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현, 〈회화의 지층〉, 2003, 캔버스에 유채, 20 x 240 x 10 cm © 이인현

“예전 작업들보다 요번 게 더 좋은 거 같애.” 뒤풀이 장소에서 한 중견작가가 전시를 두고 한 말이다. 그 이유를 묻는 내 질문에 “보면 알 수 있지 않냐?”라는 알쏭달쏭 하나, 미술판에선 널리 통용되는 선문답 식 답이 돌아왔다.

리뷰쓰기 참 난처한 전시가 있게 마련이다. 작가의 전력에 대해 필자가 아는 바 별로 없을 때도 그럴테고, 작가가 동일한 주제에 오랫동안 천착하여, 엇비슷한 평문들이 이미 쏟아진 경우가 또한 그러하다. 이것은 일종의 해당 작가의 작품론에 관한 ‘검증된 해설’에 필적하는 공감대로 굳어간다. 실은 내게 있어서 이인현이 좀 그런 축에 속한다. 해서 리뷰가 쉽지 않다.

기존에 발표된 이인현 관련 평문들을 느지감치 스캔하듯 살펴보니, 그들 역시 구사하는 중심어는 대개 통일되어 있다. ‘서구식 모더니즘 탈피’, ‘평면성과 물질성 현존’, ‘완성체가 아닌 과정’, ‘옆으로 보기’ ‘망막의 일루젼’ 등등. 많은 부분 작가의 구두 진술과 작업 노트를 참조하여 완성된 듯한 평문들이다. 그러니 더더욱 비슷할 밖에. 워낙 훌륭하게 해설된 글들이어서 나의 부실한 동어반복을 보태는 건 의미가 없어 보이고.

한정된 지면이니 두가지 질문에 답할 목적으로 글을 마무리하며, 이 난관을 모면해본다. 본 전시를 통해 변화된 ‘지층’은 어떠한 것인가가 첫 질문이다. 벽에 걸린 작품 감상을 위해 외부의 지침 없이도 관객이 자발적으로 작품 옆으로 비스듬한 자세를 취한다는 걸 전시장을 두 번째로 찾은 날 깨달았다. 측면도 정면처럼 화면의 구실을 한다는 기존 해설이 타당해서이기보다는 이번 출품작은 측면에서 봐야만 얇게 덧칠해진 색의 농도 변이를 관찰할 수 있게 구조화 된 탓이다.

한편 검증받은 ‘이인현표 변형 그림틀’ 위로 닿을락 말락 채색된 모노톤 출사표는 바라보는 각도에 대한 시정을 촉구하는 10여년의 고집을 재확인해주는 의미를 넘어서진 않는다고 본다. 어쨌건 그 점이 이번의 변화다.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두 번째 질문. 그렇지 않아도 대동소이한 평문들을 유도하는 이 기나긴 회화의 지층은 언제까지 쌓여 갈까? 불과 몇 해 전 인터뷰에 따르면 작가는 앞으로도 이 주제에만 20년은 더 매달릴 생각이란다.

그가 컴퓨터 작업에 손댄 적 있는 걸 기억들 할 것이다. 어떤 평자는 그 작업에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는 고백을 글로 남긴 적이 있다. 심정은 이해가나 그것은 아마 전작들과의 연속성을 감안한 인상일 것이고, 디지털 시대의 현주소에 너무 무지한 상태에서 나온 탄성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나는 작가의 그런 돌출시도의 건강함과 용기엔 동조하나, 작업 자체가 신통했다고 보진 않는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회화로 돌아왔다.

설사 디지털 작업 복안이 추후 그에게 있다 한들, 회화의 지층이라는 트레이드마크는 역시 아날로그 캔버스가 전제될 때 위력적으로 우리에게 ‘인식’ 되어버렸다. 십수년 째 그의 진지함이 무리없이 수용되는 건, “그가 아름다움을 추구했던 아니든 이들은 모두 정갈한 아름다움을 과시한다.”(강태희)는 이유 때문이라고 본다. 이쁘면 모든 게 용서되는 건 여자뿐만 아니다. 사실 용서해주고 싶을 만큼 그의 작업이 이쁘기도 하다.

이제 마무리할 차례다. 대충 이렇게 쓰면 가장 무난한 리뷰가 될 것이다. “이인현의 근작은 심미성과 일관된 주제의식 모두에서 성공했다. 왜냐하면 그 이유는... 탁 보면 알 수 있지 않은가?”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