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의 경우는 면과는 상대적으로 모든 면에 찍혀 있습니다. 타원형으로 엷게 번진 이인현의 크고 작은 점들은 표면에서의 정해진 넓이를 가지지 않고 마치 떠있는 구체나 구멍처럼 보입니다. 점들은 그 자리에서 ─ 면의 가장자리까지 가지 않더라도 ─ 바로 밑으로 배어 들어가는, 혹은 안에서 배어 나온 듯한 시각적 효과를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이런 입체적인 효과에는 옆면의 두께가 한 몫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점의 위치는 평면이 아닌 3차원 좌표에 속하는 듯 보이기까지 합니다(실제로 면의 경계나 모서리에 찍힌 점들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점을 찍을 때는 미리 찍을 곳을 정해놓고 물감을 절대로 면에 ‘칠’하거나 면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고 하는, 캔버스의 표면과는 무관한 순간적인 ‘자리잡기’의 노동만이 있습니다. 물감은 오로지 스스로의 힘으로 번지기만 해야 합니다. 그것은 찍는 다기 보다는 차라리 올려(내려)’놓기’에 가깝습니다. 역설적으로 말하자면 이때는 반대로 작업도중에 절대적으로 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점과 면 어느 경우에도 ‘그림을 그린다’는 생각을 한시라도 가져서는 안 되는 ‘순수한’ 노동만으로 이루어집니다.
‘회화의 지층’은 이인현이 작품발표 초기부터 자신의 작업에 붙여온 총체적 테마입니다. 작가의 정신적 사고의 결과물인 ‘옆에서 바라보기’와 순수한 육체의 노동으로 이루어진 ‘물감의 층’이 결합되어 만들어진, 작품의 제목임과 동시에 작품을 바라보는 실천방법이기도 한 것입니다. 이렇게 제작된 그의 그림은 관람객에게 다양한 상상력을 불러일으킵니다. 그의 작품 자체에는 아무런 결정된 의미의 체계가 없지만, 자유로우면서도 신비한 느낌을 주는 다양한 모습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물감의 층과 그 즉물성을 여과없이 목도하면서도 눈앞에는 아득한 호반의 풍경이 펼쳐집니다.
밤하늘에 떠오르는 푸른 별, 스위스치즈의 매끈한 촉감 등을 떠올리는 관람객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형상의 일루전에 취해 있으면서도 정작 지금 보고 있는 것이 대칭적인 색면의 얼룩, 우연한 번짐, 무심한 노동의 흔적이라는 사실도 부인할 길은 없어 보입니다. 감상에 있어서의 이러한 이분법적 한계는 어쩌면 우리가 극복해야할 명제가 아니라 자연스러운 우리의 모습을 다시 한번 우리 스스로가 반추하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관람객에게 자발적인 참여를 요구한다기 보다는, 관람객이 그것을 실현할 때 작품의 의미가 저절로 드러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의 그림이 물성과 일루젼의 측면을 효과적으로 배분,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관람객으로 하여금 다가서거나 뒤로 물러나게 하는 것입니다. 관람객은 그의 작품 앞에서 이리저리 고개를 기웃거리게 됩니다. 긴 막대 그림을 볼 때는 천천히 걸어가면서 옆 눈으로 보거나, 우습지만 게걸음을 걷게 됩니다. 큰 작품의 경우 한가운데서 전체를 볼 수는 있겠지만 그럴 때 우리는 측면을 볼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10x10x10cm의 작은 큐브 작품을 볼 때 우리는 싫어도 측면을 함께 봐야 합니다. 가려진 부분을 보거나 상상하기 위해서는 다가서서 옆면을 보아야 하고 옆면을 보게 되면 보이지 않는 것도 상상할 수 있습니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그려진 것과 그려지지 않은 것, 층과 층 사이에 숨어 있는 것들을 모두 보기 위해서는 ─ 너무나 당연한 말이지만 ─ 관람객도 작품과 같은 공간에 속하여 일정한 시간의 경과와 함께 작품이 존재하는 방식을 직접 경험해야 합니다. 이인현의 작업이 가지고 있는 가장 흥미로운 측면은 바로 이러한, 작품의 존재와 인식이 서로의 아날로지로 이어져 있다는 점입니다.
이번에 새롭게 발표되는 이인현의 그림은 그동안 보여준 제작방식과는 사뭇 다릅니다. 먼저 생 캔버스를 넓게 펼쳐놓고, 긴 막대에 씌워진 천에 짙은 푸른색을 한껏 머금게 합니다. 그리곤 이 막대를 캔버스 위에서 번지지 않도록 멈추지 않고 스쳐지나가게 하는 것입니다. 밀착되는 것도 그렇다고 완전히 떨어진 것도 아닌 상태에서 일정한 속도로 캔버스 위를 미끄러져 지나가는 것입니다. 이전의 작업방식이 최종적으로 나타날 그림의 모양새를 예상하여 고도로 계산된 사전계획에 따랐다면, 이번 작품에서는 캔버스와 긴 막대의 역할에 대부분 의존하고 있습니다.
이전에는 우연적인 효과까지도 시행착오를 통하여 일종의 ‘모범적인 상태’를 만들어내려고 했지만, 마찰에 의해 만들어진 화면은 이러한 의도나 통제가 끼어들 틈이 별로 없습니다. 달리 말하면 화면을 통제할 수 없도록 통제하는 것입니다. 캔버스의 미묘한 요철이나 변수들이 손의 떨림과 함께 고스란히 전달되어 흔적으로 남겨집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캔버스 천은 나중에 각기 다른 사이즈의 캔버스 틀에 부분적으로 취사선택되어 매어지게 되고 그 캔버스들은 다시 조합되어지기도 합니다. 이때 비로소 우리가 볼 수 있는 화면의 정면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즉 처음에는 의도나 통제로부터 자유로울 수밖에 없도록 의도되어진 것입니다.
처음 스쳐지나간 흔적의 미묘한 떨림들은 프레임에 매어질 때 다시 한번 랜덤하게 휘어지게 됩니다. 캔버스가 조합되는 경우에는 속도감과 얼룩이 변형되거나 은폐되면서 정면視의 완결성을 뒤틀게 됩니다. 이제 두꺼운 옆면은 더 이상 필요가 없게도 생각되어지지만, 마찬가지 이유로 더 이상 옆면을 감추어야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사실 흔적이나 속도감은 옆면으로 꺾일 때 가장 극적으로 변형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캔버스의 두께는 이제 물감이 아니라 공기를 머금고 있는 듯 보입니다.
신작의 경우, 짙은 물감을 사용하고는 있지만 화면 속으로 파고드는 진한 얼룩이나 번짐을 만들어낼 시간적인 여유가 통제되고 정해진 위치를 차지하는 점들도 모두 사라졌습니다. 전체적으로 훨씬 밝아진 화면에는 물감의 양을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림이 만들어지는 행위는 아슬아슬한 간극을 사이에 두고 캔버스를 스치듯 일회적으로 지나갑니다. 화면을 흥건히 적시던 푸른 물감은 이제 캔버스 올의 솜털 위에 간신히 미세한 입자로 붙어 흔들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작품들은 여전히 어떤 종류의 정신성 내지는 깊이를 변함없이 지니고 있으며 또한 여전히 아름답습니다.
이전의 작품들이 멀리서 바라보는 고요한 풍경이나 물의 반영 등의 정적인 미장센을 연상시켰다면, 이번 작품들은 그 위를 비치는 햇살이나 그림자, 혹은 허공을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소리, 그 속도감, 고정되지 않고 항상 흔들리는 프레임 등을 느끼게 합니다. 비스듬히 바라보면 마치 비로드같이 난반사를 일으키는 홀로그라매틱한 화면의 질료적인 매력도 이번 작품들에서 놓칠 수 없는 부분입니다. 이전의 작품들이 화면 속으로 겹겹이 연결된 착각을 유도했다면, 그래서 아직 마르지 않은 물감이 만지면 배어 나올듯한 촉감을 가진다면, 화면의 표피를 따라 스캔되어진 신작의 촉감은 차라리 멀쩡한 캔버스 위에 물감의 얇은 층이 또 다른 표피를 이루고 있는 듯이 보이기까지 합니다. 그것은 손에 묻어날 것 같은 넘쳐남 보다는 손길이 닿기 전의 어떤 설레임과 더 닮아 있습니다.
그가 지금까지 줄곳 견지해온 視 태도에서 볼 때, 이러한 작화방법과 느낌들은 작품의 정면성이나 결정성에 있어서 더욱 현저히 그 중심에서 물러나 있는 것 입니다. 이전의 작품에서 보여 지던 모종의 집중도를 생각하면 이번의 작품들은 비어있는 무대배경이나 열려진 창문 같게도 보입니다.
그만큼 작품 쪽에 주어졌던 무게가 덜어진 것으로 느껴집니다. 종래의 회화나 예술작품들 이 관람객과 작품 사이에 시야를 가로막는 아무방해꾼도 없이 적절한 조명이나 분위기등 의 진공상태와도 같은 여러 까다로운 조건들을 필요로 해왔다면, 이번 그의 작품들은 오히려 자신을 가려줄 어떤 것들을 필요로 하는 듯 합니다. 그것은 작품을 바라보는 관객 자신의 모습일 수도 있고 장소와 더불어 변화하는 빛이나 소음일 수 도 있습니다.
예술작품의 자기과시적인 아우라가 뜻하지 않은 방향으로 여전히 키워져가고 있는 작금의 상황을 본다면 이인현의 이번 신작들은 심플한 작품의 외형과는 달리 더욱 유효한 실천의 한방법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고 보면 이인현은재료나 도구의 선택과 사용에 있어서 언제나 매우 역설적이고 래디 컬한 측면을 보여왔다고 말 할 수 있습니다. 그가 고집하는 oil on canvas라는 표기도 실제로는 전통적인 재료기법과는 매우 딴판입니다. 마찬가지로 블과화업에 대한 환상이나 동경도거의 없는 듯합니다.
이번 작업에서 사용된 긴 막대는 이인현의 또 다른 캔버스 작품의 형태 이기 합니다.
그동안 우리는 삶의 현장에서 아니, 긴 역사에서 스치고 지나간 많은 것들을 잃어버렸습니다. 문화라는 이름으로,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혹은 자신의 이름으로, 명분과 억압에 의해서 만들어진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간과하고 지나간 많은 일들이 있습니다. 이인현은 이런 흔적과 기억들을 그의 작품에서 시사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서로간의 부딪침, 마찰, 일회적인 만남의 덧없음과 어긋남 등에 의해 형성된 많은 사건과 사실들을 자연스럽게 묻어나도록 혹은 묻어버리도록 그의 제작방식에서 말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이인현의 새로운 작품은 관람객들에게 어떤 상상력을 불러일으킬지 자못 기대가 큽니다. 선선한 바람이 상큼하게 볼에 와닿는 9월에 여러분을 이인현의 새로운 작품 발표에 정중히 초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