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가장 젊은 전시
눈은 “어쨌든” 녹아 사라질 것이다. 작가는 그렇기 때문에 눈을 재현한 대리석 조각을 만들어 전시하지는 않겠다고 밝힌 “안내말씀”을 좌대 오른쪽 아래에 부착해 작품으로 내놓는다. 거울의 속성 상 그것의 표면에 반영되는 대상은 일회성이다. 그런데 작가는 모터의 힘으로 계속 회전하는 거울을 만들어 대상의 반영(reflection)은 물론 자신의 작품 자체도 “공회전”하는 반(反)성찰적 상황을 연출한다. 하나의 회전판 위에서는 무엇이든 공동 운명체처럼 돌 텐데, 작가는 똑같은 의자 두 개를 각기 시계 방향과 반시계 방향으로 반복하며 돌도록 작동시킨다.
벽에 난 작은 구멍을 타고 어둠의 방으로 새어드는 햇빛은 시시각각 변하다 스러진다. 하지만 작가는 일일이 그 빛의 흔적을 동그라미 쳐서 벽에 인위적인 기록을 남긴다. “修身齊家(수신제가)” 또는 “無爲自然(무위자연)”처럼 사람들이 두고두고 회자해온 말들에는 일정한 진정성과 무게감이 있다. 그러나 작가는 그 말들이 공허한 정신의 기표로 파편화되고 제 잇속을 가리는 미학적 가면 명제로 남용되어온 점을 안다. 해서 그 사자성어를 쪼개 쓰기도 하고, 허장성세하게 금박 입혀 쓰기도 한다.
작가 안규철의 아마도예술공간 개인전 《12명의 안규철》 전시작들에서는 위와 같이 현실 인식 및 물리적 질서로 ‘당연한 것’과 그 당연함의 문제적 지점을 파고들어 사고와 행위를 ‘거스르는 것’이 상호 관계한다. 그 관계는 논리학으로 치면 역설(paradox)’에 해당하는데, ‘일반의견(doxa)’을 ‘넘어서는(para-)’이라는 조어의 형태처럼 둘이 공존하면서 후자가 전자에 개입하는 방식이다.나는 이 역설의 관계, 즉 당연한 것을 넘어서기 위한 거스름 혹은 개입이 곧 자신의 미술 창작을 “세계의 역설에 대한 질문”이라고 밝힌 안규철이 40여 년 간 지켜온 작업 방식이라고 본다.
또한 그것이 올해로 ‘종심(從心)’에 이른 이 원숙한 작가가 가장 최근의 개인전까지 논리적 긴장과 이질적 표현 감각으로 젊게 만들 수 있었던 일종의 ‘마음 속 가시’라고 주장하고 싶다. 세계에 대한 문제의식이 작가로 하여금 느긋해질 틈을 주지 않고 더 나은 것을 모색하도록 불편하게 찌른다는 의미로 말이다. 서두에서 내가 그의 작품들을 매개로 글쓰기 한 것은 그와 같은 긴장감과 이질성이 《12명의 안규철》에서 어떠한 인문적 맥락과 예술적 조건을 간섭하며 일어나는지 보여주려 한 것이다.
리얼리스트, 아이디얼리스트
요컨대 안규철에게 세계의 역설에 ‘대응하는’ 역설의 예술 하기는 조형(造形)을 통한 비판적 사유의 생산이라는 점에서 인문적 차원을 내포한다. 동시에 역설의 논리를 조형의 방식으로 가시화한다는 점에서 미술의 장르적 특수성을 견지한다. 그는 물리적 실제/주어진 현실의 메커니즘과 일반적 인식(전자)을 가져다 그 내부의 한계 또는 모순점을 짚고 그것과 좀 다른 것(후자)을 드러내는 작업을 한다. 그 작업은 한편으로 전자와 후자 사이에 빚어지는 역설의 긴장을 내재한 조각, 드로잉, 텍스트, 회화, 영상, 설치미술을 창작해 외적으로 보이도록 하는 일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그러한 조형 형식을 입은 작품들이 내용면에서 단순한 반어(irony)를 넘어 비록 불가능하더라도 진실을 촉진하는 역설의 언어로 읽히도록 하는 일이다.
미술만큼 글쓰기에 천착해온 안규철 스스로 그 점을 자각하며 작업해온 것으로 보인다. 그에 따르면 사물들은 개입과 읽기의 기능을 갖고 있어 예술가가 그것을 통해 일하도록 등 떠민다.
“우리 주위의 물건들은 적어도 두 가지의 상이한 기능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그것을 통해 우리가 세계에 개입하는 도구로서의 기능이고, 다른 하나는 세계를 읽는 텍스트로서의 기능이다.”
여기서 안규철이 지칭한 “세계”는 다소 추상적이다. 하지만 그는 다른 곳에서 자신의 미술이 1980년대 전반 민중미술에 속해 “어떤 상황을 입체적으로 재현”하는 데서 1987년부터 7년 반 동안 독일 유학 시절을 거치며 “사람들이 만들어놓은 일상적인 사물과 언어”로 옮겨 갔다고 진술했다. 그런 일상적 사물과 언어를 “새롭게 변형하고 조립함으로써, 새로운 텍스트”를 만드는 것이 자신의 이후 미술세계를 이뤘다는 것이다.
이러한 내용을 종합해 보면, 안규철은 주어진 사물에 근거해 세계를 읽는다는 점에서는 리얼리스트로 여겨진다. 하지만 그 사물에 의해 구성된 기성 세계에 바로 그 사물을 써서 개입한다는 점에서 안규철은 수동적 리얼리스트나 “세상에 대한 골똘한 관찰자” 역할에 그친다고만 할 수 없다.
더군다나 “나는 전형적이고 예측 가능한 반응과 해법에 안주하는 예술에 반대”한다고 천명한 사실에 입각하면, 그는 최소한 저항적 리얼리스트다. 그런데 어쩌면 우리는 그를 현실주의의 범주에서 빼내야할지 모른다. 그가 심미적 재현의 미술에 거리를 두고 그에 비하면 자신의 작업과 생각은 “세속적”이라고 자평하면서도 다음과 같은 예술가와 작품의 “상태”를 이상적인 것으로 묘사하기 때문이다.
“하나의 작품, 한 사람의 영혼의 궤적이 그런 빛(한 사람의 마음을 뒤흔들고 잠 못 들게 하는 달빛)을 저절로 발하는 그런 상태를 꿈꾸어 본다.”
위 문장은 게오르그 루카치(Lukács György)가 『소설의 이론』에서 첫 문장으로 쓴 “별이 빛나는 창공을 보고, 갈 수가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었던 시대”를 떠올리게 한다. 루카치는 고대 그리스를 ‘[서구의] 완결된 문화’로 상정하고 그렇게 썼다. 그에 따르면 인류에게 그 시대는 이미 지나가버린 과거로서만이 아니라 유토피아적 목표로서도 의미를 갖는다. 나는 안규철의 예술에 대한 사유 안에 루카치의 미학이 자리 잡고 있을 수 있다고 보는데, 그것은 현실 비판과 더불어 이상적 사회를 향한 열망 같은 것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그가 앞서 소개했듯이 자기 작업을 “세계의 역설에 대한 질문”으로 전제한 동시에 예술의 일을 “ ‘지금 여기’가 아닌 곳, 유토피아에 대한 질문”으로 정의한 데서 우리는 그런 면모를 알아본다. 또한 스페이스 이수 개인전 작품 중 나선형의 검은 통로가 원판 위에서 돌고 돌아 그곳을 걷는 이가 결코 끝에 이를 수 없는 〈나선형의 벽〉(2024)과 거기 부여된 “도달할 수 없는 유토피아”라는 텍스트를 통해 우리는 그 의미의 복합성을 헤아린다.
그럼 안규철은 아이디얼리스트인가. 나는 이 작가가 독일 유학 후 귀국해 무명의 젊은 조각가로 활동하던 1990년대 중반에 부정적 뉘앙스로 듣곤 했던 ‘관념주의자’라는 뜻을 배제하고 그렇게 생각한다. 오히려 그가 현실 세계에서 출발해 더 나은 세계를 추구하며 작업해왔다는 점에 방점을 찍고 ‘이상주의자’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 예술 실행이 특히 불가능한 목표, 단지 끝없이 추구만 할 수 있는 대상으로서 유토피아적 세계를 목표함을 강조하고 싶다. 토마스 무어(Sir Thomas More)가 고대 그리스어로 만든 라틴어 단어 ‘유토피아’의 양가적 의미처럼 ‘없는 곳(ou-topos; nowhere)’이자 ‘좋은 곳(eu-topos; well/good place)’을 향해 반복적으로 질문하는 작업자라는 속뜻을 부가해서 말이다.
존재의 미학을 연마하는 n명의 안규철
안규철은 작품 〈회전하는 거울〉(2024)을 두고 “예술가는 세상을 비추는 거울이 되어야 한다고 믿었던 나의 처지”와 같다고 썼다. 미술가로서 자신은 여태 “반성과 자책”을 멈추지 않고 작업해왔지만 “세상은 그렇게 해서는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기에 이제 “세상이 돌아가듯이 나도 돌아간다”며 지름 55cm의 작은 거울이 모터로 돌고 도는 작품을 만든 것이다. 이는 일견 니힐리즘과 반(反)유미주의가 결합한 냉소적 개념미술로 보인다. 작가가 자초했다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바로 그 자발적 의도와 속내를 작품과 글쓰기로 고백한다는 점에서 안규철을 차가운 개념미술가로 규정하기는 무리다.
나는 인문학자 이찬웅이 《국립현대미술관 현대차 시리즈 2015: 안규철 -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 전시를 두고 조셉 코수스(Joseph Kosuth) 식의 “사전적 개념미술”이 아니라 일상의 사물을 시적인 사물로 변환하는 “시적 개념미술”이라고 분석한 데 주목한다. 그는 작가가 반어를 “본질적인 수사학으로 구사”해서 사물을 일상의 용도로부터 떼어내고, 그렇게 사물을 “기호”로 만들어 “전시에서 이 기호들이 시적 세계를 형성”하도록 한다는 논리를 매우 설득력 있게 제시했다. 앞서 소개했듯 안규철 스스로 자기 작업을 분석하건대, 그의 미술은 이미 있는 세계를 질문을 통해 “변형”하고 다르게 “조립”하여 새로운 “텍스트” 혹은 “도달할 수 없는 유토피아”로 가시화하는 데 매진해왔다는 점에서 동의한다.
하지만 나는 이찬웅이 분석한 것처럼 안규철의 수사학이 반어에 한정되는지, 그것의 범주가 과연 “개념미술의 시적 전통” 인지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다. 안규철의 사유가 담긴 글과 미술작품에서 수사학의 방법론은 감상자에게 모순을 보여주는 구성을 넘어 일종의 깨우침을 유도한다. 그런 점에서 반어를 포괄하는 역설이 더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특히 강조할 점은 안규철이 기성의 조형미에 대해서는 꾸준히 경계해왔고, 예술을 통한 세계 비판과 동시에 그러한 비판자로서의 자기에 대한 반성과 자책성 고백을 결벽적일 만큼 외부로 명시해온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이 미술가가 의식적으로든 직관적으로든 작업을 통해 존재론적 미학과 윤리학을 지향해왔다고 본다. 내게는 그러한 지향성이 물리적 규모가 크지 않고 미술계의 권위면에서도 대안적 섹션에 머무는 아마도예술공간의 개인전 《12명의 안규철》을 통해 나타난 점이 흥미롭다. 전시작들은 공간의 특성을 반영해서 12개의 방/전시장과 옥상에 흩어져 있다. 12개로 분할된 전시공간과 12명으로서 한 명의 작가. 여기서 숫자 ‘12’는 단순히 정수 n이 아니라 그 전시공간이 지향하는 현대미술의 미학적 분할과 거기서 전시하는 작가의 복수적 정체성이라고 해석 가능하다.
그래서인지 작품들의 모티프부터 질료·매체·연작 구성에 이르기까지 《12명의 안규철》에는 전시 공학적으로 일관된 질서가 없고, 미적으로 고수하는 가치는 희박하다. 안규철이 처음 시도한 애니메이션 〈걷는 사람〉(2024), 작가가 직접 퍼포먼스 한 싱글채널 비디오 〈쓰러지는 의자 - Homage to Pina〉(2024)는 프리미어 영화제의 스크린 대신 대안공간의 낡고 거친 벽면에 프로젝션 된다. 옥상에 설치한 〈눈을 기억하는 세 가지 방법〉은 전시 기간 내내 날씨 등 외부의 혹독한 조건을 고스란히 받아들이며 서 있다.
하지만 전시의 이러한 양상들은 부정적 평가 요소가 아니다. 역으로 안규철이 전시의 다른 작품들 - 관념론 미학과 단색화 등 추상미술을 메타 비평하는 일련의 회화, 미술제도에 대한 의심을 담은 조각, 도덕적 행위·윤리적 의식·위로의 정서를 내포한 여러 시인들의 시를 기반으로 한 설치 - 에서 다루는 내용을 좀 더 진정성 있게 만든다. 말하자면 각 방에 전시된 작품들이 “12명의 안규철”로서 작가가 세상에 대고 추구해온 형식과 내용을 유보하지 않고 보고 듣고 읽게 한다.
미셸 푸코(Michel Foucault)는 서구 사회를 이룬 실천들의 총체를 탐구했다. 그는 그 총체가 “존재의 기술”, “존재의 미학”, “자아의 기법”으로써 오래 이어져왔다는 점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에 따르면 사람들은 “스스로 행동규칙을 정할 뿐 아니라 스스로를 변화시키고 (...) 그들의 삶을 어떤 미학적 가치를 지닌” 존재론적 차원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자발적이고 신중한 실천을 역사를 관통해 거듭해왔다는 것이다.
고고학의 방법론을 빌린 푸코의 철학은 그러한 실천들을 통해 인간이 ‘주체’로 형성된 과정을 비판적으로 조명하는 것이었다. 대상의 규모가 완전히 다르지만, 나는 안규철이 내내 해온 미술 작업과 글쓰기의 가장 원초적인 충동은 푸코가 풀이한 존재의 미학과 윤리학이지 않을까 유추해본다. 그 자신의 삶이 가치 있도록 부단히 자신을 반성하고, 세상에 대해 질문하고, 더 나은 세계를 지향하며 물질과 생각을 조형하는 실천의 매트릭스로서 말이다. 거기서 형성된 예술가 주체는 자유롭지는 않지만 멈추지 않는 수행성을 내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