가능한 순수한 픽션, 즉 예술이다. 그러나 그녀의 거짓말의 출처는 머리 속 상상이 아니라 눈으로 보는 현실로서, 그에
기반하여 그녀는 가상적 현실 또는 초현실적 허구를 만드는 것이다. 예컨대 고속도로 지붕이 달린 집은 고속도로
밑의 공간을 이용해 그 밑에 맞대어 지은 집, 또는 도로변에 바짝 붙여 지은 집과 같이 택지가 부족한 동아시아
국가들이나 제3세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상 풍경의 익살스러운 초현실적 표현이다. 작가의 언급대로 “현실 극복을 위한 제3세계
특유의 대안 또는 아시아적 방식“이 만드는 초현실적 진풍경에 대한 메타 풍경인 이 기이한 고속도로 집을 베니스로
이동시키기 위한 방편인 것처럼 정서영은 그것을 오토바이에 부착시킨 것이다. 그러나 오토바이가 다닐 수 없고
층계를 올라갈 수 있는 이상한 형태의 리어카가 유일한 운송 수단인 수상도시 베니스에서 이 기이한 오토 바이는 그 자체가 지리적, 풍토적 여건을 극복하기 위한 초현실적 대안이 된다. 결국 〈새로운 삶〉의 주역인
이 오토바이는 베니스를 무대로 한 사이트 특정적 오브제, 그러나 가상적으로만 존재하는 사이트 특정적인 초현실
오브제이다. 정서영은 이렇게 이상한 방식으로 사이트 특정성이라는 전시 개념을 충족시킨다.
정서영의 오브제는 언어체계 이전의 내면의 눈, 또는
데자뷔적 비전으로 포착된 사물, 상황, 사건, 즉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비언어적인 것의 조형적 구현이다. 역사적, 의식적, 검열적, 총체적 언어인 ‘담론 언어‘ 대신에 그녀는 ‘형상 언어‘, 즉 비역사적, 무의식적, 욕망적, 분열적 언어를 사용한다. 언어 자체의 정체성을 기피하며 기표를 문제화하는 조이스나
기의를 문제 삼는 프루스트와 마찬가지로, 정서영은 언어적 의미의 우주성, 획일성
대신에 문법을 전복하는 트로프를 선호하며 형상적 수사학으로 담론적 문법을 대치한다. 즉 유사성에 의존하는
은유적 압축, 우발적인 것에 의존하는 환유적 도치의 전략으로 비선형적이고 복합적인 ‘뉴 에세이‘를 창출하는 바, 정서영 작업에서
느껴지는 수사학적 저항은 바로 이러한 은유와 환유의 작용에 기인하는 것이다.
은유와 환유로 리일리티를 거부하는 점에서 정서영의 오브제 설치는 황인기의 디지털
벽화와 마찬가지로 알레고리를 보유한다. 그러나 황인기의 알레고리 산수화가 ‘핫‘하다면, 정서영의 픽션은 ‘쿨‘한 알레고리로서, 관객의 즉각적 반응을 유발하는 황인기의 작업에 비해 관객의
참여도가 낮은 ‘쿨 매체적‘ 특성을 갖는다.
포인트 시스템을 회피하는 황인기의 원심적 발상과는 다르게, 포인트적 밀도를 추구하는 구심적 정서를
반영하듯, 정서영은 묘사적 산문 대신에 응축된 싯구로, 내러티브 대신에
상징으로 표현한다. 작가 자신이 역설하듯이,“복잡다단한 통로를 언급하는
대신 끝까지 살아남은 농축된 의미와 긴장감만을 전달“하고자 하는 그녀에게 소통은 이차적인 문제가 된다. 통찰적 긴장과 관조적 이완을 동시에 요구하는 난해한 오브제, 신비한 주물로서의
그녀 작업의 매혹이,그것이 ‘사물‘(objecthood)에
그치지 않고 ‘예술‘(art)로 남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5. 박이소의 〈베니스비엔날레〉와 〈2010년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건축물 1위-10위〉
야외 작업을 주문받은 박이소는 한국관 앞마당에 〈베니스비엔날레〉라는 작품을 설치한다. 이 작품은 멀리 떨어져서 보면 작은 방만한 사각의 각목 프레임일 뿐이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프레임을 한 구석에서 사선으로 지탱해 주고 있는 2개의 지지목에 무엇인가 조물조물 조각되어
있는 건물 군상을 발견하게된다. 이 2개의 지지목이 본 작품의 핵심으로, 긴 각목에 26개의 국가관 건물들, 짧은
각목에 3개의 아스날 전시관들이 조각되어 있는 것이다.
이 사각틀 밑에는 채색 타일이 부착되거나 흰 자갈이 깔려 있는 4개의 플라스틱 물그릇이 얇은 각목 다리를 받치고 있다. 작가는 이 물그릇을
가득 채우고 있는 맹물이 수상도시 베니스의 바다를 상징한다고 설명한다. 그렇다면 비엔날레 건물 모형이기도
한 이 지지대에 의해 받처지고 있는 사각 나무틀은 결국 도시 한구석에서 베니스비엔날레를 개최하는 베니스 시라고 쉽게 미루어 생각할 수 있다. 작가는 사이트 특정적 야외작업이라는 요구를 사이트 재현적으로 응수하려는 듯, 베니스와
베니스비엔날레 자체를 대상으로 자르디니에 열지어 있는 국가관 건물과 아스날 건물을 재현하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그것을 미니어처로 풍자함으로써 비엔날레의 권위에, 또한 기념비적이라는 야외 작업의 스케일적 관례에
농담걸 듯 의문을 제기한다.
박이소의 미니어처 국가관들은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지는 않으나 원래의 모습을 그대로
모방하고 있어 각 국가관들이 외양으로 즉각 식별된다. 그러나 작가는 건물들의 상대적 크기를 무시한 채 거의 2-3cm 정도의 동일한 크기로 모형화하고 있다. 각기 다른 크기와 모습으로
경쟁하고 있는 각 국가관들의 차이와 다양함을 단순화, 축소시키는 이러한 동일화의 제스처를 통해 인간적 성취의
무상함, 커다란 차이의 사소함을 강조 하려는 것이다. 비엔날레는 국제
무대를 통해 자국의 미술문화를 선양하고 국가적 정체성을 확립하려는 문화 권력의 각축장으로, 각 관은 더 크고
더 멋진 건축물로 최고이고자 하는 욕망을 표출한다.
국가관 건물들은 그러한 욕망의 대리물이자 해게모니 다툼의 표상이다. 이러한 국가관들을 재현하고 있는 〈베니스비엔날레〉는 아직도 국가관 개념을 고수함으로써 문화적 패권주의의 흔적을 보이는
역사 깊은 베니스비엔날레에 대한 패러디라고 볼 수 있다. 비엔날레 참여작가에 의한 비엔날레 비평이라는 점에서
비평 효과의 신랄함이 증폭되지만, 재현 방식이나 작업 태도에서 의도된 허술함과 허약함이 단순히 제도에 대한
비판이라고만은 볼 수 없게 만든다. 크기, 양식, 재료에서 모두 비권위적이고 비기념비적인 이 작품은 오히려 평화롭고 순박한 소도시 풍경 같기 때문에, 작가가 말하듯 “경쟁없이 더불어 사이좋게 사는 미래
세상“을 보는 것 같기도 하다.
박이소는 건물 내부와 외부의 경계지대인 쇼윈도형 작은 공간에 〈2010년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건축물 1위〉라는 거창한 제목의 작업을 발표한다. 1위 호주 솔라타워(1000m 높이의 굴뚝 모양의 태양열 발전소, 2007년 완공예정), 2위 토론토의 CN타워(높이 553m, 1976년 완공), 3위
뉴욕 월드 가든스(높이 54 m로 쌍둥이빌딩 자리에 2008년 완공 예정)로부터 10위 상하이
오리엔탈 펄 타워(높이 468m, 1994년 완공에 이르는 10대 고층 건물들을 이번에도 작은 모형으로 만들고 그것을 여기서는 낮은 테이블 위에 진열한다. 나머지 9개 고층건물보다 2배 정도로
월등히 높은 1위 솔라타워는 길이 130cm 정도의 하수구 파이프를
수직으로 세우고 백색 유토를 그 주위에 발라놓은 것으로 원통 모양의 건축물 원형을 그대로 모방하여 만든 것이다. 서로
비슷한 높이지만 사소한 차이로 순위가 매겨진 나머지 9개의 건축물도 밀가구 반죽같은 백색 유토를 주물럭거려
만든 높이 60-70cm 정도의 캐리커처식 모형들이다. 이 건축물 모형들은
물렁물렁한 재료적 특성 때문에 원형과 유사한 외양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영화 세트장의 캐릭터 소품과 같이 우스꽝스럽고 괴기스러워 보인다.
작가는 위대함의 신화, 수직적 욕망의 역사를
비웃는 듯, 또는 시지프스의 불가능한 도전을 환기시키듯, 최고 높이를
자랑하는 세계적 고층 건물들을 하수관이나 물렁물렁한 반죽재로 회화화하는 것이다. 인간적 성취, 역사적 업적을 미니어처로 축소시키는 이러한 탈남근적, 탈영웅적 발상은 주변적인
것, 쓸데없는 것, 모자 라는 것, 빈
것, 약한 것에 대한 그의 관심, 그가 즐겨 사용하는 합판, 각목, 콘크리트 등 일상적이고 가공되지 않은 값싼 재료들, 힘주지 않고 허술하게 대강 만드는 제작 태도에서 감지된다. 물건이나 작품이
보기에 따라 웃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점에서 그는 정서영과 마찬가지로 시각적 농담가이지만, 구심적 밀도나
드라마틱한 긴장보다는 ‘썰렁함과 헛헛함‘에 매력을 느끼며 허술함을 미학화하는
점에서 후자와 구별된다.
황인기와 정서영이 비예술적 재료와 비전통적 방법으로 예술을 추구한다면, 박이소는 모든 것을 가볍게 처리하고 평준화시켜 예술을 벗어나고자 한다. 예술적
재현보다는 현실적 제시로 본질에 접근하고 결코 가볍지 않은 주제를 한번 비틀어 가볍게 처리하는 풍자의 전략으로 그는 고급예술, 제도예술의 코드를 탈피하고자 하는 것이다. 반예술적 저항과 문명 비판적 내용을
비도발적, 비극단적으로 탈정치화하는 그의 완곡어법에 의해 익숙한 현실, 실제적
대상이 오히려 낯설게 보여진다. 황인기의 알레고리 풍경, 정서영의 허구의
드라마가 예술적 정공법으로 리얼리티를 초월한다면, 박이소의 낯선 리얼리즘은 예술적 반어법으로 리일리티를 변형시킨다. 이 3인 작가들의 작업이 이념적, 양식적, 미학적, 전략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풍경으로 모아질 수 있는 부분은 바로
리얼리티에 대한 추상적, 개념적 접근이며 이를 통해 확보되는 알레고리의 차원이다.
결국 3인 작가들이 창출하는 복수적 차원의 알레고리, 그
차이의 스펙트럼이 관조와 동요, 명상과 도발을 공존시키는 한국관 특유의 ‘차이들의
풍경‘을 만드는 것이다.
6. 정체성의 강박으로부터의 해방
황인기, 박이소, 정서영은 미국과 독일에 거주하며 이민자의 체험과 정체성의 갈등을 경험한 작가들이다. 황인기는 1976년부터 10여년간의 뉴욕 체류 기간동안 미니멀리즘에 경도되어 하드엣지적
추상미술을 실험하기도 하고 린넨의 올을 빼어 그 사이에 채색하는 추상표현주의 계열의 작업을 시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서양의 정서와 자신이 다름을 인식하고 귀국을 결심했던 1986년 경부터 손가락으로 그리는 제스츄럴 드로잉을
시작하였다. 자연스럽게 신체의 리듬과 흥을 타고 그려지는 붓자국에서 자신의 고유 정서를 발견하고, 정체성을 직접 주제화하기보다는 자신의 정서와 감흥이 기록되고 형태의 과장이나 축소가 통하지 않는 손가락 그림에서
회화적 출구를 찾은 것이다.
1986년 귀국 후 파주, 옥천에 작업실을 마련한
그는 시골생활에 체질적 편안함을 느끼며 주변 풍광을 그리는 한편, 허니콤, 층계
등 연금술적 상징 기호와 언어가 등장하는 뉴 이미지 계열의 형상적 추상화로 조형 실험을 병행하면서 서구적 뿌리 역시 자기 정체성의 일부를 이루고
있음을 인식하게 된다. 1990년대 중반 선묘적 산수 드로잉에 레고, 리벳
등 일상의 파편들을 부착하며 예사롭지 않은 부조적 산수화를 발표하던 그가 산수 풍경을 디지털로 픽셀화시켜 그리드적 입체조형을 만드는 새로운 디지털
산수화 연작을 선보이게 되는 것이 2000년이다. 산수화 전통과 디지털
기술, 자신의 풍유적 기질과 학습된 조형기법의 행복한 만남이 이루어진 이 시점에 이르러 작가는 자신의 본성과
체질을 바탕으로 하는 자신의 그림을 그린다는 자각과 함께 정체성의 강박으로부터 놓여나게 되는 것이다.
1989-1996년의 기간을 슈투트가르트에서 보낸
정서영 역시 정체성 문제에 민감하지 않을 수 없다. 제 3세계적 초현실
풍경을 창조 모티프나 영감으로 삼는 그녀의 작업이 암시하듯이, 그녀는 자아 정체성, 민족 정체성의 문제를 예술과 예술가의 정체성 문제로 환원시킨다. 정치보다는
예술, 이론보다는 조형, 철학보다는 미학,
리얼리티보다는 픽션을 선호하는 그녀에게 문제시되는 것은 예술은 사물이나 현실과 어떻게 다르며 예술의 의미와 당위는 어디서 찾아져야
하는가 하는 예술의 본질에 관한 것이다. 그녀는 예술을 예술이 아닌 것으로부터 구별해 내기 위하여 고밀도, 고차원, 고농도의 픽션을 창안하지만 그것은 현실에 뿌리내리고 있는 사물들에
의한, 사물들의 픽션이다. 다시 말해 예술과 사물의 사잇길에서, 예술과 비예술의 경계에서 정체성의 혼란을 겪으며 주물화, 주술화되는 것이 그녀의
픽션이자 예술이다.
픽션의 가공자로서의 정서영,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불가능한 재현을 형상적으로 제시하는 이 작가는 재현과 제시의 사이에서 생산적 불안을 경험한다. 그녀의
작업은 자신에게는 익숙하지만 타인에게는 낯선 조형 언어로 관객과의 소통을 원하면서도 원치 않는 작가적 이중 심리, 이중
정체성에 대한 진술이기도 하다. 소통의 불가능성을 예견하면서도 그녀는 관객에게 말걸기를 시도한다. 다양한 해석의 층위에서 복합적 의미의 망을 구성하는 기표들로 그녀가 환기시키고자 하는 것은 기표와 기의의 간극과
불일치에 대한 코멘트, 그것은 크게 보면 실존적 부조리, 구조적 불합리에
대한 비평적 코멘트인 것이다.
정서영의 경우 정체성에 대한 관심이 심리적 차원, 미학적
차원으로 집중되어 있는 한편, 박이소는 그것을 사회적 지평으로 확장시킨다.
1982-1994년 뉴욕에 체류하는 동안 박이소는 이민자로서의 체험과 언어적, 문화적 갈등을
역설적 유머와 냉소로 표현하는 일련의 작업을 통해, 동시에 자신이 직접 운영한 대안공간 ‘마이너인저리‘를 통해 지역작가, 소수민족, 제3세계 문제를 실천적으로 이슈화하였다. 그러나
그는 1995년 귀국 후에는 “정체성이나 문화적 다양성과같은 주제에
무관심하게 되었고, 사람들과 삶과 사물의 나약함과 임시성, 커다란 것의
초라함, 성취의 하찮음 같은 것에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귀국 후의 박이소가 당도하게 된 이러한 탈정치, 탈이념의 경지, 또는 탈의식화의 태도를 과거의 작품들에서 발견되는 비판적 성향의
이면으로 본다면, 그 안에는 아직도 변혁의 의지가 숨어 있는지도 모른다. 그는
회의적인 시선으로 변방과 타자에 대한 이국주의적 관심과 자기를 주변화시키는 내면적 오리엔탈리즘의 위험, 국제화를
위한 지역주의와 전통주의의 함정을 우려하며, 대서사보다는 소서사,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틈새에 주목한다. 정체성을 재현하지 않으면서도 정체성을 내용화하고 한국적인 모티프를 사용하지
않으면서도 한국성을 주제화하는 그의 작업은 바로 동양적 개념의 여백, 파격, 비결정성과
상통하는 틈새의 미학에 연유하는 것이다.
정서영이 지역성을 초월하는 미학과 의미화에 대한 탐구로, 초자아적 직관력으로 한국성 이슈를 재치있게 우회하는 한편, 황인기와 박이소는
본성적으로 한국성에 경도된다. 즉 황인기는 풍류적 기질로, 박이소는
야인적 태도로 한국성을 표출하거나 그에 대한 관심을 표명하는데, 그와 동시에 전자는 본성에 충실하기, 후자는 인식론적 거리취하기로 정체성의 강박으로부터 일탈하고 그럼으로써 국제주의와 지역주의의 갈등을 자 연스럽게 해결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의식적 차원에서도 과거 전통과의 끊임없는 대화, 그것과의
관계의 재정립을 통해 타자화되지 않은 정체성을 담보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미국생활 10년을 통해 얻은 것이 있다면 줏대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줏대는 위신 세우기가
아니라 서구에 종속되지 않는 유일한 살 길“이라고 역설하는 황인기의 진술이나,
“글로벌리즘은 힘센 사람이 약한 사람에게 강요하는 질서“라고 규정하며 그 대신에 “약한 사람들이 자기 이야기를 하다가 나중에는 지루해져서 넓은 세상에 대해 횡설수설도 하고 농담도하는 월디즘“을 말하는 박이소의 태도가 이러한 문제의식을 반영한다.
7. 글로컬리즘을 향한 “꿈과 갈등“의 풍경화
‘차이들의 풍경‘은 한국관 전시의 정체성
분 아니라 현재진행형의 한국성을 표출하는 주제적 핵심 개념이다. 즉 한국관의 정체성을 지역적 전통이나 타자화된
동양성보다는 현재 생성 중인 현대성, ‘지금/여기‘의 현장 작업으로 일궈내고, 이를 통해 전통적이면서도 현대적이고, 한국적이면서도 국제적인 한국 현대미술의 한 가지 범례를 제시하려는 것이다.
이번 비엔날레 총감독 프란체스코 보나미는 《꿈과 갈등》이라는 주제를 통해 현대미술이
당면하고 있는 ‘국제주의 vs 지역주의‘ 이슈를
비엔날레의 과제로 부각시키고 있다. 국가적, 민족적 정체성을 개방된
지구적 비전으로 풀어낼 기량있는 국제 작가에 의해 종합이 필요한 바, 꿈과 갈등은 이러한 종합을 위한 충돌과
대립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나미는 《꿈과 갈등》은 현대미술이 생산되는 현대의 미술적, 역사적, 사회적 맥락을 반영하며 그러한 꿈과 갈등 사이에서 미래적 이슈가 해결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차이들의 풍경》을 보나미의 《꿈과 갈등》에 비견시키면, 풍경은 꿈, 차이들은 갈등에 관계된다. 여기서
차이나 모순을 데리다적 차연개념으로 풀이할 때, 차이가 만드는 갈등과 모순이 실재하지 않는 가상적, 상상적 풍경을 만든다는 가설이 성립된다. 즉 《차이들의 풍경》은 기표들의 차이와
차이의 연쇄가 의미를 유보시키고 부재시키는 해체적 풍경화로서, 해체 자체보다는 해체 후에 일궈지는 새로운
풍경에 초점을 맞춘다. 그것은 동양과 서양, 전통과 정체성, 국제성과 지역성의 위계적 이분법을 초월하고 자연과 예술, 작품과 환경, 작품과 작품, 작가와 작가의 차이를 조화시키는 생성적 통합의 시도이다. 결국 《차이들의 풍경》은 차이를 축으로 타관과 차별화되는 한국적 정체성을 확보하려는 전략적 전시 개념인 동시에, 그것을 통해 성취하고자 하는 새로운 글로벌리즘과 새로운 지역주의의 청사진, 즉 ‘글로컬리즘‘을 향한 꿈과 갈등의 풍경화인 것이다.
지역주의와 국제주의의 조화 또는 공생이라는 과제는 현대화와 서구화가 동일시되고
모더니즘이 제국 주의로 독해되는 후기식민주의 상황의 비서구권 작가들, 특히 국제화, 국제 진출의 요구에 민감할 수 밖에 없는 현대 한국의 청년작가들에게 최대의 화두가 되고 있다. 새로운 글로벌리즘, 또는 새로운 지역주의의 개념은 이에 대한 하나의 해법이
될 수 있다. 서구적 기준에 맞추어 저개발국가를 변화시키는 글로벌리즘이 아니라 동등한 상호이해의 기반 위에서
비서구가 서구사회에서 기능하는 방식과 역할에 주목하는 새로운 글로벌리즘에 의해, 마찬가지로 과거지향적인 전통주의, 집단이기를 내세우는 지방주의, 식민주의적 발상의 이국주의가 아니라 생성적 전통을
만들어 내는 역동적인 지역주의에 의해, 비서구는 다른 문화에 대해 개방적이면서 도 자신의 문화적 맥락을 발전시키는, 의미심장한 문화적, 지적 ‘글로컬리즘‘의 창출에 기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차이들의 풍경》이 기반하고 있는 사이트 특정성은 이러한 문제의식과 깊게 맞닿아
있다. 현실과 관계맺기를 거부하는 자기탐닉적이고 자기폐쇄적인 작업보다는 건물 구조, 주위 풍물과 풍경에 조응하는 건축적, 환경적, 자연적
현장작업을 통해 일상적, 사회적 현실에 개입하는 맥락적이고 관계지향적 전시를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사이트 특정성의 연장선상에서, 물량 효과나 외적 장관보다는 내적 복합성과
과정의 필연성을 중시하는 개념적이고 진화적인 전시, 명상과 함께 도발과 동요를 불러일으키는 관조적이면서도
역동적 전시를 구상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한국관의 고유한 이미지를 창출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참여 작가들의 개별 발표장, 동시 개인전 차원을 초월한 사이트 특정적
협업 정신, 나아가 큐레이터가 사회적 이슈와 문제를 제기하고 작가는 그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는 공동 연출의
과정을 통해 비평적 시각과 시의적 담론이 내포된 새로운 전시 유형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커미셔너의 이러한 큐레토리얼 제안에 적극 동참한 3인의
작가들은 각기 다른 작가적 개성과 전략으로 차이의 풍경을 만드는 한편, 한국관 자체, 베니스 자체를 대상화함으로써 차이를 일관된 풍경으로 통합시킨다. 정자와 같이
자연친화적인 한국관의 특성에서 출발하여 자르디니 공원 내의 베니스비엔날레, 수상도시 베니스 자체의 사이트
특정성으로부터 도출된 차이들의 풍경은, 황인기의 ‘베니스 풍경‘, 박이소의 ‘베니스비엔날레‘, 정서영의 ‘베니스 오토바이‘가 예증하듯, “2003년
베니스에서 생긴 일“을 기록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