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언어의 감옥에서 생각하기를 거부한다면,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만두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 눈에 보이는 한계가
정말 한계인지를 묻는 선에서
더 나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 니체
0. 기호로서의 미술작품
질러 말하면, 미술은 현실의 재구성이다.
현실의 어떤 것은 강조하고 어떤 것은 더욱 가려버림으로써, 미술은 현실의 보이지 않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러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이의 끊임없는 긴장관계를 통해 미술은 일상을 돌아보게 한다. 그것이 가능한 것은 작가와 독자 사이의 대화가 미술을 통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전통적으로 미술은 유일한 기원으로 존재하는 작가의 모습을 상정해왔다. 하나의 유일한
의미를 창출하는 작가는 미술작품을 자신의 분신으로, 자신의 목소리만을 담고 있는 것으로 보았다. 이러한 작가는 작가-미술작품-관객으로 이어지는
소통구조에서 관객을 단지 자신의 이야기를 듣기만 하는 수동적인 존재로 만들어 버리면서, 소통구조의 권좌를 누렸다. 작가→작품→관객의 구조는 작가의
창조적 아이디어를 작품이라는 매체를 통해서 관객에게 전달하는 것이다. 여기서 관객은 단지 작품을 지각할 뿐이다. 전통적인 구조 안에서 작가는 작품을
관객에게 전달하는 것이 주된 임무였으므로, 관객에게 있어서는 지각행위 자체가 미술작품과 만나는 것이었다. “이것이 미술작품인가?”라는 의구심 따위는
관객에게는 불필요한 것이었다.
그러나 20세기에 접어들면서, 작가는 작가-미술작품-관객으로 이루어진 소통구조에 관객을
초대하기 시작했다.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이 제시한 레디-메이드ready-made가 미술작품으로 가치를 인정받게 되는 것은 관객이
단순히 그 사물을 지각한다고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어떤 이가 미술작품이라고 생각하는 사물이 어떤 이에게는 미술작품이 아닌 일반 사물일 수도
있는 것이다. 작가→작품←관객으로 이어지는 구조는 작가가 제시한 작품이 전달이 아닌 소통의 산물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 “이것은 미술작품이다”라는
작가의 선언적 말은 관객을 통해서 검증되어야 하는 유보된 선언문인 것이다. 이 유보된 선언문은 능동적인 관객이 미술작품을 기호화하기 전에는 불완전한
것이다.
이상에서 알 수 있듯이 20세기 이후의 관객은 작가의 전달만을 기다리는 수동적 주체가
아니라 스스로 참여하는 능동적 주체이다. 관객은 미술작품을 기호화하고 그것을 통해 작가와 소통을 하려한다. 작가와 관객이 미술작품을 통해서 소통한다는
의미에서 미술작품은 기호이다.
Ⅰ. 재현과 현존의
틈을 떠도는 유령들
일반적으로 기호는 정보를 전송하고 한 사람이 알고 있는 무언가를 다른 이들이 알 수
있도록 말하거나 가르쳐 주기 위해 사용된다. 여기서 상정하는 발신자와 수신자는 기호라는 매체를 공통적으로 인식해야 한다. 그 때만이 발신자와 수신자
사이에 대화가 성립된다. 기호를 공통적으로 인식하지 못한다면, 발신자와 수신자 사이의 대화는 단절된다. 따라서 기호가 재현하는 사실과 실재의 사실
사이에 1 : 1 대응 관계를 이루는 것, 다시 말해 공통적으로 인식하는 기호 사이에 어떤 사실의 왜곡 없이 재현되는 것은 대화 성립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조건이다. 그러나 왜곡 없는 재현이 가능한가?
재현이라는 개념은 부재하는 대상을 그것에 상응하는 다른 대상(기호)으로 제시하는 것이다.
재현은 대상의 부재를 전제로 한다. 대상이 부재하지 않는다면, 그 대상을 다른 대상으로 제시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재현은 불안정하다.
재현은 단지 부재하는 대상을 ‘어느 정도 현존’하게 할뿐이지, 결코 완벽하게 재현하지 못한다. 이것은 기호와 재현이 가지고 있는 역설적인 측면이다.
부재하는 대상은 기호를 통해 형상화되지만 대상이 형상화되었다고 해도 대상은 부재한다. 기호가 부재하는 대상을 충만하게 만들어 준다면, 그것은 더
이상 부재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 그 자체가 되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대상을 향해 소급해 나아가지만 대상에 다다를 수 없는 지점에서, 재현은 자신의
안식처를 찾는다.
따라서 재현은 완벽한 현존이 아니라 ‘어느 정도의 현존’인 것이다. ‘어느 정도 현존’을 완벽한 재현으로 생각하는 주체는 라캉의
거울단계에 따르면 ‘자아 형성시 필연적으로 개입되는 오인(meconnaissance)으로부터 생겨난 환상’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재현된
이미지와 대상 사이에는 다가갈 수 없게 만드는 균열 혹은 틈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어느 정도의 현존’이기에 그 틈에는 완벽한 재현에 다다르기
위한 수많은 주체들이 유령처럼 떠다니고 있다. 보이지는 않지만, 존재하는 그 수많은 유령들의 언어를 빌어 우리들은 사회를 살아가고, 삶을 영위하고
대화를 하고 있는 것이다. ‘어느 정도의 현존’이라는 사실은 망각한 체.
Ⅱ. 기호적 재현,
그 허구의 세계
사실 안규철은 사소한 우리 일상에 주목하면서 평범하고 사소한 일상의 사물을 재현하는
듯 하다. 그러나 안규철에 따르면, 일상을 바라보는 우리의 눈은 이미 사각형의 틀에 갇힌 “사각형의 눈”이다. 〈장미의 이름으로〉에서 “기호의
진리에 대해 난 한번도 의심하지 않았어. 이 세상에서 인간이 자기 방향을 잡는데는 이 기호뿐이야.”라고 말하는 아드소의 말처럼 우리는 기호의 진리에
대해서 의심하지 않으며 살아간다. 일상의 평범한 사물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사실은 “사각형의 눈”을 통해 걸러진 그 무엇이라 할지라도.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에 따르면 “우리는 기호의 본질적인 기능이 현실을 사라지게 하는 동시에 이러한 사라짐을 감추는 것이 되고 있는 세계 속에 있다.
모든 이미지의 이면에서 무엇인가가 사라져 버린 것이다.” 기호는 진리가 아니다. 기호는 단지 기호일 뿐이다. 기호는 진리에 이르는 길이 아니라
어쩌면, 진리를 파괴하고 왜곡하는 수단인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눈에 보이는 것은 무엇이며, 걸러진 것은 무엇인가.
사회는 사회 구성원들에게 사각형의 틀 안을 강조하면서, 틀 밖의 세계를 제거한다.
우리는 그런 왜곡된 눈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 기호는 사회 구성원간의 약속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이런 기호의 특성은 익명의 발신자인
‘나’와 익명의 수신자인 ‘너’를 ‘우리’라는 틀로 묶어낸다. 주체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어떤 기호로 드러내야 한다. 그러나 기호는 자기
자신의 실상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규정된 인위적인 기호에 불과하다. 하지만 기호가 아무리 인위적일지라도 기호와 자신을 동일시하지 않고서는 주체는
존재할 수 없다.
말하자면 자신이 아닌 기호를 자신으로 오인하는 것이다. 이것은 사회 안에 존재하는 주체는 기호가 갖는 해당 사회의 관습적인 규정(인위적일지라도)을
받아들여야 자신의 정체성을 부여받는다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우리’의 틀에 묶이지 못한 ‘그’는 ‘나-너’에 의해서 약속된 사회의 관습적인 규정에서
소외된 ‘우리’로 편입될 수 없는 3인칭이다. 이와 같이 아무렇지 않게 사용하는 일상의 기호들은 이미 세상을 나누고 구분하는 기제들을 자신의 몸에
내포하고 있다. 그렇다고 기호의 사용을 거부할 것인가.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 눈에 보이는 한계가 정말 한계인지를 묻는 선에서 더 나아갈 수 없다(니체).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기호작용’이다. 이것은 기호가 이분법만을 향하고 있지 않음을
보여준다. 기호란 무의식과 의식이 함께 작용하는 공간이며, 그 공간에는 수없이 많은 역선(力線)들의 긴장관계가 내포되어있다. 안규철은 여기에 주목한다.
이런 의미에서 안규철이 ‘미술’을 통해 재현하고 싶었던 것은 복수로 존재하는 수많은 주체들의 더듬거리는 언어가 아닐까. 따라서 일상의 소품을 재현하는
듯한 안규철의 작업도 단지, “사각형의 눈”으로 본 사물만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다. 그의 재현은 틀 안에 보이는 세계와 틀 밖의 보이지 않는 세계의
끊임없는 긴장관계를 재현하는 것이며, 그것을 가지고 관객과 소통하고자 하는 그의 노력의 산물이다. 비록 더듬거리지만. 그렇다면 왜 더듬거릴까.
기호와 대상의 관계는 하나로 소급될 수 없기에 유령들은 때로는 서로를 밀어내면서,
때로는 서로를 인정하면서 자신의 언어를 내뱉고 있다. 유령들의 긴장관계를 통해서 언어가 사회에 내뱉어 졌을 때, 그 언어는 복수화된 유령의 주저하고
더듬거리는 언어이다. 만날 수 없고, 다가갈 수 없기에 그것을 형상화하는 안규철의 언어는 주체와 주체 사이에서 부유하며 더듬거리고 있는 것이다.
존재하지만 일상에서 망각되어버린 유령들. 그리고 그들이 만들어 내는 더듬거리고 있는 언어들이 교차하는 장(場).
안규철은 기호작용에 의해서 유령이
되어버린 그들의 더듬거리는 언어에 주목한다. 그는 변화하는 공간과 시간 속에서, 순간순간 합쳐지면서도 숙명적인 간극으로 결코 만날 수 없는 유령들의
긴장관계를 재현하고자 하는 것이다. 라캉은 이 자리에서 주체의 오인을 통한 타자의 탄생을, 즉 주체의 소외를 말하고 있다. 그러나 안규철은 주체를
복수화 시키면서 복수들간의 대화를 모색하고 있다. 그들의 언어가 더듬거리고 있지만, 복수화된 주체들은 끊임없는 소통을 도모한다. 비록 안규철의
작품을 형상화하는 언어가 더듬거리는 언어일지라도, 그 언어를 통해 진실에 다가가려는 그의 노력은 사라지지 않는다.
Ⅲ. 대화를 통한
‘인지적 지도 그리기(cognitive mapping)’
대화는 기본적으로 ‘나’와 ‘너’ 사이에서 일어난다. ‘나’가 ‘너’를 인식하지 못한다면
대화는 단절되어 버린다. 아무리 같은 기호체계 안에 있다고 해도 상대방을 인식하지 않는다면, 명령이나 전달의 수준이지 대화는 아닌 것이다. ‘나’와
‘너’는 서로를 인식하면서, 때로는 발신자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수신자가 되기도 한다. 이들은 ‘나’는 발신자이고, ‘너’는 수신자라는 고정적
층위를 부여받는 것이 아니라, 변화 가능한 유보적인 층위에 놓이게 된다. 이들이 대화를 할 수 있다는 것은 해당 사회의 관습적인 규정을 ‘나’와
‘너’가 수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들은 ‘우리’라는 하나의 틀 안에 존재한다. 그러나 ‘나’는 ‘너’를 통해서, ‘너’는 ‘나’를 통해서
자신을 그리고 ‘우리’를 돌아보게 된다. 이러한 타자를 통한 자기 반성은 해당 사회의 관습적인 규정이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인위적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첫걸음이다. 벗어나려 하지만 끊임없이 인위적인 규정으로 ‘나’와 ‘너’를 ‘우리’의 틀 안에 가두려는 힘.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계속되는 대화를 통해 ‘나’와 ‘너’가 진실성에 나아갈 때 뿐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대화는 중요하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 들어와 ‘우리라는 틀’에서 벗어나는 것은 더욱 어려워졌다. 복잡해지는
현대사회에서 범람하는 기호들은 자신의 인위성을 철저히 숨기고 있다. 현대사회는 기호를 통해 현실인 척 자신의 허구(인위성)를 닫아 버리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술은 자유로울 수 있을까. 어쩌면 미술을 통해서 현실 속에 숨어 있는 허구를 유포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대화로서의 미술적 재현의 의미는 더욱 중요하다.
이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 안규철이 택하는 방법이 있다. 끊임없이 미술을 의심하기.
이것은 미술이 허구임을 드러내는 것이다. 안규철은 미술이 현실을 재현하려 하지만, 결국은 허구임을 작품을 통해서 보여준다. 그것도 작가가 상상한
허구임을 스스로 이야기한다. 여기서 떠오르는 것은 프레드릭 제임슨Fredric Jameson의 ‘인지적 지도 그리기’ 개념이다. ‘인지적 지도
그리기’란 우리가 직접적인 인지적 상황을 통해 가질 수 있는 정서적 지도로부터 더 큰 가상적 공간의 맥락까지 아우르면서 추정할 수 있는 능력을
즉, 재현되지 않는 것에 대한 재현의 노력이다.
이것은 현실에 대한 미메시스mimesis라기 보다는 오히려 그것에 대한 해석으로서 미학적 작업에
속하는 것이다. 안규철은 바로 대화로서의 미술을 통해 ‘재현’이라는 고전적인 미술의 시도를 새롭게 한다. 안규철은 자신의 생각만을 작품으로 형상화하는
것을 거부한다. 기호작용이 일어난 공간에서 스스로를 계속해서 배반하면서 자신을 찾아가는 유령들을 형상화한다. 이것은 더 나아가 자신과 독자를 다양한
상황 속에 위치시키며 각자의 한계를 인식한 이후에 미술을 통한 진정한 대화를 꿈꾸게 한다. 그것이 가능한 것은 독자와 작가의 대화가 미술을 통해
이루어지면서 ‘인지적 지도 그리기’가 일어나기 때문이 아닐까.
Ⅳ. 대화의 조건
: 재현의 사라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