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광화문 네거리, 일민미술관 앞을 지날 때 느꼈던 당혹감이 생생하다. "REALISM"이라는 단어가 번잡한 도심 한 가운데에 거대하게 걸려 있던 기억이다. 머릿속에서 리얼리즘이 성급히 두가지로 분류되었다. 정치적. 형식적. 전시를 보기 전부터 그 제목이 최진욱의 작업을 강력히 수렴하고 있었지만, 너무 광범위한 말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어떤 명백한 선언 혹은 공표였음에도 이 말은 계속해서 모호해졌다. 최진욱의 리얼리즘은 무슨 리얼리즘인가? 왜 리얼리즘인가? 문제는 리얼리즘에서 시작되었다.

《최진욱, 리얼리즘》 전시전경 © 일민미술관

일민 미술관 2층 ㄷ자 공간 한 가운데에 섰다. 우측 벽에는 〈북아현동1〉과 〈처녀〉가, 마주선 벽에는 〈Prelude〉, 〈북아현동2〉, 〈북아현동3〉, 그리고 좌측 벽에 〈엄마와 아들〉, 〈우리 동네〉가 걸려 있다. 반복적으로 나타났다 사라지는 거리, 건물, 버스, 인물들의 게슈탈트가 불규칙한 현실적 체험으로 다가온다. 내가 그림 속에 들어온 것 같은 착각, 혹은 그림이 현실이 된 듯한 착각이다. 그것은 초점 맞춰 응시하지 않지만 각막 위를 스치는 풍경, 지나가는 시간, 무의식적 경험, 내 안의 현재와 외적 현실이 경계없이 엇갈리는 순간이다. 세잔이 변화와 본질의 양가적 진실을 위해 구성한 풍경과 정물처럼, 최진욱의 그림 역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이에서 요동치는 대상을 구성하고 그것을 하나의 현실로 만든다.

그의 화면에는 수많은 시공의 유린, 색채의 반목이 존재한다. 하지만 그것이 놀랍도록 현실인 것은 우리가 세상과 관계하는 방식이 바로 그러하기 때문이고, 내가 나를 인지하는 방식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요컨대 이것은 사물도 의식도 아우르며 나의 신체에 담기는 현상학적 경험이다.

가시적인 세계에 대한 확신은 그 확신을 의심하기 시작할 때 비로소 세계에 다가간다. 최진욱의 리얼리즘은 세계에 대한 확신과 계속해서 멀어지면서, 어떤 확신과 끊임없이 교류하고 있다. 90년대 그의 화실 그림과 자화상들은 직접적인 체험의 영역으로 사실을 축소시키되, 그것이 화가의 감각으로 소유하고 움켜쥔 현실임을 보여준다. 그는 이것을 "감성적 리얼리즘"이라 칭한다.
 
그림이 이 세상에 대한 미적 해명이라면 이 세상은 내가 확실히 해석하기에는 너무 넓다. 너무 방대하다. ... 나는 내 그림이 리얼리즘이라고 불리든 그럴 수 없든 개의치 않지만 나는 내 자신의 그림이 그 어떤 리얼리스트의 그림보다도 리얼하다고 믿는다. ... 나는 나의 리얼리즘을 신비한 리얼리즘, 혹은 신비하고도 과학적인 리얼리즘, 또는 감각으로 필연코 느낄 수 있는 '리얼함'이기에 감성적 리얼리즘으로 부른다.(「내 그림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1990년 7월 8일)
 
92년에 그린 두 점의 흑백 자화상에서 거울 속의 화가는 우리를 바라본다. 화가는 거울을 빌어 그림으로 그려진 공간 안에 있었던 자신의 현존을 알린다. 거울 앞에 있던 화가는 거기에 있었고, 그림 안에 있으며, 그 그림 앞에 선 관람객은 화가가 보았던 세계를 본다. 이렇게 현실의 층위를 둘러싸고 화가와 그림과 관객 사이의 다소 복잡한 관계가 형성된다. 우리는 거울과 같은 스크린에 우발적으로 영사되는 현실로 각자의 세계를 직조한다. 이 점에서 최진욱의 감성적 리얼리즘은 보편적 현실의 일시 정지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현실이 존재하는 방식을 다룬다. 그것은 개별적인 경험의 미시 세계와 거대한 세계의 구조 사이에서 발견해 가는 끊임없는 교환과 관련된다. 이 과정에서 익숙한 대상은 불현듯 낯설어지고, 대상의 보편은 상징적 메타포로 상승한다.
 
최진욱의 풍경들은 화가로서 외부 세계를 받아들이는 자기 의식의 투영을 전제로 하고 있다. 그것은 시선을 겹겹이 접고 펴서 만들어진 구축적 공간이자, 붓을 만지고 바르고 누르는 힘과 운동의 결합이다. 먼저 사진을 찍은 뒤 그것을 그리는 작업방식은 현실 공간의 동시성을 허물어뜨리며, 이를 다시 편집하고 배치한 생경함을 만든다. 1991년 작 〈하교길 2〉은 여러 이미지가 일상의 광경 위에서 중첩되고 있는데, 이러한 대비는 인과, 희비, 서사와 같은 것들로, 화면의 구조는 다양한 시간의 교차를 이루어낸다. 이를 통해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이미지의 기표가 충돌하는 긴장이며, 이 지점에서 감성적 리얼리즘의 형식적 차원은 역사적 맥락으로 이동한다. 화면의 구축과 장면의 선택, 그리고 회화의 요소 간의 조응이 의미를 매개하며 그의 그림을 감성적 사실성에 도달하게 하는 것이다.
 
이는 과거 루카치와 브레히트 간의 리얼리즘과 모더니즘 논쟁이 합의에 이른 상태를 연상시킨다. 루카치는 리얼리스트가 개별자의 체험과 동시에 역사적 총체성과 관련하고 있으며 사회적 사실들을 일상적 세부로 제시한다고 했다. 반면 브레히트는 이 세부가 개인들의 관점에서 이루어지는 추상화를 필요로 하고 이를 통해 '전체성'을 더듬어 볼 수 있다고 하면서, 이 전체성은 이미지가 구축되고 재구성되는 과정에서 드러난다고 설명한다. 즉 모더니즘과 리얼리즘의 긴장은 전체와 개별 사이의 인용과 환유를 통해 가능하며, 최진욱의 경우, 이것은 회화가 지닌 표현적 기능과 의미의 시대성이 공존하면서 나타난다.

최진욱, 〈295 북한 c/하이라인 파크〉, 2011, 캔버스에 아크릴, 130 × 970 cm © 최진욱

예컨대 〈북한C/하이라인〉에서 상반된 두 이미지의 순차적 병렬은 동시대가 가진 현실적 딜레마이다.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와 같은 이념적 판단이나 자연이냐 인공이냐의 환경적 판단에 앞서, 우리가 시대의 현실 속에서 존재하는 상태가 두 세계의 "중간지점"이라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는 2009년 개인전 서문에서 이렇게 썼다.
 
모더니즘과 사실주의가 긴장관계를 이루어야만 그림이 성공적으로 되는데 그럴 때의 몸의 긴장이 바로 임시정부스럽다. ... 하지만 그림에서 형식과 내용의 변증법은 여전히 유효하다. 세잔 이후 단절되다시피 했지만, 사실주의와 모더니즘의 결합은 더 멀리 가야만 하는데, 그런 그림일수록 예전의 익숙한 그림일 수는 없는 것이다. ... 그림은 그림다워 보일 때가 바로 함정이다. (10회 개인전 《임시정부》 서문, 2009)
 
"임시정부스럽다"라는 것은 일종의 내용에 관한 서술이지만, ‘한국 관광객 임시정부 앞에서 허둥대다’ 시리즈를 보면 그것이 매우 구체적인 대상을 통해 드러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임시정부와 같은 명백한 역사적 사실이 의미하는 바와 실제 임시정부 건물의 광경을 그리는 것의 사이, 그리고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이라는 불완전한 미적 난제를 그 안에 투사하는 태도는 내용과 형식, 그리고 역사와 개인이 얽힌 총체와 같다. 이는 19세기 시지각의 전환을 축도하는 회화적 질서와 본질을 향한 세잔의 분투, 그리고 동시대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화가의 언어가 '감성적 사실주의' 안에서 결합하는 과정이며, 모더니즘에 내재한 비판적 측면을 현재 안에 강력한 밀도로 문제 삼는 것이다.
 
한편 이 과정에서 화가의 내적 갈등이 그림 안에 쏟아지기도 하는데, 〈그림아, 너는 뭐냐?〉와 〈형광등〉에는 검은색으로 지운 평면 아래에 화가, 책, 누군가의 뒷모습, 그리고 형광등이 남아있다. 최진욱은 검은색이 '살려 달라'라는 의미라고 말한다. 이 어두운 그림에서, 화가와 형광등은 어둠 속에서 생존했고, 그 빛을 통해 그림이 보이고, 지움으로 망각된 그림의 마지막 흔적이 되었으며, 그림으로 남은 과거를 호출한다. 그림 속의 빛은 발광(發光)하는 것이 아니라 색을 기억하고, 어둠 속에 밝음을 남긴다. 쿠르베는 천사를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천사를 그릴 수 없다고 했지만, 그림으로 본 천사를 그릴 수 없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이는 회화의 가능성에 대한 것으로,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만드는 회화의 힘은 결국 쿠르베와 정반대 의미의 리얼리즘으로 귀착된다. 그것은 '보이는가'가 아니라 '볼 수 있는가'의 문제이다.

최진욱, 〈308 서서히〉, 2013, 캔버스에 아크릴, 194 × 518 cm © 최진욱

2016년 인디프레스에서 열린 그의 개인전 제목이기도 한 〈서서히〉는 장례식의 하관 장면을 낮은 시점으로 그린 대작이다. 역사의 정치적 전환에 대한 상징적 은유인 이 작품은 모습을 드러낸 죽음, 말하자면 죽음의 의식이 언제나 부재하는 타인의 것임을 목도하게 만든다. 우리는 하관이 이루어지는 축대의 아래, 강렬한 색채로 관념화된 풍경 안에 서서 어떤 죽음을 바라본다. 죽지 않은 사람만이 죽음을 목격할 수 있다.

미네르바의 부엉이가 날개를 펴는 이 거대한 황혼의 안과 밖에서 우리는 살아남은 대상이 된다. 눈에 보이는 대상을 바라보는 것을 넘어 살아남은 대상을 보이도록 할 수 있는 능력은 무엇으로도 갱신될 수 없는 회화의 미덕이다. 신체를 통해 발화된 미술의 재귀적 형식 요소는 화가의 혈관이 생생하게 화면 위로 확장되는 순간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2004년 작 〈나의 생명〉, 〈나의 스승〉, 〈나의 천국〉 속 다듬어지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풀밭과 꽃밭이 눈부시게 꿈틀대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일 것이다.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