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서영은
자신을 언제나 ‘조각가’로 소개해왔지만, 그의 조각은 근대 조각의 문법과는 거리가 멀었기에 조각 그 자체보다는 다른 언어를 경유해 이해해야만 하는 경우가
많았다. 평자들은 그의 조각을 마주하면서 무엇보다 ‘사물’에 관해 말해야만 했다. 좌대를 걷어치우고 주체의 정신을 대리하는
것으로 여겼던 추상적인 형이 사라진 자리를 상대적으로 익숙한 사물의 형이 채우긴 했지만, 사물은 자기자신의
존재를 넘어 다른 ‘이야기’를 하기 위해 동원된 것은 아니었다. 정서영이 본격적으로 활동한 1990년대 중반, 한국 미술의 세계화에 발맞춰 비엔날레가 한국 미술계에 이식되고, 다양한
미디어에 대한 관심이 ‘설치’와 ‘미디어 아트’라는 형식을 경유해서 유행처럼 번져나갔다.
1980년대에 정점에 달했던 리얼리즘의 미학이 그 역사적인 시효를 다한 시점에 정치적인 미술을 재발명해야 하는
등의 시대적인 요구 앞에 그의 사물은 침묵하는 것처럼 보였다. 국제적으로 활동하는 큐레이터가 영토를
넘나들며 지나간 역사의 시간을 기억하고 회고할 작품을 찾아다닐 때 정서영의 사물은 그가 살아온 시간과 공간에 관해 극적인 서사 하나를 구성하기를
거부했다. 전 지구적 네트워크에 열광하며 사물의 완고함보다는 기호로서의 이미지의 가벼움과 유동성을 유희할
때에도 그의 사물은 고집스럽게 공간을 점유할 뿐이었다. 정서영의 작업은 특정한 영토에 귀속될 수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탈영토화의 프로그램과 뜻을 같이할 수도 없었다.
1990년대
이래 한국의 미술계에서 정서영의 작업의 날 선 감각이 동료 작가와 큐레이터뿐만 아니라 다음 세대의 작가에게도 말할 수 없는 영감의 장소였음에도
그간 그에 합당한 담론의 공간을 갖지 못해왔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의 작품은 ‘역사’와 ‘정체성’이 제 목소리를 주장할 근거가 될 수도 없었고, 자본의 속도에 몸을
싣고 끊임없이 미끄러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조각의 침묵은 갖가지 오해를 낳기도 했다. 그의 사물이 ‘의미’와 ‘서사’의 시대적인 요구에 침묵하는 탓에 정서영의 조각은 근대 조각의
자율성을 배반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자율적인 것으로 이해되기도 했다.
이를테면 큐레이터 김현진은 정서영의 작업이 “말의 의미를 사물에 종속시키지 않고 사물 자체로
환원시킨다.”고 썼다.2 정서영의 조각에서 사물이 세계 속으로 외연을 확장 시켜 그럴듯한
의미화에 다다르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언어적인 차원의 의미의 영역이 ‘사물 자체’로 닫힌다는 해석은 타당하다. 하지만 이는 그간 상대적으로 경시되어온, 심지어는 억압되어 왔다고도 이해되는 사물의 ‘주권’을 회복하는 일은 아니다.
의미를 부여하는 인간 고유의 영역 반대편에
무력하게 의미의 덫에 포획되는 사물이 있고,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어온 그 일방적인 폭력의 구조를
전복시키는 것이 정서영이 해온 일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의 작품에서 의미는 고정될 수 없는 것이지
반드시 해체되거나 거부되어야만 하는 영역은 아니다. 즉 정서영의 조각 앞에서 신체는 언어에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현상학적 경험의 장에 포획되지 않는다. 사물이 ‘의미’라는 이름으로 세계 속에 영원히 머무를 수 없는 것은 맞지만, 이를
두고 단 한 순간도 사물이 관념의 형태로 우리의 의식에 상을 띄우지 않는다고 말할 수는 없다. 정서영은
언제나 난생처음 보는 것처럼 사물을 대했고 사물을 두고 “어느날 갑자기 맞닥뜨리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지만, 동시에 자신의 “무의식적이면서도 필연적인 가치부여”, 즉 “투사”의 장소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는 물론 사물의 주권 회복이라는 정치적인 프로그램도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사물을 무의식의
발현을 위한 장소로 삼는 것도 아니었다. 이는 그 스스로도 “이율배반적”이라고 말할 만큼 “사유의 긴장상태”를
의미하는 것이었다.3
자신의
내부로 닫힌 사물이 중심이 된 그의 조각은, 평자들에게 미술사의 이런저런 용어들 사이에 이를 위치시켜보려는
욕망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이를테면 누군가는 “미술의 사회화와
의식적인 거리를 두고 있는” 그의 조각을 두고 “정서영은
모더니즘적인 조각 언어 내부에 존재”하며, 그의 프로젝트를 “모더니즘 다시 보기”라고 말하기도 했다.4
정서영의
조각을 미술의 순수한 자율성과 사회를 향하는 자율성의 외부, 둘 중 그 어디에도 위치시키기 애매한 상황에서
누군가는 그럼에도 전자의 손을 들어주곤 했다. 또는 그의 작품이 단순히 ‘조각 언어 내부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외부로 나가지만 결국 다시 돌아온다고 주장하며 자율성의 논의를 한 차원 더 밀고 나가려는 시도도 있었다. 큐레이터 김장언은 “(정서영은) 끊임없이
조각으로 다시 환원”하는데, 이는 “조각의 역사적 무거움을 해체하고 사물로 조각을 환원시키지만, 다시
그것을 조각의 문법으로 등장시키는 것이다.”라고 썼다.5 조각의 언어 내부에 머물든, 혹은
사물을 경유해서 그 외부로 나갔다가 다시 돌아오든, 여기서 ‘조각’은 정서영의 사물이 결국 넘어서지 못하거나, 또는 넘어서더라도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게 만드는 벗어날 수 없는 ‘망령’처럼 여겨졌다.
그러나
정서영의 사물이 무엇보다 거부하고자 했던 것이 바로 근대의 조각이 창출하고자 했던 ‘환영’ 혹은 ‘가상’의 공간이었다. 그의 조각이 사물의 침묵과 의미의 투사 사이의 팽팽한 긴장 속에서 관념 하나를 공간 속으로 흘려보낼 때에도, 사물은 우리에게 주어진 ‘기능’ 그
이상의 의미를 허락하지 않았다. 〈전망대〉(1999)는 저
너머의 장소를 바라보는 만큼만 전망대였으며, 〈수위실〉(2000)은
어딘가에서 우리를 감시하는 그 시선만큼만 수위실이었다. 이를 두고 박찬경은 정서영의 사물은 “기능-동일적”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에 따르면 “(정서영의 작품들이) 모방하는 것은, 사물 자체라기보다는 모든 사물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그들의 기능 또는 신체와 인접한 관계이다. 카펫이나 모노륨은 바닥재로서의 기능을, 전망대는 전망하는 기능을, 꽃은 아름다운 장식이라는 기능 이외에
특별히 다른 것을 모방하지 않는다.”6 이는 정서영이 조각을 떠받치는 좌대의 합의된 권위나 조명 장치의
극적인 효과를 극도로 배제하면서 그의 조각을 선험적인 상징의 영역이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의 신체의
현존이 맞닥뜨리는 실재적인 경험의 차원으로 끌어내리려는 이유이기도 하다.
정서영의
조각에서 사물은 현재 속에서 존재하고 기능하며 그 이상의 서사를 허락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딘가로 한발 후퇴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 장소가 근대 조각의 환영의 장소는 아니더라도 사물과 우리
사이에는 ‘신체와 인접한 관계’ 그 이상의, 그 뒷면의 공간이 한 겹 더 존재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의 작품
〈전망대〉에 관해 정서영은 직접 제작 과정을 밝힌 적이 있다. 작업은 그가 엽서 한 장을 받아 든 바로
그 순간에 시작되었다. 그 엽서는 휴가지로 떠난 친구가 보내온 것이었고 그 엽서에는 “북유럽의 70년대식 수영장 사진”이
인쇄되어 있었으며, “한 구석에 손톱만 한 크기의 전망대 이미지”가
있었다. 이미지에서 “극히 작은 크기”였던 전망대를 현실 공간으로 끌고 오는 과정에서의 어떤 상태가 그의 조각이었다.
그는 그 상태를 두고 “내 손안에 있는 전망대도 아닌, 저
멀리 있는 전망대도 아닌 나와 일정한 육체적 거리가 생기는 위치를 만들어주는 그 전망대”라고 말했다.7 이때 ‘내 손안’의 공간은 그가 도착한 엽서를 집어 들고 마주한 전망대, 즉 ‘이미지’로서 소유할 수 있을 전망대일 것이다. ‘저 멀리’의 그 장소 역시 현실이 아닌 ‘관념’의 형태로만 머무른다는 점에서 마찬가지로 이미지적 상태를 의미할
것이다. 정서영은 ‘소유’와 ‘관념’으로서의 전망대가 아니라 ‘현실’의 전망대를 원한다. 이것이 박찬경식으로 말하자면, 정서영의 조각이 사물의 ‘기능’을 ‘모방’해서 ‘신체와 인접한
관계’를 생산해야만 하는 이유다.
그렇다고
그의 조각이 그저 ‘이미지’를 ‘현실’로 끌어오는 일을 수행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전망대’가 이미지로
머무는 것을 원치 않았지만, 그저 ‘현실’이 되는 것 앞에서도 망설였다. 그 이중의 망설임의 다른 이름이 곧
자신과의 ‘일정한 육체적 거리’일 것이다. 그는 전망대의 “크기”를 “결정”한 것을 두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
전망대의 크기를 만든 결정이란 것이 사실은 내가 이 사물을 어떤 세계관 속에서 보는가의 문제가 반영인 거다. 무엇보다
내가 처음에 완전히 상관없는 시공간인 저 멀리 70년대 북유럽에서 날아온 그림엽서의 사진에서 우연히
작은 전망대를 보게 된 순간이 중요하다.”8
조각가는
여기서 ‘이미지’와의 마주침의 ‘순간’ 역시 중요하다고 말하고 있다. 이는 ‘소유’와 ‘관념’이 아니라, ‘현실’에서 기능하고 작동하기를 원했던 그의 조각이 감당해야 하는 감각이 한 겹 더 있다는 것으로 읽힌다. 그는 현실의 조각을 통해 전망대의 이미지적 상태를 극복하고자 했지만, 이는
동시에 이미지와의 ‘우연한’ 만남의 감각을 향해야만 했다. 정서영의 조각에서 이미지의 부정이 역설적으로 이미지적 상태의 보존으로 이어지는 것은, 그도 밝혔듯 우선 그 ‘크기’에서
기인할 것이다. 그의 전망대는 공간에 안정적으로 서 있기 위한 4개의
다리와 누군가가 전망을 내다보기 위해 그 위로 올라갈 수 있을 사다리를 갖추고 있다. ‘기능’에 충실한 사물을 ‘모방’한
조각의 형은 주체의 신체와 익숙하고도 ‘인접한’ 관계를 맺는다. 하지만 스케일의 측면에서 정서영의 전망대는 주체의 신체와 관계를 맺는 동시에,
주체의 자리를 은근슬쩍 밀어낸다. 조각의 크기는 ‘전망할
수 있음’의 가능성의 공간과 ‘전망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의 공간, 바로 그 사이에서 ‘결정’되는 것으로 보인다.
재료에
관해서도 말해야만 한다. 그의 전망대는 오직 나무로만 세운 구조의 단순함 탓에, ‘멀리 내다봄’이라는 동사 너머로 의미가 뻗어나가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나무로 이루어진 선들은 그 폭과 길이를 달리하며 전망을 위한 구조 하나를 지면 위에 세울 뿐이다. 하지만 구조의 단순함은 작은 차이를, 조금의 엇나감을 감각적으로
도드라지게 만들기도 한다. 조각의 네거티브 공간을 향해 있는 전망대의 창은 나무가 아닌 유리로 만들어져
있기에 전망대 주변의 공간을 빛을 매개로 자신의 표면 위에 새긴다. 창의 유리가 네거티브 공간과 조각이
현재 속에서 조응하는 장소라면, 나무로 된 조각의 뼈대는 빛을 내부로 흡수하며 상대적인 감각의 차이를
생성한다. 빛을 대하는 매질의 차이가 멀리 보기 위한 전망대의 눈을 현재와 현실로, 중력을 거스르며 지면을 딛고 서고자 하는 조각의 신체를 이미지적 상태로 조금 밀어낸다.
현실의
사물을 이미지적인 차원으로 밀어내는 조각의 스케일은 비단 신체와 조각 사이의 애매한 관계 때문만은 아니다. 아트선재센터에서
열린 동명의 전시 ⟪전망대⟫(2000)에서
조각의 주변을 말끔히 정리하고, 공간에 전망대 하나가 덩그러니 놓인 모습은 멀리서 날아온 엽서 속의
그 전망대와 감각적인 위상에서 크게 다르지 않다. 하얀 벽의 미술관에서 전망대를 만나는 일은 예측 불가한
갑작스러운 마주침이라는 점에서 북유럽이라는 ‘완전히 상관없는 시공간’에서
날아온 엽서 속의 전망대를 ‘우연히’ 만나는 일의 감각을
보존한다. 드넓은 공간에 비해 상대적으로 ‘작은’ 전망대를 마주하는 일 역시 스케일의 측면에서 사진 속의 손톱만 한 이미지의 전망대를 ‘보게 된 순간’의 감각을 닮았다.
정서영의
조각을 통해 이미지는 현실로 육화하지만, 그 현실은 동시에 이미지가 되고자 했다. 온전히 육화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이미지적 상태에 머무는 것도
아닌 바로 그 ‘상태’가 곧 그의 전망대였다. 우연히 이미지를 마주쳤을 때의 감각과 현실에서의 이미지의 현존의 감각이 그의 조각을 통해 겹쳐지는 순간이 있었다. 그 겹침은 이미지와 이미지 사이의 ‘병치’처럼 같은 위상의 평면이 평등하게 뒤섞이는 그런 순간은 아니었다. 사물화된
현존은 이미지적 상태를 위협하고, 역으로 이미지적 상태는 그 현존을 위협하는, 그래서 두 존재론이 팽팽히 맞서서 우열을 가릴 수 없는 순간에 가까웠다. 평자들이
정서영의 조각에서 발견한 감각은 바로 이런 것이었다.
큐레이터 현시원은 정서영의 작업이 “두 쌍 이상의 분열적인 현실을 마주치게 하려는 교차학에 가깝다.”고
썼고,9 박찬경 역시 비슷한 맥락에서
“익숙함과 낯설음의 변증법”을 말했다.10 무엇보다 정서영 스스로가 “사물”과 “인간”의 “물리적 의미”와 “보편적
의미” 사이 그 어디에도 정박하지 않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는
이것이 조각의 ‘방법론’ 따위가 아니라 그 사이에서 “달라야 할 의무”라고 강조하기도 했다.11 지금까지 예로 든 〈전망대〉를 두고 말하자면 ‘보편적 의미’는 기능을 모방하며 현실로 내던져진, 기능하는 사물로서의 위상을 뜻할 것이며, ‘물리적 의미’는 현실에서의 그 기능이 무화되고, 이미지적 상태로 밀려난 공간 속의
외로운 현존과, 주체와 그 물리적 현존 사이의 우연한 마주침을 가리킬 것이다. 그가 그 사이에서 어디에도 정박하지 않아야 할 ‘의무’를 말한 때가 1989년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그해는 역사의 시간이 종언을 고했던 때이기도 하다.
서울대학교
조소과에서 수학할 당시 근대 조각의 문법에 한계를 느낀 정서영은 독일로 건너갔다. 그곳에서 조각가가
경험한 것은 한국에서는 듣도 보도 못한 현대조각의 방법론이라기보다 낯선 장소에서의 사물 그 자체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1990년 발표된 그의 초기작 〈베를린〉에는 당시 사물이 세계 속에서 어떻게 조각가에게 제 모습을 드러냈을지에
관해 짐작할 만한 이미지가 남겨져 있다. 여행 가방의 안쪽 면에 복사한 사진을 붙이고 가방의 내부를
잘 포갠 흰색 천으로 채워 넣은 이 작품에서, 사진은 작품의 제목이 암시하는 것처럼 작가가 1990년 베를린에서 찍은 것이었다. 조각가가 카메라의 셔터를 누른
장소는 브란덴부르크 앞 파리저 광장으로 이곳은 1989년 당시 한 세기의 종언을 선언했던 역사의 현장이었다. 광장을 가로지르던 베를린 장벽 주변에 모여 사람들은 지난 세기의 시간이 그 벽과 함께 무너져 내리는 것을 함께
지켜봤다. 1년 뒤 정서영이 그 장소에 도착했을 때에는 그 순간의 열기가 식고 지나간 역사의 형해만이
남은 채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누군가는 그곳을 찾는 관광객을 상대로 장벽의 파편을 귀걸이로 만들어
팔고 있었고, 조각가는 장식이 되어버린 역사의 파편을 귀에 건 친구의 모습을 사진으로 남겼다.
정서영을
그 역사의 흔적으로서의 사물로 잡아끈 힘은 우선 무거운 역사의 상징이 그저 장식이 되어버린 그 순간에 있을 것이다. 사물이 자신에게 부여된 지난 세기의 의미를 모두 기화시켰음을 보았을 때 조각가는 카메라의 셔터를 눌렀다. 하지만 의미가 무화 된 사물이 그 ‘순간’의 전부는 아니다. 귀걸이를 한 인물이 이미지의 오른쪽을 가득 채울
뿐만 아니라 그의 눈이 가려졌기에 우리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그 역사의 파편을 향하지만, 사진의 왼편에서
이를 바라보는 누군가의 시선이 있다. 역사의 외부에서 형해로만 남은 것을, 아니 이를 넘어 장식이 되고 기념품이 된 사물을 바라보는 시선은 역사의 내부로부터 알 수 없는 타자의 시선을
마주한다. 턱을 괴고 우리를 응시하는 그 시선은 의미를 부정하는 시선에 맞서는 알 수 없을 의미로 가득
찬 시선, 역사로부터 자유로운 시선의 반대편에 남아 있는 역사의 잔여물처럼 보인다.
정서영이
스냅사진으로 남긴 사물에 관한 새로운 인식론은 조각가로서 근대 조각에서 느꼈던 한계와 무관하지 않다. 그가 1994년 발표한 〈무제〉의 두 손은 신체로부터 분리되어 부유할 뿐만 아니라 나무 막대를 마주 잡지만, 상이한 힘의 방향 탓에 결국 ‘무위’를 향하게 되는 팽팽한 힘의 균형을 보여준다. 이 손의 탈육체화한
위상은 근대 조각이 “육체와 영혼으로 깎는” 수행이었음을
떠올려보면, 손의 신체로부터의 분리는 곧 그 영혼과 육체의 합일에 대한 조각가의 불신을 의미한다.12 정서영이 자신의 조각하는 행위를 두고 ‘정신’이나 ‘수행’이 아니라 ‘일’이나 ‘노동’이라는 표현을 즐겨 쓴 이유가 그러하다. 이렇게 보면 베를린에서 남긴 이미지가 손을 거치지 않은 카메라의 광학적 무의식의 결과라는 점 역시 사물을 포착하는
과정에서 신체의 아우라를 소거하는 일로 읽힌다. 탈육체화한 두 손이 특별한 사건을 일으키지 못하고 그저
사물을 향해 힘을 가하는 무위의 노동인 것은 근대 조각이 주체의 정신과 맺던 관계를 생각해보면 급진적이다. 근대
조각을 통해 조각가는 “초월에의 의지”를 드러내는 것이며, “우주와 자연의 이치에 이르고자” 한다.13 이는 곧 절대정신과의 합일을 꿈꾸는 것이다. 김종영이 어느 날 “신과의 대화가 아닌가”라고 말한 이유가 그러하며 최종태의 성모상이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있는 이유도 마찬가지다.14 정서영의 탈육체화한 두 손은 그의 조각에서 중요한 것이 도달해야
할 초월적인 세계가 아니라, 사물에 상이한 힘이 가해지는 바로 그 ‘순간’임을 말하고 있다.
정신과
물질의 합일이 깨어진 자리에 조각은 주체의 정신을 대리하는 것도 아니며, 그 정신이 목표로 하는 초월의
형상을 제시하는 것도 아니다. 선험적인 체계가 무너진 자리를 대신하는 것이 바로 사물이다. 하지만 세계의 모든 사물이 정서영의 관심을 사로잡은 것은 아니었다. 베를린
장벽의 파편이 그러하듯 그의 눈길을 끄는 사물은 역사의 형해이며 한때 근대적인 것의 잔해들이다. 하지만
그는 그 사물을 의미심장한 체계 안에서 바라보지 않는다. 그는 그것을 난생처음 보는 것처럼 바라본다. 귀걸이는 귀걸이인 만큼 귀에 걸리는 것이 당연하며 관광지에서 그 기념품을 두고 사진 하나를 찍는 일이 자연스럽다. 사물은 기능에 충실할 뿐 역사와 세기의 서사는 그가 카메라의 셔터를 누르는 그 순간에 중요한 것이 아니다. 앞에서 말했듯 사물의 의미가 무화된 바로 그 순간이 전부는 아니다. 사진을
현상하고 나서야 ‘우연히’ 발견한 누군가의 시선이, 오직 그 사물의 현재적인 의미에만 주목했던 시선을 마주 보는, 마치
저 멀리서 이를 반격하는 것만 같은 그 시선이 있다. 그 타자의 시선은 오직 관광객의 시선을 통해서만
사후적으로 발견된다.
독일에서
발표된 정서영의 몇몇 초기 작품은 바로 그 사진의 표면을 사이에 두고 교차하는 시선의 역학을 사물에 작동하는 힘의 차원으로 번역해보려는 시도로
읽힌다.
이를테면 플라스틱 화분을 쌓아 올린 〈고무줄 달린 조각〉(1994)은
오직 사물과 사물 사이의 힘에 의지해 형을 이룬다는 점에서 사물의 자기 지시성 그 이상의 어떠한 의미도 거부하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렇게 목적 없는 놀이 이후에야 비로소 보이는 다른 관계가 있다. 정서영은
사물의 표면에 달린 고무줄을 통해 자족적인 사물의 세계를 무너뜨릴 현실의 힘을 표상한다. 사물과 사물이
이루는 균형을 위협하는 이 힘은 사물을 쌓아서 형을 구축하기 이전에 보이지 않던 힘이다. 필름이 사진이
되었을 때 발견된 타자의 시선처럼 현실의 이 힘 역시 사후적으로 발견될 뿐이다. 정서영이 어느 글에서 “잘/못 볼 수 있는 그 고무줄이 마침내 보인다.”라고 썼을 때, 그 ‘마침내’가 사물 사이의 균형과 실재하지 않던 힘의 발견 사이의 그 시차를 의미할 것이다.15
1990년대
중반 정서영은 독일에서 한국으로 돌아왔다. 당시 조각가에게 한국은 눈길을 사로잡는 각종 사물들이 가득한
장소였다. 세계는 언제나 사물들로 가득했지만, 그가 그것들을
비로소 “세상에 가득 찬 물건”이라고, 그래서 “물질에서 눈을 뗄 수가 없다.”고 말한 것은 그 사물들이 상징계로부터 미끄러진 채 의미를 무화시키고 순수한 물질성 그 자체로 그의 감각을
향해 돌진해왔기 때문이다. 베를린 장벽의 파편이 그러했듯 그것은 지난 세기의 상징이 아니라 “정말 현실적”인 것, 내
눈앞에 그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는 것이었다. 사물은 일차적으로 물질 그 자체로, 어떤 형태로, 그의 표현으로 “형태의
현실성”을 강하게 드러내며 그의 망막을 향해 돌진해왔다. 정서영은
그 뻔뻔함을 마주하며 “공간을 버젓이 차지하고 내 시간에 끼어드는” 존재로
인식한다. 하지만 그 현상학적 감각에는 다른 단서가 따라붙는다. 조각가는
그 물질이, 형태가 “일종의 증거”라고 말한다.16
이는
사물이 내 눈앞에 존재함은 적어도 그것이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 과정에서, 즉 과거로부터 현재로 밀려 나오기 이전에 어떤 시간이 ‘있었음’을 증명한다는 뜻으로 읽힌다. 너무나도 현실적인 존재의 ‘물질성’ 이면에는 현재로 환원될 수 없을 다른 시간성의 차원이 한
겹 더 있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정서영은 현재로 환원할 수 없을 이 시간성을 두고 ‘유령’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가 “365일 유령과 함께”라고 말할 때, 이는 그 시간이 일상과 무관하지 않음으로 읽힌다. 조각가는 그 존재가 “때로는 구체적인 모습으로 등장”한다고 덧붙이기도 한다.17 물론 정서영이 현실에서 감지하는 유령의 육화는 과거를 발굴하고
기억을 재현하는 일과 무관하다.18
세계를
떠도는 영혼에, 끝나지 않은 역사에 새로운 삶을 부여하는 일은 정서영이 하는 일이 아니다. 그는 절대정신과 물질의 합일을 믿지 않지만, 어떤 이데올로기와 물질의
만남 역시 거부하고자 한다. 안규철은 1980년대 한국 조각을
돌아보고 그 대안을 모색하던 시기에, “국가적 기념 조각”을
두고 “조각가는 언제나 군주로부터 재료를 얻어서, 군주를
위해 지상의 올림푸스를 짓는 노예에 불과했다.”고 썼다.19 그렇게 만들어진 조각은 언제나 정서영에게 정신을 짓누르는 무게로
다가왔고, 그 역시 이 무거움을 두고 “물질을 극복, 압도하고자 하거나 절대적인 원리에 얽매이는 정신의 교조성”이라고
쓰기도 했다.20 그렇다고 그의 조각에서 유령이 함께한다고 할 때 이는 일상에서
찾아낸 초현실 따위는 아니다. 그의 사물은 ‘군주로부터 얻은
재료’는 아니었지만, 정서영은 그것이 어떤 구성의 원리를
통해 ‘환영’이나 ‘초현실’이 되는 것에서도 예민했다. 그의 조각에서 물질은, 사물은 현실에서 제 삶을 살아야만 했다. 그가 만든 전망대는 그것이
놓인 바로 그곳에서 전망할 수 있을 만큼만 전망대일 뿐 비무장지대를 바라보는 그 전망대를 대리하거나 재현할 필요는 없다. 마찬가지로 그의 작품에서 카펫은 관념이 아니라 현실에서 카펫인 만큼, 공간에서
그것이어야만 했다. 카펫은 말려 올라간 상태에서 자기 몸을 바닥으로 펼쳐 공간의 질을 변화시키고 장소를
만드는 일이 자연스럽다.
정서영의
작업에서 유령이 육화한다면 그곳은 좌대 위의 자율적인 가상이나 기억의 재현이 아니라 물질이 제 삶을 사는 오직 그곳에서, 물질의 ‘현실성’이 그
자체로 현실이 되는 장소다. 그의 작품 〈카펫〉(1999)에서
탑은 사물이 놓인 현실 그 자체로부터 곧바로 일어선다. 이는 탑이 어느 사원이 아니라 현실의 카펫 위에
놓여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탑 그 자체가 어느 세계관과 양식에 따라 층층이 구상하고 쌓은 그런 탑이
아니라, 카펫이 현실에서 제 삶을 사는 그 과정에서 떠오르기 때문이다.
카펫이 자신의 표면을 말아 올라가는 현실에서의 삶이 곧 장소가 되고 탑이 된다. 이 과정에는
현실의 사물을 특별한 환영이나 가상으로 변신시키는 관습적인 문법이나 조각가의 비기는 없다. 탑은 현실의
운동 속에서 곧바로 현실 속으로 뛰쳐나온다. 탑에 담긴 그 의미가 기념이든, 숭배이든, 기원이든 이미지로서의 탑은 현실의 사물이 점유하는 현재와는
다른 시간을 향할 것이다.
하지만 카펫에서 솟아난, 아니
카펫이 솟아 만든 탑은 그 초월적인 믿음을 투사하고 담을 새도 없이, 즉 그 탑을 만들려는 숭고한 마음
없이 그저 사물이 제 삶을 살고 있을 뿐이기에 온전히 상징이고 이미지일 수 없다. 카펫이라는 사물의 ‘현실성’은 탑을 현실로 육화시키는 동시에 그 탑을 이미지적 상태에서
현실로 밀어낸다. 공간 속에 육화한 전망대가 그러하듯 그 역도 마찬가지다. 카펫 위의 탑은 두 존재 사이의 공존을 따져 묻는 인과관계를 과감히 생략하고 그 논리적 결락을 존재의 조건으로
삼기에 탑의 이미지는 역으로 사물의 현실성 그 자체로부터 이탈한다. 탑은 카펫의 물질성 그 자체로부터
일어나 현실에 육화하지만 카펫 위에 탑이 놓여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화이트 큐브 속의 전망대가
그러하듯 카펫 위의 탑은 장소를 점유하는 낯선 현존으로서, 현실의 자리에서 예고 없이 솟아나 그 조각적
상태를 물리적 현존에서 이미지적 상태로 밀어내며 현실로부터의 거리를 창출한다. 앞서 전망대에서 확인한 ‘사물화된 현존’ 과 ‘이미지적
상태’의 팽팽한 긴장 관계 속에서 탑은 현실에 육화한다.
정서영이
조각의 형을 두고 ‘아름다움’이나 ‘창조’가 아니라 ‘순간’이나 ‘상황’을 말한 이유가
형이 눈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이러한 감각적 상태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조각가가 공간 속에 치밀하게
구축한 감각이기도 하지만 그가 거리에서 경험하는 인식의 상태이기도 하다. 그가 쓴 글의 일부를 옮겨
적는다.
“거리의
간판 중 별로 크지 않아도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꽃이라는 글자를 간단하게, 꽉 차게 그리고 대부분 붉은색으로
쓴 네모난 종류의 것이다. 그 간판을 보면 누군가가 느닷없이 내 얼굴 정면에 대고 〈꽃〉이라고 명확하게
발음해놓고는 휙 돌아서서 가버리는 것 같다.”21
거리에서
마주친 ‘꽃’이라는 언어는 관념이 아니라 오직 순수한 물질성의
차원에서 그의 망막을 파고든다. 자연이나 서정과 결부된 민족의식과 같은 것이 아니라 그 꽃이라는 언어는
오직 간판에 꽉 찬 형식과 붉은색이며 네모난 ‘형태의 현실성’으로
시각을 강타한다. 하지만 이내 그 이미지의 시각성은 망막을 넘어 신체를 관통하는 파동으로 연결된다. 누군가가 “얼굴 정면”에
대고 외치는 것 같다고 말할 만큼 그 감각은 이미지를 넘어 현실에 육박한다. 그 간판이 “별로 크지 않아도” 그의 시선을 사로잡는 이유가 그러하다. 친구가 보내온 엽서에 인쇄된 손톱만큼 작은 크기의 전망대도 마찬가지다. 작지만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이미지적 상태에 머물지만 그 힘이 신체를
관통하는 파동으로 느낄 만큼 그 자리에서 현실이 되고자 하기 때문이다.
스티로폼이
주재료가 되는 정서영의 작품 〈꽃〉(1999)은 거리에서 마주친 그 언어의 물질성을 조각으로 ‘재현’한 것은 아니다. 조각가는
신체만 한 스케일의 스티로폼을 가지고 어떤 형을 만든다는 생각도 없이 깎아 나가는데, 이때 육체적 노동의
위상은 선험적인 차원을 배제하고 순간의 경험에만 의지한 채 감각을 즉각적으로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거리를 걷는 그 순간과 닮았다. 그 과정에서 주변을 흐릿하게 만들며 시선을 집중시킬 뿐만 아니라, 나아가
현실에 육박하는 그 간판의 언어처럼 꽃 비슷한 형이 스티로폼 속에서 제 모습을 드러낸다. 간판의 꽃은
이미지적 상태에서 현실의 파동이 되고자 하지만, 역으로 스티로폼은 신체로 지각되는 물질의 현실성으로부터
꽃이라는 관념 하나를 의식에 띄우는 어떤 이미지가 되고자 한다.
하지만 간판의 그 꽃이 얼굴에 소리를
지르고 “휙 돌아서서 가버리는 것”처럼, 그 스티로폼도 꽃이라는 이미지나 관념으로 그 자리에 고정될 수 없다. 사실
정서영의 〈꽃〉에서 너무나도 현실적인 것은 노동의 결과 노출된 스티로폼의 거친 단면이다. 로잘린드 크라우스식으로
말하자면 “내적 필연성,” 즉 “형태의 독특한 모양이나 물체의 표면질감을 그것의 중심을 통해서 규명해낼 수”
있을 가능성이 사라진 채 우리의 눈은 대상의 표면에 머물 뿐이다.22 조각에서 이미지와 물질의 표면 사이의 필연적인 관계는 무너졌다. 이는 물질을 오직 경험에만 의지해 깎는 과정에서 꽃 비슷한 형이 그 자리에서 솟아났기 때문이기도 하며 물질과
이미지 사이에, 즉 스티로폼과 꽃 사이에 껄끄럽게 끼어 있는 해명할 수 없을 논리적 공백 때문이기도
하다. 중심의 상실과 의미의 급작스런 도약에도 불구하고 정서영의 〈꽃〉이 꽃이라는 이미지적 존재론을
스티로폼의 물질성과의 관계에서 붙잡을 수 있는 이유는 작가가 제목을 경유해 언젠가 꽃을 말했기 때문일 것이다. 첨언하자면
나무로 만든 하얀 좌대가 조각의 오랜 관습에 잠시 기대어 산업적인 재료를 자율적인 위상으로 조금 밀어내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정서영의
조각은 유령을 현실에 육화시키기도 하지만, 그 조각의 중심이 되는 사물은 동시에 유령과는 무관하게 침묵을
지킨다. 현재 속에 일시적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유령에 아랑곳하지 않고 사물은 제 삶을 살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스티로폼에서 꽃의 형상은 예고도 없이 현실에 육화한 것처럼 보이지만 이내 스티로폼은 유령을
소환하는 영매이기를 멈추고 ‘휙 돌아서서’ 그저 산업적인
재료로서의 삶을 살아간다. 〈전망대〉는 조각이 놓인 바로 그 장소에서,
즉 현실에서 기능하는 그 전망대인 동시에 현실로 육화하기 이전의 그 엽서 속의 작은 전망대이고자 한다. 현실에서의 삶도 있지만 이미지 속의 말 없는 사물로서의 삶도 있다. 조각에서
유령의 ‘일시적인’ 육화는 더 이상 꽃이 서정의 상징으로서
주체의 정신을 고양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꽃의 이미지는 자연과의 합일이나 민족의식의 형성을 통해
근대적인 주체를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조각을 통해 현실에서 신체에 육박하는 감각이 된다. 물론 그 감각은 우리를 압도하거나, 길게 지속되는 잔상을 남기기보다
어떤 섬광 같은 이미지와의 순간적인 마주침에 가깝다. 정서영의 전망대가 현실에 불러들이는 시선을 두고도
우리는 근대성을 관통하는 시각성, 즉 유토피아를 향하는 그 시선을 말하기는 어렵다. 그의 전망대의 시선은 관념으로서의 시선이 아니라 현실에서 작동하고 신체와 관계 맺는 시선 그 자체다. 물론 이 시선 역시 어떤 역사적인 전망을 담거나 감정이입을 할 틈을 주지 않고 전망대 주변으로 흩어져버린다. 이미지로서의 전망대는 서사를 외면하고 침묵하기에 자신이 공간 속에 일으킨 파장을 자신의 내부로 닫아버린다.
정서영의
조각은 이미지와 물리적 현존 사이, 또는 유령과 현실 사이의 경계에 서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 경계를 중심으로 조각의 중심이 되는 사물이 존재론적 위상을 전환하는 감각은 정서영의 몇몇 텍스트 작업이
포착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 운동은 “점점 뭉뚱그려지는 것과
점점 분명해지는 것의 합”이며, 이 합은 “유들유들한 덧셈”에 가깝다. 정서영의
조각 앞에서 주변이 점점 흐릿해지며 이미지로서 시선을 집중시키는 순간이 있고, 역으로 그 이미지가 희미해지며
현실의 물질성이 강하게 신체로 지각되는 순간도 있다. 이 두 차원의
‘합’은 ‘뻔뻔할’ 만큼 논증과 추론의 과정을 건너뛰어야만 한다. 정서영은 텍스트 작업에서, “멀리서 날아온 것을 힘껏 던져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엉뚱한 것을 영원히 기억하게 될지 모른다.”라고 썼다.그 합이 ‘유들유들’해야 하는 이유는 ‘엉뚱한 것’을
혹여나 ‘영원히 기억’하게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유령을, 근대성을 기억하는 방식이 오직 박물관에서만 가능하다면
우리가 기억하게 되는 것은 언제나 ‘재구성된’ 기억이다.23 정서영의 조각에서 우리가 마주하는 것은 오직 섬광과 같이 유령이
육화하는 바로 그 순간이다. 그가 마주치는 근대성의 유령이 역사박물관이나 어느 아카이브가 아니라 1970년대의 북유럽 풍경이 인쇄된 엽서나 거리의 작은 간판에서 그 모습을 드러내듯 그것은 ‘멀리서 날아온 것’이다. 그것이
현실에서 ‘분명’해지고 선명해지는 순간이 있지만 그는 영원히
기억하려 하지 않는다. 조각가가 그것을 다시 ‘힘껏’ 던지는 이유는 오직 찰나의 섬광만을 기억하기 위해서다.
정서영의
작품 〈-어〉(1996)에서 비닐 민속장판에 적은 ‘어’라는 외마디 망설임이 포착하는 것이 바로 그 찰나의 순간이다. 그간 우리가 주의 깊게 들여다보지 못했을 그 사물은 장판이라고 불리지만 실은 그저 장판 표면의 무늬를 흉내
낸 것에 불과했다. 이 사물은 한국의 급격한 산업화 과정에서 우리 삶에 침투한 특수한 시각문화를 상징할
것이며, ‘이미테이션’이나
‘키치’라는 용어의 도움으로 사회학적인 분석의 대상이 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무엇보다 순수한 물질성으로, 너무나도 현실적인 형태
그 자체로 정서영의 눈을 사로잡는다. 장판을 그림의 형식으로 뻔뻔하게 제시하는 것은 삶의 이모저모를
신경 쓰느라 그간 주의 깊게 볼 수 없었던 현실의 표면으로 우리를 초대하는 일이다. 현실을 떠받치던
사물이 관조의 대상이 되는 그 순간은 그의 시대에 비로소 가능한 일이다. 우리의 근대를 구성하던 사물들이
이데올로기를 뚫고 의미의 영역을 벗어나 그저 엉성한 듯 치밀한 형태와 울긋불긋한 색상으로 망막을 향해 돌진할 수 있던 것은 그 지난한 삶과 비로소
거리를 둘 수 있기에 가능했다. 〈-어〉에서 벽에 걸린 그림이
오랜 관습에 기대어 관객으로부터 창출하게 될 관조의 거리가 바로 그것이다.
그
표면 위에 그는 특별한 의미는 없을 감탄사 하나를 썼다. 그 무의미한 음절 하나가 표상하는 것은 사물과의
갑작스런 마주침일 수도 있으며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잠정적인 거부일 수도 있다. 아마도 곧은 형태의
자 비슷한 것을 대고 그었을 직선 하나는 의미가 지연되는 그 순간을 잠시 지속시키기도 하며, 동시에
외마디 외침 이전의 망설임의 시간을 표상하기도 한다. 문자와 도형의 침묵은 현실을 눈앞에서 대면한 그
순간의 놀라움과 불편함, 말할 수 없음과 말로는 다 할 수 없음의 감각 모두를 그림 속에 보존한다. 이는 그 사물이 우리에게 현실적인 ‘물질’인 동시에 지나간 시간의 ‘증거’이기
때문일 것이다. 섬광처럼 스치는 이 감정에 힘을 실어주는 것은 주체의 그 외침이 미적인 관습에 한 번
더 기대기 때문이기도 하다. 단조로운 직선과 대비되는 궁서체는 음절 하나에 주체의 정신을 대리하는 자격을
잠시 부여한다. 그림이 된 사물 위에 힘주어 그은 선들은 지난한 삶을 구구절절 재현하고 기억하지 않지만, 그 기나긴 시간의 총합을 마주할 때의 형언할 수 없을 섬광 같은 마주침의 감각을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이 그림 아닌 그림은 결국 번뜩임의 감각과 보잘것없는 사물 사이를 오간다. 애초에 조각가가 기댄 미학적인 인습의 효과가 그리 길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장판이 근사한 그림이 되기는 어렵고 우리 시대에 궁서체가 아우라를 갖기 힘들다.24 조각가가 ‘멀리서
날아온 것’을 ‘힘껏’ 던지는
순간이다.
정서영의
〈파도(〈유령, 파도, 불〉
중 일부)〉(1998-2022) 역시 ‘멀리서’ 온 것이다. 조각가가
파도를 비닐민속장판 위로 불러들일 때 그것은 지금, 여기의 현실적인 장소 위로 다른 시간성을 불러일으킨다. 파도는 파도라는 형상 하나를 조각의 형태로 그저 ‘재현’한 것이 아니다. 유토가 중력과 스스로의 점성 사이에서 운동할 때, 그 물질의 운동 자체가 곧 파도의 운동이 된다. 조각가의 입장에서는
물질의 놀이 그 자체가 다른 시간성을 향하는 제의가 된다. 운동과 놀이가 제의와 겹쳐지기에 파도는 이
장소와 무관한 저 먼 곳의 파동이지만 장판 위에서 곧바로 솟아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운동이 극적인
만큼 그 운동이 무화되는 순간도 있다. 파도는 그 형을 고정시킬 수 없을 파동이지, 사물은 아니다. 하지만 파도는 장판의 미끄러운 표면 위를 미끌어지는
것만 같고, 장판 위에 있는 존재를 움직이는 파동이 아니라 고정된 사물로 인식하는 일이 자연스럽다. 파도는 주체가 마음을 싣고 감정을 투사할 초월적인 공간이 될 수 없다. 그
가능성을 차단한 객체로서의 사물이며 통제할 수 없는 운동을 순간적으로 포착한 이미지이기도 하다. 정서영의
조각 하나가 감당하는 시간의 겹은 이렇게나 두텁다.
정서영의
조각에서 시간의 흐름 속에 동일성을 확보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파도가 솟아나고, 멀리서 온 것이 현재 속에 제 모습을 드러내며, 유령이 현실에 육화하지만
이는 그때의 그 시간에 영원을 약속하는 일은 아니다. 현실의 운동 속에서 현재와는 다른 어떤 시간성이
출현하지만 이는 그 섬광 같은 순간이 한번 스쳐 지나갔다고 말해야 한다. 현실에 육박하는 파도의 파동이
있으며, 느닷없이 현재에 출현하는 이미지가 있지만, 그것들은
다시 현실의 운동 속으로 환원된다. 잔잔한 수면 위에 일시적으로, 그리고
반복적으로 생성된 물수제비의 파문처럼, 유령은 현실의 표면 위에 자신의 모습을 새기지만 다시 그 표면
위에서 자취를 감추기를 반복한다. 정서영이 전시의 제목에서 ‘어제’나 ‘그때’라고 말하지
않고 ‘오늘 본 것’이라고 말한 것은, 그의 조각이 언젠가 보았던 것을 현재 속에 재현하기를 거부하기 때문이다. 조각을
통해 무언가를 보았던 기억을 위한 자리 하나를 만드는 일은 정서영에게 과거를 윤색하는 일이며 그때 그 시간의 깊이를 그저 기호로 치부하는 일이기도
하다. 조각이 어떤 체계와 문법에 기대어 어떤 것을 영원히 고정된 것으로 만들고, 그래서 이를 모시고 받드는 일을 수행하는 것만큼 그의 정신을 짓누르는 일은 없다. 그는 어제 본 것을, 그제 본 것을, 그때 본 것을 오늘도 본다. 조각가에게 ‘오늘’은 영속적인 현재로 환원되어 기호로서의 과거를 내 맘대로 끄집어내는
장소가 아니라, 언젠가 본 그것들이 오늘도 현실에서 제 모습을 드러내는 장소다.
정서영의
작품 〈떠돌이〉(2022)에서 조각의 장을 구성하는 것은 시멘트라는 물질의 운동이다. 파도를 현실로 끌어낸 유토처럼 시멘트는 매끈하게 형을 고정시키지 못하고, 고유의
액체적인 물성을 드러내며 우리의 시선을 신체와 조각이 만나는 현재의 표면으로 이끈다. 그 거칠고 뭉뚱그려진
표면 아래에 어떤 동물의 석상 비슷한 형이 어렴풋이 모습을 드러낸다. 언젠가 본 것은 단단하고 고른
표면의 석상일 텐데,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존재는 물질과의 관계에서 위태롭게 형태를 붙잡고 있다. 물질과 형 사이의 불안정한 결합을 말했지만, 사실 시멘트는 그 견고함으로
우리의 근대를 말 그대로 건설하고 구축한 물질이다. 전근대적인 세계를 밀어내고 시멘트는 콘크리트가 되고, 길이 되고 건물이 되어 도시를 세웠다. 그런 물질이 어느 궁이나
능에서 봤을 것만 같은 형을 우리 앞에 출현시킨다. 정서영의 조각에서 시멘트와 석상의 관계는 우연과
비약을 넘어 역설에 이르고 있다. 신화적 상징의 세계를 우리의 인식에서 조금씩 지워냈던 그 물질이 역으로
그 세계를 우리 눈앞에 펼치고 있다.
어떤 석상의 형은 어제도, 그리고
그제도 보았을 시멘트 바닥을 다듬어지지 않은 도시의 빈틈이나 미처 끝나지 않은 공사의 현장이 아니라 그 석상의 좌대로 밀어낸다. 하지만 관념의 연쇄가 빚어낸 일시적인 관계는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는 물질의 표면 위에서 무화된다. 조각가가 석상과 좌대 사이에 날카롭게 파낸 사각의 공간이 각각의 형을 제자리로 다시 밀어낸다. 변조된 물질의 상태가 품었을 전근대적인 감각은 아직 채 마르지도 않은 것만 같은 시멘트의 물성으로 회귀한다. 시멘트가 만들어낸 장소는 전근대적 시간을 떠받치는 좌대가 아니라 현재 속에 남겨진 미완의 근대를 향한다. 물질은 관념의 연쇄 속에 잠시 다른 존재가 될 수도 있지만, 그만큼
관념을 기화시키는 속도도 빠르다. 이는 아마도 애초에 석상 비슷한 것이 존재의 부정을 통해 현실에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일 것이다. 시멘트를 바르는 근대적인 감각은 석상의 전근대적인 시간을 형으로 현재 속에
새김과 동시에 지워낸다. 작품의 제목처럼 조각의 형은 ‘현재’와 ‘근대’를, 그리고 ‘전근대’를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는 ‘떠돌이’다.
조각가가 시멘트를 바르는 행위 속에 서로 다른 층위의 시간이 제 모습을 어엿이 드러낸다.
일상에서
우리가 보는 것에는 시멘트 바닥과 석상도 있지만, 적지 않은 시간을 특별할 것 없는 물건들이 우리 곁의
공간을 채운다. 가려진 시간의 증거로서 그 시간을 현재 속에 출현시키는 사물도 있지만, 말없이 언제나 그 자리에 있었던 것만 같은 사물도 많다. 정서영의
작품 〈좋은 순간〉에 놓인 의자 하나가 그러하다. 어디선가 본 것 같지만, 그 순간을 특별히 기억하게 하지는 않을 사물 하나가 조각의 장 안으로 들어와 현재 우리의 눈앞에 놓여 있다. 하지만 그 사물은 정서영의 조각에서 ‘걸상’이나 ‘의자’라고 불러야만
할 것 같은 상태는 아니다. 마치 좌대와 하나가 되어 이 세계와 분리된 것만 같은 감각을 주는 고전적인
조각처럼, 일상의 물건은 자율적인 차원으로 조금 밀려나 있다.
이는
노르스름한 색이 매끈하게 좌대와 사물을 동시에 감싸며 조각의 관습적인 문법에 기대는 탓일 텐데, 이를
두고 사물이 조각이 되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조각의 장에서 사물의 스케일이 여전히 신체와 익숙한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좌대는 사물과 존재론적으로 하나인 동시에 둘이 되는 관계를 맺고
있다. 단색의 매끈함은 세계로부터 좌대와 사물을 조각적 상태로 밀어내지만, 동시에 좌대는 사물을 떠받치는 것이 아니라 사물과 분리되어 관계를 맺는다. 의자의
다리와 좌대 사이에 파인 4개의 구멍이 사물의 일상적 현존의 감각을 보존하고 있다. 물론 의자 다리의 숨겨진 부분이 사물을 자율적인 상태로 조금 밀어내지만, 역으로
노르스름한 색에 대비되며 4개의 다리를 하나로 모으는 검은 테두리가 비밀을 벗기고 현실의 의자를 일깨운다. 그럼에도 정서영의 조각이 일상의 의자를 조각적 상태로 밀어낼 수 있는 것은,
의자 위에 놓여 현재의 빛과 조응하며 표면을 반짝이는 나무토막의 물리적 현존 때문이다.
사용
가치가 있을 물건도 아니며, 의도와 규정에 따라 관념 하나를 불러일으킬 사물도 아니기에 네모난 나무토막은
조각의 장에서 그저 물리적 현존의 감각을 뽐내기 좋다. 그럼에도 나무토막은 상대적인 감각의 차이를 통해
의자를 자율적인 상태로 밀어내는 일만을 수행하는 것은 아니다. 잘 다듬어진 나무 하나하나를 균형을 잃지
않으면서 쌓는 일은 의자의 일상적인 차원과 관계 맺는 일이다. 이 수행적인 행위가 일깨우는 순간은 좌대를
통해 조각적 상태가 된 그 변조된 의자가 아니라, 물건 하나를 올려놓을 그 익숙한 현실의 의자다. 그럼에도 나무토막의 집합은 그 의자를 일상적 현존의 상태로 환원시킬 수는 없다. 이는 단위를 하나하나 쌓아가는 행위가 형을 구성하는 관습이나 체계에서 의도적으로 미끄러지기에 의자 위에 자리
잡은 무엇이 좌대 위의 또 다른 조각이 아닌 자기 지시적인 상태로 머물기 때문이다.
결국 나무토막은
같은 것들 사이의 자족적인 수행으로 머물고 의자는 물리적인 지지체 그 이상으로 뻗어나가지 못한다. 의자
하나를 둘러싸고 발생했을 이런저런 수행적인 사건들 속에서 관념은 억압되었고, 운동의 흔적들만 남았다. 정서영의 조각에서 우리 앞에 펼쳐진 것은 미세한 조정의 순간들이다. 그가
제시하는 ‘조각적인 순간’은 오직 조각적 상태와 일상적 현존
사이를 오가는 리듬만이 남은 상태다. 조각을 구성하는 단자들이 현실과 현실 뒷면 사이에서 고정되지 않고
진동하는 바로 그 순간의 반대편에 언젠가 꽃을 찍은 스냅 사진 하나가 덩그러니 남겨져 있다. 롤랑 바르트식으로
말하자면 사진은 ‘그때 거기’에는 있었지만 ‘지금 여기’에는 그것이 없을, 시간의
층위 사이의 비논리적 결합이기에 사진 하나가 이 존재론적 난교의 상황에 또 다른 파장을 일으킨다. 하지만
그 순간은 그리 길지는 않을 것이다. 사진 속의 꽃은 지금 여기 없지만 말 없는 사진의 표면과 어울리는
봉투 하나가 그 곁에 있다. 봉투 표면이 반사하는 갈색 빛이 의자 위에 놓인 나무토막의 그 색채와 조응할
때 우리의 시선은 색과 색이 평면 위에서 균형 있게 만나는 사물들의 표면에 집중할 수 있다. 조각가에게 ‘좋은 순간’이란 바로 이 순간이 아닐까.
저자
소개
장지한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이론과를 졸업하고, 뉴욕주립대학교(빙엄턴) 미술사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2019년 SeMA-하나 평론상을 수상했다. 저서로 『그것이 그곳에서 그때: 김범과 정서영의 글과 드로잉』(서울: 서울시립미술관, 미디어버스,
2021)이 있다.
- 정서영은 자신의 작업을 두고 종종 ‘조각적 순간’이라고 말했다.
- 김현진, 「정서영의
말과 사물: 모호함의 밀도와 빛나는 명료함」, 『큰
것 작은 것 넓적한 것의 속도』, 현실문화연구, 2012,
233쪽.
- 정서영, 「사물에의
가담과 투사에 의한 조각작품 제작연구」, 서울대학교 대학원 석사 논문, 1989, 26-27쪽.
- 우적, 『우적』 NO.2-1, 2007, 33쪽.
- 김장언, 「정서영: 유령과 더불어」, 『정서영: 공기를 두드려서』, 바라캇 컨템포러리, 2021, 37쪽.
- 박찬경, 「박찬경: 전망대의 사물」, 아트선재센터, 2000, 4쪽.
- 주혜진, 정서영, 「불안한 지점으로부터 움직이는 것이 솔직한 것」, 경향아티클, 2014년 5월호, 29쪽
- 위의 글.
- 현시원, 「전시의
시간: 정서영」, 『정서영: 공기를 두드려서』, 바라캇 컨템포러리, 2021, 95쪽.
- 박찬경, 「박찬경: 전망대의 사물」, 아트선재센터, 2000, 4쪽.
- 정서영, 「늘
공기를 바꾸고 싶다」, ⟪정서영 조각전⟫
도록, 갤러리 한, 1989
- 최종태, 「刻, 不刻 그리고 침묵」, 『형태를 찾아서: 아름다움의 발견 그리고 창조를 위한 기록』, 열화당, 1990, 131쪽. 최종태는 정서영이 서울대학교 조소과
대학원에 재학할 당시에 석사 논문을 지도하기도 했다.
- 최종태, 「절대를
향한 탐구」, 『형태를 찾아서: 아름다움의 발견
그리고 창조를 위한 기록』, 148쪽.
- 최종태, 「침묵의
삶, 거룩한 聖像」, 『형태를 찾아서: 아름다움의 발견 그리고 창조를 위한 기록』, 162쪽.
- 정서영, 「GHOST WILL BE BETTER」, 『현대문학』 (통권 530호),
1999.2
- 정서영, 「Ms. C의 정서영 인터뷰」, 『큰 것 작은 것 넓적한 것의
속도』, 현실문화연구, 2012, 139쪽.
- 정서영, 「GHOST WILL BE BETTER」, 『현대문학』 (통권 530호),
1999.2
- 이를테면 박찬경은 전쟁기념관의 마네킹을 보며 초현실적인
느낌을 받는다. 전쟁기념관의 구석구석이 어떤 정치적인 프로그램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는 상황에
대해 냉철하게 바라보지만, 그는 그 장소에서 “전쟁의
귀신들이 육체를 얻어 환생한 느낌”을 받는다. 그곳에서
전쟁을 재현하는 구체적인 사실성은 과거의 시간이 현재 속으로 흘러들어와 육신을 얻은 것만 같았고, 그는
이를 두고 “냉전이라는 장기수는 전쟁기념관의 마네킹으로 새 삶을 얻고 있다.”고 썼다. 박찬경, 「국방초현실주의: 박물관」, 『블랙박스: 냉전
이미지의 기억』, 1997, 28쪽,
- 안규철, 「80년대 한국조각의 대안을 찾아서」, 『민중미술을 향하여』, 과학과 사상, 1990, 149쪽.
- 정서영, 「사물에의
가담과 투사에 의한 조각작품 제작연구」, 서울대학교 대학원 석사 논문, 1989, 24쪽.
- 정서영, 「다른
꽃 두 개」, 『현대문학』 (통권 532호), 1999.4
- 로잘린드 크라우스, 「더블
네가티브: 조각의 새로운 구문」, 『현대조각의 흐름』, 윤난지 옮김, 도서출판 예경, 1997, 291쪽.
- 박찬경은 다음과 같이 쓰기도 했다. “기념, 곧 기억의 재구성에는 기억하는 개인의 관심, 관습, 상태 뿐만 아니라,
기억하는 집단의 뚜렷한 정치적 목적이나 선호하는 문화 등이 개입되기 마련이다. 전쟁기념관의
경우에 개입되는 동기들은 매우 다양하겠지만, 그것은 크게 보아 하나의 애국주의적 전쟁 파토스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박찬경, 「국방초현실주의: 박물관」, 『블랙박스: 냉전
이미지의 기억』, 28쪽,
- 정서영은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했다. “궁서체로 쓴 ‘어’ 역시
이미테이션이죠. 서예에 능숙하지 못하기 때문에 서예체를 열심히 ‘따라서 그린’ 것이거든요.”
홍순명, 「철저함과 허술함의 공존」, 『월간미술』, 1999 11월호. 7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