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언어의 감옥에서 생각하기를 거부한다면,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만두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 눈에 보이는 한계가 정말 한계인지를 묻는 선에서
더 나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 니체

 


0. 기호로서의 미술작품
 
질러 말하면, 미술은 현실의 재구성이다. 현실의 어떤 것은 강조하고 어떤 것은 더욱 가려버림으로써, 미술은 현실의 보이지 않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러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이의 끊임없는 긴장관계를 통해 미술은 일상을 돌아보게 한다. 그것이 가능한 것은 작가와 독자 사이의 대화가 미술을 통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전통적으로 미술은 유일한 기원으로 존재하는 작가의 모습을 상정해왔다. 하나의 유일한 의미를 창출하는 작가는 미술작품을 자신의 분신으로, 자신의 목소리만을 담고 있는 것으로 보았다. 이러한 작가는 작가-미술작품-관객으로 이어지는 소통구조에서 관객을 단지 자신의 이야기를 듣기만 하는 수동적인 존재로 만들어 버리면서, 소통구조의 권좌를 누렸다. 작가→작품→관객의 구조는 작가의 창조적 아이디어를 작품이라는 매체를 통해서 관객에게 전달하는 것이다. 여기서 관객은 단지 작품을 지각할 뿐이다. 전통적인 구조 안에서 작가는 작품을 관객에게 전달하는 것이 주된 임무였으므로, 관객에게 있어서는 지각행위 자체가 미술작품과 만나는 것이었다. “이것이 미술작품인가?”라는 의구심 따위는 관객에게는 불필요한 것이었다.
 
그러나 20세기에 접어들면서, 작가는 작가-미술작품-관객으로 이루어진 소통구조에 관객을 초대하기 시작했다.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이 제시한 레디-메이드ready-made가 미술작품으로 가치를 인정받게 되는 것은 관객이 단순히 그 사물을 지각한다고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어떤 이가 미술작품이라고 생각하는 사물이 어떤 이에게는 미술작품이 아닌 일반 사물일 수도 있는 것이다. 작가→작품←관객으로 이어지는 구조는 작가가 제시한 작품이 전달이 아닌 소통의 산물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 “이것은 미술작품이다”라는 작가의 선언적 말은 관객을 통해서 검증되어야 하는 유보된 선언문인 것이다. 이 유보된 선언문은 능동적인 관객이 미술작품을 기호화하기 전에는 불완전한 것이다.
 
이상에서 알 수 있듯이 20세기 이후의 관객은 작가의 전달만을 기다리는 수동적 주체가 아니라 스스로 참여하는 능동적 주체이다. 관객은 미술작품을 기호화하고 그것을 통해 작가와 소통을 하려한다. 작가와 관객이 미술작품을 통해서 소통한다는 의미에서 미술작품은 기호이다.


 
Ⅰ. 재현과 현존의 틈을 떠도는 유령들
 
 일반적으로 기호는 정보를 전송하고 한 사람이 알고 있는 무언가를 다른 이들이 알 수 있도록 말하거나 가르쳐 주기 위해 사용된다. 여기서 상정하는 발신자와 수신자는 기호라는 매체를 공통적으로 인식해야 한다. 그 때만이 발신자와 수신자 사이에 대화가 성립된다. 기호를 공통적으로 인식하지 못한다면, 발신자와 수신자 사이의 대화는 단절된다. 따라서 기호가 재현하는 사실과 실재의 사실 사이에 1 : 1 대응 관계를 이루는 것, 다시 말해 공통적으로 인식하는 기호 사이에 어떤 사실의 왜곡 없이 재현되는 것은 대화 성립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조건이다. 그러나 왜곡 없는 재현이 가능한가?
 
 재현이라는 개념은 부재하는 대상을 그것에 상응하는 다른 대상(기호)으로 제시하는 것이다. 재현은 대상의 부재를 전제로 한다. 대상이 부재하지 않는다면, 그 대상을 다른 대상으로 제시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재현은 불안정하다. 재현은 단지 부재하는 대상을 ‘어느 정도 현존’하게 할뿐이지, 결코 완벽하게 재현하지 못한다. 이것은 기호와 재현이 가지고 있는 역설적인 측면이다. 부재하는 대상은 기호를 통해 형상화되지만 대상이 형상화되었다고 해도 대상은 부재한다. 기호가 부재하는 대상을 충만하게 만들어 준다면, 그것은 더 이상 부재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 그 자체가 되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대상을 향해 소급해 나아가지만 대상에 다다를 수 없는 지점에서, 재현은 자신의 안식처를 찾는다.

따라서 재현은 완벽한 현존이 아니라 ‘어느 정도의 현존’인 것이다. ‘어느 정도 현존’을 완벽한 재현으로 생각하는 주체는 라캉의 거울단계에 따르면 ‘자아 형성시 필연적으로 개입되는 오인(meconnaissance)으로부터 생겨난 환상’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재현된 이미지와 대상 사이에는 다가갈 수 없게 만드는 균열 혹은 틈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어느 정도의 현존’이기에 그 틈에는 완벽한 재현에 다다르기 위한 수많은 주체들이 유령처럼 떠다니고 있다. 보이지는 않지만, 존재하는 그 수많은 유령들의 언어를 빌어 우리들은 사회를 살아가고, 삶을 영위하고 대화를 하고 있는 것이다. ‘어느 정도의 현존’이라는 사실은 망각한 체.


 
Ⅱ. 기호적 재현, 그 허구의 세계
 
사실 안규철은 사소한 우리 일상에 주목하면서 평범하고 사소한 일상의 사물을 재현하는 듯 하다. 그러나 안규철에 따르면, 일상을 바라보는 우리의 눈은 이미 사각형의 틀에 갇힌 “사각형의 눈”이다. 〈장미의 이름으로〉에서 “기호의 진리에 대해 난 한번도 의심하지 않았어. 이 세상에서 인간이 자기 방향을 잡는데는 이 기호뿐이야.”라고 말하는 아드소의 말처럼 우리는 기호의 진리에 대해서 의심하지 않으며 살아간다. 일상의 평범한 사물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사실은 “사각형의 눈”을 통해 걸러진 그 무엇이라 할지라도.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에 따르면 “우리는 기호의 본질적인 기능이 현실을 사라지게 하는 동시에 이러한 사라짐을 감추는 것이 되고 있는 세계 속에 있다. 모든 이미지의 이면에서 무엇인가가 사라져 버린 것이다.” 기호는 진리가 아니다. 기호는 단지 기호일 뿐이다. 기호는 진리에 이르는 길이 아니라 어쩌면, 진리를 파괴하고 왜곡하는 수단인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눈에 보이는 것은 무엇이며, 걸러진 것은 무엇인가.
 
사회는 사회 구성원들에게 사각형의 틀 안을 강조하면서, 틀 밖의 세계를 제거한다. 우리는 그런 왜곡된 눈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 기호는 사회 구성원간의 약속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이런 기호의 특성은 익명의 발신자인 ‘나’와 익명의 수신자인 ‘너’를 ‘우리’라는 틀로 묶어낸다. 주체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어떤 기호로 드러내야 한다. 그러나 기호는 자기 자신의 실상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규정된 인위적인 기호에 불과하다. 하지만 기호가 아무리 인위적일지라도 기호와 자신을 동일시하지 않고서는 주체는 존재할 수 없다.

말하자면 자신이 아닌 기호를 자신으로 오인하는 것이다. 이것은 사회 안에 존재하는 주체는 기호가 갖는 해당 사회의 관습적인 규정(인위적일지라도)을 받아들여야 자신의 정체성을 부여받는다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우리’의 틀에 묶이지 못한 ‘그’는 ‘나-너’에 의해서 약속된 사회의 관습적인 규정에서 소외된 ‘우리’로 편입될 수 없는 3인칭이다. 이와 같이 아무렇지 않게 사용하는 일상의 기호들은 이미 세상을 나누고 구분하는 기제들을 자신의 몸에 내포하고 있다. 그렇다고 기호의 사용을 거부할 것인가.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 눈에 보이는 한계가 정말 한계인지를 묻는 선에서 더 나아갈 수 없다(니체).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기호작용’이다. 이것은 기호가 이분법만을 향하고 있지 않음을 보여준다. 기호란 무의식과 의식이 함께 작용하는 공간이며, 그 공간에는 수없이 많은 역선(力線)들의 긴장관계가 내포되어있다. 안규철은 여기에 주목한다. 이런 의미에서 안규철이 ‘미술’을 통해 재현하고 싶었던 것은 복수로 존재하는 수많은 주체들의 더듬거리는 언어가 아닐까. 따라서 일상의 소품을 재현하는 듯한 안규철의 작업도 단지, “사각형의 눈”으로 본 사물만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다. 그의 재현은 틀 안에 보이는 세계와 틀 밖의 보이지 않는 세계의 끊임없는 긴장관계를 재현하는 것이며, 그것을 가지고 관객과 소통하고자 하는 그의 노력의 산물이다. 비록 더듬거리지만. 그렇다면 왜 더듬거릴까.
 
기호와 대상의 관계는 하나로 소급될 수 없기에 유령들은 때로는 서로를 밀어내면서, 때로는 서로를 인정하면서 자신의 언어를 내뱉고 있다. 유령들의 긴장관계를 통해서 언어가 사회에 내뱉어 졌을 때, 그 언어는 복수화된 유령의 주저하고 더듬거리는 언어이다. 만날 수 없고, 다가갈 수 없기에 그것을 형상화하는 안규철의 언어는 주체와 주체 사이에서 부유하며 더듬거리고 있는 것이다. 존재하지만 일상에서 망각되어버린 유령들. 그리고 그들이 만들어 내는 더듬거리고 있는 언어들이 교차하는 장(場).

안규철은 기호작용에 의해서 유령이 되어버린 그들의 더듬거리는 언어에 주목한다. 그는 변화하는 공간과 시간 속에서, 순간순간 합쳐지면서도 숙명적인 간극으로 결코 만날 수 없는 유령들의 긴장관계를 재현하고자 하는 것이다. 라캉은 이 자리에서 주체의 오인을 통한 타자의 탄생을, 즉 주체의 소외를 말하고 있다. 그러나 안규철은 주체를 복수화 시키면서 복수들간의 대화를 모색하고 있다. 그들의 언어가 더듬거리고 있지만, 복수화된 주체들은 끊임없는 소통을 도모한다. 비록 안규철의 작품을 형상화하는 언어가 더듬거리는 언어일지라도, 그 언어를 통해 진실에 다가가려는 그의 노력은 사라지지 않는다.


 
Ⅲ. 대화를 통한 ‘인지적 지도 그리기(cognitive mapping)’
 
대화는 기본적으로 ‘나’와 ‘너’ 사이에서 일어난다. ‘나’가 ‘너’를 인식하지 못한다면 대화는 단절되어 버린다. 아무리 같은 기호체계 안에 있다고 해도 상대방을 인식하지 않는다면, 명령이나 전달의 수준이지 대화는 아닌 것이다. ‘나’와 ‘너’는 서로를 인식하면서, 때로는 발신자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수신자가 되기도 한다. 이들은 ‘나’는 발신자이고, ‘너’는 수신자라는 고정적 층위를 부여받는 것이 아니라, 변화 가능한 유보적인 층위에 놓이게 된다. 이들이 대화를 할 수 있다는 것은 해당 사회의 관습적인 규정을 ‘나’와 ‘너’가 수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들은 ‘우리’라는 하나의 틀 안에 존재한다. 그러나 ‘나’는 ‘너’를 통해서, ‘너’는 ‘나’를 통해서 자신을 그리고 ‘우리’를 돌아보게 된다. 이러한 타자를 통한 자기 반성은 해당 사회의 관습적인 규정이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인위적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첫걸음이다. 벗어나려 하지만 끊임없이 인위적인 규정으로 ‘나’와 ‘너’를 ‘우리’의 틀 안에 가두려는 힘.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계속되는 대화를 통해 ‘나’와 ‘너’가 진실성에 나아갈 때 뿐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대화는 중요하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 들어와 ‘우리라는 틀’에서 벗어나는 것은 더욱 어려워졌다. 복잡해지는 현대사회에서 범람하는 기호들은 자신의 인위성을 철저히 숨기고 있다. 현대사회는 기호를 통해 현실인 척 자신의 허구(인위성)를 닫아 버리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술은 자유로울 수 있을까. 어쩌면 미술을 통해서 현실 속에 숨어 있는 허구를 유포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대화로서의 미술적 재현의 의미는 더욱 중요하다.

이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 안규철이 택하는 방법이 있다. 끊임없이 미술을 의심하기. 이것은 미술이 허구임을 드러내는 것이다. 안규철은 미술이 현실을 재현하려 하지만, 결국은 허구임을 작품을 통해서 보여준다. 그것도 작가가 상상한 허구임을 스스로 이야기한다. 여기서 떠오르는 것은 프레드릭 제임슨Fredric Jameson의 ‘인지적 지도 그리기’ 개념이다. ‘인지적 지도 그리기’란 우리가 직접적인 인지적 상황을 통해 가질 수 있는 정서적 지도로부터 더 큰 가상적 공간의 맥락까지 아우르면서 추정할 수 있는 능력을 즉, 재현되지 않는 것에 대한 재현의 노력이다.

이것은 현실에 대한 미메시스mimesis라기 보다는 오히려 그것에 대한 해석으로서 미학적 작업에 속하는 것이다. 안규철은 바로 대화로서의 미술을 통해 ‘재현’이라는 고전적인 미술의 시도를 새롭게 한다. 안규철은 자신의 생각만을 작품으로 형상화하는 것을 거부한다. 기호작용이 일어난 공간에서 스스로를 계속해서 배반하면서 자신을 찾아가는 유령들을 형상화한다. 이것은 더 나아가 자신과 독자를 다양한 상황 속에 위치시키며 각자의 한계를 인식한 이후에 미술을 통한 진정한 대화를 꿈꾸게 한다. 그것이 가능한 것은 독자와 작가의 대화가 미술을 통해 이루어지면서 ‘인지적 지도 그리기’가 일어나기 때문이 아닐까.


 
Ⅳ. 대화의 조건 : 재현의 사라짐


안규철, 〈죄 많은 솔〉, 1992, 나무, 인조모, 20 × 9 × 5.8 cm © 안규철



안규철, 〈망치의 사랑〉, 1991, 철, 나무 © 안규철

안규철은 그의 산문집 『그 남자의 가방』에서 사물에 관한 이야기의 시작을 빌렘 플루써의 말을 인용하면서 시작한다. “우리가 어떻게 사고하는 지를 알려면 우리의 손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손을 통한 사고란 무엇인가. 뒤샹이 기성품이 존재하는 맥락의 변화를 통하여 기성품을 예술품으로 만든 것은 머리 즉, 개념을 통한 사고였다. 안규철의 작품은 마치 기성품과 유사하다. 〈죄 많은 솔〉(1992)과 〈망치의 사랑〉(1991)은 일상에서 자주 쓰이는 솔과 망치의 모습을 하고 있다. 안규철은 사물을 대함에 있어서 머리가 아닌 수공품을 만드는 손을 통해 사고를 하고 있다. 따라서 안규철의 작품은 옮겨 놓은 즉, 재현의 산물이 아니라 그 자체가 대상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개념적 사고의 대상은 부재한다. 따라서 부재하는 대상은 현존하는 것이 아니라, 재현으로 드러난다. 그러나 손을 통한 사고는 부재하는 대상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직접 대상 그 자체를 만들어 내면서 재현의 불완전함을 넘어 대화의 가장 중요한 조건인 1 : 1 관계를 충족시킨다.
 
재현을 넘어선 그 자체 대상. 대화를 가능하게 하는 그 자체의 대상. 그것은 사물의 원형에 있다. 하이데거Martin Heidegger는 고흐의 〈낡은 구두〉 논쟁에서 사물의 도구성이 존재물을 존재물로서 있게 하는 길을 막고 있다고 보았다. “용도성을 위한 제작물은 언제나, 어떤 목적을 위한 도구로서 제작된다. 때문에 존재자의 규정으로서의 형상과 질료, 즉 소재와 형식이라는 연관 개념은 도구의 본질 가운데 자신의 본령을 갖는다”라고 말하고 있는 하이데거는 제작성과 용도성을 제거하고 남는 것이 사물성이라고 보고 있다.
 
안규철은 손을 통한 사고로 획득한 ‘대상 그 자체’에 압축과 절제를 가한다. 이러한 과정은 우리의 시선을 대상 그 자체로 집중하게 만든다. 안규철은 「정서영, 유진상, 유한짐, 김기철, 금누리, 안상수와 안규철과의 대담」에서 “작품에서도 가능한 한 디자인을 뺐다…… 물질을 사용하면서 형태를 사용하지 않을 수 없으니 형태를 사용하되 디자인이 거의 없어진 것, 디자인이라고 할 만한 요소가 없는 것, 그런 오브제를 찾고 그런 것이 없으면 내가 대신 만들게 된다.”고 밝히고 있다.
 
사람은 대상을 바라 볼 때, 한 쪽 면만을 본다. 다른 쪽 면을 보기 위해서 뒤로 돌아간다면, 다시 또 다른 한 쪽 면만을 바라보게 된다. 우리는 언제나 사물의 한 쪽 면만을 보고있는 것이다. 사물의 뒷면은 볼 수가 없다. 안규철의 말에 따르면 사물의 뒷면들은 모두 세계 저편에 “거대한 유실물 보관소”에 보관되어 있다. 그러나 사람들이 제대로 바라보고 있다고 생각하는 그 한 쪽 면이라도 제대로 보고 있는 것인가. “사각형의 눈”으로 그 대상의 한 쪽면을 보고 있는 것은 아닌가. 책은 읽어야 하는 것으로, 구두는 신어야 하는 것으로, 옷은 입어야 하는 것으로, 그것은 그런 것으로 사물을 인식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안규철은 재현이 존재 할 수 없는, 사물 그 자체에만 집중 할 수 있는 대상을 제시한다. 아무리 그것이 완벽하다고 할지라도 그것 역시 한쪽 면이다. 그렇지만 안규철은 이것을 작품으로 관객에게 제시한다. 내가 본 한 쪽 면과 다른 사람이 본 한 쪽 면, 그리고 또 다른 사람이 본 한 쪽 면 그리고 작가 안규철이 본 한쪽 면을. 그리고 그것들을 가지고 서로 대화로 소통 할 때만이 “거대한 유실물 보관소”에 머물러 있는 사물의 뒷면을 바라 볼 수 있지 않을까.


 
Ⅴ. 대화하기 : 재현에 가하는 배반


안규철, 〈2/3 사회〉, 1991, 가죽, 고무, 가변크기 © 안규철



안규철, 〈안경〉, 1991, 철, 대리석, 44 × 6 × 16.5 cm © 안규철



안규철, 〈단결, 권력, 자유〉, 1992, 옷, 나무, 가죽, 170 × 110 × 5 cm © 안규철



안규철, 〈영원한 신부〉, 1994, 나무에 락카, 20 × 20 × 42.5 cm © 안규철

안규철의 작품은 아무런 이야기가 없는 듯이 느껴지며 동시에 너무 많은 이야기들이 있다고 느껴진다. 그것은 그가 제시하는 사물이 한 쪽 면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사물 뒷면의 이야기까지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안규철이 제시한 대상은 계속해서 순간을, 자신을 배반한다. 정작 그가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일정한 공간과 시간 속의 일정한 주체가 아니라는 점이다. 그렇다고 변화되는 공간 속의 변화하는 주체도 아니다. 그것은 변화의 순간이면서 불연속적인 정지 상태인 다양한 모습으로 존재하는 복수화된 주체의 복수화된 관계이다. 그것은 대화의 순간이다. 비록 한 쪽 면만을 보았지만, 사물의 뒷면의 존재를 믿고 있는 사람들 간의 대화.
 
안규철은 사물의 앞면과 뒷면을 동시에 볼 수 있도록 하는 모순된 배치를 기호작용을 통해 보여준다. 그의 기호는 소쉬르Ferdinand de Saussure 식의 기표와 기의의 이항 대립의 양극단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 사이에 머문다. 안경이라는 기표는 시력이 나쁜 눈을 잘 보이게 하기 위해, 둥그런 테에 렌즈를 끼우고 다리를 달아 눈앞에 걸칠 수 있게 만든 물건이라는 기의를 가지고, 문이라는 기표는 집이나 방이나 성곽이나 탈것 등에서, 사람이 안으로 들어가거나 밖으로 나올 수 있게 하기 위해, 또는 건물이나 방이나 탈것 등에서, 공기를 통하게 하거나 햇빛이 비치게 하기 위해, 한쪽을 축으로 돌게 하거나 옆으로 밀어서 열고 닫을 수 있게 만든 물건이라는 기의를 가진다. 소쉬르 식 이항 대립에는 빈틈이 없다. 오직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는 선언적 규정만이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안규철의 안경과 문은 이러한 기표와 기의의 이항대립적 구조에 의해서 규정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부정하면서 기표와 기의의 사이에서 미끄러지는 다양한 의미망의 층위를 탐사하는 것이다.
 
상징은 무엇보다도 사물의 타살로서 드러난다. 상징에 의한 사물의 타살은 필연적으로 사물과 상징, 혹은 존재 차원과 의미 차원 사이에 영원히 뛰어넘을 수 없는 간극을 형성한다. 안규철의 작품 〈2/3 사회〉(1991), 〈안경〉(1992), 〈단결, 권력, 자유〉(1992), 〈영원한 신부〉(1994)는 ‘언어의 감옥(프레드릭 제임슨)’에 갇힌 기의들의 재배치이다. 즉 하나의 기표 속에서 서로 어긋나는 기의들 중 하나를 노출시키는 것이다.
 
〈2/3 사회〉는 구두의 형태를 하고 있다. 그러나 안규철이 제시한 3쌍의 구두는 뒷 굽이 앞 굽을 누리고 다시 뒷 굽이 앞 굽을 누르면서 존재한다. 우연히 다른 사람들의 구두를 밟게 되는 경우에 사람들은 당황한다. 그러나 안규철의 구두는 너무도 당연히 누르고 있다. 〈안경〉은 두 개의 렌즈를 가지고 있지 않고, 다섯 개의 렌즈를 가지고 있다. 세상에 다섯 개의 눈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단 말인가. 또한 렌즈는 대리석이다. 앞을 볼 수가 없다. 〈단결, 권력, 자유〉는 세 개의 외투가 연결되어 있어 입을 수 없다. 〈영원한 신부〉는 문을 통해 열려지는 공간이 아닌 폐쇄된 공간을 제시한다. 언중들에 의해 약속된 체계를 거부하고 있는 듯하지만, 안규철은 일상적인 언어체계의 형태(기표)만을 가지고 왔을 뿐이다. 이것은 안규철이 일상의 기호체계 안에서 소통하는 구두, 안경, 외투, 문을 만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그가 만든 것은 “2/3 사회”, “안경(들)”, “단결 권력 자유(또는 단결이 자유를 만든다)”, “영원한 신부”인 것이다. 언중들에 약속된 사물의 형태를 가지고 있지만.
 
이런 의미에서 안규철이 만들어 낸 기호는 기표와 기의 사이에 존재하는 사이비(似而非)들이다. 비슷하지만 동일하지 않은, 또는 근원적인 차이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똑같다고 말할 수 없고 비슷하다고 해줄 수 있는 그 무엇을 만들고 있다. 구두는 구두이나 앞으로 걸어 갈 수 없는 구두, 안경은 안경이나 앞이 보이지 않는 안경, 옷은 옷이나 입을 수 없는 옷, 문은 문이나 열리거나 닫히지 않는 문. 구두는 신고 걸을 수 있어야 하고, 안경은 볼 수 있어야 하고, 옷은 입어야 한다는 것이 일반적 기호체계이다. 그러나 안규철이 제시하는 기의와 기표의 관계는 새로운 기의가 ‘언어의 감옥(프레드릭 제임슨)’에서 ‘자의성(소쉬르)’을 버리고 탈출하는 것이다. 안규철은 그 탈출의 한 예를 제시하고 있을 뿐이다. 안규철은 이렇게 배반하는 기표와 기의의 관계를 작품으로 보여준다.
 
또 다른 맥락에서 배반은 계속된다. 〈망치의 사랑〉(1991), 〈죄 많은 솔〉(1996), 〈기억의 국자〉(1995)는 사물에 텍스트를 배치하여 그들의 배반을 다루고 있다. 망치를 보여주면서 사랑을 이야기하고, 솔을 보여주면서 죄를 이야기하고, 국자를 보여주면서 기억을 이야기하고 있다. 무엇인가를 때려야 하는 망치에게 있어서 타인을 내리 치는 그 행위는 사랑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떤 이도 때리는 행위 자체가 사랑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망치의 사랑〉에 제시된 망치에는 ‘사랑’이라는 뜻의 독일어가 새겨져 망치로 때릴 때마다 사랑이라는 글자가 찍힌다.

솔은 먼지를 털어내는 행위를 통해 대상을 깨끗하게 한다. 그러나 그 솔에는 ‘죄’가 있다. 안규철의 〈죄 많은 솔〉은 먼지를 털어낸다는 솔의 기의를 배신한다. 대상을 깨끗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입히는 것이 안규철이 제시한 솔이다. 〈기억의 국자〉는 국자가 가진 국을 뜨는 행위를 기억이라고 적혀 있는 구멍을 통해 배반한다. 국자는 국물을 담을 수 없다. 단지 국물이 있었다는 흔적만을 담을 수 있다. 마치 기억이 현재에 흔적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안규철의 이러한 작업, 즉 연관성이 없어 보이는 ‘보여진 형태’와 ‘말하는 글’을 동시에 제시하는 것은 무수히 존재하는 사물의 뒷면의 한 측면을 관객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작가 자신의 의지이다.


 
Ⅵ. 대화를 통한 현실보기 : 재현의 이중성 드러내기
 
그렇다면 안규철이 제시하는 기호는 그 자체로 완벽한 것인가. 안규철은 사물의 뒷면을 보여주고 있는 듯하지만, 어쩌면 또 다른 기호체계를 만들어 제시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허구를 제시하면서 현실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닌가. 이 글의 서두에서 질러 말했듯이 미술은 현실의 재구성이다. 단지 현실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재구성하는 것이다. 허구를 보여주면서 그 안에 현실을 숨기는 것이 아니라, 허구 자체를 보여준다. 그 허구는 현실의 어떤 것은 강조하고 어떤 것은 더욱 가려버리면서 현실의 보이지 않는 모습을 보이게 하는 허구이다. 안규철은 ‘왜 말을 할수록 말은 우리에게서 끊임없이 미끄러지는 것일까. 또한 의도하지도 않았던 말을 하게 되는 것일까.’라는 의문 그 자체를 미술작품으로 재현한다. 기호의 미끄러지는 상황을.


안규철, 〈먼 곳의 물〉, 1991/1992, 천에 자수, 유리그릇, 물, 나무탁자 © 안규철

〈먼 곳의 물〉(1991)(도7)에는 물이 반쯤 담겨져 있는 투명 대접 두 개가 탁자 위에 있다. 그리고 탁자를 덮고 있는 탁자보에는 물고기들이 있다. 물고기들은 물을 향해 움직이고 있지만, 그들은 물이 담겨져 있는 투명대접으로 갈 수 없다. 물고기들은 탁자보에 수 놓아져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갇혀 있다. 물고기들은 한쪽의 투명대접에서 나와 반대편의 대접의 물을 찾아 빠르게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허구이다. 사실 움직일 수 있는 것은 물고기가 아니라 물이 반쯤 담긴 투명 대접이다. 물고기가 물을 향해 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물고기는 물에 있어야 한다”는 물고기 기표에 대한 편견에서 나오는 것이다.

〈먼 곳의 물〉에서 움직일 수 있는 물을 다른 곳으로 놓는다면, 물고기는 물에서 벗어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물고기와 물이 아무런 상관관계가 없게 만들 수도 있는 것이다. 물고기가 물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물이 그 위치에 놓여 있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안규철은 〈먼 곳의 물〉에 가상의 물고기와 현존하는 물을 제시하면서, 우리가 진실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어떤 맥락 안에서만 통용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안규철, 〈그 남자의 가방〉, 1993, 종이에 연필, 나무에 라커, 30 × 35 cm × (11), 50 × 98 × 11 cm © 안규철

〈그 남자의 가방〉(1993)은 11개의 드로잉과 한 개의조각으로 구성되어 있다. 안규철은 11개의 드로잉과 글을 통해 허구와 실재 사이를 이야기하고 있다. 어느 날 낯선 사람이 찾아와서 그에게 맡기고 간 날개 모양의 가방에 대한 동화적 이야기를 드로잉과 글을 통해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그 물증으로 날개 모양의 가방을 제시하고 있다. 허구와 실재는 만날 수 없는 극단의 관계이지만, 〈그 남자의 가방〉에서 허구와 실재의 관계는 지워지고 있다. 실재로 존재하는 가방을 보면서, 작가가 만들어낸 상상적 이야기마저도 실재로 다가온다. 안규철은 이러한 작업을 통해서 “보는 것이 믿는 것이다”라는 말의 이면을 보이려 한다. 사실 사람들은 “믿고 싶은 대로 본다”는 것이다.
 
〈모자〉(1994/2004)는 두 사람의 맺는 관계를 다섯 장면으로 분할하여 반복적으로 제시한다. 모자를 쓴 사람과 모자를 쓰지 않은 사람이 만나서 악수를 한다. 그리고 모자를 쓰지 않은 사람이 모자를 쓴 사람을 잡아먹는다. 단지 모자만이 남아 있다. 모자는 모자를 쓴 사람의 흔적으로 남아 있다. 친한 듯 보이는 두 사람의 관계가 먹고 먹히는 관계라는 믿을 수 없는 상황은 만화적 이미지와 반복을 통해 제시된다. 끊임없는 반복을 통해 이미지들이 만들어내는 서사구조는 생략되고 그 이야기가 실재일 가능성이 있다는 증거만이 제시된다. 이것은 앤디 워홀Andy Warhol의 반복 작업과 유사한 효과를 얻는다.

워홀은 실크스크린을 사용하여 이미지들을 반복적으로 제시한다. 그가 제시한 이미지들은 사건․사고의 현장의 참혹한 장면이지만, 실크스크린을 통한 반복적 이미지 생산은 사건․사고의 내용은 지워버리고, 단지 그 표피만을 제공한다. 즉, 워홀은 기호에 있어서 기의를 제거하고 단지 기표만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안규철에 있어서도 반복은 잔혹하고 허구 같은 이야기를 숨기는 기능을 한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제시한 것이 혹시 사실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 놓는다. 그것은 실재로 남아 있는 모자 때문이다. 사람을 잡아먹는 잔혹한 이야기는 그 모자를 통해서 사실일 수도 있는 이야기가 된 것이다. 이것은 〈그 남자의 가방〉에서 보인 허구와 실재 사이의 긴장을 재구성 한 것이다.
 
〈먼 곳의 물〉, 〈그 남자의 가방〉, 〈모자〉는 이미지라는 허구가 실재를 왜곡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우리가 말을 해 의미를 전달하려고 할 때 한번도 완벽히 그 일을 해낸 적이 없다. 그리고 그 말은 자신이 갖고 있는 사회적으로 만들어진 틀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더구나 그 안에는 수많은 이데올로기들이 있다. 안규철은 이러한 상황 자체만을 제시하고 있을 뿐이지, 어느 한쪽의 손을 들어주는 것은 아니다. 안규철 작품은 허구이다. 그러나 그것을 숨기려 하지 않고 스스로 허구임을 이야기한다. 관객은 안규철이 제시한 허구의 공간에서 “혹시 이거 사실이지 않을까”라는 의구심을 갖는다. 그러나 안규철은 대답한다. “그거 거짓말이라니까.” 또 다른 관객은 또 다른 의구심을 갖는다. “에이, 이거 거짓말 아니야!”, 안규철은 대답한다. “증거가 있는데……. 어떻게 거짓말이지? 사실이야!” 안규철은 의심하는 독자들을 자신의 작품으로 초대하여 불완전한 자신의 작품을 완성해 간다. 작가와 관객의 대화 즉 ‘인지적 지도 그리기’를 통해 사물의 보이지 않는, 가려진 부분과 대면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이러한 의미에서 안규철의 작품은 완성되어 가는 것이다. 완성된 것이 아니라. 
 
기호는 모든 것을 드러내지 못한다. 어떤 부분은 가리고 어떤 부분은 과장되게 드러낸다. 보여주기와 가리기, 기호는 가리고 보여주기의 미묘한 긴장이다. 안규철은 현실에서 존재하는 우리의 관계도 바로 이와 같다고 이야기한다. 보여주고 싶은 것은 과장해서 보여주고, 가리고 싶은 것은 마음껏 가리는. 그러나 사람들은 그 미묘한 긴장을 모르고 보이는 것만을 믿으면서 살아갈 뿐이다.


 
Ⅶ. 대화로서의 미술적 재현의 가치

기호는 부재하는 대상을 현존하게 하는 재현적인 기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재현과 현존의 사이에는 제거되지 않는 간극이 존재한다. 재현과 현존이 일치한다면, 재현은 더 이상 재현이 아닌 현존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재현은 현존을 향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의 현존’을 향하고 있다. 우리는 ‘어느 정도의 현존’에서 ‘어느 정도’를 망각하고 살아간다. 현대 사회는 ‘어느 정도의 현존’을 현존인 척 거짓말을 한다. 그렇다면 복잡한 현대사회에서 이데올로기의 공세로부터 자유로운 기호가 존재하는가. 있다면 그것은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 이데올로기에 오염된 언어(기호)로 대화하는 우리에게 소통이란 것이 정말 가능할 것인가. 이 시대에 범람하는 이미지들은 진실인가 아니면 허구인가. 미술작품도 하나의 기호이므로, 미술적 재현도 이러한 기호의 혐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은 당연하다.


안규철, 〈112개의 문이 있는 방〉, 2004, 나무, 금속, 760 × 760 × 230 cm © 안규철

이것에 대한 실험이 안규철의 작품이다. 그는 ‘기호작용’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112개의 문이 있는 방〉(2003-2004)(도9)은 주목할 만하다. 〈112개의 문이 있는 방〉은 ‘기호작용’이 일어나는 장(場)을 형상화 한 것이다. 112개문이 만들어낸 49개의 방은 안규철이 관객과 만나 소통 할 수도 있고, 관객과 또 다른 관객들이 만나 소통할 수 있는 공간이다. 하는 장이다. 그들은 마치 재현과 현존의 틈에서 서성이는 유령들처럼 불쑥 불쑥 나타나 우리가 종착점에 이르는 것을 지연시킨다. 거리에서 만났다면, 모른 척 아니 정말 바로 옆을 지나가도 몰랐을 존재들이 〈112개의 문이 있는 방〉에서는 불쑥 불쑥 우리들 앞에 나타나 상대방을 인식하게 만든다. ‘너’를 인식하게 되는 순간이 바로 대화의 출발점이다. 안규철은 자신이 주목하고 있는 ‘기호작용’을 고찰함으로 자신의 실험 결과물들을 하나씩 하나씩 내어놓는다.
 
손의 사고를 통해 직접 사물을 제작하기도 하고, 사물의 뒷면을 보여주기도 하고, 진실과 허구의 긴장관계를 보여주기도 한다. 이러한 그의 작업은 작가→작품←관객의 소통구조에서 작가와 관객이 작품을 가지고 끊임없는 ‘대화’를 해야한다는 그의 예술적 지향점을 보여준다. 안규철은 “나는 미술이 살아남을 이유가 있다고 믿는다. 그 역할은 이제까지 보여지지 않았던 것을 새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이미 보여졌고 보여지고 있는 것들, 그 흘러가 버리고 소비되는 것들에 대한 의미를 되묻는 일, 되묻게 만드는 일이라고 생각한다.(필자강조)”라고 말한다.

안규철은 대화를 통해 미술적 재현을 추구하고자 노력하며, 그것의 결과물은 작가와 관객간의 대화를 통한 ‘인지적 지도 그리기’를 통해 제시된다. 대화를 한다는 것은 ‘나’는 ‘너’를 통해, ‘너’는 ‘나’를 통해 자신을 반성적으로 바라 볼 수 있는 것이며, 이것은 더 나아가 ‘우리’라는 전체적인 세계를 반성할 수 있게 한다. 뿐만 아니라 ‘우리’라는 틀 밖에 있는 ‘그’의 존재를 인식하게 된다. 이것은 ‘나-너’, 그리고 ‘우리’로 이어지는 틀안에 갇힌 우리만의 세계를 보는 것이 아니라 ‘그’가 존재하는 틀 밖의 세계도 보게 한다. 더 나아가 세계에 대한 총체적인 전망을 가능하게 한다.
 
안규철의 미학적 감동은 이분법적 세계에서 어느 부분만을 택함으로써 획득된 인식이 아니라 그 모순된 것들이 공존하는 현실을 ‘미술’을 통해 재현함으로써 획득되는 것이다. 안규철은 어느 시대보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동시대가 이데올로기에 가장 강력히 노출되어 있음에도 그것을 극복할 가능성을 간직한 우리의 삶을, 우리의 일상을 보여주려고 한다. “우리가 언어의 감옥에서 생각하기를 거부한다면,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만두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 눈에 보이는 한계가 정말 한계인지를 묻는 선에서 더 나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니체).” 안규철은 예전에도, 지금도, 앞으로도, 미로와 같은 〈112개의 문이 있는 방〉에서 우연히 만날 관객들의 이야기를 기다리고 있다.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