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택상, 〈Hue of Breath - Deep〉, 2010, 물, 캔버스에 아크릴릭, 136 x 102 cm © 김택상

김택상은 시간, 바람, 빛으로 작품을 제작한다. 안료를 희석시킨 물의 침전과 건조, 그 반복으로 빚어낸 ‘숨 쉬는 빛’의 그림이다. 시간의 중력, 공기의 현상이 ‘화이부동(和而不同)’하여 빚어낸 빛깔이다. 선염(渲染)의 은은한 빛을 띠는 수묵화, 엷은 안료의 겹침으로 부드러운 색조를 조성하는 채색화의 방법을 직관적으로 결합시킨 것이다. 이 물빛처럼 명징한 색깔은 인간이 덧붙인 의미와 개념을 넘어서는 순수한 미적 체험으로 이끈다. 최근 도쿄에서 개인전(다구치 파인 아트, 2016.11.26~12.24)을 개최하는 등 국제적으로 주목받고 있는 김택상의 회화론을 싣는다.

김택상의 작품은 물빛 같은 명징(明澄)함을 머금은 색깔들이 고요하게 모여 있는 살결 같다. 그는 극소량의 물감을 탄 물이 캔버스에 고이게 하여 물과 물 속의 물감 알갱이가 침전한 화폭을 건조시키는 작업을 여러 차례 반복한다. 그의 매체는 단순히 희석한 물감만이 아니다. 침전과 건조 과정에 개입되는 중력, 햇빛의 양과 강도, 바람, 공기의 습윤 정도, 건조 시간 등의 자연 요소가 매체가 되어 한결의 색을 만든다. 한결의 색을 얹히는 이러한 매체들 간의 구성 관계는 그때그때의 계절과 날씨에 따라 매번 자연스럽게 변한다.

어느 누구도 완전히 예측할 수 없고 분석할 수 없는 일회적(一回的) 조건이 작업실에 초대되어 예술 창작에 흔적을 남긴다. 캔버스에 보이는 색깔은 거의 물에 가까운, 미세한 차이를 가진 색들의 층(層)이 모여서 만든 색이지만 놀라울 정도로 얇고 은은하다. 자세히 보면 손으로 조절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형성된 물길의 흔적과 선(線), 기계적이지 않고 불규칙적으로 만들어진 농담, 때론 극소하게 박힌 점들, 혹은 비단의 얼 같은 자연스러운 흠이 있다. 이러한 요소들은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며 은은하게 묻혀 있다.

김택상의 작품은 수묵화의 매력과 채색화의 기법을 결합한 독창적인 제작 방법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는 먹물이나 안료가 한지(韓紙)의 섬유질 사이로 스며들어 선염(渲染) 현상이 일어나면서 빛의 표면 반사, 종이 섬유에서의 굴절 반사, 먹 입자의 흡수에 의해 부드럽고 특유한 ‘은은한 빛’을 나타내는 수묵화의 핵심과, 엷은 안료를 여러 차례 나누어 덧칠하여 곱고 부드러운 색조를 나타내는 채색화의 특징을 직관적으로 결합시켰다. 종래 미술사에서 마치 서로 상반되는 성질을 갖는 것으로 풀이되던 양립적인 두 기법을 현대적으로 융합한 놀라운 예술적 성취다.

일필휘지(一筆揮之)의 동세와 유연성, 그와 결부된 추상적 요소를 자부하는 수묵화와 여러 번의 색을 세밀하게 칠하는 치밀하고 인위적인 장인적 기교에 토대를 둔 채색화의 양립과 갈등은 한국 미술사의 당연한 담론처럼 이어져 왔다. 심지어 수묵화만이 한국의 진정한 전통이라고 주장되기도 했으며, 더 나아가 수묵화의 추상적 요소가 채색화가 갖는 묘사성보다 우월하다는 폄하(貶下)가 은연중에 존재해 왔다. 그러나 김택상은 예술적 융합을 통해 자연스러운 흔적이 남긴 추상적 요소가 살아 있으면서, 동시에 오랜 시간과 예민한 간섭으로 곱고 세련된 색층을 만들어내는 장인적 세심함이 하나의 예술 작품에 공존하게 하였다. 그리고 그의 작품에는 채색화의 색이 주는 감각이 살아 있으면서도 단순한 겹쌓기로 생길 수 있는 불투명함이 없다. 물에 희석된 물감이 겹겹이 흡수되면서 불규칙하게 만들어진 극소한 틈을 통해 빛이 투과하고 난반사(亂反射)를 일으켜 잔잔한 광휘(光輝)가 나온다.


빛에 조응하는 구조: ‘개념’으로서의 색(色)을 넘어

김택상의 이러한 독자적인 표현 기법이 동양화의 전통에서 영감을 받아 시작된 것은 아니다. 그의 ‘숨빛(Breathing Light)’ 작업의 첫 출발점이 된 계기는 그가 우연히 옐로스톤 국립공원(Yellowstone National Park) 화산 분화구의 물빛을 보고, 그 물빛이 머금은 깊고 맑음이 마음에 깊이 꽂혔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애초에 그런 맑고 깊음을 나타내는 색은 ‘파란’ 물빛이라고 생각하고 파란색으로 작업을 하였다고 한다. 그런 과정에서 작가는 중요한 깨달음을 얻었다.

자신이 애초에 생각했던 ‘맑고 깊음’이라는 것이 ‘파란색’과 꼭 같을 필요가 없고, 더 나아가 ‘파란 물빛’과 ‘맑고 깊은 순수함’을 연결시킨 것은 순전히 개념적 이해였다는 점이었다. 결국 그는 특정 색과 결부된 ‘개념’으로부터 벗어나야 했다. ‘개념’으로부터 일탈하면서 자신이 구현하고 싶었던 바의 좀 더 본질적인 측면을 이해하게 됐다. 색이라는 개념을 일깨우는 것은 ‘빛’이고 이 빛과의 관계를 어떻게 만드느냐에 따라 색이 갖는 느낌이 다양하게 변한다는 점을 오랜 시간의 작업을 통해 체득하게 된 것이다. 

빛이 어떤 대상의 표면에 닿았을 때 표면에 흡수되지 않고 반사되는 빛, 이 빛을 우리는 색으로 본다. 그런데 예를 들어 잎사귀에서 반사되는 빛의 양을 측정해 보면, 새벽인가 황혼녘인가, 아니면 햇빛이 많은 날인가 구름 낀 날인가에 따라서 반사되는 빛의 양이 상당히 다르다. 그렇지만 인간의 눈은 다양한 조건에 따라 다르게 보이는 것을 무시하고 잎사귀는 항상 초록색이라고 인지한다. 즉 잎사귀는 항상 초록색이라는 개념을 갖고 이 개념이 주는 불변성(constancy)을 근간으로 하여 세상을 보고 판단하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이것은 좋고 나쁨의 문제가 아니다.

인간의 이러한 인지 능력은 오랜 시간을 통해 진화되어 온 기능이기 때문이다. 어떤 대상을 식별하는 데 있어서 여러 다른 조건에서 봤을 때 대상이 다 다르게 파악된다면 인간은 큰 문제에 봉착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추상화된 ‘개념’을 만들어 다양한 조건 속에서 변화하는 대상의 정체성(identity)을 실패하지 않고 알아보는 능력을 구비하였다. 색이 바로 이러한 기능 중의 대표적인 예다. 설사 색이라는 개념이 다양한 조건의 미세한 반사광 차이를 희생시킨다고 하더라도, 계속 복잡하게 변화하는 세상을 인식하는 데 거칠지만 불변하는 틀로서 존재하고 있다.

이러한 개념으로서의 색, 색의 불변성(color constancy)에 저항을 한 자들이 인상주의 화가들이었다. 모네는 햇빛 속에서 잎사귀에 순간적으로 반사되는 반사광을 즉각적으로 반영했다. 개념이 주는 불변성에 입각하여 보라는 대로 보지 않고 그에 저항하면서 순간적 반사를 포착한 것이다. 그래서 세잔은 모네를 보고 “What an eye”라며 놀랐다고 하지만, 또 다른 차원에서는 대단한 ‘의지’의 문제라고 볼 수도 있다. 왜냐하면 인간의 시각 기능이 보라는 대로 색을 보지 않는 것은 인간의 생리적 저항 중에서도 가장 고도의 저항일 수 있기 때문이다. 빛의 논리에 순간적으로 붓을 내맡기면서 인간의 시각 구조로부터 자연스럽게 주어진 색의 불변성 개념을 깬 것이 바로 인상주의 화가들의 독창성이었다. 

커다란 문맥에서 볼 때 김택상도 인상주의 화가들처럼 색과 빛의 숨겨진 관계를 발견하였다. 그러나 그의 문제의식은 빛 자체에 좀 더 다가갔다. 그에게 빛이란 색을 ‘숨 쉬게’ 하고, 숨 쉬는 색은 생명감을 은유적으로 함축했다. 결국 그의 작품 제목이 된 ‘숨빛’이라는 말에서 드러나듯이 빛이 바로 연금술사이고 예술 작품은 그 빛을 담는 그릇이다. 모네가 빛이 다를 때마다 순간적으로 다르게 보이는 사물을 각각 그려 빛에 대한 탐구를 여러 개로 늘어놓았다면, 김택상은 빛의 핵심이 보이도록 하나로 응축한 셈이다. 그는 극미한 광도 차를 갖는 색들을 중첩시켜 색이 빛의 상태에 따라 다르게 보이도록 하는 구조를 고안한 것이다.

따라서 김택상의 작품은 햇빛의 다양한 정도에 따라 천(千)의 얼굴을 갖는다. 햇살이 따사롭게 스며드는 공간에서 그의 작품을 보면 숲속 나뭇잎 사이로 들어오는 쑥물빛 같은 빛이 캔버스로부터 내뿜어 부유하는 것처럼 보인다. 또 황혼이 질 무렵에 그의 작품을 보면 몽롱한 빛을 발하며 표면을 베일에 감싼다. 즉 빛과 조응하며 대화하는 구조 자체를 작품 내에 만들어 하나의 작품이 빛의 다양한 상태에 따라 자연적으로 반응하도록 한 것이다. 개념으로서의 색(色)이 희생시킬 수밖에 없었던 다양하고 극미한 반사광의 차이를 살려놓은 것이다.


〈Breathing Light〉 작업 과정 © 김택상

안료의 겹쌓기

유화를 다루는 화가들이 공통적으로 경험하는 신비로운 순간이 있다고 한다. 그것은 물감의 겹쌓기가 초래하는 특이한 효과를 볼 때다. 예를 들어 들판을 칠한다고 할 때 캔버스에 초록색을 입히고 그 후에 연속적으로 밝은 초록과 어두운 초록의 색층을 입힌다. 이렇게 색의 겹을 쌓다 보면 얼마 후 서로 다른 톤들이 최초의 초록색을 거의 뒤엎게 된다. 그때 신비로운 일이 벌어진다. 설사 겹쌓여진 색들에 의해서 최초의 초록이 아주 조금밖에 안 보인다고 해도 틈으로 보이는 그 조그마한 부유하는 듯한 국부적인 색으로 들판이 이제 진짜 만들어진 것처럼 보이는 효과다.

안료가 층층이 쌓인 후 안료의 축적 사이를 비집고 드러나는 색이 초래하는 신기한 시각 효과다. 김택상은 종종 서양화 물감의 겹쌓기 기법과 동양화의 안료 흡수 기법을 비교하며 언급한다. 김택상의 겹쌓기는 재료의 흡수성을 경험한 작가들의 현실과 미감으로부터 촉발되어 독자적으로 발전시킨 기법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비교해서 보자면 서양 화가들이 얻으려고 했던 조그만 틈같이 보이는 색들이 초래하는 미적 효과는 동양화에서는 한지라는 섬유질 안에 존재하는 설렁한 틈새가 초래하는 미적 효과와 대칭점을 이룬다고 할 수 있다.

김택상은 동양화 자체를 흠모하며 복원하겠다는 생각을 한 것은 아니었지만 스스로의 문제의식을 갖고 꾸준히 작업하면서 동양화의 기법이 불러일으키는 미감에 대한 재발견을 한 것이다. 유명한 서양화 작가들도 결국 어느 색이 먼저 칠한 것이고 어느 색이 나중에 칠한 것인지 모를 때까지 색칠을 하여 색의 무한한 겹이 만들어내는 총체로서의 살아 있는 느낌을 구현하려고 애썼다. 김택상이 셀 수 없을 만큼 수차례 얹힌 색의 층은 캔버스의 섬유 구조 안으로 은밀하게 흡수되어 숨어 있다. 그의 색에서도 어느 층이 먼저인지 얼마나 반복적으로 했는지는 보이지 않고 놀랍도록 얇은 하나의 은은한 전체가 된다. 그리고 바로 그 전체로부터 ‘숨을 쉬는 듯한 생명감’이 느껴진다. 그의 작품은 서양화와 동양화의 대화를 촉발시키는 잠재력을 갖고 있다.


개념 예술에 대한 비판: 예술이란 무엇인가

김택상은 창작은 절대로 ‘개념’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작가는 처음에 어떤 일정한 아이디어나 개념으로 작업을 시작할 수는 있지만 결국 작업 과정을 통해 시행착오를 겪고 뜻밖의 어려움에 부딪혀 애초의 계획이나 의도를 바꾸기도 하면서 오랜 반복을 통해서 작업을 완성하게 된다고 거듭 설명한다. 최종적으로 작가가 이루어내는 작품은 절대로 최초의 개념을 기계적으로 반영한 것이 아닌, 어떤 논리나 말로써 되짚어 갈 수 없는 ‘변형된 전체’이며 작가 스스로도 예기치 못한 탐험과 발견이라고 한다.

작품은 재료에 대한 작가의 민감한 방임과 동시에 민감한 간섭을 통해 이루어지는 작가의 노력과 작업실 내외부의 현실적 제한과 기회들을 총합한 경험의 결정체다. 이는 지난 30여 년 이상 현대 미술 담론의 핵이라고 자칭해 온 개념 예술론에 대한 근본적인 비평이다. 작품은 작가의 직접적인 수공(手功)을 개입하여 이러한 개입 과정 속에서 우러나오는 미적 체험을 실현하는 것이라는 그의 예술론은, 이성적 개념 자체가 물질을 동원해 만드는 작품보다 근본적으로 더 우월하며, 또는 그 개념 자체를 굳이 인간이 집행하지 않고 공장에 주문 생산해도 된다는 예술론과 정면 대결한다.

그렇다면 그가 작품을 통해 함축적으로 제시하는 예술이란 무엇인가? 햇빛이 충만한 공간에 전시된 김택상의 작품을 보면 캔버스 내부에 흥건하게 고여 있는 듯한 빛이 색을 통해 느껴지고, 통상적으로 색이 돋구는 감정적 연상보다, 자신이 어떤 분위기에 침잠되어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색(色)이 색이 아니다. 물감(물질)도 아니고 상징도 아니고, 나의 감각을 공기의 입자처럼 공간 속으로 번지게 하고 추상적으로 퍼지게 하며 나의 개별적 중요함이나 대단함, 현실이 복잡하게 의미하는 바 모두가 사라지는 듯하다. 예술이 주는 아름다운 환영(幻影)이다. 그렇지만 그 체험 자체에 몰두하면서, 한 순간도 완전하지 못하고 결함과 갈등투성인 현실 속에서 의외의 찰나의 완전감(完全感)과 충만감(充滿感)을 느끼게 해 준다. 어쩌면 이것이 작가가 자신의 숨 쉬는 색에 대해서 느끼는 생명감과 공명하는 체험일지 모른다.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