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면에 입체를 그리려는 강박적인 욕구가 르네상스 이래 서구 미술사의 추진력이 되어 왔다면, 마네 이후의 화가들은 다시 평면으로 돌아가려는 또 하나의 강박증을 보여 왔다. 이들 모더니스트들에 있어서는 '평면'이라는 것이 회화의 순수성을 지키는 마지막 보루와 같은 것이었다. 평면성을 향한 그들의 집요한 자기비판의 과정은 궁극적으로 캔버스 바탕과 물감의 완전한 일치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그들의 목표가 성취된 순간 평면성이라는 것은 화면의 물질적 현존과 동일시될, 따라서 회화는 무엇인가를 담기를 포기한 순수한 그릇 자체로서 남게 될 위험에 빠지게 되었다. 자가당착에 빠진 모더니스트들은 그림이 물체로 전락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시각적 일루젼(optical illusion: C. Greenberg)' 또는 '회화적 매체로서의 형태(shape as a medium of painting: M. Fried)'를 수호하고자 하였다.
재료의 특성과 중량감을 벗어버린 채 망막 위에서만 현현하는 형태를 그림 속에 담아내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방법이 역사 속에서 형성되어 온 그림의 자리를 온전히 보장해주지는 않는다. 지금까지의 그림들에 담겨 있었던 모든 것은 어디로 가야 하는가? 이제 그림은 어떤 구체적인 형상도, 이야기도, 관념도, 정서도, 하다못해 작가의 작은 의도마저도 담고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일까?
이인현의 작업은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된 것 같다. 그는 굳이 그림의 물질적 현존을 거부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을 받아들임으로써 그동안 소위 '내용'이라는 이름으로 화면에 담겨졌던 것들이 작품으로부터 그것의 원래 자리인 작가로 옮겨진 사실을 깨닫고 있다. 그는 작품 속에 그것의 제작 주체가 내재해 있다는 미술의 오랜 신화를 깨고 있다. 그는 작품으로부터 넌지시 뒤로 물러가 있기를 자처하면서 그림을 미지의 공간 속에 던져 놓고 그것이 되어지는 과정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인현의 그림은 그 안에 의미를 함유한 완결체라기보다 주변의 공간과 관계를 이루고 그 공간을 만들어 가는 단위물들이 된다.
그것은 우리와 마주치는 시간과 공간 속에 던져진 하나의 존재 방식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의 그림들을 그 자체로서 자족적인 명사형으로서가 아니라 회화의 자기성찰 과정 속에 있는 동사형으로서 경험하게 된다. 이와 같이 작가가 뒤로 물러가 있는 작품 앞에서일수록 우리는 이상하게도 그것의 배후에 있는 작가 자신에게 더 관심을 갖게 된다. 작품 속에서 그것의 제작 주체를 발견하고자 하는 것이 미술품 경험의 오랜 습관이라면, 작품과 분리되었으므로 오히려 그 배후에 더욱 굳건히 서 있는 작가에 주목하게 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이와 같은 경험의 양상은 이미 마르셀 뒤샹의 레디메이드에서 시작되었으므로 그렇게 낯선 것은 아니다. (이렇게 보면 뒤샹이 미니멀리즘과 개념미술 모두에 있어 선구격이 된 것도 우연한 일이 아니다. 사실상 작품의 물체성을 중시하는 미니멀리즘과 그 배후의 작가 주체가 관심의 초점이 되는 개념미술은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이다.) 그렇다면 이인현의 작품에 대한 경험은 우선 그의 '생각'을 알아보는 것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순리일 것이다.
그는 '바라보기'라는 회화 경험의 가장 기본적인 문제에서 출발하고 있다. 그가 가장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그림이란 앞에서 보는 것이고, 따라서 앞에서 그리는 것이다'라는 명제이다. 그는 '그림에도 측면이 있다'라는 당연한 사실을 굳이 액자로 감추어 온 회화의 역사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한다. 그가 미셸 푸코의 어휘를 빌어 사용한 회화의 에피스테메(pistêmê: 지층)는 바로 이러한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는 회화의 지층을 재료들의 만남에 의하여 탄생하게 한다. 캔버스의 풀기를 빼내고 물감을 묽게 타서 올 속으로 스며들게 하는 스테이닝 기법은 그림을 이루는 물리적 두께를 보여주는 데 효과적이다. 모리스 루이스나 케네스 놀랜드와 같은 작가들이 화면의 궁극적인 평면성을 위해 사용하였던 방법을 그는 전혀 다른 목표를 위해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의 화면은 그린버그식의 색면(color field)이면서도 물질적인 표면이 된다.
그가 두꺼운 나무토막 모양의 캔버스를 사용하는 것도 측면들의 존재를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두꺼운 운두는 정면에서 스며든 물감이 캔버스의 측면을 따라 번진 흔적을 보다 현저하게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그리는 순간의 정면이 측면으로, 측면은 정면으로 전시되는 경우도 있다. 어떤 경우에는 두 캔버스를 마주 보게 붙여서 애초의 정면은 접합부로 숨어버리고 측면만이 제시되기도 한다. 캔버스 천을 완전히 펼쳐서 전개도와 같이 고정시켜 놓은 경우에는 정면과 측면이 모두 정면이 되는 셈이다. 결국 그에게 있어서 정면과 측면의 구분은 의미 없는 것이 되어 버린다.
이와 같은 그림의 '정면'으로서의 존재 방식에 대한 의문 제기는 '바라보기'에 있어서의 '정'의 문제로 연결된다. 우리는 소위 정면성을 의심할 여지없이 구현하고 있다고 자처하는 그림 앞에서조차 온전한 정면을 바라본다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가령 우리가 그림의 중앙에 서 있다고 할 때, 신체에 종속된 시각의 한계로 인하여 그림의 가장자리로 갈수록 옆눈으로 볼 수밖에 없게 된다. 그의 좌우로 긴 캔버스는 이와 같은 사실을 더욱 절감하게 한다.
우리는 그 그림들을 보기 위하여 앞과 옆, 위와 아래 모두를 훑어보아야 할 뿐 아니라 정면마저도 그 앞을 천천히 지나가면서 보아야 한다. 결국 '정면에서 바라보기'에 이의를 제기한다는 것은 그림을 실제 시간의 지속 속에서 경험하는 물리적 실체로 규정함을 의미한다. 그의 입장은 정면성과 그것에 따른 순간적 인지라는 초시간적인 경험을 강조하는 모더니스트들과 대극에 있는 것이다.
이인현의 그림은 평면성을 부정하지 않으면서 즉물성을 고수하는 특수한 평면이다. 모더니즘식의 정면으로서의 평면이라기보다 모든 부피를 가진 입체의 표피를 이루는 평면, 즉 홑겹으로서의 평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그는 회화를 바라보는 데 있어서 가장 본질적인 관행이 되어 온 일루젼이라는 것을 부정하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 '그림 바라보기'란 망막에서 자발적으로 일어나는 일루젼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굳이 그의 그림을 평면으로서만 인지하기를 강요하지 않는 것이다.
이와 같은 그의 입장은 물감의 반점들로 이루어진 그림들에서 절묘하게 예시되고 있다. 짙은 색과 옅은 색으로 된 두 개의 점이 마치 그림자를 드리운 하나의 점과 같이 한 쌍을 이루어서 그려져 있고, 그것들이 그림의 중심으로부터 정확히 양쪽으로 대칭을 이루며 반복되고 있다. 또한 가장자리로 갈수록 그 간격이 좁아지고 있다. 그리하여 우리로 하여금 거부할 수 없는 명암 효과와 원근감, 즉 시각적인 두께를 지각하게 한다. 여기서는 물리적 지층이라기보다 시각적 지층이 탐구되고 있는 것이다.
이인현의 작업이 일루젼을 철저하게 배제함으로써 작품의 즉자성을 성취하고자 한 미니멀리스트들의 경우와 구분되는 것은 바로 이 지점에서이다. 그러나 그가 용인하는 일루젼은 우리를 그림의 정면 한가운데에 세워 놓는 전통적 명암법이나 원근법에서의 그것과는 다르다. 그것은 개념적 그리드가 아닌 물질 그 자체를 통해 경험하게 되는 망막적 현상으로서의 일루젼이다.
전통 회화에서는 일루젼이 그림의 실재를 지배하였으며, 그것은 비록 추상적 형상으로 대치되었을 뿐 모더니즘에도 계승되었다면, 그리고 미니멀리즘에서는 일루젼이 배제된 실재만이 강조되었다면, 이인현은 물질을 통한 일루젼을 받아들임으로써 회화에 대한 새로운 경험의 방식을 탐색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이와 같이 선험적 논리에 의하지 않고 실제의 시간과 공간 속에서 자발적으로 일어나는 어떤 방향을 가진 지각이나 사고를 '경향성'이라는 말로 설명한다.
이와 같은 '경향성'은 자유로운 상상까지도 허용하게 된다. 이인현은 화면을 이루는 물질과 그것을 통한 망막적 일루젼을 거쳐 자발적으로 떠오르는 현실의 단편들을 거부하지 않는다. 잇대어 붙인 두 캔버스의 틈 사이로 푸른 물감이 양쪽으로 번져 나온 그림은 양수리를, 그 흔적이 더욱 좁고 길게 펼쳐진 경우에는 미시시피를, 위로부터 스며 나온 물감의 너울 밑에 반점들이 찍혀진 모습은 먹구름과 비를, 물감의 번짐과 모노크롬 화면이 상하로 병치되어 있는 형태는 침대 위에 서서히 몸을 눕히는 누드를 떠올린다는 그 자신의 상상의 가능성뿐 아니라 관람자의 그것까지도 온전히 인정하고 있다.
이제 그의 '그림 바라보기'에는 시적인 상념까지도 끼어들고 있는 것이다. 실제의 시간과 공간에 대한 그의 집착은 판 작업을 통해 역설적으로 예시된다. 그의 판화는 하나하나가 모두 다른 작품이다. 동일성과 반복성을 강조하는 매체 속에도 이질성과 일회성이 내재되어 있다는 점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작품이란 특수한 시간과 공간 속에 구체적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목표를 위해 모노타이프나 제작 후의 리터치와 같이 판화가 가진 고유의 공정을 부정하는 길을 택하지는 않는다. 그는 회화에서도 그랬듯이, 판화라는 매체가 가진 속성을 일단 그대로 받아들인다. 그는 우선 한지에 먹으로 드로잉한 밑그림을 감광시켜 인쇄용 판을 제작한다.
이때 감광의 시간을 달리하여 4~5장의 서로 다른 판을 만들어 낸 후, 이 판들을 겹쳐 찍는 과정에서 유래하는 여러 변이들을 그대로 수용한다. 에디션들을 굳이 균일하게 유지하려고 하지 않으면서 서로 조금씩 다르게 찍혀져 나오는 자연스러운 상태 자체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의 판화들은 제작 과정의 자발성과 판화의 복제성이 융화된, 그가 말하는 일종의 '경향성'을 띠게 되는 것이다.
이인현은 이와 같이 양극적인 사고의 이분법을 극복할 수 있는 단서를 물질과의 직접적인 만남 속에서 발견하고 있으며, 이와 같은 만남이 그에게 있어서는 '자연스러움'을 의미한다. 이러한 점에서 그의 생각은 현상학에서 이야기하는 신체적 사유의 방식이나 존재와 표상의 이원성을 넘어선 동양의 무위자연 사상과도 맞닿아 있다. 세계가 너무 리터럴하니 예술만이라도 그것을 초월하게 하고자 한 모더니스트의 아집도, 세계의 리터럴리티를 동어반복하고자 한 미니멀리스트의 편집증도, 그 어느 것으로도 그의 작업을 설명할 수 없다.
그는 이 모든 것에 초연한 채 자신의 물건들을 세계 속에 던져 놓고 그 되어지는 바를 지켜보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달인과 같다. 삶 속에서 한 번이라도 만날 수 있을지, 또는 전혀 만나지 못할지가 전적으로 우연에 맡겨져 있는(R. Krauss), 그렇기 때문에 너무나 소중한 체험들을 기다리고 있는 한, 그의 작품은 여전히 신비로운 하나의 '예술'로 남아 있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