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ppropriation & Customising
존재하는 혹은 이미 생산된 사물들을 사용하여 다른 형태로 전환하거나 다른 콘텍스트로 옮겨 놓는 '차용'의 컨셉은 ‘다름’을 보여주는 방식에 있어서, 또 작품의 ‘파장’을 실험하는 데 있어서 번역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김홍석이 말하는 ‘동화된 다름’은 그의 작업에서 대부분 번역과 차용에 의해 가시화된다. 김홍석은 어느 날 길거리를 지나다가 우연히 한 건물의 쇼윈도우에 진열된 로버트 인디애너(Robert Indiana 1928-)의 작품을 보게 되었다. 그는 로버트 인디애너의 작품이 서울의 한 건물의 쇼윈도라는 엉뚱한 콘텍스트에 너무도 자연스럽게 자리 잡고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
작가는 쇼윈도에서 본 〈LOVE〉 (1970)를 조금 확대시키고 찌그러트려서 미술관 컨텍스트로 옮겨 놓는다.(〈LOVE〉 (2004)) 물론, 로버트 인디애너의 조각을 찌그러트린다는 것은 미술에 대한 반달리즘은 아니다. 여기서 반달리즘을 말한다면 오히려 작품이 쇼윈도의 장식품으로 전락(?)한 그 상황일 것이다. 김홍석은 바로 이러한 상황을 차용한 것이다. 물론 인디애너의 작품과 함께, 하지만 이 상황은 반드시 로버트 인디애너의 조각에만 국한 된 것은 아니다.
작품의 본래 의미나 미술사적 가치와는 무관하게 쇼윈도의 장식품으로 소비되고 있는 상황, 즉, 이미 차용된 것을 또 차용하며 김홍석은 한 작품의 운명과 소비방식에 대한 위트 있는 일격을 가한다. 이렇듯 차용은 동일한 작품이 또 다른 의미들을 생성할 수 있는 무한한 잠재력을 드러낸다.
오늘날 예술에서 차용은 작품을 생산하는 방식이다. 작가들은 미술사에 등장하는 모든 형태, 이미지, 행위의 레파토리 속을 파고들며, 그들이 원하는 형태들을 자유자재로 사용한다. 어디 미술사뿐인가 모든 예술 장르, 우리를 둘러싼 모든 환경, 오브제, 상황, 즉 ‘현실’ 그 자체가 오늘날 작가들에겐 더할 나위 없는 풍요로운 작업 레파토리가 되는 것이다. 물론 차용미술은 레파토리의 다양성과 선택의 임의성만을 주창하는 것은 아니다. 차용은 작품의 생산방식이기 때문에, 무엇을 차용하는가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전환되는가가 그 작품의 결정적 역할을 한다.
프랑크 스텔라의 작품을 형광등으로 다시 만든 베르트랑 라비에(Bertran Lavier 1949-)의 〈IFAFA IV〉 (2004), 아르너 야콥센(Arne Jacobsen 1902–1971)의 의자를 해체해서 칼더(Alexander Calder 1898–1976)의 모빌로 전환한 마틴 보이스(Martin Boyce 1969-)의 〈Suspended Fall〉 (2005), 찌그러진 자동차를 화장품 색조로 도장한 실비 플러리(Sylvie Fleury 1961~)의 자동차 〈Skin Crime 3 (Givenchy 318)〉 (1997) 등... 이러한 차용의 흥미로운 방식 가운데 하나로 바로 ‘커스터마이징(customizing)’을 꼽을 수 있는데, 커스터마이징은 본래 모터사이클 혹은 자동차 매니어들에게 익숙한 용어이며 자동차 본체 혹은 부속품을 변조하거나 독특하게 장식하여 ‘자기만의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이 커스터마이징 프로세스는 오늘날 작가들의 차용방식과 그것의 미묘한 다름을 설명하는데 아주 유용하다. 김홍석의 찌그러진 〈LOVE〉 (2004)나 실비 플러리의 찌그러진 자동차(〈Skin Crime 3 (Givenchy 318)〉) 모두 미술사의 거장인 로버트 인디애너와 세자르(Cesar 1921-1998)의 작품을 차용하고 그 형태를 왜곡했으나, 작품의 운명과 소비방식을 비평하는 김홍석의 찌그러진 〈LOVE〉는 미술사를 화장품 쇼핑하듯이 소비하며 생산된 실비 플러리의 핑크 빛 찌그러진 자동차의 문맥과는 아주 명백하게 다른 지점을 향하고 있다. 현대미술에서는 바로 비슷해 보이나 다른 것, 그것의 의미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해진다.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는 모든 레파토리는 누구에게나 선택과 사용이 가능하다. 오늘날 ‘새로운 것은 요소가 아니라 배치’다. 우리가 차용미술에서 주목하는 것은 (동일한) 요소가 어떻게, 어디에 배치되었는가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경험할 것 인가다. 길거리에 굴러다니는 비닐 쓰레기봉지들, 버려진 종이상자들, 방치된 나무토막들, 노숙인들... 모든 도시에서 발견될 수 있는 그리 낯설지 않은 상황들이다. 폐기되고 정리되어야 할 길거리의 너저분한 풍경이 김홍석에게는 ‘아름다운 일회성 구조물’로 다가온다.
제프 쿤스(Jeff Koons 1955-)가 수퍼마켓의 진열대에 열광했다면, 김홍석은 길거리의 허접하고 후미진 구석구석을 샅샅이 뒤진다. 김홍석은 이렇듯 방치된 비닐쓰레기봉지를 모아 브론즈로 캐스팅한다. 모든 콜렉터가 열광하는 제프 쿤스의 강아지와 토끼 형상으로.(〈Canine Construction〉 (2009), 〈Rabbit Construction〉 (2009)). 내노라하는 유명 콜렉터 거실에 모셔 놓은 제프 쿤스의 글래머러스한 토끼 조각과 서울의 한 길거리에 놓여 진 김홍석의 비닐쓰레기봉지로 캐스팅된 제프 쿤스의 조각을 상상해 본다. 쓰레기 비닐봉지의 유쾌한 일탈이다. 길거리의 쓰레기 봉지와 놀이 공원의 싸구려 플라스틱 토끼 인형은 ‘차용’에 의해 이렇듯 각기 다른 콘텍스트에서 서로 조우하며 동시에 다른 이야기를 생산해 낼 수 있다.
Original Copy
김홍석은 2006년 한 개인전에서 ‘READ’ 시리즈를 발표했다. 무엇의 읽기인가? 그것은 바로 작가 자신과 동세대 작가들, 현대미술의 흐름을 주도하는 유명 작가들의 도록을 그대로 카피한 것이다. 사진으로 찍기도 하고 잘 그리는 사람을 시켜 그대로 베끼기도 한다. 카피란 아주 오래된 학습 방식이다. 우리는 늘 외우고 베끼고 반복하면서 지식을 습득하는데 익숙해 있다. 하지만 이렇게 친숙한 일상적 학습 방식이 창작의 영역에서는 불편한 방식이 되고 심지어는 범죄가 되기도 한다.
카틀란(Maurizio Cattlan 1960-)의 조각을 베낀 김홍석의 회화는 엄밀히 따지자면 오리지널과 카피의 문제는 아니다. 김홍석은 카틀란의 작품 이미지를 카피한 것이기 때문이다. 김홍석은 제목에서 카피의 출처를 매우 친절하게 밝히는 방식을 통해서, 합법적(?)으로 뤽 튀이망스(Luc Tuymans 1958-)의 회화와 카틀란의 조각 이미지를 자신의 작품으로 재탄생시킨다.(〈READ-Luc Tuymans, PHAIDON, p226〉 (2005), 〈READ-Maurizio Cattelan, Electa, Marian Goodman Gallery, 2006, p55〉 (2008))
이것은 어쩌면 카피의 혐의를 살짝 빗겨가며 작품을 생산하기 위한 얄팍한 수단이 아닐까? 아이디어가 없어 그냥 카탈로그 이미지를 찍은 것은 아닐까? 아이러니하게도 김홍석의 ‘READ’ 시리즈는 바로 이러한 편협한 혐의(?)와 현대미술에 무지한 사람들에게 훨씬 더 유용하다. 왜냐하면 이 작업은 바로 ‘카피의 혐의’에 대한 문제를 호출하고 있기 때문이며, 이 혐의는 베꼈는가 아닌가라는 단순무식한 잣대를 허무는 것은 물론이고, 이것보다 한 층 더 복합적이고 첨예한 문제들을 노출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김홍석의 ‘READ’ 시리즈의 쟁점은 카피는 오리지널을 위협하는가, 그리고 이미지의 카피와 그 저작권의 관계는 무엇인가 그리고 카피는 오늘날 피할 수 없는 소통 방식인가를 논하는 데 있다.
‘READ’는 오리지널을 찍은 사진가의 ‘저작권’과 그것의 출판에 관여한 모든 ‘저작권자’들을 연루시킨다. 그는 ‘READ’를 통해서 카피의 카피, 즉 원전의 비공식적 전달 경로를 드러내며, 카피라이트와 카피레프트의 위험하지만 각별한 관계 그리고 그것의 파동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다. 주로 지적 소유권의 폐기를 위해 투쟁하는 카피레프트(copyleft) 운동은 인터넷 문화가 선호하는 도구이자 모델이지만, 후기 모던의 진통을 겪고 있는 오늘날 이러한 움직임은 모든 분야에 적용될 수 있으며, 그 당위성을 향해 전진하고 있다.
“광명의 시기 이전에 모방(le plagiat)은 생각들을 전파하는 데 사용되었다. 한 영국 시인이 페트라르카(Petrarch 1304-1374)의 시를 가져다 번역하고 자기 것으로 만든 것이 가능했었다. 이러한 행위는 그 시대에 매우 당연한 것이었고 모방이라는 예술의 고전적 미학형태와 일치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러한 활동의 진정한 가치는 이러한 고전미학을 강화하기보다는 모방 없이는 작품의 전파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카피레프트 이슈는 모방이라는 오래된 학습방식의 현대적 버전이며, 이것이 오늘날 콘텍스트에서 어떻게 수용될 수 있으며, 그것의 긍정적/부정적 파장은 무엇인가를 질문하는 것이다. 엘레인 스터트번트(Elaine Sturtevant 1930-)는 자기가 좋아하는 작가들, 자신에게 영향을 준 작가들의 작품을 세밀히 관찰하고 그것을 그대로 그린다. 그에게 있어서 카피는 학습과 습득의 방식이기도 하며 자신만의 방식으로 20세기 미술사를 소비하며 전파하는데 있다. 50년이 넘게 지속적으로 20세기 미술사의 거장들을 그대로 카피해 온 엘레인 스터트번트의 작품이 2000년대에 와서 세계 주요 미술관의 주목하고 재조명 받는 이유는 무엇인가?
현대미술사의 작가들의 도록을 섭렵하며 관심 있는 작가들의 작품 이미지를 카피하는 김홍석의 ‘READ’ 시리즈는 카피 미술의 노익장 엘레인 스터트번트를 연장하는 듯하지만, 김홍석의 카피는 원본의 ‘정보교란’이란 또 다른 지점을 도출시킨다. 김홍석의 ‘READ’는 프란시스 알리스(Francis Alÿs1959- )의 원작이 퍼포먼스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에게 이 작품이 원래 회화일 것이라고 믿게 한다. 김홍석의 ‘READ’ 시리즈에서 ‘카피’는 오늘날 원전과 그 맥락을 떠나 떠도는 수많은 이미지들의 왜곡된 정보들, 그것의 기상천외한 모험의 설득력 있는 반영이다. 뿐만 아니라 김홍석의 ‘카피’는 재현의 전통을 송두리째 소환하며, 이미지와 실제, 보는 것과 아는 것, 그 차이, 그리고 그것의 생산과 소비 그 자체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고 있다.
'Copy as more'
보르헤스(Jorge Luis Borges 1899-1986)는 〈피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 Pierre Menard, Author of the Quixote〉에서 세르반테스(Miguel de Cervantes 1547-1616)의 소설과 구두점까지 동일한 피에르 메나르(Pierre Menard 1766-1844)의 텍스트, 하지만 두 저자를 나눠놓는 시대적 맥락의 차이(17세기의 스페인과 20세기의 프랑스)가 이렇듯 완벽하게 동일한 텍스트에 전혀 다른 의미를 부여한다고 말한다. 세르반테스의 소설에 필적하고자 했던 창작열망에서 나온 피에르 메나르의 종착지는 결국 그것을 카피하는 데 그치고 말았으나 오늘날 이 메나르의 카피는 시대적 맥락을 반영하고 그 차이에서 오는 묘미와 해석의 풍요로움을 제안하게 되었다.
〈READ-Richard Prince, Untitled(Cowboy)〉 (2005)는 리차드 프린스(Richartd Prince 1949-)의 ‘무제(카우보이)’ (1989) 시리즈 가운데 한 사진을 그대로 다시 찍은 김홍석의 사진작품이다. 말보로 광고 이미지를 그대로 다시 찍은(re-photography) 리차드 프린스의 ‘Untitled(Cowboy)’는 80년 대 초 저작권 소송에 휘말리며 문제의 화제작으로 유명했던 작품이다. 그리고 리차드 프린스 덕분에 우리는 이제 예술작품에서 저작권 소송과 카피의 혐의로부터 어느 정도는 자유로워졌다. 이것을 모를리 없는 김홍석이 바로 그 문제의 다시 찍기 행위를 반복하며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바로 카피가 저자를, 즉 오리지널리티를 위협하는가에 있다.
우리는 카피가 원본을 위협한다고 생각해 왔다. 하지만 “질서를 반영하는 (자본주의)세계에서 예술적 창작활동은 그것을 묘사하는 것에 있을 뿐이다. 작품은 주어진 텍스트에 끊임없이 주석을 다는 것과 같으며, 거기서 영감을 얻은 모든 카피는 결국에 오리리지널의 질서를 초월하며 다원적 반영처럼 정당화 된다. 달리 말하자면, 독창성의 문제는 제기되지 않으며, 작품은 그것의 카피에 의해 위협당하지 않는다” 장 보드리아르(Jean Baudriard 1929-2007)의 이러한 입장은 카피의 정당화를 허용하는 것처럼 보이나, 이것은 우리에게 카피 할 수 없는 것, 즉 시그니처(signature)의 오리지널리티(originality)를 역설적으로 부각시킨다.
작품과 시그니처, 이 불가분의 관계는 오늘날 색다른 모험을 하게 된다. 뒤샹(Marcel Duchamp 1887-1968)의 ‘레디메이드(ready made)’를 카피한다고 해서 뒤샹이 되는 것은 아니다. 수많은 ‘레디메이드’의 카피와 변조 속에서 뒤샹의 독창성이 여전히 아니 오히려 20세기 초보다 더욱 더 독보적으로 존재 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카피행위가 ‘카피할 수 없는 것’을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다니엘 뷰렌(Daniel Buren 1938- )의 트레이드마크인 수직 띠를 카피할 수는 있지만, 그의 시그니처, 즉 인시튀(in situ) 목록에 없는 것은 그의 작품이 아니다.
이렇듯 오늘날 시그니처의 의미와 영역은 예전의 작품(물질)의 위상을 대신하며 오리지널리티의 주체를 더욱 더 부각시킨다. 카피의 정당화는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가능하다. 카피가 정당화된다고 해서 독창성 그 자체가 소멸되는 것은 아니다. 단 독창성의 개념이 바뀌었을 뿐이다. 김홍석의 시리즈는 보르헤스가 언급한 피에르 메나르의 ‘카피’의 풍요로움을 환기시키고, 카피레프트를 통한 전파와 유통에 관한 논쟁을 끌어 들이기도 하며, 나아가서는 오늘날 작품의 오리지널리티란 무엇인가라는 문제를 호출하기 때문에 흥미로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