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미술작품'이라는 이름 아래 물건들을 흉내내어 만들 때, 그 길들의 끝에 서 있는 사람이 있다. 길들은 나로부터 바깥을 향해 갈래갈래 자라난다. 한 개의 의자, 하나의 방, 한 채 의 집, 하나의 숲이 생긴다. 그리고 때때로 그 굽은 길들을 더듬어 누군가가 내게로 올 것이다. 그 길들의 약도, 나의 주소를 모르는 채로 누군가 사람이 찾아 올 것이다. 내가 그곳에 더 이상 살지 않더라도. (안규철, 1995)
 
나는 이 글을 쓰기 위하여 무려 6시간을 작가와 인터뷰했다. 오직 작업에 대한 진지한(?) 이야기로 그 시간을 보낸 것이다. 그런데도 나는 대화를 나눌수록 그 작가를 모르겠다는 느낌이 들었다. 무언가가 틀림없이 있는데 그것에 이를 수 없다기보다 원래 없는 어떤 것 또는 꽁무니를 빼는 어떤 것을 추적하는 것 같았다. 나는 과연 작품과 말을 통해 '작가'를 만난 것일까? 아니 그 '작가'라는 것이 있기는 한 것일까? 그런 존재가 있다고 해도 나는 그 것과 바로 만난 것일까? 만났다면 내가 만난 그 존재를 나의 목소리는 바로 전하고 있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면 'Special Artist'라고 이름붙여진 이 작가론을 쓰는 일은 부질없는 짓이지 않는가?
 
작가는 없을지도 모른다. 있다고 해도 영원히 알려지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 안규철이라는 작가는 더욱 이런 의혹에 사로잡히게 하는데, 그것은 그 자신이 그런 심증을 집요하게 추적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자신을 지우면서, 아니 오히려 지우기 위해 물건들을 만들어 가는 안규철은 ‘저자의 죽음’을 말한 바르트나, 문학을 자살행위로 본 푸코를 실천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그의 ‘자살’은 역설적으로 나로 하여금 그에 대한 글을 쓸 수 있게 한다. 그것도 매우 자유롭게, 따라서 즐겁게. 바르트의 권유대로, 작가가 물러선 공간에 탄생한 '독자'로서 그가 새겨 넣은 텍스트를 '즐겁게' 읽어갈 수 있게 된 것이다.
 
작가라는 것이 있다면 이런 읽기 속에 있을 것이다. 그가 거주하는 장소는 작품이라기보다 그것을 보는 독자들의 시선 속이다. 안규철의 작품이 이런 '읽기'를 독려한다면, 그것은 그 자신이 이런 시선 속에 거주함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점 때문이다. 그는 독자로서의 작가, 작가로서의 독자라는 혼성적 페르조나를 연기하고 있는 셈인데, 따라서 다음의 글은 이 작가의 실체를 추적하기보다 그가 드러내는 페르조나를 더듬어보는 일이 될 것이다.
 


미술 바라보기

안규철에게 일관된 주제가 있다면 그것은 무엇보다도 '미술'이다. 그가 지금까지 바라보아 온 것은 객관적 시각세계도, 정치적 현실도, 초월적 세계도 아닌, 또는 그 모든 것을 포함한 '미술'이라는 명제다. 모두가 알고 있듯이, 그는 1980년대 중엽인 한 때 '현실과 발언'의 일원으로 사회적 현실에 눈길을 준 적이 있다. 〈녹색의 식탁〉(1984)은 그런 현실을 소위 '민중적인' 소박한 어휘로, 그러나 매우 직설적으로 말하는 이야기 조각이다. 이야기가 전개되는 연극무대와 같은 조각은 근작에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여기서 그가 말하고자 한 것은 일차적으로 경제적 착취와 같은 주제이겠지만 그의 궁극적인 관심사는 그 속에서의 미술이었다. 종이점토와 석고 같은 '보잘 것 없는' 재료와 그것을 다 루는 의도적 아마추어리즘은, 큰 스케일과 비싼 재료로 허울뿐인 진지함을 포장한 당대 모더니즘 조각과 예술 상품화 시대의 기념비를 생산하던 환경조각 붐에 대한 일침이었다. 현실을 보는 그의 시선의 끝은 어디까지나 미술이었다. 그는 소셜리스트같은 얼굴로 말할 때 도 자신이 미술가임을 잊지 않았던 것이다.
 
그가 33세이던 1987년에 기자라는 직업을 버리고 유럽으로 다시 미술공부를 떠난 것도 미술에 대한 궁극적 관심 때문일 것이다. 그는 프랑스를 거쳐 1988년부터 독일에 정착해 미술학교를 1학년부터 다시 다니게 되는데, 이때부터 미술을 밖에서 바라보던 그의 눈길이 안에서 바라보기 쪽으로 옮겨진다. 한번도 발표되지 않은 채 아직도 작업실 서랍에 쌓여 있는 〈악어이야기〉(1989) 드로잉들은 이때 그려진 일기 같은 그림들이다. 문명에 적응해 가는 악어를 새로운 환경에 처한 자신에 빗대어 그린 것인데, 이것을 그리면서 그는 이미 68세대에 대한 냉소주의가 만연한 독일과, 아직도 예술에 의한 투쟁을 믿는 한국을 견주어보게 된다.
 
그의 시야가 개인으로, 또 미술 자체로 좁혀져간 것은 이같이 혁명의 도구로서의 미술, 시사적 일러스트레이션으로서의 미술의 한계를 볼 수 있는 거리를 확보했기 때문일 것이다. 독일에서 최초로 발표한 〈개별적인 것으로〉(1989)는 이와 같은 변화의 증거로, 어두운 공간에 설치된 무겁고 우울한 풍경이다. 굴뚝에서 연기 속에 섞여 나오는 '미술은 도덕을 모른다' '미술은 자본이다' 등의 문장들은 사회 속에서의 미술의 의미를 묻고 있다. '개별적인 것으로'라는 문장을 업고 가는 바닥의 뱀은 역설적으로 집단의 역사를 표상하는 깃발 달린 수레를 향해 간다. 그는 개인과 사회의 관계 또는 그 속에서의 미술의 위치 같은 것들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가 점차 미술을 안에서 바라보는 쪽으로 태도를 바꿈에 따라 다소 어둡고 무거웠던 말투 는 점차 가볍고 재치있는 것으로 바뀐다. 주제가 가벼워졌다기보다 무거운 주제를 가벼운 이야기에 담아낸다는 편이 옳을 것인데, 이런 특유의 화법은 1990년대 초부터 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된다. 예컨대 〈무명작가를 위한 다섯 개의 질문〉(1991)에서 그는 '심각한' 질문을 변형된 일상 사물에 재미있게 담아내고 있다. 자신도 말하듯이, 이 작품은 그를 따라다니던 정치적 현실이라는 그림자에서 벗어나 예술과 예술가로서의 자신으로 눈길을 돌리게 되었음을 알리는 신호와 같은 것이다.
 
5개의 손잡이가 달린 '예술'이라고 씌어진 문과 '삶'이라고 씌어진 손잡이 없는 문, 그리고 화분 속에서 자라나는 의자로 이루어진 이 작업에 대하여 안규철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보통사람들의 삶으로부터 떠나왔고 예술의 문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그 문을 열려면 5개의 손이 필요하다. 그 안에서 나는 죽은 나무에 물을 주는 허황된 일에 매달리고 있다.” (필자와의 대화, 1999) 그가 말을 계속했더라면, 아마도 이런 것이 될 것이다. '미술이란 무엇인가? 또는 무엇일 수 있는가?' 그의 작업을 일별하면 결국 이런 질문과 그것에 답하는 과정에 다름아니다. 그는 미술이라기보다 미술에 대한 미술, 즉 메타 미술을 수행하고 있는 셈인데, 그것은 밖으로부터 차단된 미술의 본성을 묻는, 더 정확히는 묻는 것이 아니라 단언하고 지향하는 모더니스트의 그것과는 다르다.
 
안규철에게 미술에 대한 언급은 그것이 속한 문맥, 즉 삶에 대한 언급과 다른 것이 아니며, 따라서 무한히 열린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사회적 현실에 대하여 직설한 초기의 것과 근작 이 크게 다를 바 없으며, 말투와 강세만 조금 달라졌을 뿐이다. 그를 모더니스트라고 부를 수 있다면, 그것은 그가 결코 미술이라는 명제를 떠나지 않기 때문이며, 그를 포스트 모더니 스트라고 한다면, 그것은 그가 '미술'이라기보다 미술이라는 '텍스트'를 바라보기 때문이다. 애드 라인하르트가 말한 '미술로서의 미술로서의 미술' 대신, 안규철은 '미술로서 일컬어지는 미술로서 일컬어지는 미술'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사물들의 연극

안규철은 만들기만큼 쓰기를 많이 하며 또 매우 잘 하고 있음은 알려진 사실이다. 그의 언 어 감각은 마치 손끝을 통해서도 작용하는 듯 그가 만들어내는 물건들은 '말'을 한다. 그는 이 물건들로 크랙 오웬스가 포스트 모던 증후로 진단한 '미술에서의 언어의 분출', 또는 '미학영역으로의 문학의 분산'(Owens, 1979)이 이루어지는 현장을 연출한다. 그에게 미술은 시 각적 사실이라기보다 언어와 같은 기호이다. 모더니스트가 묻어둔 언어를 부활시킴으로써 그는 마이클 프리드가 그토록 경고한 '연극성'(Fried, 1967)을 탐구하고 있는 셈이다.
 
연극 무대와 같은 조각은 이미 초기작부터 시작되었는데, 최근에는 일상의 사물들이 등장인물이 되어 대사를 말하는, 심광현의 표현을 빌리자면, '조각극장'(심광현, 1996)이 되었다. 〈영원한 신부〉(1994), 〈잠드는 집〉(1996), 〈죄 많은 솔〉(1992) 등으로 사물들은 의인화되어 각자의 역할을 연기하고 있는 것이며, 안규철은 그 이야기를 쓰고 무대에 올리는 극작가이자 연출가인 셈이다.
 
그의 작업에서는 이미지나 사물 뿐 아니라 문자언어까지 동원되어 모두 동등한 언어적 구성 요소로서 전체 텍스트를 이루고 있다. 특히 제목은 화두를 꺼내는 역할을 해왔는데, 이런 문자언어가 점차 이미지나 오브제와 혼용되면서 작품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안규철, 〈그 남자의 가방〉, 1993, 종이에 연필, 나무에 라커, 30 × 35 cm × (11), 50 × 98 × 11 cm © 안규철

〈그 남자의 가방〉(1993)에서는 오히려 문자로 된 텍스트가 전체 내용을 주도하기에 이르는데, 이것은 그에 의하면, “(모더니즘 미술의 정제된 형식이 아니므로) 사람들이 촌스럽다고 할까봐”(필자와의 대화, 1999) 억제해온 이야기 쓰기를 작품 안에서 과감하게 시도해본 예다.
 
11장의 드로잉과 그에 상응하는 글, 그리고 그 이야기 속에 나오는 날개를 넣는 가방을 실 물로 재현한 것으로 이루어진 이 작품은 전체가 일종의 그림책이다. 그러나 그의 텍스트는 단순히 한 이야기를 전달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글과 그림, 그리고 실물 재현이라는 각기 다른 기호들 사이의 관계에 주의를 환기시키기 위한 것이다. 이들은 모두 ‘그 남자의 가방’인가? 그것들이 같지 않다면 어느 것이 진짜인가? 우리가 진짜라고 생각하기 쉬운 모조가방은 진짜가 아니다. 그것은 글로 쓴 가방보다 더 진짜로부터 먼 것일 수도 있다. 도대체 기표 뒤의 실재란 과연 있기는 한 것인가…?
 
안규철이 주시하는 것은 기호라기보다 기호 작용인 것이다. 그것의 구조 또는 기능이 그의 주된 관심사인데, 그것을 환기시키기 위해 그는 기호의 모순을 노출시킨다. 우선 그는 그 존재 자체가 기성품과 예술품의 사이라는 애매한 지점에 있는 기호를 만들어낸다. 뒤샹과는 달리 일상품을 장인과 같이 공들여 만듦으로써 익명적 사물의 외양을 띤 개성적 예술품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나아가 그는 사물의 기능을 무효화하는 방식으로 통상적인 기호의 구조를 교란시킨다. 열릴 수 없는 문, 또는 열수록 닫히는 문(〈영원한 신부〉), 입을 수 없는 옷, 앞으로 걸어 나갈 수 없는 구두, 2.5인이 사용하는, 또는 (대리석으로 만들어) 보이지 않는 안경 등과 같은 소쉬르 식의 이항 대립이 그가 주로 사용하는 개념적 도식이다.


안규철, 〈단결, 권력, 자유〉, 1992, 옷, 나무, 가죽, 170 × 110 × 5 cm © 안규철

문자언어의 다중성도 그의 표적이다. 〈단결, 권력, 자유〉는 '단결은 자유를 만든다'는 걸프전쟁을 정당화하기 위한 부시 대통령의 말인 동시에 폴란드 자유노조의 슬로건이기도 하다. 여기서 '만든다'의 독일어 3인칭 단수 'macht'는 '권력'이라는 명사이기도 하므로 어떤 쪽을 택하는가에 따라 상반된 뜻으로 읽히게 된다. 시각기호의 경우에는 일루전이라는 요소가 또한 서로 다른 의미의 층위를 만들어낸다.

투시도법으로 그린 집 모양을 검은 단색 패턴으로 만들어 바닥과 벽에 반복하여 펼쳐 놓으 면 평면적 문양으로도, 입체적인 집의 연속으로도 읽힌다. 같은 집 모양으로 된 〈미니멀리즘 연습〉은 순수한 추상 입방체이기도, 집이라는 집합개념의 시각적 표상이기도, 또는 이야기를 담은 특정한 집이기도 하다. 모더니즘 맥락에서는 병존할 수 없는 두 가지 이상의 기의가 한 기표 속에 병존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이같이 하나의 기표 속에서 서로 어긋나는 여러 기의들을 노출시킬 뿐 아니라 어떤 기표에 전혀 뜻밖의 기의를 대면시키기도 한다. 제유로서의 기표에 의외의 기의를 전치시키는 방법이 바로 그 예인데, 이런 방법은 기계구조를 사용한 작품들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그렇다 그렇다 그렇다〉(1992), 〈어느 전기공의 판토마임〉(1992), 〈나는 어차피 상상을 먹고 산다〉(1993) 등에서 도장을 찍거나 발을 비비거나 숟가락질하는 행위가 암시하는 부재하는 주인공은 사람이 아니라 기계이다. 이들의 대사나 연기는 베케트 연극의 그것과 같다. 발화는 화자로부터, 즉, 기표는 기의로부터 분리되어 순수한 소리나 움직임이라는 물질로 고립되는 것이다. “나는 어차피 상상을 먹고 산다”고 말한 장 보드리야르는 숟갈질 너머로 사라져버리는 것이다.
 
그는 또한 전체 텍스트 속에서 서로 다른 종류의 기호들이 충돌하게도 만든다. 〈망치의 사랑〉(1991)에서는 '사랑'이라는 단어와 때리는 망치가, 〈죄 많은 솔〉에서는 '죄'라는 글자와 허물을 닦는 솔이, 〈기억의 국자〉(1995)에서는 '기억'이라는 글자를 이루는 구멍과 그것을 푸는 국자가 부딪친다. 또한 〈나/칠판〉(1992)에서는 '나'라고 자기 주장하는 글자와 단지 발언의 도구가 되어야 하는 칠판의 기능이 충돌할 뿐 아니라 뒷면의 '칠판'이라는 도드라져 나온 글자가, 평면이어야 하는 칠판의 요건과도 모순된다.
 
〈무쇠에게 꽃을 가르치다〉(1994~96)에서는 '꽃'이라는 글자가 주는 느낌과 무쇠라는 재료가 주는 느낌이 일치하지 않는다. 문자와 실물이라는 다른 종류의 기호들이 충돌하고 있는 것인데, 이런 충돌이 어떤 작품에서는 이질적인 기호들의 본성적인 간극을 부각시키는 효과도 낳는다. 예컨대 〈먼 곳의 물〉(1992)에서는 그림과 실물이 서로 배반한다.
 
물고기 그림은 한쪽의 물에서 나와 다른 그릇으로 들어가는 듯 하지만 그림 물고기와 실제의 물은 서로 만날 수 없는 것이다. 〈모자〉(1993)에서도 그림 속의 모자와 실물의 모자는 같은 것을 지시하는 것 같지만 실상은 다른 것이다. 안규철의 작업을 계속 들여다보면 기호들을 낯설게 하는 방법을 더 많이 열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작업에서 주시되는 점은 그 물건들이 단지 다양한 방법으로 기호 작용의 임의성을 노출시키는 것에 그치지 않고 언어적 공간에 대한 모종의 언급을 던지고 있는 점이다.
 
그는 새로운 기의들을 재생산하고 있는 셈인데, 그 내용은 〈망치의 사랑〉과 같이 개인적 삶에 속한 것이기도, 〈단결, 권력, 자유〉와 같이 정치적인 것이기도, 〈나/칠판〉처럼 미디어 문화에 대한 것이기도, 또는 〈그렇다 그렇다 그렇다〉처럼 언어적 소통의 생리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또는 <먼 곳의 물>이나 〈미니멀리즘 연습〉처럼 실물과 픽션, 형식과 주제 등 미술 자체의 문제를 말하기도 한다. 나아가 그 공간에서 들려 오는 수많은 목소리들이 한결같이 말하고 있는 것은 무엇보다도 주체의 부재에 대한, 쓴 농담들이다. 인간을 포함해 유일하고 개별적인 존재들이 분열과 복제의 운명 앞에 놓여 있는 현실을 증언하는 최근작 〈더블 오브제〉(1999)는 이를 한층 더 강력한 목소리로 말하고 있다.


 
객석에 앉은 작가
 
이같이 작품 자체보다 그것이 통용되는 언어적 공간, 즉 작가와 작품, 작품과 작품, 작품과 관람자 사이의 공간을 시선의 표면으로 떠오르게 하는 점에서 안규철의 작업은 개념미술의 범주에 접해 있다. 그러나 그 공간을 투명한 개념틀로 구조화하기보다 그것의 모호함과 침투 불가능함을 주지시킨다는 점에서 그의 작업은 개념미술에서도 독특한 지점에 있다. 그가 제시하는 언어적 공간에서 기호들은 상호 반향하는 명증한 구조를 이루기보다 끊임없이 미끄러지면서 서로를 배반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처음에는 비교적 단순한 이야기처럼 보이는 안규철의 텍스트는 읽어갈수록 기묘하게도 안쪽의 어떤 중심을 향해 수렴하기보다 바깥쪽의 여백으로 확산되는 경향을 띤다. '사물에 빈자리를 남겨 주다'라는 〈서랍〉(1994)의 부제처럼, 그는 버려지는 의미들을 채집하여 그것들을 하나로 통합하기보다 그들 사이의 모순과 이질성을 그대로 병치한다.
 
〈서랍〉은 열리면서도 닫혀 있는, 속이 비어 있기도 막혀 있기도 한, 일상 사물이자 미니멀 리즘 조각, 또는 개념미술의 어휘 등등인 것이다. 그의 텍스트는 바르트의 비유처럼 지속적 인 올풀기를 향해 열린 매듭 없는 그물망이며, 오웬스를 빌자면 거듭 쓴 양피지와 같은 알레고리이다. 그가 기호를 탐색하는 것은 그 의미를 닫기 위해서가 아니라 열기 위해서이다. 관람자는 그런 의미들의 몽타주 효과에 의해 모호하고 유동적인 상태로 표류하는 기호들의 유희 속에 연루된다.
 
그는 언어의 볼 수 없음을 확인하기 위하여 그것을 들여다본다는 역설을 수행하고 있는 셈인데, 언어적 공간을 겨냥하고 있는 그의 작업이 언어가 미치지 않는 어떤 곳을 부단히 건드리고 있는 것도 그가 이같이 애초부터 언어의 불투명성에서 출발하기 때문인 듯하다. 박찬경이 그의 작품의 심미적 특성으로 언급한 '정형성· 규범성· 균일성'(박찬경, 1996) 등은 그의 작품을 세련된 미적 취향의 영역에 위치시킨다.
 
시각세계에만 속한 이런 비언어적 영역을 탐구하는 지점에서는, 안규철은 글쟁이라기보다 미술가이며 모더니스트다. 그러나 그런 비언어적 감각이 작품에의 투명한 몰입을 위한 것이 라기보다 작품에서 주체의 아우라를 제거함으로써 그것의 침투 불가능한 사물적 현존을 지 속시키기 위한 것이라는 점에서 그의 작업은 모더니즘을 배반한 미니멀리즘에 가깝다.
 
안규철의 물건들을 물들이고 있는 비언어적 감각은 시각뿐 아니라 촉각이기도 하다. 꼼꼼하게 꿰맨 옷의 바느질 땀, 금붕어 모양으로 수놓은 한올 한올의 실, 촘촘하게 심어 놓은 낱낱의 털 등의 촉각적 현존에는 언어가 개입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이같은 손작업의 흔적 역시 언어를 매개로 하지 않은 작품에의 직접적인 몰입을 보장하기 위한 모더니스트의 것과는 다르다.
 
그것은 제작자의 숨결을 전달하는 추상표현주의자의 필치와는 정반대의 효과를 위한 것이다. 그의 장인적, 더 나아가 기계의 공정에 가까운 수공은 오히려 신체의 불투명성에 기대어 자신을 그 공정의 바깥으로 밀어내기 위한 것이다. 그가 예술을 창조하는, '대단한' 일이 아닌 물건을 만들어내는 '하찮은' 일에 기꺼이 몰두하는 것은 예술가들이 예술작업에 거는 과 도한 진지함, 자신의 창조물을 지배하는 권능의 허구에서 벗어나기 위한 것이다. 그는 치밀한 손작업을 통해 자신의 그림자를 사물로부터 거두면서 사물의 익명적 현존을 각인해 간다.
 
그는 객석에 물러나 앉아 자신이 만든 사물들의 연극을 관람하는 관객이기를 자청하는 셈인데, 이것은 기호의 투명성을 보장하는 인식 주체의 전능함에 의문을 제기하는 제스처이다.


안규철, 〈사소한 사건〉, 1999, 복합재료, 가변설치 © 안규철

그가 최근에 구상한 〈사소한 사건〉(1999)은 그런 제스처의 좋은 범례로서, 작가가 익명의 옵서버가 되어 서술하는 일종의 3인칭 소설이다. 그는 한 장의 손수건이 땅에 떨어져 만들어진 모양을 석고로 여러 개 떠내고 브론즈로 캐스팅하기도 하며 유화로 그리기도 하고 기념비적 규모로 확대하기도 하여 함께 설치한다. 우연히 일어난 하찮은 일을 새삼스럽게 바라보고 그것에 온갖 제도적 관행을 부여하는 것이다.
 
그는 주체의 개입이 최소화되었다는 의미에서 지극히 물화된 한 사건을 역설적으로 매우 섬세하게 관찰함으로써 세계와 주체 사이의 멀고먼 거리를 실측한다. 껍질뿐인 기표의 표면은 예술가 주체의 아우라 '같은' 것으로 지속적으로 치장됨으로써 오히려 그것이 껍질임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그는 화자가 없음을 재현하는 부조리극을 연출하고 있는 셈인데, 여기서 그는 그것을 바라보는 관객이 됨으로써 부조리극의 작가가 된다.
 
“아, 사물들이란 어쩌면 하나같이 이토록 우리를 떠날 궁리들만을 하고 있는 것일까?”라 고 말하는 안규철은 실상, “나는 사물들을 나로부터 떨어져 있는 그대로 보고자 한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 태도에서 그는 '자유의 경계'를 감지한다. 사물에게, 세계에게 제자리를 돌려주는 것, 그것의 알 수 없는 신비를 알 수 없는 채로 묻어 두는 것이야말로 겸허한 깨달음에서 오는 자유인 것이다.
 
안규철의 작업은 예술가가 무대 뒤켠으로 사라진 시대의 미술에 대해서 말하는 메타 미술이다. 그는 수직의 시선으로 미술을 내려다보는 셈인데, 따라서 어떤 이는 그가 민중의 시선으로부터 이런 엘리트적 시선으로 옮겨온 것을 안타까워한다. 그러나 나는 '예술'이라는 개념이 존재하는 한, 예술가의 시선은 이런 시선을 떠날 수 없고 또 그래야 한다고 믿는다. 민중 미술가들의 시선도 결코 민중의 시선은 아니었으며, 따라서 그의 시선도 그리 많이 변한 것은 아니다. 나는 수직 시선이 갖는 오류와 폭력의 가능성을 비껴가기 위해서는 예술가가 다양한 수평적 시선들을 끊임없이 왕복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안규철에게서 그런 눈의 움직임을 본다. 그의 메타 시선은 이전의 형이상학의 그것처럼 규정적이거나 통합적이지 않다.
 
그의 작업은 메타 바깥의 '흔적'을 담고 있는 메타, 메타를 부정하기 위한 메타라는 모순의 외줄타기와 같다. 그는 한결같이 “외곽에 서는 것을 두려워 말자, 외곽에 나와 있을 때 전체가 더 잘 보인다”(안규철, 1990)는 입장에서 미술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그는 이른바 '미술'이라는 기호의 '차연'들을 만들어내고 있는 셈인데, 그것은 단일논리의 허구를 노출시키고 그것에 의한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을 지향하는 점에서 정치적 제스처다. 그는 “이질적인 언어 게임에 의해 총체성에 전쟁을 선포하라(리오타르, 1979)는 리오타르의 제안을 따르고 있는 것이다. 그의 말놀이가 자기 쾌락적인 배설 이상인 것은 바로 이런 비판효과 때문이며, 이런 점에서 그것은 또다른 형태의 소셜 리얼리즘이다. 그는 미술을 말함으로써 삶을 말하고 있는 셈이며, 삶에 편재한 기호들의 사이를 눈여겨 봄으로써 그 뒤에 숨은 힘의 지형을 노출시키고 그 공간을 교란시킴으로써 그 힘으로부터의 해방의 가능성을 암시한다.
 
여기서 작가는 텍스트 사이를 이동하는 주체를 연기하는 셈인데, 이것은 크리스테바 식으로 표현하면 딱딱한 주체에서 부드러운 주체로의 전환이다. 그에게 주체의 죽음은 자기 속에 들어앉은 다른 이를 받아들이는 것, 곧 주체의 복수화인 것이다. 그는 끊임없이 얼굴을 바꾸는 페르조나 뒤에 숨어서 말한다. “보는 것을 믿지 말라”고, “그 그림자의 뒤켠을 응시하라”(안규철, 1996)고. 그 말은 마스크 뒤의 익명의 목소리들에 실려 나온다. 어쩌면 안규철 이란 존재는 그런 목소리들 속에만 있는지 모르겠다. 이런 생각에 이르고 나니, 나는 비로소 그를 만나고 왔다고, 또 작품 속에서 그를 보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