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석, 〈쿵!〉, 1999, 치약 57개, 합판, 종이, 230 x 140 cm © 김홍석

“이질적 담론들과 부딪히며, 서로 다른 문화의 주체들의 다원적 토론들과 전지구적 차원에서 협상하는 21세기의 모더니티는 다언어적(polyglot)일 수밖에 없다. 서구식민주의라는 추상적 언어를 구가하며 ‘진보주의(progressism)’로 대변되는 20세기 모더니티 내러티브에 대척하는 알터모던은 모더니티를 번역하는 ‘모더니티번역가’처럼 나타난다.” 오늘날 번역가로서 작가에게 번역, 차용, 카피는 창작의 중요한 도구일 수밖에 없다.

김홍석의 작품세계는 다름과 다양성의 사이에서 그것을 번역하는 데 있으며, 그는 차이나 다원성을 부각하기 위한 그 어떤 에그조티즘도 거부한다. 그가 발견하고자 하는 것은 닮아 가면서 다른 모습, 즉 ‘동화된 다름’이며 그것의 불분명한 정체성이 무엇인가에 있다.

이 에세이는 이 세계의 다양성과 차이, 진실과 거짓을 독특한 방식으로 번안하는 작가 김홍석의 작업세계에 관한 것이다. 그의 창작세계를 가동시키는 주요 콘셉트인 번역과 차용, 오리지널과 카피, 가짜와 가짜의 풍요로운 변주곡을 보여주며, 이것이 어떠한 의미를 창출하는가를 파악하고자 하는 데 있다. 


김홍석, 〈G5〉, 2004 © 김홍석

Translate differences!

작가 김홍석의 머릿속에 떠도는 수많은 익살스럽고 황당한 생각들이 빚어 낸 〈쿵 Thump!〉 (1999), 〈2297년의 마술검 Magic Sword of MMCCXCVII〉 (1999), 〈흔들구 Shake sphere〉 (2000)이야기는 초현실과 판타지 소설 중간쯤에 위치한 의도적으로 애매모호하며 적당히 허무맹랑한 이야기다. 불분명한 시공간, 하이퍼텍스트적 구성, 비논리적 전개가 스토리 라인을 혼동을 증폭시킨다. 무의미하고 유희적이며 비상식적 이야기에서 어떠한 구체적 줄거리나 메시지를 찾는다면 애당초 승산 없는 게임이 되고 만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이야기들이 의도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김홍석의 작업에서 텍스트는 그의 작품을 활성화하고 완성시킬 수 있는 ‘장치’와도 같다. 이러한 ‘장치’로서의 텍스트는 대부분 번역과 함께 가동된다. 그의 초기 텍스트인 〈쿵 Thump!〉 (1999)은 한국어, 영어, 일본어, 프랑스어 그리고 다시 한국어로 번역되었다. 물론 이 이야기는 원래 한국어로 쓰여 졌기 때문에 전시되는 지역에서의 소통을 위해 번역이 불가피했겠으나, 작가는 의도적으로 매 번 원본의 번역이 아닌 번역본의 연속적 번역을 시도했다. 그리고 이러한 '연속번역(serial translation)'을 통해서 원전과는 아주 다른 변형을 경험하게 된다.

오늘날 현대미술을 파악한다는 것은 작품의 '파장' 혹은 '진동'의 의미를 살펴보는 것이라 해도 과장은 아닐 것이다. 그래서 작가들은 지진을 발생시키는 데 주력하기 보다는 오히려 그 여파를 생산해 내기 위한 다양한 '장치들'을 고안한다. 조나단 몽크(Jonathan Monk 1969-)가 그의 작업 에서 로버트 바리(Robert Barry 1936-)의 에 대한 다양한 묘사를 번역한 기록들을 보여 주었을 때, 조나단 몽크는 이미지나 언어로 가시화 될 수 없는 '예술혼'의 번역을 시도한 것이며 그 파장을 실험한 것이다.

김홍석의 〈쿵 Thump!〉 역시 주인공 스티브의 일화, 즉 사랑, 정액, 치약, 미끄러짐의 비선형적 사건의 파장은 이야기 내용의 전달에서 보다는 우리가 번역될 수 없다고 생각했던 영역에서 드러나게 된다. 김홍석의 이야기는 연속번역 과장에서 제목이 바뀌고, 이야기가 왜곡되며 저자는 모호해 진다. 원본을 전달하기 위해 번역을 하지만 이것은 수많은 오차와 함께 또 다른 변형을 생산해 내는 것이다. 김홍석의 ‘연속번역’은 바로 오차와 변형에 관한 것이며, 이러한 반복가능성(reiterability)이 생성하는 차이는 소통의 장애요소로 작동하기 보다는 또 다른 의미를 창조하는 '창작'이 되는 것이다.

번역은 언제나 변질을 전제로 이러한 반복가능성에 스스로 노출되어 있다. 벤야민(Walter Bejamin 1892-1940)에 따르면, 성서는 각기 다른 나라의 말로 번역되고 반복되는 과정에서 차이가 발생하고 성서의 풍요로움은 바로 이 차이를 통해서 우리에게 전달된다는 것이다. 김홍석의 연속번역 작업은 원전으로부터 잃어버린 것 혹은 진실을 찾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원전과의 ‘다름’을 즐긴다. 영국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William Blake 1757-1827)의 〈인간 추상 The Human Absrtact〉 (2004)이라는 시 역시 먼저 한국어로 번역되고 그 이후 번역된 한국어에서 순차적으로 다른 나라의 언어로 번역되는 과정을 거친 작업이다.

이 연속번역의 마지막 단계는 원작 언어인 영어로 마감되었고, 최종본은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를 닮기는 했으나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라고 할 수는 없는 애매모호한 시 한 편을 탄생시켰다. '다른 것 같지만 비슷하고, 비슷한 것 같지만 다른 것'을 생산하는 김홍석의 연속번역에서 우리는 이것이 생성하는 의미의 미세한 진동을 경험하게 된다. 원전이 희석되고 미묘한 뉘앙스가 자리 잡으면서 형성되는 모호한 정체성의 탄생은 바로 김홍석이 자신의 작업의 중요한 지점 가운데 하나로 꼽는 ‘동화된 다름’이다. 연속번역은 다름을 인식하는데 있어서, 그 차이를 그저 단순히 기록하는 것 보다 훨씬 더 풍요로운 방식으로 그것의 다름을 인식할 수 있게 만든다.

김홍석의 〈G5〉 (2004)는 실제 G8국가들 가운데서 미국, 영국, 프랑스, 러시아, 일본의 국가를 한국어로 번역해서 5명의 한국인(가수, 성악가, 일반인)에게 노래를 부르게 한 영상작업이다. 선택된 5명의 한국인들은 5개국의 국가를 마치 그들의 애창곡을 한 곡조 뽑듯이 멋들어지게 부른다. 국가는 노래이전에 한 나라의 역사와 정체성을 상징하는 복합적인 기호다.

자국어로 번역된 다른 나라 국가를 부른다는 것은 이러한 기호가 그 문맥에서 일탈하는 것이다. 이 일탈은 야스퍼 존스(Jasper Johns 1930-)의 〈성조기 Flag〉 (1954-1955)와는 사뭇 다른 방식으로 국가의 신성함, 권위, 역사 그리고 애국적 감정을 변조한다. 자국어로 번역된 다른 나라의 국가를 부르는 사람의 국적, 그것을 듣는 사람의 국적에 따라 또 이것을 어느 나라에서 부르는 가에 따라 번역된 ‘국가 부르기’의 진동은 달라진다.

김홍석의 는 특정 국가에 입력된 상징성을 희석시키는 동시에 글로벌 시대의 ‘국가’, ‘국적’ ‘정체성’이란 과연 무엇이며, 이것의 갈등, 혼동, 다름을 어떻게 재정의할 수 있을까에 관한 질문이다. 번역이란 기호들이 시공간을 가로지르고, 이질적 영역으로 이동하며, 또 특정한, 규정된, 혹은 식별 가능한 영역에 속한 문화에 저항하는 것이다. 번역은 움직임이고 이동이며 일종의 회로와도 같다. 이러한 번역은 마치 위상학에서처럼 하나의 코드 시스템에서 두 번째 코드 시스템으로 형태를 이동하는 것과 같으며, 여기에서 변형은 동등하지만 언제나 다르다.


김홍석, 〈LOVE〉, 2004, 철에 페인트, 80 x 145 x 160 cm © 김홍석

Appropriation & Customising

존재하는 혹은 이미 생산된 사물들을 사용하여 다른 형태로 전환하거나 다른 콘텍스트로 옮겨 놓는 '차용'의 컨셉은 ‘다름’을 보여주는 방식에 있어서, 또 작품의 ‘파장’을 실험하는 데 있어서 번역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김홍석이 말하는 ‘동화된 다름’은 그의 작업에서 대부분 번역과 차용에 의해 가시화된다. 김홍석은 어느 날 길거리를 지나다가 우연히 한 건물의 쇼윈도우에 진열된 로버트 인디애너(Robert Indiana 1928-)의 작품을 보게 되었다. 그는 로버트 인디애너의 작품이 서울의 한 건물의 쇼윈도라는 엉뚱한 콘텍스트에 너무도 자연스럽게 자리 잡고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

작가는 쇼윈도에서 본 〈LOVE〉 (1970)를 조금 확대시키고 찌그러트려서 미술관 컨텍스트로 옮겨 놓는다.(〈LOVE〉 (2004)) 물론, 로버트 인디애너의 조각을 찌그러트린다는 것은 미술에 대한 반달리즘은 아니다. 여기서 반달리즘을 말한다면 오히려 작품이 쇼윈도의 장식품으로 전락(?)한 그 상황일 것이다. 김홍석은 바로 이러한 상황을 차용한 것이다. 물론 인디애너의 작품과 함께, 하지만 이 상황은 반드시 로버트 인디애너의 조각에만 국한 된 것은 아니다.

작품의 본래 의미나 미술사적 가치와는 무관하게 쇼윈도의 장식품으로 소비되고 있는 상황, 즉, 이미 차용된 것을 또 차용하며 김홍석은 한 작품의 운명과 소비방식에 대한 위트 있는 일격을 가한다. 이렇듯 차용은 동일한 작품이 또 다른 의미들을 생성할 수 있는 무한한 잠재력을 드러낸다.

오늘날 예술에서 차용은 작품을 생산하는 방식이다. 작가들은 미술사에 등장하는 모든 형태, 이미지, 행위의 레파토리 속을 파고들며, 그들이 원하는 형태들을 자유자재로 사용한다. 어디 미술사뿐인가 모든 예술 장르, 우리를 둘러싼 모든 환경, 오브제, 상황, 즉 ‘현실’ 그 자체가 오늘날 작가들에겐 더할 나위 없는 풍요로운 작업 레파토리가 되는 것이다. 물론 차용미술은 레파토리의 다양성과 선택의 임의성만을 주창하는 것은 아니다. 차용은 작품의 생산방식이기 때문에, 무엇을 차용하는가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전환되는가가 그 작품의 결정적 역할을 한다.

프랑크 스텔라의 작품을 형광등으로 다시 만든 베르트랑 라비에(Bertran Lavier 1949-)의 〈IFAFA IV〉 (2004), 아르너 야콥센(Arne Jacobsen 1902–1971)의 의자를 해체해서 칼더(Alexander Calder 1898–1976)의 모빌로 전환한 마틴 보이스(Martin Boyce 1969-)의 〈Suspended Fall〉 (2005), 찌그러진 자동차를 화장품 색조로 도장한 실비 플러리(Sylvie Fleury 1961~)의 자동차 〈Skin Crime 3 (Givenchy 318)〉 (1997) 등... 이러한 차용의 흥미로운 방식 가운데 하나로 바로 ‘커스터마이징(customizing)’을 꼽을 수 있는데, 커스터마이징은 본래 모터사이클 혹은 자동차 매니어들에게 익숙한 용어이며 자동차 본체 혹은 부속품을 변조하거나 독특하게 장식하여 ‘자기만의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이 커스터마이징 프로세스는 오늘날 작가들의 차용방식과 그것의 미묘한 다름을 설명하는데 아주 유용하다. 김홍석의 찌그러진 〈LOVE〉 (2004)나 실비 플러리의 찌그러진 자동차(〈Skin Crime 3 (Givenchy 318)〉) 모두 미술사의 거장인 로버트 인디애너와 세자르(Cesar 1921-1998)의 작품을 차용하고 그 형태를 왜곡했으나, 작품의 운명과 소비방식을 비평하는 김홍석의 찌그러진 〈LOVE〉는 미술사를 화장품 쇼핑하듯이 소비하며 생산된 실비 플러리의 핑크 빛 찌그러진 자동차의 문맥과는 아주 명백하게 다른 지점을 향하고 있다. 현대미술에서는 바로 비슷해 보이나 다른 것, 그것의 의미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해진다.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는 모든 레파토리는 누구에게나 선택과 사용이 가능하다. 오늘날 ‘새로운 것은 요소가 아니라 배치’다. 우리가 차용미술에서 주목하는 것은 (동일한) 요소가 어떻게, 어디에 배치되었는가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경험할 것 인가다. 길거리에 굴러다니는 비닐 쓰레기봉지들, 버려진 종이상자들, 방치된 나무토막들, 노숙인들... 모든 도시에서 발견될 수 있는 그리 낯설지 않은 상황들이다. 폐기되고 정리되어야 할 길거리의 너저분한 풍경이 김홍석에게는 ‘아름다운 일회성 구조물’로 다가온다.

제프 쿤스(Jeff Koons 1955-)가 수퍼마켓의 진열대에 열광했다면, 김홍석은 길거리의 허접하고 후미진 구석구석을 샅샅이 뒤진다. 김홍석은 이렇듯 방치된 비닐쓰레기봉지를 모아 브론즈로 캐스팅한다. 모든 콜렉터가 열광하는 제프 쿤스의 강아지와 토끼 형상으로.(〈Canine Construction〉 (2009), 〈Rabbit Construction〉 (2009)). 내노라하는 유명 콜렉터 거실에 모셔 놓은 제프 쿤스의 글래머러스한 토끼 조각과 서울의 한 길거리에 놓여 진 김홍석의 비닐쓰레기봉지로 캐스팅된 제프 쿤스의 조각을 상상해 본다. 쓰레기 비닐봉지의 유쾌한 일탈이다. 길거리의 쓰레기 봉지와 놀이 공원의 싸구려 플라스틱 토끼 인형은 ‘차용’에 의해 이렇듯 각기 다른 콘텍스트에서 서로 조우하며 동시에 다른 이야기를 생산해 낼 수 있다.


Original Copy

김홍석은 2006년 한 개인전에서 ‘READ’ 시리즈를 발표했다. 무엇의 읽기인가? 그것은 바로 작가 자신과 동세대 작가들, 현대미술의 흐름을 주도하는 유명 작가들의 도록을 그대로 카피한 것이다. 사진으로 찍기도 하고 잘 그리는 사람을 시켜 그대로 베끼기도 한다. 카피란 아주 오래된 학습 방식이다. 우리는 늘 외우고 베끼고 반복하면서 지식을 습득하는데 익숙해 있다. 하지만 이렇게 친숙한 일상적 학습 방식이 창작의 영역에서는 불편한 방식이 되고 심지어는 범죄가 되기도 한다.

카틀란(Maurizio Cattlan 1960-)의 조각을 베낀 김홍석의 회화는 엄밀히 따지자면 오리지널과 카피의 문제는 아니다. 김홍석은 카틀란의 작품 이미지를 카피한 것이기 때문이다. 김홍석은 제목에서 카피의 출처를 매우 친절하게 밝히는 방식을 통해서, 합법적(?)으로 뤽 튀이망스(Luc Tuymans 1958-)의 회화와 카틀란의 조각 이미지를 자신의 작품으로 재탄생시킨다.(〈READ-Luc Tuymans, PHAIDON, p226〉 (2005), 〈READ-Maurizio Cattelan, Electa, Marian Goodman Gallery, 2006, p55〉 (2008))

이것은 어쩌면 카피의 혐의를 살짝 빗겨가며 작품을 생산하기 위한 얄팍한 수단이 아닐까? 아이디어가 없어 그냥 카탈로그 이미지를 찍은 것은 아닐까? 아이러니하게도 김홍석의 ‘READ’ 시리즈는 바로 이러한 편협한 혐의(?)와 현대미술에 무지한 사람들에게 훨씬 더 유용하다. 왜냐하면 이 작업은 바로 ‘카피의 혐의’에 대한 문제를 호출하고 있기 때문이며, 이 혐의는 베꼈는가 아닌가라는 단순무식한 잣대를 허무는 것은 물론이고, 이것보다 한 층 더 복합적이고 첨예한 문제들을 노출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김홍석의 ‘READ’ 시리즈의 쟁점은 카피는 오리지널을 위협하는가, 그리고 이미지의 카피와 그 저작권의 관계는 무엇인가 그리고 카피는 오늘날 피할 수 없는 소통 방식인가를 논하는 데 있다.

‘READ’는 오리지널을 찍은 사진가의 ‘저작권’과 그것의 출판에 관여한 모든 ‘저작권자’들을 연루시킨다. 그는 ‘READ’를 통해서 카피의 카피, 즉 원전의 비공식적 전달 경로를 드러내며, 카피라이트와 카피레프트의 위험하지만 각별한 관계 그리고 그것의 파동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다. 주로 지적 소유권의 폐기를 위해 투쟁하는 카피레프트(copyleft) 운동은 인터넷 문화가 선호하는 도구이자 모델이지만, 후기 모던의 진통을 겪고 있는 오늘날 이러한 움직임은 모든 분야에 적용될 수 있으며, 그 당위성을 향해 전진하고 있다.

“광명의 시기 이전에 모방(le plagiat)은 생각들을 전파하는 데 사용되었다. 한 영국 시인이 페트라르카(Petrarch 1304-1374)의 시를 가져다 번역하고 자기 것으로 만든 것이 가능했었다. 이러한 행위는 그 시대에 매우 당연한 것이었고 모방이라는 예술의 고전적 미학형태와 일치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러한 활동의 진정한 가치는 이러한 고전미학을 강화하기보다는 모방 없이는 작품의 전파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카피레프트 이슈는 모방이라는 오래된 학습방식의 현대적 버전이며, 이것이 오늘날 콘텍스트에서 어떻게 수용될 수 있으며, 그것의 긍정적/부정적 파장은 무엇인가를 질문하는 것이다. 엘레인 스터트번트(Elaine Sturtevant 1930-)는 자기가 좋아하는 작가들, 자신에게 영향을 준 작가들의 작품을 세밀히 관찰하고 그것을 그대로 그린다. 그에게 있어서 카피는 학습과 습득의 방식이기도 하며 자신만의 방식으로 20세기 미술사를 소비하며 전파하는데 있다. 50년이 넘게 지속적으로 20세기 미술사의 거장들을 그대로 카피해 온 엘레인 스터트번트의 작품이 2000년대에 와서 세계 주요 미술관의 주목하고 재조명 받는 이유는 무엇인가?

현대미술사의 작가들의 도록을 섭렵하며 관심 있는 작가들의 작품 이미지를 카피하는 김홍석의 ‘READ’ 시리즈는 카피 미술의 노익장 엘레인 스터트번트를 연장하는 듯하지만, 김홍석의 카피는 원본의 ‘정보교란’이란 또 다른 지점을 도출시킨다. 김홍석의 ‘READ’는 프란시스 알리스(Francis Alÿs1959- )의 원작이 퍼포먼스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에게 이 작품이 원래 회화일 것이라고 믿게 한다. 김홍석의 ‘READ’ 시리즈에서 ‘카피’는 오늘날 원전과 그 맥락을 떠나 떠도는 수많은 이미지들의 왜곡된 정보들, 그것의 기상천외한 모험의 설득력 있는 반영이다. 뿐만 아니라 김홍석의 ‘카피’는 재현의 전통을 송두리째 소환하며, 이미지와 실제, 보는 것과 아는 것, 그 차이, 그리고 그것의 생산과 소비 그 자체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고 있다.


'Copy as more'

보르헤스(Jorge Luis Borges 1899-1986)는 〈피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 Pierre Menard, Author of the Quixote〉에서 세르반테스(Miguel de Cervantes 1547-1616)의 소설과 구두점까지 동일한 피에르 메나르(Pierre Menard 1766-1844)의 텍스트, 하지만 두 저자를 나눠놓는 시대적 맥락의 차이(17세기의 스페인과 20세기의 프랑스)가 이렇듯 완벽하게 동일한 텍스트에 전혀 다른 의미를 부여한다고 말한다. 세르반테스의 소설에 필적하고자 했던 창작열망에서 나온 피에르 메나르의 종착지는 결국 그것을 카피하는 데 그치고 말았으나 오늘날 이 메나르의 카피는 시대적 맥락을 반영하고 그 차이에서 오는 묘미와 해석의 풍요로움을 제안하게 되었다.

〈READ-Richard Prince, Untitled(Cowboy)〉 (2005)는 리차드 프린스(Richartd Prince 1949-)의 ‘무제(카우보이)’ (1989) 시리즈 가운데 한 사진을 그대로 다시 찍은 김홍석의 사진작품이다. 말보로 광고 이미지를 그대로 다시 찍은(re-photography) 리차드 프린스의 ‘Untitled(Cowboy)’는 80년 대 초 저작권 소송에 휘말리며 문제의 화제작으로 유명했던 작품이다. 그리고 리차드 프린스 덕분에 우리는 이제 예술작품에서 저작권 소송과 카피의 혐의로부터 어느 정도는 자유로워졌다. 이것을 모를리 없는 김홍석이 바로 그 문제의 다시 찍기 행위를 반복하며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바로 카피가 저자를, 즉 오리지널리티를 위협하는가에 있다.

우리는 카피가 원본을 위협한다고 생각해 왔다. 하지만 “질서를 반영하는 (자본주의)세계에서 예술적 창작활동은 그것을 묘사하는 것에 있을 뿐이다. 작품은 주어진 텍스트에 끊임없이 주석을 다는 것과 같으며, 거기서 영감을 얻은 모든 카피는 결국에 오리리지널의 질서를 초월하며 다원적 반영처럼 정당화 된다. 달리 말하자면, 독창성의 문제는 제기되지 않으며, 작품은 그것의 카피에 의해 위협당하지 않는다” 장 보드리아르(Jean Baudriard 1929-2007)의 이러한 입장은 카피의 정당화를 허용하는 것처럼 보이나, 이것은 우리에게 카피 할 수 없는 것, 즉 시그니처(signature)의 오리지널리티(originality)를 역설적으로 부각시킨다.

작품과 시그니처, 이 불가분의 관계는 오늘날 색다른 모험을 하게 된다. 뒤샹(Marcel Duchamp 1887-1968)의 ‘레디메이드(ready made)’를 카피한다고 해서 뒤샹이 되는 것은 아니다. 수많은 ‘레디메이드’의 카피와 변조 속에서 뒤샹의 독창성이 여전히 아니 오히려 20세기 초보다 더욱 더 독보적으로 존재 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카피행위가 ‘카피할 수 없는 것’을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다니엘 뷰렌(Daniel Buren 1938- )의 트레이드마크인 수직 띠를 카피할 수는 있지만, 그의 시그니처, 즉 인시튀(in situ) 목록에 없는 것은 그의 작품이 아니다.

이렇듯 오늘날 시그니처의 의미와 영역은 예전의 작품(물질)의 위상을 대신하며 오리지널리티의 주체를 더욱 더 부각시킨다. 카피의 정당화는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가능하다. 카피가 정당화된다고 해서 독창성 그 자체가 소멸되는 것은 아니다. 단 독창성의 개념이 바뀌었을 뿐이다. 김홍석의 시리즈는 보르헤스가 언급한 피에르 메나르의 ‘카피’의 풍요로움을 환기시키고, 카피레프트를 통한 전파와 유통에 관한 논쟁을 끌어 들이기도 하며, 나아가서는 오늘날 작품의 오리지널리티란 무엇인가라는 문제를 호출하기 때문에 흥미로운 것이다.


김홍석, 〈마라의 적(赤)〉, 2004, 유리, 철, 전구, 벽면 텍스트, 60 x 60 x 184 cm © 김홍석

Real Fake

낯설음과 친숙함을 절묘하게 교직하며 사실과 허구의 전방위적 교란을 시도하는 김홍석의 허구적 이야기가 지향하는 것은 무엇일까? 1974년 솔제니친(Aleksander Solzhenitsyn 1918-2008 )의 입회하에 마오 쩌둥(Mao Zedong 1893-1976)과 덩 샤오핑(Deng Xiaoping 1904-1997)이 당시 미국대통령이었던 리차드 닉슨(Richard Nixon 1913-1994)과 비밀회담을 했으며, 그 증거물이 남아 있다는 이야기(〈마오는 닉슨을 만났다(Mao met Nixon)〉 (2004)), 프랑스 혁명가 장 폴 마라(Jean Paul Marat 1743-1793)가 암살된 후 그의 혈액이 채집되었고 그것을 죠르주 당통(Georges Danton 1759-1794)이 보관했으며 현재 이것은 스털링 박물관에 보관되어있다는 이야기(〈마라의 적(赤) (Marat's Red)〉 (2004)), 물론 이 이야기들은 가짜다.

하지만 소위 킬링 타임용 믿거나 말거나 식의 무상 행위는 아니다. 김홍석은 일부러 역사를 오독하거나 의도적으로 진실을 왜곡 혹은 은폐하면서 역사의 허구성과 진실은 만들어 지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가정’을 강하게 어필하고 있다. 그의 모든 이야기는 거짓을 더욱 더 믿음직하게 더욱 더 교묘하게 진실 속으로 밀어 넣으면서 진실과 거짓의 불편한 대면을 기획한다.

김홍석의 허구적 이야기는 우리가 진실이라고 믿고 있는 대문자 H로 시작하는 역사에 대한 엉뚱하지만 기발한 ‘주석’들이다. 진실은 어디에 있는가? 만일 우리가 알고 있는 진실이 진실이 아니라면... 만일 우리가 듣고 보는 사실이 사실이 아니라면... 이러한 ‘가정’에서 출발한 김홍석의 이야기는 바로 진실을 거짓 속으로 몰아 놓고 그것을 교묘하게 작동시키며 한 층 더 거짓말 같은 게임을 벌이는 과정을 통해서 진실의 양면성을 가시화하기 때문에 흥미로운 것이다. 김홍석의 진짜 같은 가짜 이야기는 진짜와 가짜의 불편한 동거를 극대화 하며 우리의 고정관념에 도전한다. 진실이 만들어 진다는 것을 어떻게 거짓을 통해서 밝힐 것인가! 김홍석은 이것을 위해 매 번 논리적 궤변과 통쾌한 역설을 가동시킨다. 

마닐라에서 출생한 마사히로 다카하시는 유미 다카하시로 성전환 수술을 했으나 수술이 잘 못되고 다리가 잘린 트랜스 섹슈얼이 되었으며, 그는 이러한 상황에서 자기가 겪은 이 세상의 모든 인권유린의 현장을 거침없이 적나라하게 쏟아낸다.(〈Top of the World〉 (2007)) 김전일은 북한에서 일본으로 탈출하여 일본정부에 망명을 신청한 상태며 이러한 상황을 연기할 사람을 찾는다는 공고를 보고 시간당 오달러를 받고 하루 여덟 시간 동안 불법 노동을 하게 된다.(〈This is Coyote〉 (2006))

왜 작가는 아무도 믿지 않는 아니 믿기에는 너무도 가짜 같은 이러한 이야기를 지어 내는 걸까? 불법체류자, 이주노동자, 성고문 피해자, 트랜스 섹슈얼, 매춘부 등 김홍석 작업의 주인공들은 매 번 잔인하게 희화되며, 작가는 이들의 불운에 대한 배려 따위는 조금도 없어 보인다. 이들의 아픔, 이들이 겪는 부조리, 이들의 척박한 상황은 하나의 게임으로 또 작품을 성립을 위한 도구로 전락하는 듯하다.

김홍석은 작품을 위해서 한국에 체류하는 동티모르 노동자를 저렴한 임금으로 고용하고, 한국의 외국인 노동자의 불편한 진실을 인터뷰한다.(〈대화〉 (2004)). 이 동티모르 외국인 노동자의 인터뷰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해 보나 그 내용을 파악하기에는 너무 많은 장애가 따른다. 결국 포기하고 돌아서면 짤막한 설명이 우리의 멍청한 행동을 비웃는다. 외국인은 진짜 외국인이 아니고, 인터뷰도 가짜며, 이 모든 상황에 우리가 속았다는 사실을 알려 준다. 갤러리 안에 있는 창녀를 찾으면 현상금을 준다는 매우 불편하고 못된 게임을 감행한 에서도 우리는 감쪽같이 속는다.(〈Post 1945〉 (2008)) 퍼포먼스가 진행되는 동안 열심히 우리는 진짜 창녀를 찾는 데 혈안 된다. 하지만 결국 나중엔 이 창녀는 고용된 연극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물론 이러한 연출은 그리 기발한 아이디어는 아니다. 여기서 중요한 건 사실을 모르고 모두 감쪽같이 속는 우리의 모습을 보는 것이다. 김홍석은 바로 이러한 상황을 유도하고 있다. 윤리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행동을 자처하며 사회적 약자를 우롱했다는 혐의를 의도적으로 유도하는 상황을 우리에게 보여 주는 작가의 기발함이다. 

외국인 노동자, 불법체류자, 성고문 피해자, 인권 유린을 당한 사람들, 매춘부 등의 사회적 소수자들은 현실에 존재하는 하나의 사회적 시스템, 즉 권력이 만들어 낸 소외 계층이다. 김홍석 작업에 등장하는 이러한 사회적 소수자는 우리에게 보다 확장되고 복합적인 차원의 권력, 위선, 폭력을 일삼는 피해자/가해자와의 만남을 상징적으로 주선한다. 이 가해자/피해자는 ‘내 안에’ 그리고 ‘우리들 사이에’에서 잔인하게 들어나게 된다.

결국 김홍석이 소통하고자 하는 것은 강자의 권력과 약자의 애환이 공존할 수밖에 없는 잔인한 현실세계 또 그렇게 만들고 있는 인간의 양면성인 것이다. 윤리와 비윤리, 옳고 그름, 이성과 비이성 사이에서 끊임없이 갈등하는 인간의 양면성이 현실세계를 만들어 낸다. ‘정치적 올바름’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것 같지만, 바로 이 ‘정치적 올바름’이 또 다른 ‘권력’이 되고, 겉으로는 강자도 약자도 없는 평등을 표방하지만, 그 이면에는 이것을 가장한 온갖 범죄가 난무하는 그런 현실세계에 우리는 살고 있다. 오늘날 “완전범죄는 아마도 (이러한)현실세계를 제거하려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바로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원죄적 환상인 것이다”라는 보드리아르의 글귀가 떠오른다. 그렇다. 김홍석은 ‘완전범죄’를 꿈꾸지 않는다. 오히려 “이 세상 자체가 범죄적”이라는 보드리아르의 생각을 더욱 더 극단적으로 밀고 나간다. 마치 부조리에 부조리로 대응하던 고대 그리스의 ‘시니크(cynique)’처럼, 김홍석은 비윤리를 비윤리로 풀고, 스스로를 가해하며 궤변의 풍요로운 역설을 시도하고 있다.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