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동천, 〈의미있는 오브제-정치가를 위한 도구들〉, 2011, 똥바가지 © 윤동천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은 예술과 일상과의 동질화를 모토로 내걸었다. 모든 사람이 예술가인 차원을 통해서 이 모토를 현실로 만들 수 있다고 믿었다(사실 이 모토 자체는 자신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려는 보통사람들의 잠재력에서 미학적 계기를 본 마르크스에게서, 그리고 더 멀리는 실러의 유희충동에서 유래한다). 그런데 정작 그들의 예술은 오히려 더 난해해졌고 대중으로부터 더 멀어지기만 했다. 예술은 시대를 반영하고, 예술가는 시대의 언어로 발언한다고 믿는 것이 반영이론이다. 그렇게 당시 예술가들은 시대를 반영했고, 시대의 언어로 발언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그 시대는 이성을 상실한 시대며 이성에 대한 신뢰가 무너진 시대다. 그래서 예술가들도 덩달아 이성으로는 이해할 수가 없는 언어로 발언했고, 대중들은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다고 불평했다. 그리고 예술가들은 시대가 비이성적이지 않느냐고, 그래서 우리는 다만 그 비이성적인 시대를 반영한 것일 뿐이라고 답변했다. 이런 배경 위에서 대중과 쉽게 소통이 되는 예술은 의심스럽다는 아도르노의 발상이 나올 수가 있었다. 

윤동천은 이 시대를 표면적이고 표피적인, 겉보기가 전부인 시대, 그래서 속이 없는 시대로 진단한다. 바깥으로 드러나 보이는 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태도가 이미지의 정치학이고, 정치가들을 이 이미지의 정치학의 고수들이라고 생각한다(실제로 작가의 작업에서도 뒷받침되는 것이지만, 이 방면에 관한한 언론 역시 정치에 뒤지지 않는다). 그래서 표면적이고 표피적인, 겉보기가 전부인 언어를 이 이미지의 정치학의 고수들의 면전에다 들이댄다(이렇게 작가는 시대를 반영하고 시대의 언어로 발언한다는 반영이론과 아방가르드를 전유하는 것). 그리고 탁류 곧 똥물을 전제로서 끌어온다.

그런데 정작 똥물은 작가가 구사하는 표면적이고 표피적인 언어와는 대비된다. 똥물은 탁하기 때문이고, 물론 똥물이겠지만 어떤 똥물이 어떻게 흐르는지 잘 보이지가 않기 때문이다. 작가는 이처럼 표면적이고 표피적인 언어에다 똥물(탁류에서 오히려 그 의미가 더 뚜렷해질)이라는 그 의미가 잘 보이지가 않는 전제를 결부시켜 아이러니를 끌어들이고 있다(물론 시각정보에 의해 가려진 똥물의 의미가 후각정보에서 재차 벗겨지기는 하겠지만, 여하튼).

그렇게 작가가 진단한 정치적 현실은 똥물이고 똥판이다. 정치가들은 지키지도 못할 약속을 남발하고(공약), 밥 먹듯이 거짓말을 해대고(자라는 코), 그러다가 궁지에 몰리면 오리발을 내민다(내밀다). 철새처럼 이해관계에 따라 당적을 옮겨 다니고(특질), 겉과 속이 다르고(속), 정작 들어야할 소리에는 귀를 틀어막고 있다(경청). 그리고 작가는 이런 정치가들에게 몽둥이와 밥주걱, 쥐덫, 파리채와 끈끈이, 살충제와 세척제, 총명탕, 그리고 똥바가지를 바친다. 오마주치고는 좀 그런 오마주다.

이렇게 뒤틀린 오마주는 김수영과 신채호를 끌어들이면서 바로잡힌다. 당신이 내 얼굴에 침을 뱉기 전에 당신의 얼굴에 침을 뱉는다는 김수영의 시를 끌어들여 정치적 현실에 침을 뱉고, 신채호를 끌어들여 천고 곧 하늘의 북소리에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사람들의 각박한 살림살이를 대비시킨다(신채호는 민중을 하늘로 봤고, 따라서 하늘의 북소리란 민중의 소리를 의미한다). 

슬라보예 지젝은 진정한 발언이 자기배경에 대한 반성을 전제로 한다고 본다. 자기의 안위를 보장해주는 배경에 대해서 말하는 것, 그 배경을 포함해서 말하는 것일 때 발언은 비로소 진정성을 얻고 전복성을 획득한다. 배경 없이 전망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자칫 그 말의 대상(체제)을 공고히 하는 우회로로 작용할 수가 있고, 그 대상과 마찬가지의 또 다른 이데올로기로 변질될 수 있음을 경고한다. 그리고 미셀 푸코는 권력 곧 정치의 편재성에 대해서 말한다. 윤동천의 근작은 지젝과 푸코를 곱씹게 만든다.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