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춘수, 〈수상한 혀 9407〉, 1994, 캔버스에 아크릴릭, 259 x 194 cm © 김춘수

김춘수의 작업은 언어의 임의성과 한계, 즉 '혀의 수상함'에 대한 깨달음에서 시작되었다. 따라서 그의 그림그리기는 언어적인 것 즉 모든 서술적인 발언방식에의 문제제기이다. "말로 담을 수 없는 것은 침묵속에 묻어두어야 한다는 언어의 한계 너머에도 그 무엇이 분명 존재하는 것을 믿고 싶다. 그리고 그것을 어떤 양상으로든지 표현해보려는 역설, 그에 대한 의지가 예술정신의 다른 이름일게다."(1991.3.) 라는 그 자신의 독백과 같이, 색채, 형태, 질감... 등 비언어적인 방법으로 얘기 할 수 있는 그림은 그에게 있어 이러한 무언의 세계를 탐구하는 좋은 방법이었다.

그러나 회화에 있어 자연의 외양을 모방한 형상은 언어와도 같은 것이다. 그가 신체의 언어를 선택한 것은 언어 너머의 세계를 말하기 위해서이다. 신체의 언어는 존재의 외관을 설명하기 보다 존재 자체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의 발언방식은 형상을 매개로 한 회화보다 오히려 더욱 직설적이며 그러한 의미에서 더욱 정확하다.

김춘수가 붓을 버리고 자신의 손으로 직접 화폭에 물감을 '묻히는'것은 철저하게 무엇인가를 '그리지'않기 위한 것이다. 신체와 물감을 일치시킴으로써 물감은 더 이상 신기루와 같은 공간 속에 부유하지 않고 구체적인 실체로서 화면 위에 견고히 자리잡게 된다. 그리하여 우리는 물감이 그려내는 형체가 아닌 물감자체를 보게 되며 그것을 통해 그의 몸놀림을 감지하게 되고 언어로는 설명할 수 없는 존재의 비밀에 접근하게 되는 것이다. 그의 작업은 이같이 지극히 물질적인 속성을 통하여 정신에 도달한다는 의미에서도 일종의 '역설'이다. 그의 작품에서 원시적인 생명력 같은 것을 느끼게 되는 것은 그가 바로 이같은 근원적인 행위로 회귀하였기 때문이다.

사실상, 1990년 여름부터 시작된 푸른 그림들 뿐 아니라 이전의 다양한 작업까지도 포함하여 김춘수의 작업은 '그리기'의 의미에 관한 물음의 연속이었으며, 그는 그에 대한 대답을 몸의 움직임에서 발견하였다. 청색을 묻히고 그것을 흰색으로 덮는 행위의 반복을 통하여 때로는 거칠고 때로는 섬세한 선들이 화면을 뒤덮게 된다. 마치 호흡의 들숨과 날숨이 짜여 생명을 이어 가듯 묻히고 지워가는 과정 속에서 그림이 태어나는 것이다.

따라서 그의 그림은 끊임없이 움직이고 지속되는 삶의 표상이 된다. 이 작가가 그림을 만들어가는 과정은 삼라만상을 완결된 실체로서가 아니라 상반되는 것들의 상호작용으로서 보는 동양의 음양사상을 떠올리게 한다. 여기서 실과 허, 정과 부, 삶과 죽음은 등가의 것이다. 바름과 지움을 동등한 것으로 취급하는 이 작가의 태도도 같은 맥락에서 설명이 가능할 것이다.

지움으로써 더 잘 보이게 한다는 이 작가의 방법은 이미 1980년대 중반의 창 연작에서 시작된 것이다. 보여지는 세계와 실재하는 세계의 간극을 초월하기 위하여 그는 그려진 형상을 지워나갔다. 그에게 있어 창은 주체와 세계가 만나는 장소이다. 그 만남을 좀더 본질적인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그는 창에 비친 형상들을 지웠다. 그에게 있어 지운다는 것은 주객의 일치를 의미하며, 시각을 초월한 본질의 세계와의 만남을 의미한다.

이러한 김춘수의 작업방식이 신체를 매개로 한다고 하여 펄록과 같은 추상표현주의자들의 그것과 동일시 할 수는 없는 측면이 있다. 그들에게 있어서는 화폭이 일종의 정복의 대상이 며 작가의 행위는 무의식의 상태를 목표로 한 것이지만, 김춘수에 있어서 화면은 자아의 일 부이고 그의 손놀림은 오히려 명증한 깨달음에 도달하기 위한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그의 작업방식은 무위의 상태에서의 반복적인 행위를 통해 득도의 경지에 도달하고자 하는 것은 세계와 나, 나와 그림이 하나가 되는 물아일치, 주객혼입의 상태이다.

여기서 신체의 움직임은 자연의 움직임이므로 그림은 문자 그대로 '자연스러운'것이 된다. 이들 그림에서 쏟아져내리는 폭포수, 여름의 푸르른 녹음, 숲 속의 덤불과 그 속에서 새어 나오는 맑은 빛, 또는 투박한 바위로 이루어진 험준한 산세 같은 것을 상상하게 되는 것은 이같은 자연스러움 때문일 것이다. 그는 실제로 이러한 자연의 모습을 염두에 두고 그리기도 한다. 그러나 그가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그거의 형태보다 그것이 가진 기운이다. 자연과 작가가 하나가 도는 순간 자연의 기운은 작가의 신체 속에 깃들게 되고 화면에 살아 숨쉬는 갈필효과로서 나타나게 된다. 그의 작품에서 문인 산수화에서와 같은 기운생동을 느끼게 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일견 같은 것 같이 보이는 ‘수상한 혀’ 그림들도 자세히 관찰해 보면 약간의 변화과정을 겪어 온 것을 발견하게 된다. 1990년의 그림에서는 잎사귀나 덤불과 같은 형상이 비교적 뚜렷하게 나타나다가 1991년에는 그 터취가 좀더 섬세하게 변화되어 마치 인상주의 회화나 이상범의 미점산수를 연상시키는 화면으로 변화를 보인다. 1992년 작품에서는 거칠고 과감한 손놀림의 효과가 탐구되고 있으며, 최근작에서는 수직의 터취들이 다소 균일하게 반복되고 있어서 비로소 생명의 고른 숨소리를 듣는 듯 하다. 그의 시각이 점차 자연의 외관에서 떠나 그것에 내재된 본질로 침잠하게 된 것이다. '혀의 수상함' 즉 언어의 낯설음에 대한 그의 깨달음이 점점 심화되었기 때문이다.

김춘수의 그림은 물질적인 동시에 정신적이고 구체적인 동시에 추상적이다. 우리는 이 화가가 만들어낸 화면을 보면서 터취 하나하나를 느낌과 동시에 전체적인 분위기를 감지하게 된다. 작가의 몸놀림의 한순간, 순간을 체감함으로써 그 구체적인 시간의 단편들을 초월한 영원의 본질에 다가가게 되는 것이다. 글의 행간을 읽는 것이, 또는 글을 모두 읽고 나서의 전체적인 느낌이 더욱 그 본의에 접근하듯, 그의 그림은 분석을 거부하며 구체적인 동시에 총체적으로 다가와 무언의 진실을 넌지시 알려준다.

이들 그림이 이같은 효과를 가져오는 것은 특히 시각적으로 지각되는 모호한 공간감 때문이다. 원근법에 근거한 전통회화가 우리의 시선을 그림 속으로 끌고 들어간다면 그 그림들은 우리의 시선이 화면의 안과 밖을 넘나들게 한다. 물감자욱들을 마치 공중에 떠돌 듯이 우리 앞으로 전진해 오기도 하고 뒤로 물러나기도 한다. 전면적으로 펼쳐져 있는 손자욱으로 인하여 시각이 초점을 잃고 분산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미묘하게 움직이는 무한한 공간 속에서 우리는 미지의 세계로 이끌려지며 그곳에서 생명의 울림을 듣게 된다.

이러한 효과는 이 작가가 주로 사용하는 푸른색이나 흰색, 또는 검은색이 가진 독특한 속 성에서도 기인한다. 말레비치의 흰 바탕의 흰 사각형, 이브 클랭의 푸른 모노크롬, 또는 깊은 묵색을 탐구해 온 문인화 전통에서와 같이 이러한 색채들은 미술에서 주로 가시적인 외 양 너머의 본질적인 세계를 의미하는 것이 되어 왔다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김춘수도 이 들 색채 속에 함축된 의미를 의식적으로는 아닐지라도 예술가적인 직관으로 간파하고 있다 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절제된 색채와 단순한 손자욱의 반복으로 이루어져 첫눈에는 단조롭게 보이는 그의 그림은 보다 넓고 깊은 것을 얻고자 하는 의도에 기반하고 있다. 최소의 것이 최대의 효과를 가져온다는 믿음에서 출발한 것이다. 그 자신도 말하고 있듯이, 색을 절제하여 쓰는 이유는 색채자체에 더욱 깊이 있게 접근하기 위한 것이다. 무수히 중첩된 유사한 선들 또한 우리로 하여금 그것들의 다양한 변주에 더욱 주의를 기울이게 한다.

단조로운 화면은 집중과 연상작용을 유도하여 오히려 풍부한 의미의 가능성으로 열리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측면도 간소한 색채와 선, 그리고 여백을 통해 깊은 정신성에 도달하고자 하였던 옛 문인화가들의 태도와 상통한다. 주체와 객체, 정신과 물질, 사유와 시각의 이분성을 초월하기 위하여 김춘수가 선택한 신체의 언어는 데카르트 식의 이원론을 극복하기 위한 현상학적 경험의 방법과 동양의 자연관 이 만나는 지점이기도 하다. 김춘수의 그림에서 시대와 문화의 차이를 뛰어 넘는 호소력을 기대하게 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점에서이다.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