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으로서의
조각
작가
정서영에 대해서 말하기 어렵다고 해서 그것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정서영의 세계는 미궁에 빠지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로, 명징하고 정확하다. 두 쌍 이상의 분열적인 현실을 마주치게 하려는 ‘교차학(學)’에 가깝다. 교차하는 시간과 공간을 연구하는 학문이 있다면 정서영이
방법론을 설계할 수 있지 않을까. 흐르는 것과 고정된 것, 멀어지는
것과 가까워지는 것, “어느 곳으로도 고이지 않고 흐르는 시간” 등과 같은 작업에 관한 작가의 말은
작업에 대한 진술도 직접적인 설명도 아니다.1 그것은 작업이 작가의 뇌와 손에서 멀어진 이후 어디에서든 스스로
작동하며 외부와 작용, 반작용을 해 나갈 남겨진 작업의 ‘수행’에 관한 것이다. 정서영의 작업은 물리적으로 완성된 이후에도 주변의 공기, 보는 자, 세계 자체의 운동에 의해 변화한다.
이러한
가설 속에서 (혹은 증거들 속에서) 우리는 보다 구체적인
‘전시’를 눈앞에 내놓을 필요가 있다. 작가가 허락한 총체적 세계의 일부분으로서 ‘전시’가 그것이다. 정서영이 구축하는 전시는 세밀하게 조정되고 국한된 지대다. 그것은
정서영의 작업을 외부로 나타나게 한다. 일련의 변화 속에서 작가의 작품을 관객의 눈앞에 머물게 한다. 정서영이 자유자재로 자신의 개인전을 ‘조각’해내는 방식은 작가가 펼친 문제들 중 일부를 살펴보게 하는 기술(테크닉)이다. 개인전을
조각한다니 이게 무슨 말인가. 이때 정서영이 조각 자체를 개념화하는 방식을 따라가 보는 일이 필요하다.
“이
조각은 〈유령, 파도, 불〉이라는 제목의 설치 작업 중 남아있는
일부이다. 정해진 형태도 크기도 없으며 끊임없이 움직이는 것을 조각으로 만들고자 했던 것이다.”2
“나는
대체로 조각가이다. 그리고 정말 너무 크고 헐거운 질문이다. 그래도
그 헐거운 사이에 이런 이야기를 한 번 넣어볼 수는 있을 것 같다. 사물에서 조각까지 가려면 사물에
대한 ‘합의’를 깨야 한다.”3
그의
전시 또한 ‘멈추지 않고 움직이는 것, 형태조차 없는 것을 고정하는 것’이다. 망실된 조각 중 일부를 〈파도(유령, 파도, 불 중 일부)〉(1998)라고 이름 붙여 새로운 자리를 찾아주었던 2016년 ⟪정서영전⟫(시청각)에서 작가를 통해 문제시되는 것은 눈앞에 드러나는 ‘순간’과 움직임이 발생하는 ‘상황’ 자체다. 작가는 전시 공간을 ‘상황이 발생하는 장소’로 역전시킨다. 이것은
해당 공간이 일찍이 전시장이기 이전에 어떠한 벽, 바닥, 제도의
선택, 몇몇 징조들의 총합이었다는 사실을 감지해내는 작가의 눈에 의해 가능하다. 그가 아트선재센터의 흰 벽을 사용하는 방식, 아뜰리에 에르메스의
바닥, 이번 전시장의 높은 벽면, 시청각의 ‘세탁실이라고
불렸던’ 공간을 변화시키는 방법을 보라.4 정서영의 전시는 간단하게 끝나지 않는다. 이중 복화술, 상반되는 것들을 동시에 보기, 전시의 물리적 조건을 갱신하기. 전시는 낯선 문제가 턱, 하고 발생하는 문제적 시공이다.
정서영의
전시는 그의 결정을 경험하게 한다. 작가의 방법론이 공존하는 시간으로서, 전시는 외부와 변별되는 하나의 세계다. 우리는 이곳에서 작가의 결정들을
본다. 작가의 결정은 대상을 세분화하여, 쪼개고 나누면서
나아간다. 이때 대상은 복합재료(mixed media), 가변크기(dimensions variable)와 같은 작업의 캡션이 되는 물리적 재료이기도 하며 그가 드로잉을 통해 간혹
힌트를 주는 듯한 ‘의미’의 차원이기도 하다. 정서영의 대문자 A는 A’, A”로 끝없이 세밀하게 분절되어 나간다. 실로 정서영의 작업에는 A들이 있다. 피그먼트 프린트 사진 작업 〈A는
B가 그럴 줄 몰랐다〉(2014/2016), 나무, 유리, 도자로 이뤄진 〈테이블 A〉(2020)가
있다. 작업의 세부는 타자라는 조건(B), 주변 맥락의 관계(작가가 세운 테이블)로 인해 A가
간편하게 하나의 A가 되는 것을 불가능하게 한다. 작가는
끝까지 컨트롤한다. 이런 가운데 작가가 분절해 놓은 세밀한 순간들의 결과로 관객이 보게 되는 것은 조각
난 파편이 아니다. 그것은 작가가 잡아내 잠시 세워놓은 한 순간으로서의 ‘전체’다.
전체를
보여주고자 하는 의도는 20세기 후반 미술사에서 뒤로 밀려났다. 이것, 작가가 특정한 결정권을 끝까지 밀고 나감으로써 구축되는 미적 성취는 20세기
모더니즘 미술을 자기화하려던 한국 현대 조각사에서 제대로 발현되지 않았다. 거대한 철, 나무, 돌 조각으로 형상화되었던 재료의 물질성이 1990년대를 지나 설치미술의 스펙터클이 주는 비결정성의 자유로 둔갑할 때, 조각은
설치와 혼동되었다. 물질의 본래 상태는 작업이 내세우는 목표와 그에 따른 의미 부여 뒤로 밀려났다. 정서영은 오히려 비타협성을 도드라지게 하며 조각을 향해 나아갔다. 작가
정서영이 발휘한 결정권은 조각의 몸통을 불려 나가는 대신 순간들을 세분화하는 결투를 통해 조각성, 조각적인
것의 의미를 새겨 나갔다. 그러므로 작가가 1990년대 한국의
재료, 조각, 조각의 발생 순간에 대해 논해온 것은 그의
고유한 문제의식이자 태도이다. ⟪공기를 두드려서⟫에서 보았던 하얀 색 좌대, 나뭇가지, 제스모나이트와 알루미늄 주물, 날렵한 스테인리스 철사 등의 물리적
재료는 둔탁한 ‘의미’가 작품에 들러리 서지 못하도록 한다.5 2020년의 작가의 작업과 전시는 여전히 외부의 막연한 의미 작용을
차단한다. 그 앞에서 세상을 힐끔 넘겨 짚어보려고 하는 관객의 관습을 통한 ‘보기’는 불가능해진다.
그것은
작가의 결정권 때문이다. 정서영의 힘은 부분과 전체라는 이질적인 감각을 관객이 동시에 경험하게끔 만든다.6 정서영이 만들어내는 물질들은 모든 것에 관한 의심처럼 보이지만
동시에 확고한 선언이다. 그의 작업은 눈앞에 당도한 것들을 조정해나갈 필요성을 주장하는 순간들을 보여준다. 뾰족하면서도 물렁거린다. 그러나 이 반대되는 두 가지 이상의 상태를
그대로 보내지 않고 관객은 선택해야 한다. 볼펜, 열쇠와
같은 단조로운 사물들의 변화부터 1994년 작가의 전시에서 설치되었다가 이번에 다시 나타난 〈무제〉(나무, 천)의 상황에 이르기까지. 그것은 (정서영의 작업은) 여전히
자신의 특질을 남겨둠으로써 어떤 지향점을 드러내는 물질로 존재한다.
조각의
발생, 그리고 거리감
⟪공기를 두드려서⟫에서 좌대와 도자 텍스트로 이뤄진 작업을 보자. 좌대 위에 올라간 도자에 새겨진 문자들은 눕혀져 있다. 정서영의
좌대는 ‘보기’를 효과적으로 최적화(디스플레이) 하는 데
사용되지 않는다. 그것은 스스로 좌대 이상의 육중함으로 기능을 배반하는 도색된 합판이다. 한편 작은 새의 둥지처럼 포개져 있지만, 포장지는 조각이고 조각
포장지는 종이가 아니다(〈두 개〉, 2020). 작가의 작업이
가진 이러한 반동적, 비타협적인 힘은 종이와 조각, 평평한
것과 볼록 튀어나온 것, 딱딱한 것과 물렁한 것을 조정한다. ⟪공기를 두드려서⟫ 전시장 1층의 〈피, 살, 뼈〉(2019)는 2미터가 넘는 키를 가졌다. 피, 살, 뼈라는 영문
글자가 새겨진 “표지판”이었다. 〈노란색, 그것〉(2020)이라 불리는 수직 구조물에는 아래에 사각형의 작은 거울이 놓여 있었다.
거울은 원래 성질을 잃지 않고 전시장 공기가 발사하는 다른 순간들을 반사시켰다. 전체에
통합되지 않고 ‘그것’인 채로 있다.
작가의
결정이 지닌 비타협적 속성은 대상 사이의 거리감을 만든다. 전시에는 작품 간 이야기의 교환, 고조되는 연속된 감정이 부재한다. 정서영의 작업은 사물을 둘러싼
기존의 관습과 인간의 인지 사이를 미세하게 떨어뜨려 놓는다. 그가 만드는 것은 조각인 동시에 두 개
이상의 대상 사이에 생기는 거리(감)이다. 이 거리에서 시야는 좁아졌다가 넓어진다! 전시장에 형성된 거리(distance)는 변화를 가져오는 주된 원인인 시간에 의해 강화되거나 사라진다. 지금 나는 정서영의 작업 〈동서남북〉(2007), 〈괴물의 지도, 15분〉(2008), 〈A는 B가 그럴 줄 몰랐다〉를 머릿속에서 본다. 두 개의 지휘봉을 들고
세계를 조율하는 과학자처럼, 그가 포착한 두 가지 이상의 대상들은 ‘거리감을 생성해내는 공식’을 만들어낸다. 특정한 주제를 재현하거나 작업 과정의 재료들이 결합되는 절차가 보인다면 관객은 작가의 작업을 덜 어렵다고 느낄
것이다. 하지만 정서영의 작업에는 과정을 통과하며 생성되는 ‘경로’가 있다. 작품 앞에 도착하면 새로 변화하고, 현실과 작업의 관계를 새로 조망할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으로 촘촘하게 짜인 경로가 있는 것이다. “시작과 끝이 구별되는 하나의 선(line)이 경로(path)”7라는
말을 빌려와 정서영의 조각을 보면, 그의 조각은 매번 “스스로” 다른 속도와 힘을 발생시킨다.8
정서영의
조각은 주변의 공기, 보는 자, 세계 자체의 운동에 변화한다. 작가의 조각은 이때 변화에 귀속되는 대상이 아니라 의인화되지 않은 사물인 채로 작동하는 동적인 주체다. 바퀴(〈동서남북〉), 동네를
걷는 발걸음(〈괴물의 지도, 15분〉)이 작업의 일부였다는 점을 떠올려 보라. 움직임을 둘러싼 시작과 끝에
관해 말할 때, ⟪공기를
두드려서⟫에
있는 〈테이블 A〉를 떠올릴 법하다. 왼손과 오른손이 합쳐진
듯한 손 덩어리, 속도감을 잃어버린 건축 구조물처럼 느껴지는 이 이상한 도로는 경로의 발생 목적 자체를
거부하는 고립된 마을처럼도 보인다. 또 이것은 서로 다른 것들이 같은 공간(테이블) 위에 배치되어 있다는 점에서 수집, 병치, 한시적 공존을 보이는 하나의 전시이다. 시작, 끝을 알 수 없는 듯 모호한 단서들이 자리할 듯 보이는 이
작업은 정반대로 작가의 기술(記述)에 의해 더할 나위 없이
명료해진다. 작가에 따르면 “각각의 조각들은 사실은 보이지 않는 이유에 의해 밀려나와 모여서 테이블이
되었다.” 여기에 흥미롭고도 중요한 점이 있다. 작업이 현재
외양으로 나타난 이유를 밝히는 작가의 기술이 지금-결과보다 완료 이전의 무수한 ‘가능성’을 상기시킨다는
점이다. 여러 방향의 움직임을 가능성으로 품은 사물들의 존재는 세분화된 결투의 결과로 눈앞에 드러난다. 아직은 무엇이 될지 몰랐던 형태들의 ‘과정’을 강조하면서 작업은 스스로 존립 근거를 갖는다.
작가는
두 눈으로 보았던 것을 실체적 증명으로 어떻게 가져오는가? 작업에 부수적인 레퍼런스를 거부하는 작가의
작업은 극히 독립적이다. 그의 작업은 형태가 특정 형태가 되는 과정을 문제화한다. ⟪공기를
두드려서⟫
2층에 놓인 〈같은 것〉(2020)은 정서영이 자신의 결정권과 시간을 첨예하게
다루는 장치로서 우리가 ‘전시’를 말할 때 주요한 작업이 아닐 수 없다. 그의 〈같은 것〉은 1997년 작업실에서 찍은 한 장의 ‘대충 만들다 밀어 놓은 작은 조각’이라는 확실했던 물증의 사라짐에서 시작한다. 작가는 ‘전시 사진(installation view)’이라는 전시를
기록하고 현재와 매개하는 장치를, 버린 지 오래된 조각을 다시 만나는 계기로 삼는다. 눈앞에 한때 놓여 있던, 그러나 이제는 간신히 눈에 보이는 것(우연히 발견한 사진)으로 치환된 사라진 사물들은 다시 다른 조각이
되어 있다. 그것은 사라진 시간과 다시 ‘그것’을 만들어낼 수 있는 조각 사이의 간극을 작가가 움직여
보고 헤쳐 나간 결과이다. 그의 조각은 시간의 선적(수평
수직) 흐름을 배반하여 다시 출몰하고, 주변의 공간, 소리, 빛과 조응한다.
전시의
시간
이제
정서영으로 인해 생각하게 된 ‘전시의 시간’을 좀 더 살펴보자. 한국 현대미술에서 정서영이 해낸 일
중 하나는 조각에 시간을 부여한 것이다. 이는 조각에 형(形)뿐 아니라 생(生)을 구축한
것이다. 이는 다이내믹한 산업화와 민주주의의 과도한 압박과 속도전의 시간 속에서 쓸모와는 ‘무관한’
비가시적인시간의 존재와도 연관되어 있다. 정서영의 조각은 두드리기, 세우기, 올리기, 쌓기, 가르기
등 기존 남성 모더니즘 조각들의 기념비성과 거리를 둔다. 그의 조각은 그가 강조해 왔듯 눈에 드러나는
‘형’을 결정짓는 난제를 최대한 세밀하게 좁혀간다. 그의 조각은 20세기
중후반 기존 조각-하기의 고정관념을 깨 가며 만들어낸 시간들의 증거다.
정서영은 추상적인 시간 자체를 상대하고, 세계 전체를 다룬다.
여러
시간의 축을 따라가 볼 필요가 있다. 1990년대 이후 대한민국이라는 현실 차원에서의 시간 축이 눈앞에
보인다면, 플라스틱, 합판,
하늘색 페인트, 레진 등등의 재료들 또한 뒤따라 자신의 시간을 주장할지 모른다.9 전시가 지닌 시간의 지위 또한 문제가 된다. 정서영은 전시를 둘러싼 시간 자체를 전시장의 오프닝과 클로징 날짜만이 아닌,
작품과 작품 사이 혹은 관객과 관계하는 전시 동선과 관계하는 관람 시간만도 아닌 리플렛 지면으로 확장할 것을 시도하기도 했다.10 이때 확장은 실제 부피를 넓히는 확장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기존의 암묵적인 합의를 재검토하는 시야를 확보하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의 선명한 주장이다. 정서영이 세운 전시 안의 작업은 해당 시공간의 조건에 따라 발생의 방식을 달리하는, 수행적인 것이 된다. 이를테면 드로잉과 퍼포먼스 작업 등 여러 매체를
다뤄 온 정서영의 작업 중에서 〈괴물의 지도, 15분〉은 작업의 전시를 지시하는 스코어가 되기도 했다. 〈괴물의 지도, 15분〉은 〈여기 녹색 어제 녹색〉(2016)이라는, 시청각의 세탁실에 상응하는 작업으로 변화한 바 있다. ‘세탁실이라 불렸던’ 한 공간(시청각)에 〈괴물의 지도, 15분〉의 방법론을 활용한 정서영은 〈여기 녹색
어제 녹색〉이라는 하나의 ‘상황적 공간’을 조각해냈다. 이 공간에는 나뭇가지가 별도의 고정 장치 없이
부피를 가진 사각형 공간에 맞게끔 조절되었다. 팽팽하게 걸쳐진 긴 나뭇가지가 공간을 예리하게 가로질렀다.
작가는
전시를 통해 조각의 존재, 그리고 관람의 경로를 결정한다. 전시는
작업의 변화와 재출현을 가능하게 한다. 개인전 ⟪전망대⟫(아트선재센터, 2000) 당시 ‘전시장의 창백한 불빛’을 언급하는 작가의 말은 그가 자세히 보며 컨트롤하고자 했던 대상이
미술이라는 국한된 제도로는 포섭 불가능한 한국의 현실 자체에 있었다는 걸 보여준다.11 ⟪사과 VS 바나나⟫(현대문화센터 내 구 아파트 모델 하우스, 킴킴갤러리, 2011)에서 임시 모델하우스 공간에 들어가 작업을 배치하거나, 이전
작업의 증거물을 통해 다시 조각이 되는 순간을 되살리는 작가의 방식은 그가 다루는 것이 현대미술의 맥락 안에 파생된 협의의 전시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보다 넓은 의미의 세계를 보여주는 의미에서 전시이기도 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작가는 전시(展示) 그러니까 ‘대상이 눈앞에 드러나는 순간’을 조각한다. 정서영은 “사물이 조각이 되는 순간” 뿐 아니라 시공간의 상황을 결정짓는 힘을 사용한다. 그것은 특정 시공간에서 성립되는 조각의 전시, 한 작가의 개인전을
만들어내는 비전을 열어젖히는 방식으로서 세계를 ‘보는 방식’에 대해 숙고하는 것이다.
정서영의
조각은 시간의 흐름 속에 있다. 그는 물질을 사물을 과잉 생산하지 않는다. 조각은 한 번 생성되기까지 걸리는 시간에 보는 시간이 더해진다. 현시되는
과정으로서의 전시가 끝난 이후, 또 다른 상황에서 작업이 남겨지는 시간이 지속된다. 후려치거나 토막 내거나 하는 과격한 동사들을 행하지 않고 대상을 조각해낼 수 있는 것은 그의 시선이 조각과
세계를 둘러싼 관계의 끝없는 움직임에 초점이 가 있기 때문이다. 〈피,
살, 뼈〉라는 스스로 직립하여 있는 조각들과 같이, 정서영의
사물들은 땅 위에 스스로 끝장을 보며 서 있다는 점에서 독립적이다. 독립하는 유령들이다.
전시는
한시적이다. 정서영의 전시는 고정된 잠깐의 순간들을 눌러 붙지 않게 본뜨듯 고정시킨다. 순간의 정황들을 세밀하게 조각한다. 그의 손에 들린 것은 도구로서의
무기(만들기의 재료)가 아니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남은 흔적, 혹은 거대한 세계 자체를 상대하는
것이다. 정서영의 조각은 ‘끝나지 않은 조각’이자 죽은 듯 살아있는 유령성을 지닌다. 엄격한 형식주의자의 면모로 추상화된 조형성에 정령이 깃드는 감각이 찾아온다.
정서영의 사물들은 현대화된 애니미즘(물활론)의
속성도 갖는다. 자체적인 힘을 발생시키는 사물들은 멈춰져있지만 곧 밖으로 나갈 듯도 보였고 영상작업
〈세계〉(2019)에 등장한 호두와 같이 세속화한 현실의 범주는 숭고한 구슬처럼도 보였다. 정서영이 세심하게 빚은 전시장은 “분위기”로서 디스플레이었기도 했지만12 점차적으로 정서영에게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상황’이자 퍼포먼스를
발생시키는 가변적인 조건이 되어갔다.
작가는 “생각이 사물로 실체화되면 그 사물이 움직임을 이끌어 낸다는
사실을 상황극으로 만들면서 재미있었다.”라고도 말했다.13 ‘생각→사물→움직임’의 방향은 정서영이 가진 비관습적 특성 때문에
규정 가능한 속도로 반복되지 않는다. 예측할 수 없는 곳으로 흐르는 시간과 공간은 그의 조각이 고유한
상황으로서 포함시키는 것이다.
정서영의
작업은 특정 시대의 귀속물이기를 넘어서고, 설치와 전시를 매순간 상황 특정적으로 다룬다. 수많은 재현적인 언술들을 치고 나가는 방법으로서 정서영의 조각은 깎고 빚고 다듬는 행위의 틈새 사이에 위치해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 특정성은 하나의 세계를 단 하나의 언어와 사물로 고정시키는 것의 불가능성을
드러낸다. 작가가 말하곤 하는 “흐르는 시간”은 ‘고정된 시간’의 반대가 아닐 것이다. 이 글을 마무리하던 무렵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열리는 소장품 전시에서 〈자전거의 빛〉(2007)을 보았다. 자전거라는 사물, 불빛을 내는 전등, 그리고 동그란 구멍이 뚫린 전시장 벽이 한 켠에
있었다. 작은 구멍을 내기 위한 큰 가벽은 작업의 일부이자 전시 공간의 과도한 적막과 물리적인 무기력함을
가시화시키고 있었다. 구멍난 틈 사이로 빛이 집중해 들어가고 있었다.
⟪공기를 두드려서⟫에서 정서영의 조각은 자신을 뼈대부터 애초에 다시 세움으로써
군더더기를 덜어내는 방향으로 생성되어 나간다. 작가의 작업은 그것이 그것으로, 핵심이 핵심만으로서 존재하게끔 순간들을 던져 놓는다. 예측 불허, 다른 것들을 동시에 보기, 결투 속에서 경로들을 좁혀 나가는 결정권은
조형 언어로서의 주장이다. 정서영이 만든 전시, 구체적으로
그가 조각한 전시의 시간은, 보는 행위의 막다른 어느 길을 뚫는다. 작가의
집약된 선택들로 이뤄진 경로는 특유의 밀폐성, 보다 예리한 완결성을 갖는다. 이것은 무한 확장되어가는 듯 보였던 오늘날 현실에서 보기 힘든 것이다. 그의
조각은 잊고 있던 큰 개념들을 매우 구체적으로, 또 세밀한 상태로 전체를 보여준다. 그것은 추상적인 세계 자체를 포괄한다.
정서영의
작업은 대상을 직면함으로써만 생겨나는 시야가 있다고 믿게 한다. 이러한 기대를 여전히, 갖게 한다는 점이 우리에게는 중요하다. 수증기와 얼음처럼 대기의
변화에 따라 응결될 고유의 형태를 향해 나아가는 물체들의 법칙처럼, 정서영의 조각은 핵심적인 순간으로서
관객을 작업 앞으로 끌어당긴다. 모습 없는 말, 글, 생각, 존재에 몸을 만들어주기. 정서영의
조각들은 거리감을 만들어내며 걷고, 멈추며 정면과 후면을 동시에 본다.
그의 결정들은 주어진 시간 앞에 잠시 멈췄다 또 다른 경로로 나아갈 것이다.
- “하지만 기대하는 것은 이 이상하고 어리석은 조합이
만들어낸 조각이 어느 곳으로도 고이지 않고 흐르는 시간을 예견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정서영전⟫(시청각, 2016) 브로슈어 중 〈뼈와 호두〉(2016)에 대한
설명 발췌. 본문의 인용 중 서지정보가 적히지 않은 것은 작가 노트에서 발췌했다.
- 정서영, ⟪정서영전⟫
브로슈어 중 〈파도(유령, 파도, 불 중 일부)〉에
대한 설명 발췌.
- 김현진, 정서영, 「Ms.C의 정서영 인터뷰」, 『큰 것 작은 것 넓적한 것의 속도』, 현실문화, 2012, 139쪽. 작가의 문장은 “당신은 조각가인가?” 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이었다.
- ‘세탁실이라 불렸던 공간’은 ⟪정서영전⟫을 준비하며
작가와 나눴던 대화와 작가의 노트에 반영된 하나의 표현이었다.
- 정서영의 작업은 연상 작용은 가능하게 하나 결말도 상징도
주지 않는 미술 언어의 불가침영역을 가진 듯 보인다. 2000년 아트선재센터에서 열린 개인전
⟪전망대⟫에서 작가의
작업을 둘러싼 비평을 읽어보자. 미술사가 윤난지는 “정서영이 혐오한 것은 ‘깊이’라기보다 그것을
꾸미는 과도한 수식어들”이라며 “스폰지를 질끈 묶어 꽃 두 개를 만들기도 하지만 전통 조각가다운 치밀함으로 파도를 조각하기고 한다”고
썼다. 윤난지, 「‘깊이’에의 혐오 정서영의 탈원근법」, 『전망대』, 아트선재센터,
2000, 17쪽.
- ⟪공기를
두드려서⟫에
있던 감각을 몇 편 던져보기로 하자. 찌르는데 연약하다. 육중한데
가볍다. 미끄러지는데 등이 딱딱하다. 멈춤인데 동작이다. 수직 수평 운동인데 원 안에 있다. 전시 안에서 관객은
끊임없이 작가 정서영의 세워놓은 표지판을 따라, 시각적 선언문에 당도하기를 원한다. 그러나 이 분열하는 동시다발적 감각의 차가움 속에서, 감각은
폭발하는 대신 고립된다. 사전적으로 ‘뼈 속에 있는 골수’를 뜻하는 정수(精髓)의 상태를 향해 조각도 가고 관객도 이동한다.
- 찰스 샌더스 퍼스, 김동식, 이유선 옮김, 『퍼스의 기호학』, 294쪽.
- “스스로”, 그리고
“속도”라는 표현은 김현진 큐레이터의 저술에서 왔다. 김현진,
「스스로 빛나고 진동하는 사물과 언어」, 『아트인컬처』, 통권 9 제 1호(2008년 1월); 김현진, 「정서영의 말과 사물: 모호함의 밀도와 빛나는 명료함」, 『큰 것 작은 것 넓적한 것의 속도』, 현실문화연구, 2013.
- 한편 한국의 시각적 외관과 스티로폼, 리놀륨, 합판 등을 재료로 삼아온 정서영 작업의 관계를
사회학자 한석정의 저술과 겹쳐볼 수도 있다. 한석정은
1960년대 대한민국 군정이 “신속하게 뚫고 파헤치고 메우고 덮어버리며 남성성을 과시한 체제”였다며 “재건 체제는 험난한
지형을 개척하며 자연에 대한 장악력을 드높이고, 단순, 직선, 사각형, 거대함으로 공간을 변형시키면서 자기 존재를 과시했다. 이 개발의 추진과 속도, 직선적 건설의 이면에는 만주국에서
흘러온 하이 모던 정신이 있었다”고 쓴다. ‘5장: 건설시대’의 소제목으로 쓰고 있는 단어는 뚫기, 메우기, 파헤치기, 스피드 등이다.
한석정, 『만주 모던: 60년대 한국
개발 체제의 기원』, 문학과 지성사, 2012, 297쪽.
- ⟪커넥트 1: 스틸 액츠⟫(아트선재센터, 2016). ⟪정서영전⟫
연계 토크 프로그램에서 정서영의 말(2016년 11월 5일).
- “전시장의 불빛을 흰색으로 바꾸었다. 창백한 등 아래에서 그의 작품들은 더욱 ‘권태롭게’ 보이기 때문이다.
작가는 “형광등이 좋은데”라며 여전히 아쉬워한다. 전시장의 노란 불빛이 조각을
‘예술적’으로 보이게(비싸보이게) 하기 때문이다.” 「‘신성한 미술’ 놀려먹기」, 『주간동아』, 229호(2000년 4월 13일), 90쪽. 이
짧은 주간지 인터뷰는 모처럼 정서영의 유머러스함을 곳곳에 전한다는 점에서도 흥미롭다.
- 〈수십 개의 그림과 몇 개의 조각으로 만든 일〉(1994)을 두고 작가 박찬경은 “사물들이 모인 결과(디스플레이)는 결국 하나의 ‘분위기’”이며, “분위기는 (…) 사물들이 있는 세계가 애매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려주기에
적절한 것”이라고 썼다. 박찬경, 「전망대; 정서영의 사물」, 『전망대』, 아트선재센터,
2000, 7쪽.
- 작가와의 인터뷰, 김성원, 『책상 윗면에는 머리가 작은 일반 못을 사용하도록 주의하십시오, 나사못을
사용하지 마십시오』, 아뜰리에 에르메스, 2007, 7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