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 글을 쓰는 것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이 글을 쓰기 위해서는 예술에 대해서 뿐 아니라, 인간의 질서, 즉 인간이 어떻게 존재하고 배치되어 있는지, 인간의 정치성과 윤리적 원칙들이 어떻게 서술되고 다루어져야 하는 지에 대해 깊이 생각해봐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행을 떠났던 것이다.
나는 모든 것을 뒤로 한 채 유럽으로 여행을 떠났다. 이 글을 써야하는 바로 그 시기에 여행을 떠남으로써 나는 이 글에 대한 모든 것을 뒤에 남겨 두었다. 실은 이렇게 무책임한 일을 한 자체가 일종의 무의식의 발로가 아닐까 한다. 즉 나는 이 모든 것이 이 글을 쓰는 일이 부담 되었거나 혹은 귀찮았거나 혹은 나 자신이 이제 상당히 무책임한 인간이 되어가고 있는 것에 기인한 사태가 아닐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작가 김홍석이 스스로 질문하고 대답하고 있는 이 모든 문제가 지향하는 어떤 이상적 상태에 나도 모르게 이미 도달하여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스스로에게 부과하는 모든 비-일관적 의무감, 자신이 원하는 것을 거슬러 가며 기존의 관행과 제도를 유지시켜야 한다는 명령에 대한 비-주체적 복종, 자신이 스스로의 삶에 대해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 모른다는 모순된 질곡에 대해 아무런 저항조차 하지 못하는 상황, 이런 것들로부터 나는 아주 깨끗하게 떠나 있었던 것이다.
여행이 끝나갈 즈음, 큐레이터로부터 메일이 왔다. 이미 원고 마감이 지났고 자신은 이제 커다란 위기에 봉착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그제서야 내가 어떤 글을 써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김홍석의 작업이 지향하는 곳이라고 나 스스로 예상하는 어떤 지점에 내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스스로 그곳으로부터 현실로 복귀해야 했다. 인간의 질서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한다. 즉 그것은 ‘어떤 것을 지향한다.’ 혹은 ‘원한다.’ 혹은 ‘욕망한다.’ 라고 표상하는 일과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그것’ 사이에 놓여있는 절대로 건널 수 없는 심연 같은 것이다.
물론 이 심연을 가리키는 방법은 있다. 그것은 ‘웃어 버리거나’ 혹은 실제로 ‘몰두하고 있거나’ 혹은 침묵하는 것이다. 그것에 대하여 말하는 순간 그것은 바로 어떤 ‘비평적’ 대상이 되어버려 그것이 원래 지니고 있어야 할 ‘뿜어져 나오는 광휘’를 상실해 버리기 때문이다.
인간은 이 세계를 잠시 여행하는 여행자일 뿐이다. 그가 발견하는 것은 항구적 원칙이나 불변의 조건이 아니라 끝내 그 의미를 읽어낼 수 없는 풍경들이다. 김홍석의 작품들은 이 풍경들에 대한 불평, 독백, 방언 같은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다만 그의 질문들이 다소 수다스럽지만 흥미로운 것은 그렇게 혼자서 질문에 질문을 거듭하는 그 역시 그 풍경의 일부가 되어간다는 점 때문이다.
김홍석의 작품은 이 세계에 던져져 있는 것들 모두를 같은 지평 위에 놓고 말을 건다는 점에서 이우환의 ‘물(物)’에 대한 태도와 같은 맥락에 있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다른 점은 이우환이 ‘물’과 상당한 거리를 취하면서 그것들을 모든 맥락들로부터 독립적인 어떤 것으로 드러내려고 하는 것과 반대로, 김홍석은 대상이 놓여있는 상황들을 모두 점검하고 끄집어내어 그것을 어떤 ‘기능’이나 ‘역할’의 맥락으로 되돌려 놓는다는 점이다.
나는 ‘미완성’이 무슨 의미일까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일반적으로 그것은 작품이 만들어지다가 중간에 멈추어 어딘가 불완전하고 만족스럽지 못한 상태에 이르렀다는 의미겠지만, 김홍석의 작품에 있어 미완성은 일종의 ‘신념’같은 것이거나, 혹은 그러한 신념에 대한 의심 일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예술가가 작품을 만든다는 것이 어떤 신념의 발로라고 믿는 신화는 종종 사회적 인간성이 나아가야만 방향이라거나 작품에 본질적 가치를 보장하는 태도거나 아이들이 삶의 모델로 삼아야 할 위대한 인간의 모습 같은 의미론적 조건으로 이어진다.
실은 정반대일수도 있다. 예술가들은 그리 환영받지 못하는 삶을 살며 성공을 한 경우에도 질시나 비판의 대상이 되곤 한다. 혹은 예술가들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사회가 추천하는 모델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이 되기도 한다. 미완성은 ‘오류’이거나 ‘자책’이거나 ‘후회’에 선행하는 형식이다. 스스로 궁지에 몰리는 것, 소수자가 되는 것, 아무에게도 이해되지 않는 것, 이런 것들이 미완성이 파생시키는 서사에 속한다.
김홍석은 〈인간 질서〉에 대해 “인간이 만들어 낸 ‘완전함’, ‘완성’의 인식이 임시적, 사회적 합에 그칠 뿐 특별히 존중받아야 할 사유적, 실천적 가치가 부족하다는 점을 부각시키려 노력한 제스처”라고 언급한다. 그는 자신의 작품들이 지닌 위상에 대해 “보편적 질서의 기준으로 보면 이상하고 수용이 불편한 것”이라고 기술한다. 그의 작품들을 보면 이미 용도가 끝난 물건들이 담겨있는 비닐 백을 모은다거나 버려진 스티로폼을 이용해 조각을 만든다거나 벽에 칠을 하다가 만다던가 하는 퍼포먼스의 결과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 작품들은 실제로 매우 체계적인 방법과 절차를 필요로 한다. 예컨대, 사람들에게 그들이 사용하다 만 물건들을 수집하여 비닐백에 담아달라고 하기 위해서는 그들과 어느 정도 대화를 통해 왜 이런 일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 설명하지 않으면 안된다. 최소한 그가 그런 일을 부탁할만한 입장에 있어야 하는 것이다. 또 스티로폼을 이용해 여러 개의 조각을 하기 위해서도 스스로 이런 일을 하기 위한 작업공간과 시간을 내어 다른 작가들과 똑같이 노동을 해야 한다.
벽에 칠을 하는 일 역시 다른 사람의 벽일 경우 미리 양해를 구하거나 제대로 된 전시의 틀 안에서 이런 일을 저지르지 않으면 안된다. 여하튼 이 모든 일은 일반적인 ‘사회적’ 혹은 ‘예술적’ 제도 안에서 밖에 성립되지 않을뿐더러 매우 잘 알려진 수사와 형태의 윤곽들을 떠올리기조차 한다. 실은 이 정도의 오류나 불완전함은 지난 몇 십 년 간 동시대미술의 맥락 안에서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퍼포먼스의 영역에 속한다. 그러면 김홍석은 왜 이러한 작업들을 반복해서 보여주는 것일까?
김홍석은 작업 초기부터 일종의 ‘복제’ 혹은 ‘표절’을 다루어왔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이웃집 부인’에서 보여준 다른 작가들의 도록을 그대로 촬영하여 확대한 연작이다. 사실 이러한 작업은 매우 경악할만한 것으로, 셰리 레빈 이후 가장 도발적이고 급진적인 방법을 보여주었다. 프란시스 앨리스나 산티아고 시에라와 같은 잘 알려진 작가들의 작업을 명백하게 인용한 작업들이 그 뒤를 이었다.
김홍석은 동시대미술의 다양한 참조들을 인용하면서 윤리적 선을 아슬아슬하게 넘나드는 작업을 보여주었는데, 이번 ‘인간질서’에서도 마틴 크리드, 게리 웹이나 우고 론디노네와 같은 작가들의 작품을 강하게 떠올리는 작품들을 보여주고 있다. 무엇보다도 그의 작품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핵심적인 요소는 스스로 자신의 작품에 대해 부여하는 매우 구체적인 ‘정황설명’ 혹은 ‘부연’이다.
이 부연은 매우 특징적인 공통점을 지니고 있는데, 그것은 어떤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담론의 ‘말투’이자 미술 공동체 내에서 유통되는 예술-비평적인 ‘독백’ 같은 것이다. 그가 매번 이러한 류의 텍스트를 자신의 작업 옆의 벽에 직접 손으로 써넣거나 최소한 핸드아웃, 리플렛 등을 통해 작품의 일부로서 제시한다는 점을 간과할 수는 없다. 즉 그의 작업은 불완전함, 표절 그리고 비평적 담론을 항상 하나의 패키지로 제시한다.
흥미로운 것은 다소 ‘위악적’이고 메타-비평적인 배치를 추구하는 그의 작업방식이 만들어내는 독특한 아이러니함이다. 그는 자신의 작업을 대부분 레디메이드 혹은 ‘써드-파티’ 제작방식으로 만든다. 때로는 재료가 무엇인지를 헷갈리게 할 만큼 스티로폼, 브론즈, 종이, 합성수지 등이 정교하게 재현적으로 상호-전위되기도 한다.
무엇보다도 그의 많은 언술들이 상당부분 진의를 구분하기 어려운 장치적 요소일수도 있다는, 학습적으로 얻게 된 ‘의심’이 작업에 추가적인 모호성을 부여하는 부분도 중요하다. 그가 2008년에 국제갤러리에서 했던 전시 《밖으로 들어가기》에서 오프닝 퍼포먼스로 보여준 소위 ‘창녀 찾기’가 거듭되는 대상의 진위여부 때문에 대형 신문사 한 곳에서 계속되는 오보를 내게 했던 일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의 짐짓 그럴 듯해 보이는 작품주제에 대한 선언들이 과연 진의일 것인지 묻는 것은 ‘순진한’ 접근일 것이다.
나는 김홍석의 작업이 본질적으로 세계와 예술이 지니고 있는 짓궂은 ‘불확실성’에 대한 매우 일관적인 대답이라고 느낀다. 세계는 선험적으로 우리를 절대적 불확실성에 위치시킨다. 그것에 대해 직접 언급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세계와 주체의 관계에는 근본적인 모순이 자리 잡고 있다. 예술가가 그것에 대해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은 ‘시’를 다루는 것이다.
즉 객관적 재료들의 비-정형적인 배치를 시도하는 것뿐이다. 비평적 담론, 예술적 참조, 전시형식, 예술에 대한 기성의 경험, 유통되는 명사들, 예술적인 태도, 가능한 모든 해석의 방식들, 이 모두가 단지 새로운 배치를 위한 재료들일 뿐이다. 그런 점에서 김홍석은 매우 전략적이고 치밀한 작가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이 모든 전제가 가정에 불과할 수도 있다. 그래도 이렇게 생각하는 편이 훨씬 흥미롭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김홍석의 작업에 대해 써야할 글을 놔둔 채 어딘가로 훌쩍 떠났다가 이제 돌아왔다. 이것이 김홍석의 작업을 다루는 가장 적절한 방식이라고 한들 누가 뭐라고 할 것인가? 그의 작업에 말려들지 않고 평정심을 유지한 채 짐짓 무시하는 태도를 취하는 것. 이것이 가장 정확한 비평적 대응이다, 라고 말해보는 것이다. 이것이 변명인지 아니면 예리한 분석인지는 읽는 사람이 판단하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