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하리 265번지》 전시전경 © 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

‘정체성’이라는 주제 하에 끈질기게 지속해 온 ‘자화상’과 ‘혈류도’ 연작이 일단락되던 2002년 ‘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 다방’에서 열린 개인전에서 나는 김을을 처음 만났다. 톡톡 튀는 젊은 작가들의 실험 무대였던 공간을 생뚱맞게도 풍경화와 인물화로 가득 채워놓고 당당하던 작가의 모습은 상당히 신선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자신의 족보를 역으로 추적해 갔던 ‘혈류도’ 연작은 그 이전까지 거울 너머 비친 자신에게 박혀있던 시선이 자신을 둘러싼 세계로까지 확장된 결과였다. 그러나, 그 소재가 고향 마을 어귀의 선산이든 흑백사진으로 간신히 남은 조상의 기억이든, 그의 궁극적인 관심은 다름 아닌 자신이었다.
 
이 고집스러운 연작의 스토리에 대해 알게 되면서 그 빛 바랜 캔버스들이 마치 치열한 전투가 지나간 전장에서 발굴한 유품 같은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만큼 그의 화면에서는 아직도 아물지 않은 상처의 아픔이 배어 나왔다. 한편으로 그의 진정성에 고개가 끄덕여졌지만, 실은 나 자신조차 힘이 들어 오랫동안 보지 못 하고 전시장을 나섰던 기억이 난다. 그 강렬하고 무거운 주제는 김을에게는 양날의 칼이었다. 그의 자아 탐구를 인도하는 등대인 동시에, 예술세계의 자유로운 확장을 막는 장애물이기도 했다. 주제는 마치 수도자를 내리치는 채찍처럼 그에게 좀처럼 일탈을 허용하지 않았다. 역사학자나 인류학자인 양 족보를 연구하고, 관공서의 문서철을 뒤지고, 선산의 조상님들의 묘소를 방문하고 집안 소유의 토지들을 측량했다. 당시 주변에서는 작가가 그 말리기 힘든 고집으로 이 주제를 더 밀고 나갈는지 혹은 어떤 새로운 주제를 발견하게 될지 자못 기대가 커지고 있었다.
 
그러나, 궁금증은 관객의 몫일 뿐이라는 듯, 작가는 이미 전혀 엉뚱한 방향의 드로잉 작업을 시작한 후였다. 2001년부터 6년간 3년에 1,000점의 드로잉을 그리고, 도합 2,000점의 드로잉을 완성한다는 장기 프로젝트였다.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해 본 드로잉은 주제가 무게에 진력이 나기 시작한 작가에게 새로운 세계로의 문을 열어주었다. 끊임없는 상념들을 즉흥적으로 옮겨놓다 보면 머리가 비워지고 다시 새로운 생각들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 경험이었다. 주제가 미처 사태를 통제하기도 전에 쏟아져 나온 생각들이었고, 무언가 다듬을 틈도 없이 끝나버렸다. 그린다(paint)기 보다는 머리 속에 있는 것들을 그저 꺼낸다(draw)에 더 가까운 작업들이었다.
 
2003년 첫 3년간의 1차 프로젝트가 선보였다. 거의 천 점에 이르는 작품의 양도 양이었지만, 각 드로잉들이 담고 있는 아이디어들은 마치 둑이 무너져 내리듯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다양하고 또 신선하게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필자는 거의 두 시간에 걸쳐 그 드로잉 북 전체를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빠져서 보고 있었다. 카페 컵 받침에 새겨진 로고, 화장실의 낙서, 중고시장에서 발견한 낡은 인형, 심지어 낡은 수학책에서 본 도형까지, 그의 눈과 손에 포착된 모든 것들은 드로잉의 소재였다. 이 모든 잡다한 소재들은 ‘김을’이라는 거름망을 통과하는 즉시 드로잉으로 전환되었고 그는 이것을 ‘잡화’라고 불렀다.

작업 성격의 즉흥성을 감안하면 당연한 일이겠지만, 그 엄청난 양의 드로잉들은 일견해서 서로 연결되는 부분이 없다. 즉, ‘혈류도’에 익숙했던 주변의 기대가 무색하게도, 그 프로젝트는 아무런 주제가 없었다. 가끔 예외적으로 반복되는 소재를 제외하고는 그저 하나의 생각 너머에 또 다른 생각이 자리잡고서, 각자 저마다의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을 뿐이었다. 왜 주제를 버렸냐는 질문에 작가는 “너무 무거워서 스스로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고 고백했다. 드로잉들이 쌓여가면서 중압감은 서서히 사라졌고, 그 가벼워진 손놀림에 또 다른 드로잉들이 만들어졌다. 그렇게 또 십여년이 훌쩍 넘어버렸다. 이제는 심지어 아침에 일어나서도 ‘오늘 뭘 그려야지’라는 생각 자체를 안 한다고 한다. 조바심 내지 않고 그저 물 흐르는 듯 오늘 하루도 살아가면 그 뿐… 어쩌면 편집증적으로 주제에 집착해서 자신을 극한까지 몰아가 본 작가이기에 가능한 깨달음이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태여 이 프로젝트를 관통하는 주제를 언급하자면, 마치 ‘삼천배’를 결심한 불교신자처럼 결연히 스스로에게 부과한 ‘3년에 천 개의 드로잉’이라는 과제 그 자체라고 해야 할까?
 
그러나 그 드로잉 연작들이 더욱 놀라운 부분은 그 끊임없는 실험과 다양한 표현에도 불구하고 전혀 혼란스럽게 느껴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일관된 주제가 없다는 것은 나중에 전시를 되새겨볼 때의 분석일 뿐 그 각각의 작업들은 철저하게 하나의 주제로 묶여있었다. 드로잉, 회화, 오브제. 설치. 소재와 방법이 제 아무리 다양할지라도 그의 주제는 언제나 변함없이 ‘김을’ 자신이다. 마치 각양각색의 풍선 뭉치가 가는 실로 그 중심의 장사꾼에게 연결되어 있듯이, 언뜻 눈에 띄지 않으나 작가의 존재감은 결코 가볍지 않다. “나를 중심으로 짜여진 세계의 전모를 한 번 드러내 보고자 한 것”이라고 말하는 김을의 작업들은 어쩌면 보이지 않지만 그 중심에 감지되는 작가의 거대한 자화상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김을, 〈자화상〉, 2012 © 김을

2012년작 〈자화상〉은 이런 작가의 세계를 잘 도해하고 있다. 화면 중앙에는 좌우명이기도 한 ‘정직(正直)’이라 쓰여진 기저귀를 차고, 하늘색 선글라스를 쓴 작가가 양 팔을 펼친 채 독특한 형태의 받침대 위에 서 있다. 양 손 위에는 푸른 색과 초록 색 눈물방울이 놓여 있고, 심장에는 튜브가 박혀서 묘하게 생긴 실험용기를 지나 미완성의 캔버스에 붉은 피를 뿌리고 있다. 특히, 머리를 거치지 않고 심장에서 곧바로 피를 토하듯 그려진다는 점에서 이는 그의 드로잉 작업의 특성을 상징하고 있다. 잘린 머리 위로 뻗어나가 있는 가지에 걸린 붉은색 띠에 “MY BLOOD, TEARS, SEMEN…”이라고 적혀있는 것은 이 체액들이 작가의 생리적, 실존적 조건이자 매일매일 배출하듯 작업하는 작가의 작업성격을 암시한다.
 
좀 더 거리를 두고 보면, 그의 정체성을 보다 객관적으로 증명하는(혹은 그렇게 보이는) 사실들로 작가는 둘러싸여 있다. 각각 출생연도인 ‘1954’와 ‘20□□’라고 적힌 화면 좌우의 깃발은 이 드로잉이 그의 생애 전반을 의미하고 있음을 말해 준다. 작가의 뒤편에는 여러 점의 백색 캔버스가 놓여있는데, 첫 캔버스가 기대선 나무 위에는 파랑새가 마지막 캔버스에는 녹색 뱀이 그려져 있다. 양쪽 끝에 모두 ‘베니타스’를 상징하는 해골이 그려져 있는데 이는 ‘죽음’에 관한 작가의 오랜 집착과 관련이 있다. 먼 배경의 얕은 능선 위에는 A와 T라는 알파벳이 간판처럼 서 있고(이는 시간의 경과와 자신의 A형 혈액형을 동시에 상징한다.) 하늘에는 여행과 모험을 상징하는 여객기와 군용헬기들이 떠 다닌다. 이 드로잉에 등장하는 소재들 중 상당수는 다른 드로잉과 오브제 작업들에서 다양한 형태로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회화와 드로잉의 차이가 뭐냐는 나의 질문에 대해 자신에게 있어 드로잉은 정치적이지 않은 것이라는 질문이 돌아왔다. 정치란 무슨 의미인가. 마치 성장(盛粧)한 여인네처럼 외관을 꾸며 타인에게 영향을 주려는 욕망이라고 한다. 이에 비해, 드로잉은 막 깨어나 눈곱도 떼지 못한 맨 얼굴의 여인, 타인을 미처 의식하기 전의 상태이다. “드로잉은 그림이라기 보다는 차라리 그림에 대한 어떤 내적인 태도이다”라고 말하는 김을에게 있어 드로잉은 재료나 기법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 마치 회화 같지만 사실은 드로잉인 작품도 있느냐는 질문에도 즉답이 돌아온다.

작가가 어떤 작업을 처음 시도할 때, 즉 백지상태로 실험에 나설 때의 작업은 아무리 회화나 조각처럼 보여도 본질적으로 드로잉이라는 것이 김을의 설명이다. 물론 자신은 그 백지상태의 위험한 자유를 최대한 유지하고 싶다는 의미일 것이다. “드로잉에는 작가의 진실이 담겨있다…. 그것은 강하고 아름다우며 진실하고 자유롭다.” 그런 맥락이라면… 그의 오브제 작업도, 페인팅도, 설치작업도, 심지어 다시 들추어 본 ‘혈류도’조차 너무나 정확히 드로잉이다. 그 피가 흐르고 흘러 마침내 “뼈가루로 빚은 눈물 한 방울”이 자신의 마지막 드로잉이 될 것이라는 작가의 말처럼… 드로잉은 김을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꺼내어 세상에 흩뿌리는 수단일 뿐이다.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