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웅규, 〈가래 드로잉 #7〉, 2015 ©박웅규

박웅규의 작품에는 성상으로부터 출발한 강렬한 이미지가 있다. 종교가 있는 사람은 물론이거니와 종교가 없는 이에게도 성상은 세상을 떠돌아다니는 수많은 이미지 중의 하나에 불과한 것은 아니다. 이미지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예술이 있기 전에 먼저 신화와 종교적 성상이 있었고, 모든 것이 등가의 코드로 평탄해져 버린 오늘날에도 그것들은 원형으로서의 역할을 한다. 줄리아 크리스테바는 [사랑의 정신분석]에서 니체가 신은 죽었다고 선언했을 때, 무신론자로서 신의 자리에 허무를 위치시킨 것이 아니라, ‘초감각성의 본질적 쇠퇴’, ‘계율과 은총의 권능을 가진 초감각적 세계로서의 이상’(하이데거)의 종말을 확인한 것이라고 말한다. 의식적 차원에서 종교는 축소되었지만 무의식적 차원에서는 여전하며, 심지어는 더 확장되어 있기도 하다. 신이 실재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신과 관련된 상상과 제도는 엄연히 존재하며, 이미 수 천 년의 전사를 가지고 있다.

예술의 역사보다 종교의 역사가 더 길며, 더 보편적이다. 그래서 인간은 상상과 상징을 통하여 인간이 되며 때로 종교적 인간(Homo Religiosus)이 된다. 누군가에게 종교는 상상과 상징을 넘어서 실재계에도 속할 수 있으며, 작가 박웅규가 그렇다. 종교적 상들은 제도 속에서 여전히 어떤 공식적인 환경을 이루고 있기도 하지만, 무의식으로 내려앉아 기괴한 형상으로 출몰하곤 한다. 박웅규의 작품에 가득한 기괴한 정서의 뿌리는 그 스스로도 인식하고 있듯이 종교에 있다. 로즈메리 잭슨은 [환상성]에서, 기괴함은 불온하고 공허한 영역을 지칭한다고 본다. [환상성]에 의하면 하이데거는 기괴한 것을 신성한 이미지에 대한 믿음을 상실함으로서 야기되는 텅 빈 공간으로 묘사하면서, ‘진실로 자기 자신을 신의 공간 안에 위치시키는 것의 불가능성에 비례해서 기괴한 무언가가 발생할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오토 랑크는 [신성함의 관념]에서 공포가 초자연적 형상들 속에 위치해 있을 때 기괴하다고 해석한다.

불가사의한 신비에 대한 종교적 감각은 세속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기괴함의 감각으로 변형되어 나타난다. 그러나 그 둘의 심리적 기원은 동일하다. 기괴함은 정(正)으로 간주된 남성에게 도전해온 페미니즘에서도 주목되었다. 백치같이 미성년화한 부류(Femme Enfant)부터 불길한 음모를 꾸미는 듯한 ‘운명의 여인’(Femme Fatale)까지 여성들은 기괴하다. 좋게 말하면 신비하다. 프로이트가 말했듯이, 남성의 관점에서 거세를 떠올리는, 피 흘리는 상처처럼 보이는 여성의 성기야 말로 기괴함의 원천이었다. 기괴함은 친숙하고 정상적인 것과의 관계 속에 존재한다. 여성의 영역인 집이야말로 친숙과 정상의 원형이기에, 이 영역에서 기괴한 것이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 관계적 기표로서의 기괴함은 ‘우리가 단일성을 보장받고 싶어 하는 그 지점에서 하나의 간극을 강력히 주장 한다’(엘렌 식수스) 기괴함은 재현불가능성이라는 점에서 현대미학과 연결된다. 박웅규의 작품에서 완전히 부정되지는 않았지만, 말소 하에 놓인 것은 종교적 재현물이다. 그는 종교적 재현물을 재현 불가능한 영역으로 이동시킨다.

물론 그 또한 정통교리에서 이단시 되어왔던 신비적 전통에 있는 것이긴 하지만, 동양화의 기법이나 애니매이션같이 기존의 종교적 형식과는 방식을 통해 변주된다. 카톨릭에 동양의 도상까지 합세하면서, 복합에서 야기되는 간극과 기괴함도 강도를 더해간다. 복제를 통해 아우라가 상실될 위협에 처한 현대미술에게 아직도 그 아우라를 보존하고 있는 종교는 재 발굴될만한 감성의 영역에 속한다. 물론 무엇이든 내용이 더 중요하지만, 형식 또한 자체의 내용을 내장하고 있기에 종교적 도상을 참조하는 것은 단절될 수 없는 관계망을 이루게 한다. 박웅규에게 카톨릭은 모태신앙이었으며 청소년기까지 엄격한 규율적 환경을 이루고 있었다. 집에는 200개가 넘는 성상이 있었으며, 자기 전에 해야 하는 기도를 깜빡 잊고 며칠 동안을 죄책감에 시달리기도 할 정도로. 지금은 성당을 다니지 않지만, 어릴 적부터 그가 몸담고 있던 종교적 분위기는 여전히 그를 지배한다. 예술과 종교가 분화된 이래로, 예술가들은 종교의 몫을 줄이거나—종교에서 큰 영감을 받았지만 자기가 올라간 사다리를 차는 식으로--더 나아가 억압까지 하는 것에 비해, 자신의 존재조건을 그대로 까발리는 박웅규는 작가로서 솔직하다.

물론 그의 작품에서 종교적 원형이나 도상은 변형된다. 성상이 성상이기 위해 요구되는 경계나 금기 사항들이 위반되면서 말이다. 현재 종교를 떠났든 아니든, 부정 속에는 정(正)이 포함되어 있으니만큼, 그의 작품 속에는 원죄의식과 양심의 가책, 고통과 죽음, 그리고 부활, 혼돈과 되찾아진 질서 같은 그 종교 특유의 드라마틱한 제의적 과정, 그리고 그것이 야기하는 억압과 공포, 신비와 희열이라는 양면적 가치를 내포한다. 요즘 작업은 자신의 모태신앙을 떠나 동양의 종교--만약 동양에 종교가 없다면 정신--에까지 관심의 폭을 넓힌다. 자신의 정신과 감성의 중요한 배경을 이루었던 것에 대해 한번쯤 짚고 넘어가고 싶어 했던 그는 ‘도상들의 껍데기를 가져와서 괴물화 된 성화’를 만든다. 2013년에 제작된, 3분 분량의 영상설치 작업에 등장하는 성모상은 뒤의 그림자가 기괴한 형상의 액체로 흘러내리는 기괴한 작품이다. 이것은 마리아 상에 영상을 투사하는 작업으로, 영상은 완전한 형태를 유지해야할 성상을 침범하는 불경한 장면의 연속이다.

오염된 경계는 정화와 승화를 요구한다. 이 마리아 상은 실제로 집의 거실에 놓인 것으로, 매일 밤 같은 시간대에 어머니는 촛불을 켜고 기도를 올렸다고 한다. 작가는 어두운 거실과 촛불에 비친 마리아상의 신성한 이미지를 전도시킨다. 자신의 선택과 무관했던 신앙, 특히 어머니가 주도했던 그 신앙은 작가에게 모성적 영역으로 다가온다. 통상적으로 여성은 자연이며, 문화의 힘으로 길들여져야 할 미분화된 영역으로 간주된다. 이러한 성이데올로기에서 통제되지 못한 자연-여성은 재앙으로 생각된다. 남성에게 모성은 그 가치를 충분히 인정을 하면서도, 사회의 지배적 가치로 상징되는 부성의 영역으로 떠나지 않으면 삼켜져버릴 위험이 있는 영역이다. 자신을 낳았으니 다시 거두어들일 수도 있는 모성은 양가감정을 야기한다. 거기에는 보호와 공포가 동시에 존재하는 것이다. 뱃속에 있었던 시절을 포함하여 어머니라는 타자와 자신이 동일시하는 기간 중에는 보호가 우세하지만, 자기 정체성을 정립해야할 시기에 어머니라는 타자는 거부돼야할 대상이 된다.

가령 마리아상이 등장하는 작품에는 저녁 기도 시간대의 집안 분위기를 그대로 옮겨왔다. 하지만 양육과 보호를 제공하는 성모마리아의 가슴에 있어야 할 따뜻한 젖이나 연민의 눈물을 대신하는 것은 몸의 보다 아래쪽에서 분출되었음직한 정체불명의 액체들이다. 더군다나 그것은 경계를 넘쳐 흘러내리면서 생명의 상징에 내포된 질서정연한 체계를 위반한다. 2014-15년에 제작된 6분 분량의 싱글채널 비디오 작업에서는 피를 연상시키는 붉은 색 톤이 지배한다. 어두운 배경에 크고 둥근 형태가 등장하지만 태양 같은 존재는 아니다. 신체내의 환경을 연상시키는 붉은 색 톤의 공간에서 그 덩어리는 난자나 피톨같이 보인다. 덩어리에는 구멍들이 나고 이 구멍으로 무엇인가 흘러내리는 등, 어둡고 질척한 분위기다. 인간의 몸속에 있는 액체 중에서 원래의 자리를 벗어났을 때 가장 역겹고 두려움을 주는 것은 피일 것이다. 피는 생명을 상징하기에 동시에 죽음 또한 상징한다. 피가 아니더라도, 인간은 생애초기부터 자기 배설물을 제대로 가릴 것을 철저히 교육받는다.

모든 것은 제때 정해진 장소에서 정상적으로 배설돼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박웅규는 예술이라는 공적 무대의 한 켠에서 배설한다. 그의 한 작품은 가래를 뱉어낸다. 2012년에 제작된 1분가량의 싱글채널 비디오 작품에서는 가래 형태의 덩어리들의 움직임을 보여준다. 종이에 펜으로 그려진 [가래 드로잉](2015) 시리즈에서 가래의 복잡한 외곽선 미지의 대륙을 그린 지도처럼 보이기도 한다. 정상적인 배설기관이 아닌 곳으로 나온 체액들은 더럽게 여겨진다. 입을 통한 배설은 입과 항문의 관계가 전도 또는 평행성을 보여주며, 인간이 이미 극복했다고 여겨지는 동물성을 불러들인다. 2012년부터 시작된 가래 드로잉 시리즈는 목에서 나오는 편도결석을 뱉어내면서, 몸속에 이런 더러운 것들로 가득 채워져 있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으로 시작되었다. 그것은 일종의 자기혐오다. 그러나 작가는 이 더러운 것을 곱디고운 비단 족자에다가도 그릴 예정이다. 경계 밖으로 내뱉어진 것들이 고상한 완상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부적 그릴 때 나쁜 기운 쫒아내는 상징인 붉은 색 경면주사로 그려질 가래 드로잉은 더러운 것으로 더러운 것을 씻어내는 일종의 제의다. 이러한 제의적 감수성은 이제 갓 30세가 넘은 젊은 작가의 연배를 생각컨대, 고딕이나 컬트같은 동시대 하위문화의 감수성과 교차하는 부분이다. 불교의 탱화나 부적같은 방식 역시 깊은 의미보다는 기표로서 호출된 것이다. 그것들 역시 카톨릭의 이미지들처럼 고뇌와 번뇌, 그리고 혐오감과 죄책감을 씻고 싶었던 작가의 욕망에 부응하는 기표들이다. 그의 모태신앙에서는 비체와 종교의 관련성이 뚜렷하게 나타나지만, 불교의 경우에는 양식만 가져다 쓴다. 동양은 서양에 비해 자연과 더욱 친화적이어서 원죄의식이나 극복, 진보, 초월같은 서양 종교에 흐르는 지배적 가치와 구별된다. 누군가는 그것을 수직(서양)과 수평(동양)의 관계로 대조했을 만큼 그 차이는 크다. 서양이 자본주의를 통해 지구적 보편성을 선취했지만, 수직과 전진의 세계관은 균형추를 필요로 한다. 작가가 전공한 동양화라는 어법은 이러한 차이를 견인하는데 도움을 줄 것이라 생각된다.

가래를 소재로 한 영상작업은 남성이라면 다들 가지고 있다는 ‘동영상 아카이브’에서 뽑은 36개의 프레임이 3번 반복되어 108 번뇌로 표현된다. 작가는 그것을 ‘상징적인 가래’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피를 피로 씻어내고 가래로 가래를 막는 ‘영상부적이다. 영상은 화면을 크게 조절할 수 있고, 또한 소리와 결합할 수 있기에 더 강렬한 효과를 자아낸다. 2014-15년의 영상작업에서 구체가 솟아올랐다가 분열되어 흘러내리고 다시 재생되는 모습들은 작가가 직접 만든 효과음과 더불어 흘러간다. 거기에는 주변을 두루 탐사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영상의 기본 패턴이 있다. 그러나 시뮬레이션 게임 등에 많이 등장하는 뻥 뚫린 공간은 아니다. 그것은 밖이 아니라 안으로 침투하는 느낌이다. 몸은 안과 밖을 구별하는 대표적인 경계이다. 붉은 색 기운이 완연한 몸은 여성의 몸이다. 자기가 나온 곳으로 다시 가는 것, 즉 역행은 사회나 윤리적 관점에서 퇴행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이러한 역행, 또는 퇴행을 종교나 예술을 오랫동안 사용해왔으며 지금도 그렇다.

2015년에 제작된 8분 분량의 싱글채널 비디오 작품에는 붉은 톤으로 칠해진 머리 셋 달린 여성이나 여성의 생식기처럼 보이는 괴물이 등장하는 등, 그의 작품에는 끌리지만 거부해야할 어떤 것들이 적나라하게 표현되어 있다. 정확한 서사는 없지만 시간의 축을 따라 흘러가는 영상작품은 서사를 내포한다. 운동감이 있는 생멸의 과정 자체가 마치 미사의식의 기승전결같이 카타르시스를 향하는 드라마인 것이다. 2015년의 첫 개인전 [불온한 일치]의 설치장면을 보면, 작가는 종교에서 애용하는 대칭이라는 구도를 활용한다. 가운데에 지배적인 형상이 강하게 똬리를 틀고 있고 410x100cm 크기의 길쭉한 유사(pseudo) 성상들이 신하들처럼 좌우로 배치되어 있다. 보편적 구조를 빌어 왔지만, 모조리 다른 내용으로 바꿔치기한 개인의 성전 같은 모습으로 연출되었다. 종이에 먹으로 그려진 이미지들 역시 그림의 배치방식과 같이 대칭이다. 그러나 위와 아래의 구별은 확실하다. 외곽선 안쪽으로 세필로 가득 채워진 선들은 부드러운 느낌을 준다. 중앙이 가늘게 비어있는 길쭉한 타원형 실루엣의 변주들인 이 추상적인 이미지에 성을 부여한다면 그것은 단연코 여성이리라.

그러나 긴 치마처럼 바닥까지 질질 끌리는 과도한 길이와 빽빽한 배치는 압박감을 준다. ‘불온한 일치’ 전은 작가의 집안에 과도하게 넘쳐나던 종교적 성물에서 느꼈던 감정이 전달된다. 그것은 적절한 거리감이 필요한 승화를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종교는 승화를 위해 승화되기 이전의 것을 필요로 했다. 줄리아 크리스테바는 [공포의 권력]에서, 죽이기보다는 차라리 금지하는 것, 그것이야 말로 성서가 혐오스러운 것을 자꾸 증식시키는 이유를 설명한다고 본다. 크리스테바에 의하면 혐오의 대상이란 결국 성스러움에 대한 맞장구이다. 동시에 성스러움의 고갈이다. 점차 종교는 없어지고 도덕만 전개된다. 논리와 추상적 관념, 체계나 판단의 법칙 속에서 말이다. 크리스테바는 말하는 주체나 법칙의 주체가 되기 위해 자신의 개인적인 역사를 따라 내내 벌여야 하는 투쟁을 언급한다. 이때 종교는 다시 아래로 내려가 굳어져 버린 상징적 질서에 균열을 내는 힘으로 작동하며, 새로움과 이질성을 추구하는 예술의 욕망과도 만난다. 박웅규의 작품에는 이 교차지점에서 위반을 강조한다.

References