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최진욱의 그림 중에는 '수업 중'이라는 제목을 단 그림이 많다. 이 그림들은 그가 3년여 간의 미국체류를 끝내고 돌아온 84년 이후부터 90년 〈그림의 시작〉이라는 제목의 그림이 그려지기까지의 시기동안에 그려진 것들이다. 하지만 사실 이 기간의 그림들 그리고 그 이전 미국 체류시의 그림까지도 어떤 의미에서는 모두 '수업 중'의 그림들이다. 다시 말하면 이 시기의 그림들은 나름의 자기표현과 의미망을 지닌 완성품(그 완성의 수준과는 별도로)에 속한다기 보다는 대상을 드러내고 표현하는 방법에 대한 훈련의 성격이 강한 '과정 중'의 그림들이다. 소위 '완성품'을 보는데 불가피하게 너무 익숙해져 버린 나로서는 그간 이러한 그림들이 전시장에 걸려 있는 것에 대해 무척이나 당황했던 기억이 남아있다(물론 어떤 그림이든 한 측면으로는 '과정 중'의 그림이고 다른 측면으로는 '완성품'이다. 그것이 태작이냐 아니냐 하는 측면과는 별도의 차원에서. 어쨌든 이런 표현을 통해 여기서 내가 주목하는 것은 그의 이 시기 그림들이 나름의 완성을 향한 훈련과 수업의 과정의 기미를 분명하게, 의식적으로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다).
사실 그의 그림에 대해 조금이라도 선지식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그가 매우 드믈게 볼 수 있는 탁월한 테크니션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한 동료 화가가 표현한대로 '무엇이든지 자기 식대로 그려낼 수 있을 것 같은' 그의 기량을 고려한다면, 그가 무슨 이유로 완성된 그림을 그렇게 기피했는지 혹은 선뜻 그것으로 다가서기를 꺼려했는지는 의문이 아닐 수 없다. 물론 그의 '과정 중'의 작품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에게 기대와 즐거움을 가질 수 있게 했던 것이 사실이다. 일종의 잠재력이라고 할까? 그의 그림들에서는 무언가 풀리지 않는 고리들을 헤쳐내는 요소들이 언뜻언뜻 자신을 내비치곤 했다. 그렇다면 그는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렇게 오랜 과정의 '수업'을 필요로 했던 것일까? 혹은 그가 그 수업을 통해 얻어내려 했던 것은 무엇일까?
2.
이런 질문을 던져보자. '좋은' 그림이 우리들에게 주는 즐거움 혹은 깨달음이란 어떤 종류의 것인가? 물론 어떤 단일한 답변이 쉽사리 주어질 수는 없을 것이다. 하나의 이미지로서의 그림은 선과 색, 구성, 필치 등등 수많은 조형 요소들을 통해 삶의 과정에서 축적되어 우리들의 기억 속에 침잠된 시각적 연상대들을 자극한다. 그리고 우리들은 그것들이 유도하는 데에 따라 그 시각적 연상대들을 스스로 결합, 재구성해서는 결국 하나의 반응에 도달하게 된다.
하나의 그림이 결과하는 이러한 반응은 다양한 수준의 것이 될 수 있다. 그것은 조형요소들에 대한 단순한 감각적 즐거움의 차원에 속하는 반응을 낳을 수도 있으며, 재현된 이미지에 대한 친근성에서 유래하는 발견의 기쁨을 줄 수도 있다. 또한 그림이 제공하는 이야기에 대한 감동을 낳을 수도 있다. 하지만 '좋은' 그림의 경우, 우리들이 그 작품에 대해 최초로 반응한 이후 그것으로부터 떠났을 때 그것이 우리의 의식 속으로는 이전시키는 것은, 예를 들면 한 그림에 재현된 사건에 대한 우리의 기억이나 해당 미술가가 이전에 사용하고 배치했던 형태나 색 혹은 공간들에 대한 우리의 기억 이상의 것이다. 나는 그것이 다름 아닌 가장 근본적인 차원에서 한 미술가가 세상을 '보는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가 사용한 형태나 인지할 수 있는 사건들은 바로 이러한 '보는 방식'을 전달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이러한 '보는 방식'은 우리에게 좋은 그림이 줄 수 있는 즐거움의 원천이다. 그 즐거움은 우리의 감각의 뿌리에까지 파고들어 시작되며 그 곳으로부터 하나의 깨달음을 통해 확산된다. 그리고 이 때 이 깨달음이란 우리 자신에 내재된 힘을 우리 자신이 놀라움으로 확인하는 깨달음이다. 즉 하나의 '보는 방식'이 우리 자신의 '보는 방식'과의 같음과 다름을 통해 우리를 확장시켜 주는 과정에서 느끼게 되는 우리 자신의 잠재력에 대한 깨달음이다. 때문에 이는 단순한 '보는 방식' 그 자체에 귀결되는 깨달음에 한정되지 않는다. 세상을 본다는 것은 세상과의 일정한 관계를 함축한다. 그리고 이 때 세상과의 관계란 행위를 포함하는 것이다. 즉 한 작가의 '보는 방식'은 궁극적으로 우리들 안에 내재된 미처 확인되지 않은 잠재력을 해방시켜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행위로의 혹은 행위방식에로의 욕구를 일깨운다.
3.
이런 맥락에서 나는 그간의 최진욱의 작업이 그 나름의 '보는 방식'을 가시화하기 위한 가장 정통적이며, 철저한 노력의 과정으로 이해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동시에 그의 수업에 대한 강조 역시 다른 무엇보다도 이러한 과정이 요구하는 어려움과 절차에 대한 그 나름의 의식적이며 동시에 무의식적인 대처방식의 자연스러운 결과였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그는 자신의 '보는 방식'을 창출하기 위해 어떻게 출발했을까? 잘 알다시피 그는 통상적인 어법에 따른다면 구상작가이다. 그는 자신이 대면하는 대상과의 직접적인 만남에서 자신의 그림을 시작한다. 그리고 이 곳에서 나름의 '보는 방식'에 대해 욕구한다.
각자 지금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주위를 돌아보기로 하자. 그 곳이 방안이라면 아마도 책상, 침대 혹은 TV., 천장, 창문, 바닥, 벽 등으로 둘러싸인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것들을 눈여겨 주시하고, 바라보자. 아마 그것들은 통상 그것들이 그 곳에 당연히 존재한다고 지나치곤 하던 때와는 다른 모습으로 우리들에게 느껴질 것이다. 그것은 우선 이전에는 전혀 그것을 보지 못했던 양, 마치 사르뜨르가 나무들의 모습에서 구토를 느낄 때와 같이, 하나 하나가 그 원래의 의미(책상, 침대 등등)를 잃어버리고 사물 그 자체로서 순전히 색채와 선과 재질, 면, 덩어리와 같은 물질감으로만 다가올 수 있다.
이런 느낌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것을 보다 몸으로 느껴볼 수도 있다. 이 경우 그것들은 물론 통상적인 친숙함과 직접적인 의미는 잃어버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름의 연속성을 지닌 것으로 혹은 보다 풍요롭게 느껴질 수 있다. 아마도 사물들의 색채에서 혹은 그것들이 따로 또 같이 놓여진 공간에서 오랜 만남의 과정을 통해서 농축된 사물들에 대한 감정과 느낌들이 감지될지도 모른다. 혹은 수 없이 방안을 움직이면서 그 사물들 하나 하나와 혹은 서로와 가까이 혹은 멀리에서 아니면 이 쪽 저쪽의 방향에서 혹은 내려다 봄과 올려다 봄에서 맺었던 관계들의 기억들로부터 자신이 그것을 대했던 자세와 태도가 느껴질지도 모른다.
아니면 이러한 경험들과는 전혀 상반되게 언젠가 감미로운 음악이 방안에 울려 퍼졌을 때나 혹은 너무나 힘든 사안에 부딪쳐 고통스럽게 그 안에 머물렀던 기억에 따라 그것들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이 경우에도 마치 문제가 없으면 바라보지 않는 구두와도 같은 일상적으로 느끼던 방안의 모습과는 다른 느낌으로 그것들은 다가온다.
내 생각으로 최진욱이 주목했던 것은 두번째의 시각이다. 그는 자신이 대면한 수 없는 대상세계와의 만남의 방식 중에서 바로 이 지점에 주목했다. 그는 이러한 만남을 그 어떤 일상적인 만남 보다도 풍요롭다고 믿었다. "리얼리티 보다도 더욱 심원하며 가장 현재적인 것 보다도 더욱 신선하며 시간이 지나가도 결코 질을 상실하지 않는 이미지"를 창출하겠다는 그의 이야기는 바로 이러한 이해로부터 나온 것이다. 그래서 바로 이러한 만남의 방식 그 자체를 시각화하기로 결심한다.
"추상회화는 거의 한 세기동안 미술계를 지배해왔다. 그것은 작가로 하여금 자기자신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그러나 미술관객들은 그 이상을 그리고 미적 특질 이상의 것을 보고 싶어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작가 역시 그 스스로가 진정한 관객의 한 사람으로써 보다 많은 것을 보고 싶어한다"
그의 이러한 확신의 타당성에 대해 이 자리에서 이야기하기는 힘들다. 이는 현대미술의 근본 문제와 연관된 보다 철학적인 논의를 요구한다. 다만 확인하고 싶은 것은 그가 바로 이러한 구상적 리얼리즘의 방식을 통해 그 어떤 조형방식 보다 풍요로운 전달이 가능하다고 믿었으며 또 이를 통해 더 많이 볼 수 있다고 믿었다는 사실이다.
4.
자기 그림의 목표를 확인한다는 것과 그것을 구체적으로 풍부하게 시각화해낸다는 것 사이에는 깊은 심연이 놓여있다. 목표가 단순할수록 다시 말하면 근원적인 것일수록 그러한 단절은 더욱 심하게 마련이다. 최진욱은 일단 위에서 지적된 두 번째 지각방식의 새로운 표현가능성에 주목했던 것 같다.
당연히 우리의 구상회화의 경우 이런 문제에 구체적인 도움이 될 수 있는 사례는 거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보기에 그것들은 한편으로 표면의 인상에 몰두하거나 아니면 전통적인 시각방식의 틀을 벗어나지 못한 절충적인 것들로 보였으리라. 그는 따라서 나름의 '더 많이 볼 수 있는' 리얼리즘을 표현해내기 위한 탐구에 들어간다. 이 때 그가 염두에 둔 이미지의 특성은 보다 "통렬하고, 자극적이며, 현대적이고, 자유로운 동시에 리얼한" 것이었다. 그리고 베이컨의 사례에 따라 그가 발견한 요법은 정확성, 유동성, 단순성, 제스츄어, 우연적 사건 같은 것들이었다.
그는 이러한 요법을 마스터하기 위한 오랜 훈련을 계속한다. 자전거 연작과 정물 연작이 바로 그런 시도의 대표적 산물이다. 이들 연작들은 그가 중요시 여기는 직접적인 관찰에 기초한 것이다. 그는 여기서 아직 전혀 대상의 의미영역을 고려하지 않는다. 그가 그려낸 대상들은 순수 시각적 실재에 가깝다. 물론 보다 "통렬하고,자극적이며,현대적이고, 자유로운 동시에 리얼한"이라는 표현에 내포된 해석적 요소를 배제하는 정도까지 순수한 것은 아니겠지만. 하지만 이 그림들에서 그림을 그리는 주체(작가)는 분명 대상에 대한 '의미있는 느낌'을 가지고 있지 않을 뿐 아니라 의도적으로 그러한 느낌을 배제하고 있다.
그러나 훈련은 훈련일 뿐이다. 그가 목표했던 것은 사실 이런 것이 아니었다. '더 많이 볼 수' 있기 위해서는 대상들과 그것을 살아가며 느끼는 주체와의 만남이 필요하다. "리얼리티 보다도 더욱 심원하며 가장 현재적인 것 보다도 더욱 신선하며 시간이 지나가도 결코 질을 상실하지 않는 이미지"는 필연코 삶을 살아가는 작가가 개입된 '보는 방식'을 요구한다.
이 지점에서 최진욱은 무척이나 오랜 동안의 혼돈을 겪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86년부터 90년까지의 약 5년의 기간동안 자신의 화실 안을 그린다. 그리고 그 화실의 그림들에 '의미있는 느낌'을 부여하기 위해 노력한다. 아니 사실 그는 자신이 하려는 일이 '의미있는 느낌'을 부여하는 일인지 충분히 의식하지 못한 것 같다. 내 생각에 이 시기 그림들, 적어도 90년 회색조의 ‘그림의 시작’ 연작들이 그려지기 이전의 그림들은, 대상의 직접적인 느낌으로부터 자신을 드러내려는 그의 욕구와는 달리 끊임없이 양자가 부딪치고 중심을 잡지 못하고 있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리고 이는 그 자신이 훈련의 기간동안 대상 자체를 일차적으로 순수 시각적 실재로 드러내려 했던 관습이 체질화되었던 결과가 아닌가 싶다. 즉 작위적인 언어가 아닌 철저하게 자신의 원래의 의도에 따라 소화된 언어를 요구하는 그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표현대로 "벽에 부딪치는" 방식의 시도만이 가능했고 또 실제로 그랬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