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열자적 지식은 표상의 논리에 종속되는 지식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지도 그리기'의 지식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특이성을 찾아 끊임없이 순회하고 이동하는 지식이다.”
-질 들뢰즈
“옆에서 바라보기. 모든 정면적·정태적 노력과 결별하는 것. 내부와 외부, 표층과 심층, 의미와 무의미,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실재와 표상의 집요하고 성실한 각주들로부터 벗어나는 법. 단(旦), 자기 언급과 내파(內破)라는 더욱 치열한 정태성의 가장에 있어서. 아무 생각 없이 그냥 바라보기. 트롬프 레이유와 가상현실을 진짜로 즐기기 위한 동형 반복으로서의 사시(斜視).”
-이인현 작업노트 「방관(傍觀)과 편견(偏見), 사랑과 미움의 끝」 중에서
사시(斜視)
이인현의 작업노트에서는 어긋남이나 넘어감 또는 흘러넘침 등의 표현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위에 인용한 글만 해도 사(斜) 말고도 방(傍)과 편(偏)이 있다. 그런데 이들은 모두 시(視)·관(觀)·견(見) 등 본다는 말과 어울려 있다. 이는 그가 바라보는 방법에 각별한 관심이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 해서 그의 학위논문도 바라보는 법에 관한 것이다(그는 동경 예술대학 미술연구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학구파이다).
논문에서 그는 자신이 지향하는 궁극적인 바라봄의 방식을 “보면서(觀) 보지(見) 않고, 보지(見) 않고 보는(觀), 견-관(見-觀)의 알리바이”의 경지로 설명한 바 있다.
한지에 먹을 번지게 한 밑그림을 필름으로 노출 시간을 다르게 한 여러 개의 판을 찍은 다음, 이들을 정확하게 겹쳐 찍은 것이다. 그렇다면 그의 '사시(斜視)'는 일단은 상식적인 시각을 넘어섬을 뜻함이요, 더 나아가서는 견-관(見-觀)의 화해마저도 거부하는 초변증법적인 것이 된다. 그러나 이런 메타시선으로 그가 주시하는 것은 뜻밖에도 회화의 안팎과 경계이다. 그렇다면 그의 사시는 모든 편견으로부터 자유로운 상태에서 회화의 한 명징한 투시도를 그려 내고자 하는 방법적인 것이 되며, 이는 곧 그의 전 작업을 일관하는 모티프가 되는 것이리라.
모더니티 또는 미술의 모더니즘은 시각 중심주의를 그 특징으로 한다. 물론 그 근본은 데카르트적 원근법이다. 그것은 한마디로 정면적인 시각이며, 배타적이고 자기 중심적인 외눈박이(mono-cular)의 시선을 칭한다. 이는 또 추상화되고 관념화된 공간에 관여하는 것으로 몸을 배제하고 서사를 타기한다. 현대에 이르러 이런 시각중심주의에 대한 강력한 비판이 실제로 사시(斜視)였던 사르트르에서 비롯된 것은 의미심장한 데가 있다.
어쨌든 그간 이인현적 사시가 정면과 측면의 새로운 관계 규정으로 구체화되었다면 좀 다른 문맥에서이긴 하지만 오래전에 이 문제를 제기한 그림으로 한스 홀바인의 〈대사들 The Ambassa-dors〉(1533)을 들 수 있다. 해골의 존재로 더 유명한 이 작품은 세속의 과학과 예술에 관한 지식을 고루 갖춘 인물들을 그리고 있지만 정작 초점은 그들의 발치에 왜상(歪像, anamorphosis)으로 그려진, 그래서 정면에서는 결코 해독할 수 없는 해골에 모아진다. 모든 정통적인 시각과 지식에 대한 경고(memento mori)를 의도하는 이 이미지는 측면에서만, 그것도 적절한 각도를 잡아야만 파악이 가능하다. 자연스럽게도 라캉에게는 이 해골이 상징계에 속박되어 있는 우리들 시선의 숙명의 상징으로 너무나 적절한 예가 되었다.
즉, 이미 사회화된 말의 질서에 종속당하는 개인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발화 주인공이 아니듯이 우리의 시선이나 시각장 역시 기존 기표들의 조직망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을 웅변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는 그의 해석일 뿐이다. 그러나 홀바인은 UFO 같은 물체를 화면의 정중앙에 그려 넣는 담대함으로 관람자를 측면으로 몰고 가는 플레이를 통해 '시각의 정면성'에 도전한 것만은 틀림없다. 물론 왜상을 다룬 그림은 이외에도 많지만 르네상스 단일시점 원근법이 확립한 화면의 자족성·통일성·합리성 등을 이토록 풍부한 메타포로 이처럼 정면에서 도전하고 야유한 그림은 드물다.
대학 시절 작업으로, 한지를 여러 번 접어서 겹쳐진 모서리 부분을 잉크에 담구었다가 펼쳐 놓은 작품이다. 그런데 사르트르에게서 출발한 시선 논의가 라캉으로 이어진 것이라면 이인현의 사시는 그들이 말하는 시선의 공격성이나 사회성과는 무관한 영역에 있다. 그는 타자의 시선이 얽혀 들어오는 것을 애초부터 인정하고 그를 개의치 않는다. 그보다는 시선의 한계와 그를 극복하는 방법에 관심을 갖는다. 가령 사물을 바라보는 모든 가능한 시선의 총 수를 n으로 나타낸다면, 그는 거기에 굳이 한 차원을 더한 n+1의 시선을 택한다. 이는 그에 의하면 n에 의해 규정되는 닫힌 계(系)와는 달리 '옆으로 미끄러지는 타블로'가 가능한 열린 세계의 코드이다.
이인현은 굳이 분류하자면 판화가 출신이다. 대학을 졸업한 뒤 일본에서 근 10년을 유학하는 동안에 그가 주로 공부한 매체는 판화였고 당시에는 작품도, 전시도 판화에 한정되었다. 비록 귀국 후에는 캔버스 작업을 주로 했지만 회화의 두께나 깊이에 관심을 가지게 된 그가 일차적 매체로 판화를 택했던 사실은 역설적인 데가 있다. 그러나 어차피 그는 역설과 정설의 가역성에는 익숙하며 판화를 다루는 방법 역시 그런 관점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않다. 판화는 찍어내는 그림이다. 그것은 모든 상황이 사전에 준비되고 통제되지만 일단 찍고 나면 그 이미지는 완결된다는 특성을 지닌다.
따라서 덧칠이나 다른 여러 현대적 의미의 '변형된 판화'를 배제한다면 이는 치밀한 사전 준비와 그 결과에 대한 승복을 전제한다. 즉, 부분 수정을 할 수 없다는 점에서 그것은 원칙적으로 일회적인 매체인 것이다. 또한 에디션을 명시하는 관행이 웅변하듯 엄밀한 의미에서의 복제성 역시 판화의 영역이 아니다.
따라서 복수 제작을 하지 않고 미세한 차이를 견지하는 이미지들을 시리즈화하는 방식을 택하는 이인현의 판화는 가장 전통적이면서도 동시에 가장 비정통적인 양면성을 지닌다. 예를 들어 총 50매 계획으로 지금까지 몇 년째 지속되고 있는 ‘달밤 #n’ 시리즈는 그의 이런 입장을 잘 보여 준다. 이 작품들은 한지에 먹으로 번지게 드로잉한 밑그림을 필름으로 사용하여 노광 시간을 달리한 여러 개의 판을 만든 다음, 이들을 정확하게 겹쳐 찍은 것이다. 결과적으로 수묵의 일회성은 겹쳐 찍힌다는 판화 작업을 통해 변질되고 각 에디션은 일회적인 작품으로 남게 되는 것인데, 이들은 달밤이라는 자연 현상과 판화 매체의 공통점인 반복과 차이에 대한 그의 관심을 매개해 주는 좋은 예가 된다.
또 판과 판화지를 조금씩 어긋내어 잉크가 다할 때까지 거듭 찍는 방법을 취한 〈대척점의 사고〉 역시 기법은 다르지만 비슷한 관점에서 제작된 예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그는 판화의 근본 속성을 뒤집기보다는 그것이 '스스로 흘러넘쳐 자신을 비울 수 있을 때까지 철저히 밀고 나가'는 길을 택하는 것이다. 이때 일탈과 차이를 매개하는 수단으로서의 판화는 참으로 적절한 매체가 되며, 매체의 코드를 재조정하는 이와 같은 n+1의 시선은 추후의 회화 작업에서도 그대로 적용되게 된다.
한지의 물성에 대한 꾸준한 관심이 캔버스로 전환하기 전에 이 작품으로 발전한 면모를 보여 준다.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그가 일찍부터 종이를, 그중에서도 한지를 기본적인 재료로 사용했으며, 한지의 물성에 대한 그의 꾸준한 관심은 캔버스로 전환하기 직전에 급기야 〈회화의 두께〉나 〈회화의 깊이〉 등의 작품으로까지 발전했다는 점이다. 한지는 무엇보다 그 흡수성 때문에 평면에서도 깊이와 부피를 포용하는 신축성 있는 재료이다.
물감이 번진 한지는 2차원도 3차원도 아닌 이를테면 소수 차원의 프랙탈(fractal) 공간이며 생성하고 변화하는 n차원, 즉 n+1의 차원을 유감(類感)한다. 예를 들어 대학 시절 작업 중의 하나로 한지를 여러 번 접어서 겹쳐진 모서리 부분을 잉크에 잠시 담구었다가 펼쳐 놓은 작품이 있다. 여기서 격자의 반복성과 규칙성을 배경으로 잉크가 번진 모습들은 凹와 凸, 평면과 입체, 표면과 이면, 깊이와 원근 등 수분의 흡수와 증발에 따른 한지의 변모를 여실히 보여 주고 있다.
그는 이런 작업에서 먹과 종이가 서로 스며드는 입자적인 연속성에 관심을 기울이며, 그림은 그리는 것과 그려지는 것의 능동과 수동의 교환 과정에 의해 탄생된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그에게 있어 그림이란 '그리는' 것이기보다는 재료와 제작이 서로 얽혀지는 과정을 통해 '되는' 것이며, 작품은 결국 생성의 물리적 아날로지가 되는 것이다. 프로세스-친화적인 한지는 그래서 그에게 아주 중요한 매체일 수밖에 없으며, 이런 관심은 자연스럽게 캔버스를 통해 회화의 '깊이'를 추적하는 작업으로 이어진다.
지층(地層)
이인현이 많은 영향을 받고 또 직접 인용하고 있는 들뢰즈에 의하면 지층(地層)은 응고의 과정이자 분절 작용으로 물질에 모습을 부여하며, 지층화는 카오스에서 시작된 지속되고 갱신되는 세계의 창조를 뜻한다. 1992년 후반기에 귀국한 이후 그는 자신의 대표작이 된 장방형의 청색 캔버스들을 이 단어를 빌려 '회화의 지층'이라는 총괄적인 제목으로 부르고 있다. 또한 '에피스테메'를 지층의 번역으로 쓰는 것을 감안한다면 그는 이를 통해 회화의 물질적 기반과 형성 과정 또는 그 형식적·인식론적 기본 조건을 탐구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층은 회화의 두께나 깊이 등의 개념과 연결되어 측면을 보여 주며 결국 정면의 '횡포'를 거부하는 측면의 논리를 대두한다.
이미 잘 알려져 있다시피 그의 회화 작업은 캔버스의 정면과 측면을 그리기와 번지기로 나누고 정면은 비교적 균질한 모노크롬 화면으로 처리하는 반면, 폭을 넓힌 측면은 정면에서 흘러내린 물감이 번지고 스민 효과를 통해 일루젼을 허용하는 것으로 요약된다. 따라서 지층은 회화의 두께나 깊이 등의 개념과 연결되어 측면을 보여 주는 그림으로 가시화되고 결과적으로 정면의 '횡포'를 거부하는 측면의 논리가 대두된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런 단순한 이분법적 대립에서 벗어나기 위해 정면에는 물성을 줄이는 섬세한 그라데이션을 주는 한편 일루젼이 발생하는 측면은 번짐을 조절하여 물성을 강화함으로써 균형을 취한다. 따라서 어느 쪽이든지 그의 작업은 고도의 계산과 집중의 산물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들이 벽에 걸릴 때는 다시 한 번 뒤틀기를 통해 정면과 측면은 서로 섞이고 뒤집어진다.
이런 작업을 통해 그가 강조하는 것은 회화의 물성과 일루젼의 상호 교환이며, 이를 가장 효과적으로 보여 주기 위해 이제껏 가시권 밖에 있었던 측면을 부각시킨 것이다. 새삼스러운 얘기지만 회화는 오브제이자 이미지이며, 사물이자 기호(상징)이며, 상태이자 사건이며, 또한 궁극적으로 존재이자 변화이다. 회화를 바라볼 때 우리는 통상적으로 양극을 동시에 보지 않지만 그 경계는 의식한다. 그는 이 가역성에 주목하고 경계선을 차별화하며 동시에 그를 혼란시키기 위해 지층과 깊이를 노출하는 과정을 택한 것이다. 이때 그가 다루는 지층은 당연히 문자 그대로의 물질적 단층이라는 뜻 외에 그 인식론적 구조까지를 함의한다.
우리가 익숙해 있는 통상적인 회화의 기본 조건은 채색된 사각형이다. 그리고 그것이 그림이라는 사회적인 기호가 되기 위해서는 틀이라는 물질과 결합하거나 혹은 액자라는 경계를 필요로 한다. 이때 결정적인 곳은 측면 자체이기보다는 면이 꺾어지거나 단절되는 부분이며 이곳이 양극화가 일어나는 지점, 즉 특이점 또는 들뢰즈의 사건이 발생하는 시뮬라크르(simulacre)가 된다.
이때 공간과 차원이 갈라지는 불연속선상에서 물질은 의미 차원으로의 위상학적 변환을 일으키는데, 이인현은 동일성과 안정성의 정면을 운동과 변화의 측면과 대비시켜 급변(catastrophe)의 지점을 부각시킴으로써 회화의 특이성을 규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이것에서 저것으로 넘어가는 순간 속에 나타났다 사라지는 변화와 운동이며, 그것은 그에게 끊임없이 지속되고 갱신되는 회화와 예술의 생성과 그 의미 작용에 대한 메타포가 된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그는 마지막으로 캔버스를 틀에서 벗겨서 평면도처럼 펼쳐 놓음으로써 그 경계선을 다시 한 번 시험대에 올린다. 그래서 적나라하게 노출된 회화의 '알몸'을 목격하는 우리는 회화의 기반은 물질이며 우리의 초월적 시선이 일루젼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더 나아가 우리는 액자 안에 모셔진 이들을 작품이라고 불러야 할지 말지 망설이는데, 이런 혼란은 벗긴 캔버스를 다시 느슨하게 틀에 싸 놓은 작품에서도 예외가 될 수 없다. 정면과 측면의 구분도, 특이점도 사라진 펼쳐진 캔버스는 또 하나의 확장된 측면인 배경과 또 그 너머의 벽면과 불화하면서 애매한 존재로 남게 된다.
점(点)
점의 등장은 이인현 작업의 한 중대한 고비를 뜻한다. 이를 계기로 그가 깊이에서 거리로, 공간에서 시간으로, 또 근시(近視)에서 원시(遠視)로 시각이 바뀌는 것이 관찰되기 때문이다. 그는 서로 전혀 다른 뒤러와 뒤샹의 작품도 고작 50m만 떨어뜨려 놓아도 똑같은 하나의 점으로밖에는 보이지 않는다는 말로 이 변화를 설명한 바 있다. 그의 말대로 면을 멀리서 보면 점으로 보이고, 점 속에도 면이 펼쳐지며, 점은 측면의 번짐이라는 우회로가 필요 없이 옆으로 번지면서 캔버스의 두께 안으로 들어갈 수가 있다.
그렇다면 이는 실은 초기의 한지 작업에서 이미 터득되었던 것을 다시 점을 통해 구체화하는 일이 되지만, 그가 지층을 면에서 점으로 환원시켰다는 점에서 적지 않은 변화를 말해 준다.
큐비즘적 공간의 현대적 해석이자 4차원 공간의 개념화라 할 수 있다. 언뜻 보아 무작위한 밤하늘의 별자리를 연상시키는 점들의 배치는 모두 일정한 법칙에 근거하고 있다. 이들은 우선 공간감과 깊이를 나타내기 위해 선명하거나 흐린 점으로 구분되며 대칭이나 반복 또는 역전 등의 '숨겨진' 원칙에 의해 포진되어 있다. 그중에는 뫼비우스의 띠를 재현하거나 실제로 별자리를 나타내는 것도 있지만 이들은 모양 자체는 중요하지 않으며 그 연속과 불연속의 배치 관계가 문제되는 위상공간을 점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점 작업은 '보기'보다는 '읽기'의 대상이 되며, 한편으로는 '별자리 찾기'의 게임으로 접근될 수 있다.
점 작업 중 한 특수한 부류를 형성하는 것이 '주사위' 들이다. 실제로 주사위 형태의 소형 캔버스들이나 액자 속의 캔버스들은 모두 주사위의 숫자를 통해 공간을 표현하고 있다. 예를 들어서 각기 하나·둘·셋으로 구성된 점의 그룹들이 배치된 작품은 한 평면에 주사위 3면을 다 열거한 것이며, 전체적으로는 6개의 점이 동일 평면에 존재하므로 결과적으로 주사위의 4면이 동시에 보이는 셈이다.
이것은 이를테면 큐비즘적 공간의 현대적 해석이자 우리가 아직 시각화하지 못하는 4차원 공간의 개념화이다. 그러나 다시 생각하면 둘 이상의 숫자들은 동시에 복수의 면, 또는 차원을 나타내므로 전체적으로는 동일 화면은 거의 무한대의 차원을 포용하게 된다. 또한 점이 면의 경계선에 놓인 것이나 전혀 보이지 않는 캔버스의 병치는 현대 물리학이 말하는 '휘어진 공간'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결국 이인현은 점을 이용한 자유로운 공간 이동을 통해 우리의 시선을 유클리트 기하학을 멀찌감치 뛰어넘는 n차원의 '우주적'인 것으로 인도하고 있는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는 유명한 말을 남긴 바 있고, 말라르메나, 니체 또한 주사위를 중요하게 언급했다. 그러나 이를 사고에 비유해 “떨어진 주사위는 하나의 성좌이며, 점은 별들에서 태어난 수를 형성한다”고 한 들뢰즈의 말은 이들 점 작업에 진지한 반향을 일으킨다. 지층의 문제를 주사위의 점으로까지 끌고 간 이인현도 사실 이들을 통해 주사위 놀이에 가담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어두워질 때까지
점 이후 지금까지 이인현 작업에는 크고 작은 변화들이 있었다. 두부나 벽돌 형태의 캔버스가 등장하고, 점과 면이 혼합되며, 전체적으로 여백이 두드러졌으며, 또 곡면이 등장하고, 최근에는 캔버스 블록 쌓기가 시도되고 있다. 캔버스 블록들은 이제는 측면을 보여 주기보다는 동일한 단위의 중첩과 배치에 초점을 맞추어 가로 쌓기·세로 쌓기·계단식 쌓기·사선 구도로 쌓기 등 다양한 구문법을 구사하는 데 사용되고 있다. 그는 이제는 회화의 정/측면이나 물성/이미지의 관계보다는 이런 기본 어휘들로 어떤 의사소통이 가능할지에, 또 회화 내(內)의 공간보다는 회화가 속한 공간과의 대화 가능성에 더 큰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듯하다.
'점' 작업 이후 여러 변화를 보여 준다. 한편 앞으로의 그의 작품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는 최근의 주목할 만한 변화는 시간의 요소를 강조한 일련의 작업들이다.
〈4D Perspective-어두워질 때까지〉라는 부제를 단 이들은 여전히 '회화의 지층'이라는 제목을 고수하고 있지만 판화와 컴퓨터로 제작된 이미지들이다. 그 1부가 되는 1997년의 판화전에서 각기 번호가 매겨진 직사각형의 화면들은 판이 거듭되면서 잉크가 점점 균등하게 퍼져 가면서 그라데이션에서 모노크롬으로 변모하는 과정을 보여 준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시간적인 차원이며 제작 과정의 실제 시간은 거듭된 판의 숫자로 제시되어 있다.
후속 작업인 이듬해의 〈4D Perspective-어두워질 때까지 2부〉는 역시 사각형 이미지들이 시간의 변화에 따라 종국에는 거의 사라져서 보이지 않게 되는 과정을 담았다.
중요한 것은 이들이 컴퓨터로 제작되었다는 사실이며 이는 앞으로 그의 작업세계의 무한한 확장 가능성을 예고한다. 이들 두 작품은 전시가 끝난 후 음향을 가미한 관객 참여 작품으로 다시 정비되어 인터넷에서 새로운 관객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또 비록 프로젝트로만 남아 있기는 하지만 14인치 LCD 패널 34장을 옆으로 배열하여 그라데이션의 반복 변화를 나타내는 설치 작업도 있다.
이것은 시간의 경과와 감상의 거리, 또는 관람객의 수에 따라 작품의 형상과 디스플레이 속도가 달라지는 것으로, 그가 처음 시도한 대중 참여 작품이다.
지도 그리기
이제 이인현 작품의 변화 과정과 그 주요 관심사의 의의를 정리해 볼 차례이다. 이인현은 자신의 작업에 대한 큰 그림을 그려 놓고 문제를 하나씩 차근차근 풀어내는 작가이다. 그는, 무심한 관람객이 판단하기에는 의아해할 정도로, 지금까지의 작업이 너무 빠르게 진행되지 않았나 염려한다. 얼핏 비슷비슷해 보이는 그의 작업은 사실은 미술의 제반 문제를 그만큼 세심하게 다루고 있는 것이다.
그가 일차적으로 관심을 가진 것이 회화의 평면성과 물성이라는 점에서 그 출발점은 미니멀리즘이며, 회화의 기본 단위가 되는 사각형을 고수하고 그를 철저하게 탐색하는 점에서 방법상 도널드 저드와 비견된다. 캔버스로 블록을 쌓는 작업은 측면보다는 동일 단위의 중첩과 배치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러나 그는 이제는 신물이 나도록 진부해진 평면의 논의를 지층으로 환원하여 일단 깊이와 측면을 들고 나오는 방법을 택했다.
평면인 회화에 당초 가시적인 깊이가 있을 리 없다. 단지 무시되거나 가려진 측면과 뒷면이 있을 뿐인데 그는 측면을 통해서 회화의 생성 과정을, 그 물질적인 형성과 기호로서의 의미의 착종을 점검해 온 것이다. 그에게 이런 작업은 회화라는 지식과 관습에 대한 일종의 고고학적 탐사 행위가 된 것이리라. 이런 탐색의 결과로 얻는 것은 그 특이성의 확인이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사각형으로 대변되는 회화의 아이콘으로서 위상은 변함이 없는 채이다. 이제 그는 컴퓨터의 도움으로 이 아이콘을 생성·변화 그리고 교환을 함의하는 움직임 자체로 치환하는 데까지 이르러 있다.
그것은 물성이나 두께와는 무관한 가볍고 유동적인 이미지의 세계에 진입한 것이다. 현재 갓 태어난 별처럼 컴퓨터 안에서 반짝이고 있는 이 이미지조차도 당연히 영속하지는 않을 것이며 그 운명은 어쩌면 회화 일반의 그것과 보조를 같이할지도 모른다. 여기서 정작 관심사는 그가 다루는 사각형의 의미이다. 이미 말한 대로 그는 회화의 기본 구조를 점검해 오고 있다.
그런데 이 깔끔하고 정확한 사각형은 붓자국도, 땀냄새도 없는 '추상'의 세계에 속해 있다. 비록 그는 물성을 주시하지만 그것은 촉각과는 무관한 '바라보는 방법'의 대상일 뿐이며, 제작자로서의 그의 존재는 사유 뒤에 증발한다. 상당한 노동의 산물인 작품 어디에도 그는 지문을 남기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이는 그의 엄연한 선택의 결과이자 한편으로는 힘이며 또 다른 한편으로는 한계이기도 하다.
해서 그의 사각형은 침묵하는 기표, 요즘 말로 떠도는 기표가 되며, 결과적으로 그의 시선은 회화 내의 논리나 윤리 문제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않고 있는 것이다. 들뢰즈에 의하면 지도 그리기는 안정과 영원을 추구하고 존재와 생성을 대립시키는 편집증적 지식에 대립되는 것으로 생성과 변화, 창조와 변이를 대변하는 분열자적 지식을 지칭한다. 이는 머물러 정체되지 않고 유목민처럼 떠돌며 끊임없이 접속하고 분열되는 지식이다.
이것이 전통적인 기하학 대신 휘기·누르기·비틀기 등을 기본으로 하는 위상수학과 연결되는 이유이다. 이인현은 특이점을 지적하고 위상공간을 통해 회화의 새로운 지도를 그리고자 했고 그 시도는 일정 부분 성과를 거두었다고 판단된다. 그러나 정작 앞으로가 문제이다. 어차피 지도 그리기는 본질 추구와는 무관하며 그것은 컴퓨터 이미지에서도 예외가 아니기 때문이다.
판화와 컴퓨터 작업으로 시간이라는 요소를 강조한다. 마지막으로 이인현의 작업 자체에 대해 한마디 언급이 필요하다. 캔버스이든, 판화이든, 또 컴퓨터 이미지이든 그의 작품은 한결같이 흠잡을 데 없이 만들어졌다. 그가 아름다움을 추구했던 아니던 이들은 모두 정갈한 아름다움을 과시한다. 그의 완벽주의의 증거이다. 무엇보다 컴퓨터 이미지는 내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그것은 그의 주된 의도와는 달리 인생의 많은 것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음의 마지막 구절은 사실은 글을 시작하면서 맨 먼저 쓴 것이지만 수정 없이 내보내기로 한다. 이 모든 '썰(說)' 뒤에 나도 나름대로의 '지도 그리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덧붙이자면 중요한 것은 나의 첫 느낌이며 그것은 지금도 대부분 유효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4D perspective-어두워질때까지〉는 인터넷에 올려져서 언제든지 누구든지 볼 수 있고 참여할 수 있다. 시간이라는 차원을 보태서 3차원을 넘어선 그의 작품은 컴퓨터 스크린이라는 가상의 공간에서 명멸한다. 그것은 영구히 살아 있으면서도 누군가가 불러내기 전에는 잠재태로 남아 있는, 실로 생과 사를 초월한 비물질의 세계에 진입해 있다. 물질에서 입자로 또는 빛으로 환원된 그 작품은 미세한 진동 속에서 끊임없이 변화하며 견(見)-관(觀)의 알리바이를, 그 이원(二元) 시스템의 덧없음을 환기시킨다.
결국 우리에게 남는 것은 생멸의 과정을 연출하는 사물의 잔상일 뿐이다. 전시 도록에 NASA가 촬영한 별의 탄생과 죽음의 모습을 - 우리에게 전달되는 별의 모습이야말로 시공이 왜곡된 거대한 잔상이므로 - 담은 것은 따라서 당연하다.
통상적인 시각을 뛰어넘는 방법으로 회화의 본질을 규명하고자 하는 그의 시선이 현재 가 닿은 곳은 그래서 카오스의 까마득한 우주 공간이다. 그 잔상이 가볍지 않은 여운을 남기는 소이(所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