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서영의
작품은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조각하지 않고 조각할 수 있는가? 사물의
삶은 사물을 구성하는 물질과 무관한가? 예술가가 만든 형태와 사물은 그럴듯한가 아니면 부조리한가? 이 세상의 모든 사물은 상관관계를 가지는가?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린 ≪오늘 본 것≫의 서른세 작품은 그 배치에서부터 상당히 고심한 흔적이
엿보인다. 반(半)회고전의
성격을 띤 이번 전시는 정서영의 작품을 단순히 보여주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보다는, 이 작품들이 한자리에 모일 수 있는 기회이자, 과시적 소비와 물질
문화로 형성된 환경에서, 사물과 공간에 관한 미래의 해석을 위해 (정서영
철학의 탈승화적 방식으로) 우리의 감각을 활성화한다. 작품
하나하나 조각가의 손길로 매만지는 과정을 거쳤음에도 본래 그 뿌리는 산업의 산물이었음이 드러난다. 전시
⟪오늘
본 것⟫은
지난 삼십여 년 동안 정서영이 만든 모든 물질과 형태의 변화무쌍한 사회성을 다룬, 그 자체로 하나의
작품이다.
형태가
되는 형상, 형상을 탈피하는 형태
서울시립미술관
전시에서 정서영의 작업을 처음 마주했을 때 감지할 수 있는 것은 구상과 추상 사이에 흐르는 긴장이다. (몇몇은
있는 그대로의 물건인) 각 작품의 형상과 형태는 전시의 전체 구성이 이루는 형태와 긴장 관계에 있다. 사실 “전시”라는 것은
추상적인 개념이다. 그러나 한곳에 모인 정서영의 작품들을 보니 마치 이 조각들은 오래 전부터 ≪오늘 본 것≫에 참여하기를 고대해온 것만 같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이 가능하다. 전시는 그 자체로 하나의 작품일
수 있는가? 정서영이 자신의 작업을 공간으로 초대하는 방식은 아주 설득력 있으며, 우리는 이 전체를 하나의 새로운 작품, 거대한 설치 작업으로 보고
싶은 유혹을 느끼게 된다. 작품이 공간에서 자기 자리를 발견했기 때문에, 우리의 감각으로 하여금 개개의 작품을 돌아보고, 각 형태에 시선을
집중하며, 그 형체가 어떤 조건에서 지금의 모습을 갖게 되었는지 분석하도록 가르치는 일은 그만큼 더
어렵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서 정서영의 조각하기란 곧 형상을 해체하는 일, 조각 그 자체를 해체하는 일임을 이해하게 된다. 이 긴장은 작가가
도달해야 하는 다른 무엇이 존재함을, 그리고 그 무엇에 끝내 가닿지 못하더라도 그것을 향한 시도의 행위가
곧 예술적 실천임을 시사한다. 그렇다. 정서영의 작품은, 조각을 만드는 작업에는 우리가 속한 세계에 대한 해석적 관점을 급진적으로 재조정하는 과정이 필연적으로 수반됨을
암시한다. 시간, 시간과 물질, 시간과 물질과 경험, 시간, 물질, 경험과 생각…. 이 모든 차원이 정서영의 조각에서 서로 충돌한다. 이 충돌은 우리를 성찰하도록 한다.
정서영이
이 긴장을 어떻게 만드는지를 잘 보여주는 작품으로 〈파도 (〈유령, 파도, 불〉 중 일부)〉(1998-2022)를
꼽을 수 있다. 유토로 만든 원작을 ≪오늘 본 것≫을 위해 제스모나이트로 캐스팅했다. 바다에는 얼마나 많은 파도가 있을까? 모든 파도는 파도 모양을 하고 있을까? 아니면 파도란 그저 바람과
물일뿐이며, 따라서 파도의 형태라는 것은 없는 것일까? 하지만
바다는 셀 수없이 많은 파도로, 파도의 형상들로 뒤덮여 있지 않던가?
고대의 화가에서부터 현대의 해양학자, 수학자, 기상학자들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이들이 파도를 모형화하는 작업에 몰두했고, 이는 해안지대 마을이나 원주민 공동체는
물론 서구 과학계의 관심사이기도 했다. 왜? 바다를 구성하는
가장 작은 단위인 파도가 바다의 총체적인 상태, 다시 말해 전지구적인 상태를 말해주기 때문이다. 파도는 불꽃과 마찬가지로 모양과 형상이 결코 일정하지 않으므로 형태를 가지지 않는다. 파도는 바람과 바다의 질량으로 인해, 불은 열로 인해 끊임없이 변하는
한시적인 물질일 뿐이다. 그러므로 파도를 조각하는 작업은 곧 조각과 파도 둘 다를 부정하는 일이다. 파도이기 위해서는 바뀌고, 진동하고, 물마루가 바다를 향해 낙하했다 반등하는 운동을 반복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정서영의 파도는 무엇인가? 이 파도는 세상의 모든 파도를
내포하고 있을 뿐 아니라 원작이 점토로 만들어졌기에 온 지구를 담고 있다. 그러나 이후 (퇴적암에서 생성된 광물인) 석고와 수성 아크릴 수지를 혼합하여 개발된
물질 제스모나이트로 재탄생했기 때문에 그보다 더 많은 것을 품게 되었다. 기후의 미래, 환경 그리고 인류가 지구와의 관계 속에서 얻은 지혜와 고통을 이야기하기 위해 자연-문화가 탄생시킨 서사들을 말이다. 파도 하기는 자신의 주위에 경계를
형성하는 “경계성의(limbic)” 경험과 감정을 되돌아보게
한다. 이 파도를 보는 우리는 그 에너지가 유지되기를 바라고, 하나의
개체로서의 파도가 흔적도 없이 바다로 흡수되어버리지 않기를 소망한다. 이 소망은 문화의 영역에서 매우
원초적인 기능을 한다. 모든 것을 인간의 통제 아래 두고자 하는 우리의 욕구와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정서영의 파도는 이 마음을 이해할 수 있게 도와준다. 그리고 그
마음이 작품 안에서 머무를 곳을 찾도록 인도한다.
모형
〈싱크대〉(2011)를 보자. 모델하우스에 비치되어 있던 싱크대를 재조립하여
하나의 작품으로 탈바꿈하였다. 싱크대의 한 부분은 네 개의 돌로 괴었다. 모형은 조각에 들러붙어 있는 영원한 질문이다. 다른 사물을 닮은
사물에 관한 문제를 단번에 해결하는 최적의 방법은 원 사물에 다른 생을 부여하는 것이다. 하지만 〈싱크대〉의
경우 이 모형의 문제는 그리 간단치 않다. 싱크대가 모델하우스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모델하우스는 공간 활용 방식을 보여주기 위한 하나의 예시이자, 가장
안락한 생활양식이라는 환상을 상연하는 무대다. 모델하우스의 공간은 한 사회의 규범을 구체화할 뿐 아니라
더욱 극적인 방식으로 제시한다, 사회적 규범과 가치관의 틀 안에서 행복하게 공존하는 시나리오를 우리
눈앞에서 실연해 보이는 것이다. 잠시, 단 몇 분에 불과할지라도
우리는 그 집에 거주하는 사람의 배역에 자신을 대입해 본다. 모델하우스의 싱크대는 바로 그 이상화된
생활의 일부였고, 보는 이의 욕망의 맥락에서 인식되었다. 저
집에서 쉬고 싶고, 그 공간을 누리고 싶고, 사랑하는 가족과
식사를 한 후에는 바로 그 부엌에서 설거지하고 싶다는 갈망의 순간을 시연한다. 그러나 동시에, 이 초대를 수락하는 것과 이 모델하우스에는 없는 다른 삶을 단념하는 것 사이에 흐르는 긴장 관계도 드러낸다.
사실
이 싱크대의 문제는 충분히 진짜 같지 않은 게 아니라 너무 진짜 같다는 데 있다. 이는 곧 모형의 문제이기도
하다. 집과 그 안의 방과 사물 전체를 대신하는 모델하우스는 모범적인 사례와 이용법을 보여주며, 동시에 그 사물들이 구비되어 있는 공간에 어울리는 이상적인 생활 양식을 육화한다. 어쩌면 그래서 작가는 싱크대에 제2의 생명을 주면서 그 한 켠에
네 개의 돌을 괴었는지도 모른다. 돌은 결코 모형이 아니다. 우리는
사람이 만든 물건과 돌이 공존하는 상황을 목도할 때에야 비로소 이 점을 깨닫는다. 돌은 다른 돌의 모형이거나
산의 모형이 결코 아니다. 모형 싱크대의 한 부분을 돌이 지탱하고 있는 이 모습은 시간의 상반된 두
측면을 간명히 병치시킨다. 싱크대는 문화, 문화에 의해 생산된
행동양식 그리고 이에 수반되는 규범 및 기대와 연결된다. 돌은 이 장면에서 모든 생명체에 죽음을 고하는
생물학적 시간과는 무관한 또 다른 시간을 더한다. 유한한 우리가 속한 세계들은 자연과 그 법칙이 지배하는
세계들을 토대로 존재한다. 돌은 이런 한정된 시간을 사는 모형들을 몇이나 기억할까? 돌은 기나긴 지질학적 생애 동안 살아있는 모형들을, 인간의 욕망에
물질이 복무토록 하는 시도를 수없이 많이 목격했을 것이다.
비유
정서영의
작업에서 비유는 (고통만큼이나)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영문학자인 일레인 스캐리는 역작 『고통받는 몸』에서 형언할 수 없으며 지극히 사적일 수밖에 없는 고통의 속성을
탐구한다. 고통이란 인간의 언어로는 온전히 표현되지 않는 것이지만, 그것을
겪는 이에게는 절대적인 확실성으로 경험된다.2 고통이 지나간 후에야 비로소
“불에 덴 것 같았어”라든가 “칼로 찌르는 듯했지”와 같은 비유로 어림잡아 얘기해 볼 뿐이다. 일레인 스캐리는 적확하게
전달될 수 없는 고통의 특질이 곧 세계들이 파괴되는 지점이라고 지적한다. 정서영은 고속자본주의(fast capitalism)가 야기한 세계들의 파괴와 고통에서 엄청난 가능성을 발견한 듯하다. 경제의 붕괴와 회복이 반복되면 그것을 경험한 공동체의 사회 및 물질 문화에 상흔이 남기 마련이고 대한민국도
예외는 아니다. 정서영의 작품에서는 이러한 변화에 관한 책임 의식이 느껴진다. 고통과 (전통, 물질, 고대의 지식 등의) 상실에 대한 질문은 그러한 조건 아래 존재하는
물질에 에너지를 주입할 수 있는 역동적인 방법을 생산할 필요성으로 대체된다. 그 방법은 처음에는 장인
정신의 섬세함과 형태적 요소들의 합성적 배치로 인해 한눈에 포착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결국 우리의 인식을
재형성하고, 자본주의에 따르지 않는 가치와 행동의 출현에 불을 붙인다.
이것이 이번 전시에서 받는 주된 인상 중 하나다.
〈아이스크림
냉장고, 케이크 냉장고〉(2007)를 예로 들어 보자. 둘 다 냉동고처럼 생겼으나, 한국의 편의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실제 아이스크림 냉장고와 작품 속의 사물을 비교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그들은 고통과 고통스러운 기쁨이라는
연관이 있을 뿐이다. 아이스크림은 자본주의의 방식으로 생산되는 달콤한 행복의 한 유형이고, 이를 보관하는 데 사용되는 인공물의 관점에서 체화된 경험에의 탐색을 냉장고라는 형태는 설득력 있게 전달한다. 〈아이스크림 냉장고, 케이크 냉장고〉에는 진짜 냉장고가 없다. 하지만 보는 이는 즉각 이 작품의 토대, 원천, 근원이 곧 “진짜” 냉장고임을
알아차린다. 정서영의 모든 작업은 특정 사물에 대한 ‘이해’가 어떻게 다른 사물을 매개로 달성될 수 있는지를 인식하게 해주고, 물질에
대한 이해 또한 같은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 있음을 알려준다. 그리하여 바라보는 이의 감정이 친숙한 사물과
물질에서 출발하여 이들에게 주어진 새로운 상황과 삶으로 흘러가도록 한다. ≪오늘 본 것≫은 정서영의 조각이 가지는 이 힘이 잘 느껴지는 전시다.
비유의
또 다른 흥미로운 특징은 과도한 단순화다. 이는 정서영이 작품에 투영하는 철학과 인식론의 가장 아름다운
특징 중 하나다. 작가는 모든 사물에 모호함이라는 새로운 터를 마련해준다. 이를 통해 우리는 작가가 작품을 그것의 조건으로부터, 심지어 그것이
속한 물질문화로부터 어떻게 해방시켜왔는지를 천천히 이해하게 된다.
리듬
〈1년에 한번은 치워야 할 것〉(2007)은 시멘트와 모조식물로 구성된
작품으로 초현실적인 꿈의 생산품처럼 보인다. 정서영의 조각은 계속되는 기록의 과정으로 읽힐 수 있는데, 이 기록은 사물 안에서 혹은 사물을 통해서 구체화된다. 여기서 자연의
모습은 우리 눈에 하나의 스펙트럼으로 들어온다. 이곳에 있는 듯 보이지만, 실은 없다. 이 식물은 인공물이고,
시멘트 또한 그러하다. 둘 다 만들어진 것이다. 온전히
사람의 영역에서 비롯된 사물이다. 이 작품은 무엇을 기록한 것인가? 생산의
문제를 다루는 여러 방법과 죽어있는 물질에 새 생명을 불어넣는 방법에 대한 기록이다. 서구 낭만주의
전통을 따라 해석한다면 내적인 것을 비평과 인식론의 영역으로 승화시키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정서영 작품의 형식미가 아니라 (낭만주의의 전통처럼) 그의 작품 안에서 발생한 리듬의 역할에 대한 세심하고 깊은 이해를 통해 가능한 것이다.
우리가
실재(the real)와 맺는 관계는 결국 리듬의 문제로 귀결된다. 만약
그 실재가 리듬을 가지고 있으면 우리는 그것을 생명이라고 가정한다. 반대로 그 실재가 리듬이 없으면, 그것은 불활성적인 것, 생명 없는 물질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이미 1800년 무렵부터 노발리스와 같은 시인들은 이런 이분법에
의구심을 품었다. 그러다가 끊임없이 변하는 물질의 성질을 설명하기 위해 리듬에 관한 담론이 제기되었다. 예를 들어 생물 물질은 매 순간 변한다. 세포는 우리가 모르는 사이
분열하고 변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누적된 변화가 가시화되고, 우리는
거기서 순차와 리듬을 감지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무기물질도 변화에 영향을 받는다. 우리 주위의 모든 것에 영향을 주는 리듬에 대한 이러한 고찰은 역동적인 기류를 발생시킬 수 있는 관계와 힘을
생성한다. 세월이 많이 흐른 뒤에야 비로소 이러한 동적 에너지에 대한 논의가 철학계에서도 이루어지게
되었다. 서구에서 리듬의 개념에 처음으로 관심을 가진 이는 프랑스 철학자 가스통 바슐라르 그리고 뒤이어
앙리 르페브르였다. 리듬은 철학의 맥락에서 시간을 이해하기 위해 매우 중요한 개념으로서3, 서로 다른 시점 사이에 지속되는 시간을 뜻하는 ‘지속’과는 점차 구별되었다.
리듬은
시간을 연속적인 상태로서 제시할 뿐만 아니라, 어떤 불연속이 발생할 때 인지할 수 있는 긴장을 포함한
것으로서 또한 제시한다. 정서영은 예술의 영역 밖에서 생명을 가지는 물질을 갑자기 예술 작품의 재료로
사용하곤 한다. 이를테면, 산업 원료로서 지속되어온 생이
중단되고, 또 다른 생이 시작되며, 이로써 작품에 또 다른
시간에 대한 감각이 내재되는 것이다. 정서영은 고유한 작업 방식으로 수명이 한정된 평범한 물질에 예술이
품은 시간의 상징적 차원을 덧입힌다. 그의 작품은 이러한 시간의 상반된 속성들 사이의 긴장을 드러낸다. 시간은 고정된 사실이 아니라 잔잔한 흐름 또는 일종의 연속적인 상태로서 인간이나 사물에 찾아오는 것이다. 작가의 작업과정과 작품 속 시간은 작품 내부에서 반복되는 연속성과 불연속성 사이의 무한 진동의 산물이다. 리듬은, 작가가 무기물에 형태를 주고, 있을 곳을 주고, ≪오늘 본 것≫에서처럼
다른 작품과의 관계성을 만들어 줌으로써 예술가와 그 무기물 사이에 형성되는 낱낱의 연결에 물질도 영향을 받는다는 점을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리듬은 삶이 생물학의 영역에 속하는 생명체만의 특징이 아니며, 이
세상의 모든 존재와 공유하는 공통점임을 인식하게 한다. 정서영의 작품에서는 리듬, 동적 에너지, 실재에 대한 비정태적 경험이 두드러진다. 이 작품들은 우리에게 인간만 사물의 존재를 인식하는 것은 아니라고 이야기한다.
사물도 자신이 살아온 삶에 대해서 그리고 자신이 어떤 상황에 처해 왔는지 ‘안다.4
〈지금이
바로 그때〉(2012)를 살펴보자. 책상이 세 개의 목재
가대 위에 자리를 잡았다 (아니, 보기에 따라 자리에서 벗어나
있다고도 할 수 있겠다). 책상과 가대 사이에서 여러 개의 각목이 균형을 지탱하고 있다. 앉아서 업무를 보는 용도로 제작된 작업용 책상. 그 위에 놓인 커다란
유리판. 그 아래에는 가대. 이 책상은 제 기능을 수행할
수 없다. 책상은 세상의 수많은 사무직 노동자들이 일하는 책상과 동기화되어 있다. 하지만 이제 그중 하나가 불능이다. 여전히 책상이지만, 얇은 나무다리 위에 얹힌 그 모습은 차라리 공중에 높이 떠받들린 발레리나에 가깝다. 그것은 아마도, 오랫동안 앞에 앉아있는 모든 인간이 차지하고 있는
다른 책상을 공중에서 관찰할 수 있을 것이다. 포드식 자본주의와 그 맥락 속의 책상을 다룬 책은 많다. 하지만 이처럼 유별한 위상의 책상은 시라고 부를 만하다. 나무 가대
위에 얹은 책상은 포드식 대규모 공장에서 생산을 지원하기 위한 책상과 예술가의 스튜디오나 자택에서 창조적인 작업을 할 때 쓰이는 책상 사이의 대비를
선명히 드러낸다. 책상은 남성 노동과 여성 노동의 차이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책상은 젠더 지표이다. 대규모 공장에는 성인 남성 노동자가 절대다수를
이루었고, 여성은 극히 소수였다. 책상의 평평한 윗면은 사회적
갈등을 드러내는 평면적인 시나리오다. 현장 노동의 대척점에 있는 특정한 유형의 노동, 즉 무급 가사 노동에 대한 시나리오이며, 예술가가 스튜디오의 작업대에서
수행하는 창의적인 작품 활동에 대한 시나리오다.
불- 그리고 물질에 대한 상상
2005년
작품 〈모닥불〉은 불을 파란색으로 표현했다. 본래 불에는 주황색, 적색, 노란색, 파란색이 공존하지만, 이
모닥불은 온통 파랗다. 불은 우리의 통념과는 다른 모습의 자신을 상상할 수 있을까? 불은 물과 더불어 지구의 물질성을 설명하는 데 사용된 기초 원소 중 하나다.
정서영의 작업은 철학적임과 동시에 시학을 체현한다. 합리적인 사유의 특징인 체계화가 필요함을
작품에 담아내면서도, 모든 체계를 한없는 경험의 풍성함 앞에서 고집스럽게 무너뜨린다. 여기서 경험은 표면적인 지각으로는 실현될 수 없는 심층의 경험을 말한다. 작가의
경험에 대한 개념은 주체의 개별적인 상상을 초월하는 (시적인 경험에 고취된) 심오한 상상을 통해 존재를 제한하기를 요구한다. 불이 파란 것은
그러한 까닭이다. 인류사적 사건으로서의 불의 발견이나 리비도적 에너지를 불에 비유하는 관습은 이 파란
풍선 같은 모닥불을 통해 유머러스한 면을 얻는다. 모닥불은 젊은이들이 향유하는 문화에 속한다. 불을 다스리는 일과 오줌을 갈겨 불을 끄고 싶은 충동을 연관 지어 생각하는 연령대가 즐기는 것이다. 정서영의 다른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모닥불〉은 창조적인 공상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 공상은 우리의 의식이 다양한 가능성과 시나리오 사이에서 진동하는 장소이고
작품은 거기에서 등장할 것이다. 모닥불은 원시의 불이다. 인간에게
뭔가를 주었던 최초의 불이다. 작가는 먼저 이 작품을 다른 조각과는 분리된 독자적인 작품으로 감상하고픈
우리의 내적 욕구를 부추긴다. 그리고 이내 작가의 예술세계 전체 맥락에서 작품을 파악하고자 하는 열망을
깨운다. 이처럼 계산된 방법을 ‘이미지의 창조적 출현을 일깨우기’로 명명할 수 있을 것이다. 정서영의 시학은 평범한 사물에 대해 작동하는
일반 인식론과 작가 자신의 물질에 대한 상상의 형이상학을 교배한 결과물이다. 정서영은 물질이 상상하고, 꿈꾸고, 갈망하고, 원할
수 있다고 상상한다. 물질을 변화시키는 것은 비단 기업이나 예술가만이 아니라 물질 자신일 때도 있다. 물질도 행위한다. 그리고 정서영은 물질에 내재된 이 에너지를 해방시켜
그의 놀라운 작품으로 흐르게 한다.
공기를
닮은 고체
〈말
그대로〉(2022)는 소금과 목공용 접착제를 사용해 바닥에 소금 자국을 만든 작품이다. 소금은 물이 증발한 이후의 잔여물인데도, 이 작품을 보는 이는 사라져버린
물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어느 회의에서 해양생물학자 디바 에이먼이 모든 유기체의 생명에 소금이
중추적임을 역설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5 인간도 예외는 아니어서 소금은 자연스럽게 인류 생활사의 일부가
되었지만, 정서영의 〈말 그대로〉가 암시하는 소금물은, 바다와
마찬가지로, 결코 우리의 갈증을 풀어줄 수 없다. 소금길, 소금 광산, 소금 의식, 종교… 잠시일지라도 생각은 여러 방향으로 뻗어나가고 만다. 하지만 이 작품은 (아마도 스테인리스 철사로 만든 〈평범한 날〉(2022)의 바로 옆에
있었기 때문일 텐데) 자연을 언급하기보다는 전시에 광물이라는 층위를 더할 가능성에 가깝다. 바닥의 흔적은 배관이나 설비 고장으로 인한 누수 사고가 일어났던 듯한 인상을 준다. 흔적은 언제나 이야기를 상상하도록 자극한다. 저 흔적이 생기기까지
과연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들판이나 눈에 찍힌 동물의 발자국을 보면 거의 반사적으로 궁금해한다. 얼마나 된 것일까. 저 발자국의 주인은 언제 이곳을 지나갔을까. 언제 물기가 증발해 우리 눈에 보이도록 소금 자국을 남겼을까.
이러한
작업은 결코 똑같이 재현될 수 없다. 이 작업에는 과거 그리고 미래가 있을 것이며 그 과정과 결과물은
늘 다를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생각에는 한계가 있어서 수분이 완전히 마르고 소금이 바닥에 고정되기까지
이 작업이 통과한 수많은 ‘상태들’을 선명하고 상세한 상상력으로
추적하기란 불가능하다. 우리의 지각은 과정에 대한 분절된 의식을 생성하기 마련이고, 변화를 고정된 하나의 형태나 상태로 환원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이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소금과 접착제라고 짐작하지만, 오히려 이미 사라지고 없는 물이야말로
진짜 핵심일 수도 있다. 현장에 있는 것 즉, 바닥에 무작위적인
형태를 이룬 소금과 접착제와 현장에 없는 것 사이의 관계가 이 작품이 품고 있는 신화다. 신화는 언제나
더 이상 이곳에 없는 그 무엇이 돌아올 가능성에 관한 이야기다. 여기서 사라진 것은 다름 아닌 물, 세상의 모든 존재에 있어 가장 기초적인 요소다. 우리는 바닥을 수놓은
소금 결정을 보는 것만으로도 물의 귀환을 상상할 수 있다.
신화적인
에너지로 이야기가 확장된 만큼 바로 가까이에 설치된 〈평범한 날〉(2022)에 대해 살펴보는 것이 좋겠다. 천장에서부터 늘어뜨려진 작품의 재료는 스테인리스강 철사다. 섬세한
수작업으로 완성된 이 작품을 보는 일에는 노력이 필요하다. 순백색의 벽면과 허공을 배경으로 설치된 작품은
그 어렴풋한 색이나 소재의 특성상 모든 디테일을 눈으로 포착하기가 대단히 어렵다. 바닥의 소금 자국처럼, 철사가 이룬 형태는 그것을 완전히 마음에 담아두려는 우리의 시도를 어떻게든 피해 달아나고 싶은 것만 같다. 철사는 고체이지만, 소금처럼 쉽게 형태를 바꾸지 않는다. 하지만, 〈평범한 날〉은 마치 하나의 철판으로부터 철사를 한 올씩
공들여 ‘머리카락’처럼 풀어 내린 듯한 느낌을 준다. 연속적인 금속 평판을 해체하여 낱낱의 섬유들을 뽑아낸 후 실을 자을 수 있을 정도로 가지런히 골라놓은 듯하다. 불현 듯 스테인리스강은 전혀 다른 물질을 연상시킨다. 마치 금속이
자신의 정체성을 잊고 양털실이 된 것 마냥… 존재의 형성은 곧 부재의 형성이다. 이런 방식으로 우리는 눈앞에 있는 것 이상을 봄으로써 작품에 대한 우리의 상상을 확장한다. 기억도 더 이상 특정한 과거나 사실을 회상하는 수동적인 역할에 머무르지 않는다. 작품이 소금 자국이나 철사 묶음과 같은 실제 형태를 취하기 이전에 어떤 상태였는지 기억이 능동적으로 재구성할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작품과 작품 아닌 것 사이의 게임을 통해,
우리는 작품 아닌 것은 사라짐을 통해 존재하게 된다는 것을 깨닫는다.
내장
기관
칼
세이건은 말했다. “뇌는 근육과 같다.”6 이 명제를 받아들인다면, 그
근육을 지탱하기 위한 뼈를 찾아야 할 것이다. 정서영은 최근작 〈뇌 속의 뼈〉(2022)에서 그 뼈를 완성했다. 처음 시작은 가느다란 목재로 이루어진
그리 탄탄하지도 오래갈 것 같지도 않은 구조물이었다. 그 형상은 한 그루의 나무 또는 그 밖의 어떤
식물을 연상시킨다. 그러다가 이 목재 구조물이 청동으로 주조되면서 다른 힘을 얻는다. 보는 순간 발레 바가 떠오른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 이미지가 〈뇌
속의 뼈〉라는 제목과 제법 잘 어울린다. 발레 바는 무용수가 신체와 자세 훈련을 위해 정해진 연속 동작을
효과적으로 연습할 수 있도록 고안된 장치다. 미숙한 무용수들이 균형 잡는 기술을 연마하는 데 쓰인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정서영이 만든 가늘고, 즉흥적으로 이어
붙인 듯하며, 나무의 형상을 닮은 이 바는 도움이 필요하다. 다섯
개의 팔이 자라났기 때문이다.
이런 본체의 확장은 전체 구조물의 균형을 위태롭게 한다는 점에서 대범한
시도일 수 있다. 실제로 작품이 넘어지지 않도록 다섯 개의 가지는 천장에 고정된 철선에 연결되었다. 그리고 머지않아 더 많은 철사가 필요할지 모른다는 듯 조각의 반대편 끝에는 여분의 철사 다발이 걸려 있다. 한편, 조용히 작품을 감싸는 금빛 녹도 시선을 사로잡는다. 이 은연한 금빛은 경쾌한 느낌과 따뜻한 온기를 동시에 불어넣는다. 마치
뇌에 뼈를 심어주겠다는 이 간단치 않은 기획이 사실은 매우 간단한 수단으로 실현할 수 있다고 암시하는 느낌마저 든다. 하지만 이 금빛 파티나는 또 다른 상징성을 가진다. 우리가 아는
나무라는 물질이 금빛 녹이 있는 청동으로 된 새 몸을 얻었으므로, 본연의 불안정성을 초월하여 오랜 세월을
견딜 힘을 가지게 되었음을 내비치는 것이다. 긴 탐색 끝에 이 형태에 도달함으로써 〈뇌 속의 뼈〉는
마침내 스스로 자기실현의 형태를 찾았다.
〈가운데
서고 가운데 눕고 가운데를 열어서 밖으로 나가 다시는 돌아오지 마라〉(2002)는 접힌 채 바닥에 놓인
비건 가죽이다. 전술한 작품이 신체의 일부인 뼈와 뇌를 생각하게 했다면, 이 작품은 피부를 연상시킨다. 이 피부는 무기물로 만들어졌다. 지능이 인공적인 물질로 만들어지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말이다. 형태를
보자면 유기물도 아니고 기계도 아니다. 단순한 모습이지만 제대로 묘사하기란 매우 어렵다. 왠지 언어는 이 작품 곁에 오래 머무르지 못하고, 작품은 저만의
방식으로 미니멀리즘의 미학에 강력한 한 방을 날린다. 사건처럼 보이기도 하고, 어떤 행위가 끝난 뒤에 하나의 흔적으로 남은 물질 같기도 하다. 정서영의
작품세계에는 물질의 생에 대한 깊은 이해가 깔려 있다.
산업이 각종 재료를 개발하여 사용하고, 그 산물을 우리는 소비한다. 다시 그 물질을 예술가가 작업에 활용하면
복합적이면서도 모순적인 판단의 대상이 된다. 물질은 자신이 기인한 산업의 현실을 드러내기 마련인데, 바로 그 점 때문에 고귀하지 않은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하지만
정서영은 물질에 대한 자신의 인식론을 통해 이제껏 마주친 모든 물질에 제 역할과 자리를 찾아준다. 정서영의
실천 속에서, 예술은 전통적인 조각의 영역에서 배제되었던 재료를 품어주는 역할을 한다. 작가는 기존 문화의 맥락에서 형성된 물질의 정체성을 해체하여 제2의
생명을 주고, 그 과정을 통해 작품을 탄생시킨다. 바꾸어
말해보자면, 산업이 물질에 역할, 목적, 기능을 부여한다면 정서영은 그 물질들을 잠에 들게 한다. 〈가운데
서고 가운데 눕고 가운데를 열어서 밖으로 나가 다시는 돌아오지 마라〉가 그렇다. 작가는 이 작품이 서거나
눕도록 허락하고, 우리에게 공간의 중심을 열어준 후 사라지도록 허락한다.
이런
방식으로 정서영의 최신작들은 인간의 지성과 사라짐을 대비시킨다. 이번 개인전에서도 비중 있게 다뤄진
이전 시기의 작품들에는 일종의 “무거움”이 있었다. 그런데 이 무거움이 이제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 듯하다. 작가의
예술세계를 응축하여 보여주는 ≪오늘 본 것≫의 기획과 유동적인
공간 구성 사이의 상호작용 덕분에 이런 변화의 흐름이 더욱 분명하게 포착된다. 예전 작품에서는 의식에
의한 제약의 메커니즘이 두드러졌다면, 최근의 작업에서는 그것을 해제하는 가뿐함과 여유로움이 감지된다. 물론 작가의 의도는 실재를 입맛대로 바꾸거나, 현실의 조건에 순응하는
물질 또는 관행적으로 실행되는 결정론적인 행동양식들을 제어하려는 것이 결코 아니다. 다만, 우리가 그녀의 작품을 접함으로써 어떤 삶의 과정들이 우리를 풍요롭게 하는지 관찰하고 인식하는 감수성을 얻기를
바라는 것이다. 나아가 그러한 감수성이 꾸준한 훈련을 통해 굳이 의식하지 않아도 발휘되기를, 그리하여 우리가 주위의 모든 존재와 공존할 수 있게 되기를 소망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본 것≫을 정서영 작가의 작품 활동에 대한
회고전으로 규정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그보다는 모든 전시된 작품들을 동시에 현실화하고, 모든 작품과 우리를 위해 영원한 오늘로서의 현재적 순간을 만드는 놀라운 기회이다. 이 ‘오늘’을 우리는
소중히 여겨야 한다. 과거로 시선을 돌리고 싶어 하는 충동적 노스탤지어가 오늘을 집어삼키게 두어서는
안 된다. 반대로 현실도피주의적 감상에 젖어 시선을 가까운 미래에 두고 작품을 대해서도 안된다. 우리는 현재에 서 있어야 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작품을 마주할 때, 정서영의 조각은 내부에 응축되어 있던 다양한 시간에 대한 이해를 전하고, 또
초월적인 에너지를 더 얻을 것이다. 그의 작품을 통해 우리는 관찰 가능한 현상과 관찰 불가한 현상을
구별하는 방법을 배우고, 관찰된 증거가 삶과 예술에서 가지는 인식론적 의미를 분별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일순간에 삶과 예술의 영역이 융합될 것이다. 정서영의 조각을 통해
우리는 우리 주변 세계를 보다 잘 해석할 수 있게 될 것이다.
- 프랑스 시인 파울 첼란이 남긴 명언.
- Elaine
Scarry, The Body in Pain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1985).
- 가스통 바슐라르, 『지속의
변증법』(1936); 앙리 르페브르, 『리듬분석: 공간, 시간 그리고 일상생활』(1992)
- ‘안다’를 외따옴표로 구별한 이유는 이것이 인간의 ‘앎’과는 다른 개념이기 때문이다. 사물에는 정신이라 할만한 것이
없다. 그러나 지난 수십 년 사이에 의식은 신경 작용의 산물 그 이상이라 주장하는 다양한 이론들이
발전했다. 가령, 범신론이 그런 예다. 여기서 이를 상세히 다루는 것은 적절치 않지만, 한 가지는
짚고 넘어가고자 한다. 정서영의 작품은 인간이 세계의 물질과 사물과 주고받는 상호작용의 복합적인
역학을 은연중에 성찰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이 역학은 시간과 지각에 대한 우리의 상식을 벗어나고, 진화생물학으로부터는 멀어지며, 양자물리학에 더 가깝다.
- 디바 에이먼. “패널
토의: 건강한 바다를 위한 보호 노력”에서의 발언 (Our Ocean Conference 2019, 2019).
- Carl
Sagan, Broca’s Brain: Reflections on the Romance of Science (New
York: Random House, 1979),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