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웅규, 〈십팔나방〉, 2021 ©박웅규

아래는 홈페이지에 있는 작가의 작업노트 일부다.

“나는 언제나 '부정한 것, 부정한 상황, 부정한 감정' 같은 것들에 기민하게 반응한다. 그리고 그것을 해소해 나가는 과정을 하나의 유희로 받아들인다. 나는 그 과정에서 때때로 종교의 것을 연상한다. 가령 죽은 벌레 시체의 생김새에서 현란한 불교 회화를 떠올리고, 창 밖에 붙어있는 나방 무리에서 성당에 빼곡하게 들어선 성화를 떠올린다. 나는 가장 저급한 것에서 가장 신성한 모습을 떠올린다는 것이 그 자체로 종교적이며, 또 부정하다고 생각했다. 근래의 몇 년 동안 주로 벌레를 대상으로 작업을 이어왔다. 하지만 내 작업에서 어떤 실체적 대상은 크게 중요하지 않다. 그것이 벌레이든, 아니면 어떤 성화이든 간에 더 이상 이 둘은 내게서 분리되지 않는다.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을 내가 어떤 태도로 바라보고 있는지,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분별하고 있는지이다. 따라서 작업에 드러나는 형상들은 유사 기능을 수행하는 껍데기(Dummy)에 가깝다.”

여기에는 박웅규 작가의 작업 전반을 이해하는데 핵심 개념이 등장한다. ‘부정’이다. 우리가 사용하는 ‘부정’이라는 단어는 여러 의미를 지니고 있다. 첫번째로 ‘부정’은 ‘긍정’의 반대말로, 무엇인가의 존재나 타당성을 인정하지 않는 ‘negation’의 의미로 사용된다. “그는 그녀의 말을 부정否定하였다”가 그 예이다. 이와는 달리 ‘부정’은 ‘올바르지 못한’이라는 규범적 의미도 가지고 있다. 이는 예를 들어 “수능시험에서 부정 不正 행위가 발생했다” 혹은 “정치가의 부정 축재” 등의 표현에서 사용되는데, 영어로는 ‘injustice’에 상응할 것이다. 이뿐만 아니다. ‘부정(不淨)’은 축어적으로는 ‘깨끗하지 못한’을 의미하지만 주술적 혹은 종교적 맥락에서는 ‘성(聖)스러움을 훼손시키는 것, 따라서 터부시되어야 할 것’을 지칭할 때 - “부정한 물건”, ‘부정탄다“ 등 – 도 사용된다. 한글로는 음가가 같지만 한자로는 구분되는 이 단어는 많은 경우 이 의미가 서로 엄밀하게 구분되지 않은 채로 사용된다. 예를들어 ”그는 부정적인 사람이야“라는 말이, 그가 늘 무언가의 존재나 타당성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인지, 그가 올바르지 못하게 처신/행위하는 사람이라는 말인지, 아니면 존중받아야 할 것을 훼손하고 공격하는 성향의 사람이라는 말인지 구분하기 쉽지 않다. 어쩌면 이 말에는 이 모든 함의가 다 들어있을 것이다. 한자로는 서로 구별되는 이 ’부정‘의 함의는 사실상 내적으로 서로 통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말로 ’부정‘이라고 번역되는 영어 단어 ’negative‘ 혹은 ’negativity’를 생각해봐도 그렇다.

내가 주목하는 건 박웅규 작가 스스로도 자신 작업의 중심 개념인 ‘부정’을 이렇게 다의적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위에서 인용한 작가 노트 중 “나는 언제나 '부정한 것, 부정한 상황, 부정한 감정' 같은 것들에 기민하게 반응한다.”는 문장을 보자. 여기 등장하는 ‘부정’에는 ‘올바르지 못한 것’이라는 부정(不正), ‘깨끗하지 못한 것’이라는 부정(不淨), ‘어떤 존재의 불승인’이라는 부정(否定)의 의미가 함께 울리고 있다면, “나는 가장 저급한 것에서 가장 신성한 모습을 떠올린다는 것이 그 자체로 종교적이며, 또 부정하다고 생각했다.”는 문장에서는 부정(不淨), 곧 ‘성(聖)스러움’을 훼손시키는 터부적인 것의 의미가 강하게 부각된다. ‘더미 Dummy’ 연작에 대한 작가 노트에는 이런 문장이 나온다. “〈Dummy〉 연작은 이미지를 수집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일상에서 마주하는 것에서 시작하여, 스마트폰으로 접하게 되는 ‘부정함'에 관한 모든 이미지들을 사진첩에 저장해둔다.” 이 문장에 등장하는 ’부정함‘ 역시 부정(不正), 부정(不淨), 부정(否定) 중 어느 하나로 축소되기 힘든 다의성을 갖는데, 흥미롭게도 이 문장의 영역 - “Starting with everyday encounters, all images of 'negative' are stored in the photo album.” - 은 ’부정함‘을 ’negative’ 로 옮겼다. 역시 ‘부정’이라는 단어가 등장하는 작가의 아래 글은 어떤가.

“종교의 도상기호는 일정하게 반복되는 도식들이 존재한다. 화면 안에서 형상들이 배치되는 방식이나, 그것을 장식하는 도식의 형태, 혹은 반복되는 수와 관련되어 나타나는 기호-도상들의 표출 방법들. 이것들은 작업의 원전이 되는 부정함의 대상들을 포착하는 방식으로 기능한다. 또한 부정한 것을 대하는 나의 태도를 스스로 통제하려는 나름대로의 규율이다.” 작가는 “부정함의 대상들”은 “the objects of negativity”로, “부정한 것”은 ‘injustice’로 번역하였는데, 여기서도 ‘부정’은 다의적 의미를 갖는다. 이러한 단서들로 부터 나는 박웅규 작가가 ‘부정’에 대해 말할 때는 깨끗하지 못한 것, 정의롭지 못한 것, 나아가 무엇인가의 불승인이라는 ‘부정’이라는 단어가 지닌 복합적 함의를 염두에 두고 있다고 추론한다.
 
2012년, 박웅규 작가가 커리어 초반에 그렸던 〈가래 드로잉〉 연작이나 〈‘사리 객담〉 작품에서는 ’부정‘의 여러 의미 중 ’부정(不淨)’, 곧 깨끗하지 못한 것, ‘더러운 것’의 의미가 강하게 부각되어 있다. 작가는 가래나 편도결석 등 인간의 몸에서 나오는 이 ‘더러운 물질들’을 성화처럼 또 사리처럼 만들면서 ‘부정不淨’한 것을 그와 대립적인 성스러운 것과 연결시켰다. 박웅규 작가의 스타일이라 부를만한 것이 자리잡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던 2015년 이후 ‘더미 Dummy’ 연작에서는 ‘부정’의 다른 의미가 전면에 등장한다. 독특하게 패턴화되어 있는 더미 연작 그림들은 어떤 건 곤충이나 벌레 같기도, 어떤 건 블로스펠트가 찍은 식물 같기도, 다른 건 현미경으로 들여다본 미생물 같기도, 또 어떤 건 성모나 예수의 성상 같기도 하다. 〈가래 드로잉〉이나 〈사리 객담〉과는 달리 여기서는 그리는 대상들 자체가 ‘부정(不淨)’적인 것이 아니다. 이 작업에 대해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어떤 대상들을 볼 때에 그 안에서 ‘부정함'의 코드를 읽으려 애쓴다. 그리고 그에 부합한다면 나의 사진첩에 저장된다. 작업의 과정에서 그 이미지들을 직-간접적으로 참고하게 된다. 작업에서 이 이미지들은 그대로 재현되지 않는다. 이것들은 서로 교배되거나 변형되기도 하며, 때로는 그 과정에서 전혀 다른 형상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미지를 구현하는 방식에 있어서 종교의 도상기호의 형식을 빌려온다는 것이다.”

혐오스러운 벌레나 곤충뿐 아니라 일상사물이나 식물, 성상 등의 대상들을 볼 때에 ‘부정함의 코드’를 읽는다는 건 무슨 뜻일까? 나는 여기 등장하는 ‘부정’은 어떤 존재나 타당성을 승인하지 않는다는 의미의 ‘부정 否定’이라고 생각한다. 혐오스러운 벌레건, 아름다운 식물이건, 혹은 성스러운 성상이건 그 대상에 부여되어 있던, 거의 우리의 자연스러운 감정적 반응으로까지 고착된 어떤 분위기의 존재나 타당성을 승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벌레의 혐오스러움, 식물의 아름다움, 성상의 성스러움은 그들 자체에 본래적으로 내재한 어떤 속성이나 특질이 아니다. 그건 그 대상들과 관계하면서 우리에게 생겨난 감정, 가치, 규범들의 기묘한 뒤섞임의 산물이다. 이 점에서 그를 대상들의 ‘아우라’라 칭해도 좋겠다. 이런 대상들 “안에서 ‘부정함’의 코드를 읽는다”는 것은 이 대상들에 부여된 아우라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그에 휘둘리지 않고 그들을 대한다는 것이며, 그렇기에 이들은 작가에 의해 ‘서로 교배되거나 변형’되어 ‘전혀 다른 형상’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부정 否定’의 작업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종교의 도상기호 형식’이다. 작가의 말대로 종교의 도상기호는 대상을 ‘반복되는 도식 형태’로, 곧 패턴화하여 표현한다.

주지하듯, 패턴화는 생명체의 생존에 핵심 능력 중의 하나다. 환경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사건들 주변의 세계들을 어떤 식으로든 패턴화하여 그 질서를 파악하지 않으면 생명체는 혼돈스럽고 카오스적 세계 속에서 생존하기 힘들 것이다. 패턴화는 어떤 대상의 모든 디테일에 일일이 세부적으로 다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일정한 범주로 묶어 낼 수 있는 추상화 능력이다. 사냥에 나선 사자는 서로 다른 형태와 크기, 색깔을 가진 나무와 풀, 흙과 자갈 등의 세부 디테일에 다 주목해서는 풀숲에 숨은 토끼를 잡을 수 없다. 팔과 다리, 깃털 등 수많은 부분들로 이루어진 토끼를 그저 한 마리의 토끼라고 추상화 해 낼 수 없다면 사냥은 불가능할 것이다. 패턴화한다는 것은 세계를 자신 나름대로 파악하고 포착해 질서를 부여하는 것이며, 그를 통해 생명체는 무한하게 카오스적인 것 앞에서의 막연한 공포와 불안감 대신 그에게 어떻게 대응하고 대처해야할지를 알게 된다. 인간도 마찬가지여서, 우리를 둘러싼 모든 사물들의 디테일들을 추상화해 패턴과 도식을 포착할 수 없다면 우리는 어떤 행위도 하지 못할 것이다. 박웅규 작가의 ‘더미’ 연작에서 ‘부정否定의 방법’은 이렇게 작동한다. 이 ‘더미’ 연작 이후 박웅규 작가가 “내 작업에서 어떤 실체적 대상은 크게 중요하지 않다. 그것이 벌레이든, 아니면 어떤 성화이든 간에 더 이상 이 둘은 내게서 분리되지 않는다.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을 내가 어떤 태도로 바라보고 있는지,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분별하고 있는지이다.”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은 여기서 문제되는 것이 이 ‘부정否定’이기 때문이다.

이번 생생화화 전에 출품한 〈십팔나방〉은 이 ‘부정 否定’의 방법론이 가장 명시적으로 드러난 프로젝트다. 〈십팔나방〉은 총 18개의 작품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는 각 세 개의 이미지를 한 세트로 한 여섯 세트의 작업이다. 그리고 한 세트 내 세 작품은 형태나, 색채, 재료에 있어서도 서로 다르다. 단원 미술관에 걸린 〈십팔나방〉을 기준으로 말하자면, 가장 아래쪽 작품들은 삼베에 안료로 그려졌고, 중간에 걸린 작품들은 종이에 먹으로, 가장 위쪽 그림들은 종이에 안료로 그려졌다. 작가의 설명에 의하면 이 세 종류의 그림은 “작업실에 출몰하는 벌레들을 3가지 방식”으로 그린 것이다. 이 세 방식을 작가는 “자세히 보고(중립), 형태와 구조를 이해하려 애쓰고(긍정), 질감을 느끼려고 노력한다(부정)”로 제시한다. 이 세 가지 구분은 작가가 불교 교리로 부터 가져온 것이다. 그에 따르면 인간의 108가지 번뇌는 눈, 코, 혀, 귀, 피부 등 우리의 감각이 색, 향, 맛, 촉각 등을 대할 때 생겨나는 세 가지 느낌에서 출발한다. 감각에 ‘좋은 것(好)’, ‘싫은 것(惡)’, ‘싫지도 좋지도 않은 것(平)’이 그것이다. 박웅규 작가는 이를 긍정, 부정, 중립이라는 개념으로 가져와 대상을 표현하는 세 가지 방식 - “자세히 보고(중립), 형태와 구조를 이해하려 애쓰고(긍정), 질감을 느끼려고 노력(부정)하는” - 으로 전유한다.
이런 기반에서 나온 프로젝트 〈십팔나방〉은 많은 미학적 질문들이, 마치 물에 떨어진 잉크처럼 퍼져 나가게 한다. ‘싫은 것’의 ‘질감을 느끼려고 노력’하면 그 싫음이 ‘부정’될 수 있을까? 대상을 자세히 보는 것이 그를 ‘좋지도 싫지도 않게’ 만들 수 있을까? 그 대상의 형태와 구조를 이해하려 애쓴다면 ‘좋은 것’은 더 이상 좋은 것이 아니게 되는 건 아닐까? 불교적 수행의 목표는 감각에 좋거나 나쁜 것에 휘둘리지 않는 평정상태에 도달하는 것이다. 그런 평정 상태에 도달한다면 저녁 창문에 붙어있는 나방들은 우리에게 어떻게 보일까? 등등.

이런 질문들을 던지며 벽에 걸린 18개의 그림을 보다 박웅규 작가는 우리 시대 거대한 이미지 순환 네트워크에 자리잡은 이미지 필터 같다고 생각했다. 그는 그 네트워크를 떠도는 모든 부정(不正)하고 부정(不淨)한 이미지들을 부정(否定)해 우리를 매료하는 독특한 이미지로 변형시켜 내 놓는다. 그러면서 스스로 이미지 필터로서의 평정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애쓴다. 단원 미술관 전시장에는 고풍스러운 삼베 위에 “흉측한 외모로 사람들에게 불행을 가져다주는 여신” ‘흑암천’을 그린 〈자매〉가 건너편 벽에 걸린 두 점의 붉은 〈흉〉을 명상하듯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의 외모를 흉측하게 만든 피부의 흉들을 담담히 마주하는 평정심의 상태. 이것이 부정의 이미지 필터로서의 작가의 모델일지도 모르겠다.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